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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함께 읽기 - 2장 동의의 구축 본문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함께 읽기 - 2장 동의의 구축

때때로 2012. 3. 3. 23:15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1979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혁명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뤄져야만 했다. 이처럼 중대한 이행이 가능하려면, 선거에서 이길 정도로 충분히 큰 범위에 걸친 정치적 동의가 사전에 구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공동으로 보유되는 지각'으로 정의되는) '상식'이라고 한 것이 전형적으로 동의의 기반을 이룬다. - 59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1970년대 초반 칠레ㆍ아르헨티나와 같이 폭력에 의한 강제로 이뤄진 것만은 아닙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모두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결정적 계기가 됐죠. 이러한 '민주주의'적 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거대한 규모의 정치적 동의가 구축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람시가 상식이라고 한 것이 바로 동의의 기반입니다.

 

상식은 지역과 국가에 기반한 문화적 전통에 깊숙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상식은 편견과 모호함, 이주민ㆍ공산주의자ㆍ동성애자와 같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포괄합니다.

 

미국에서는 '자유'라는 단어가 대중의 상식적 이해에 크게 공명했죠. 이라크 전쟁의 이유로 제시된 많은 것들이 증명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은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전쟁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동의를 구축하기 위한 첫 걸음은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지닌 여러 제도(물질적 기반)의 구축이었습니다. 기업의 후원을 받는 싱크탱크와 전문가들의 모임, 대학 교육과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이후 정당과 국가권력을 장악하죠.

 

운동의 핵심 가치는 개인적 자유의 확대로 천명됐습니다. 1960년대의 정치적 격변은 개인적 자유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강화했습니다. 이 운동들은 사회정의도 요구했었지만 쉽게 개인적 자유의 차원으로 환원되곤 했죠.

 

개인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수사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자유지상주의,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기중심적 소비자주의로 분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로, 미국의 좌파 내에서 개인의 자유와 특정한 정체성의 완전한 인정 및 표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가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면서, 사회적 정의를 달성하려는 정치적 행동에 필요한 집단 규율을 세우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점이 오랫동안 입증되어왔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구분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쉽게 악용하거나 조장할 수 있었다. - 62

68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적은 강력한 국가였죠. 신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개인적 자유'의 이상을 자신들이 장악한 체, 68운동의 참가자들이 강력한 국가에 대한 적의와 함께 지니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기업과 경영에 대한 적대감을 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닉슨에 의해 대법관으로 승진하게 되어 있었던 파월은 1971년 전국상업회의소에 편지를 보내죠. 그는 그 편지에서 자유기업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분쇄하기 위해 미국 기업들이 '지혜ㆍ재능ㆍ자원을 배치'해 대학ㆍ학교ㆍ대중매체ㆍ출판ㆍ법정에 대한 공격을 주도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파월의 호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972년 '기업을 위해 공격적으로 정치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CEO들의 경영원탁회의가 만들어집니다. 이 회의는 1970년대 연간 9억 달러를 정치적 문제에 지출했죠.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헤리티지재단, 후버연구소, 미국경영연구센터와 같은 싱크탱크와 전국경제연구소가 공격적 활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반기업 정서의 파괴를 위한 보다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파월은 국가권력의 확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은 국가를 '주도면밀하게 육성해야' 했고, 필요하다면 이를 '공격적이고 단호하게' 이용해야 했다. - 65

1970년대 뉴욕시 재정위기가 이러한 노선을 실험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은행들은 채무상환연장 조치를 거부해 도시를 파산으로 몰고 갔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공적 서비스 분야 노동자의 임금이 동결됐고, 수익자 부담 원칙이 도입돼 요금이 부과됐습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억제됐고, 노동조합의 연기금은 채권에 투자할 것이 강요됐습니다.

 

뉴욕에서의 일상생활은 "녹초가 되었고, 도시의 분위기는 비참해졌다.". 도시 정부, 지역 노동운동, 그리고 뉴욕의 노동계급은 "지난 30년 동안 쌓아올렸던 권력의 많은 부분"을 결국 박탈당했다. 탈도덕화된 뉴욕의 노동계급은 마지못해 새로운 현실을 인정했다. ……

기업복지가 사람 복지를 대체했다. 도시의 엘리트 기관들은 ('I♡NY'라는 유명한 로고를 고안하면서) 문화센터이며 관광지로서 뉴욕의 이미지를 팔기 위해 동원되었다. 지배 엘리트는 종종 까다롭게 다양한 범세계적 경향들의 모든 방식들이 도입될 수 있도록 문화적 장의 개방을 지원했다. 자아, 성, 정체성으로의 자기중심적 천착이 부르주아적 도시문화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도시의 강력한 문화기관들에 의해 촉진된 예술적 자유와 방종은 결과적으로 문화의 신자유주의화를 유도했다. 쿨하스의 기억할 만한 문구인 '광란의 뉴욕(Delirious New York)'은 민주적 뉴욕에 관한 집단 기억을 지워버렸다.

- 68

재정 위기에 의한 뉴욕의 변화는 이후 IMF에 의해 국제적인 모델로 만들어집니다. "금융기관들의 위원회 및 채권소유자들의 수익과 시민들의 복지가 대립하는 경우 전자에 특혜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죠.

 

뉴욕 사례의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확산을 위해 "경영은 계급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경영자들은 공화당을 장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1970년대의 정치자금법 개혁은 이들의 수고를 덜어줬습니다. 기업이 정당에 기부할 '권리'가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보장됐습니다. 기업들이 만든 정치행동위원회(PACs)는 "업계, 재계, 전문가 협회의 이해관계에 의한 양대 정당의 금전적 지배를 확보"했습니다. "PACs 기부에 있어 개별로 5000달러까지 허용하는 상한은 상이한 기업들과 산업들의 PACs가 함께 활동하도록 강제했으며, 이는 특정한 이해관계라기보다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연합의 구축을 의미"했습니다.

 

공화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하나가 더 필요했습니다.기독교 우파와의 연합이 그것입니다. 1978년 파웰의 '도덕적 다수'의 창립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공화당은 "종교 및 문화적 국민주의"를 긍정하게 됐고,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인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그리고 반페미니즘"으로 대중을 동원하게 됐습니다. 탄탄한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의 과잉된 개입주의(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론자, 환경운동가 등)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도덕적ㆍ문화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결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대처의 정부를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애초 신자유주의의 주창자들은 과격할 만큼 개인적 자유를 강조했고, 도덕ㆍ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죠. 즉 이러한 결합은 애초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추진했던 자들에게 '개인적 자유의 확보'는 명분이었을 뿐 지고의 가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기업적ㆍ금융적 이해관계와의 화해와 동시에 대중을 위한 생활조건의 개선이라는 모순된 목표를 지녀야만 했습니다. 1980년대 내내 민주당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화당은 거대한 금융 자원을 동원하고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해 문화적ㆍ종교적 토대에 따라 투표하도록 대중적 기반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민주당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지 기반인 대중들의 물질적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공화당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좀 더 확고해졌다. - 73

레이건 당선 후 정부의 모든 기구와 법률, 제도 등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위해 조정되고 개혁됐습니다. 전국노동관계위원회는 노동의 권리를 공격하고 규제하는 기관으로 전환했습니다. 관리예산청은 모든 규제에 대해 비용편익분석을 하도록 지시받았습니다. 개인의 상위 조세율이 78%에서 28%로 낮아졌습니다. 세금 계산의 교묘한 개정은 많은 기업들에게 실질적으로 면세 혜택을 줬습니다. 공적 부문의 많은 자산이 사적 부문으로 이전됐습니다.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처럼 전국에서도 노동자와 노동조직의 순응이 필요했습니다. 기업들은 이전(노조가 없는 남부 주로, 혹은 멕시코와 동남아시아와 같은 해외로)을 무기로 노동조합의 권리를 공격했습니다.

 

채찍과 함께 '당근'도 필요했습니다.

 

유연성의 결여는 흔히 자본에 있어서만큼이나 개별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결점이었다. 노동과정에서 유연적 전문화와 탄력적 시간 편성에 대해 고결한 체하는 주장은 개별 노동자들, 특히 강력한 노조화가 때로 제공한 독점적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했던 신자유주의적 수사의 일부가 되었다. 노동시장에서 더 큰 행동의 자유와 자율을 선사하겠다는 것은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덕목으로 여겨졌고, 이는 여기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상식'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 75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업은 노동의 최저제한가격이 너무 높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실업의 해소를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복지"를 축소해야만 했습니다. '복지의 여왕'에 대한 그 많은 전설이 만들어진 건 이 시기죠.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경영 신문(우리나라에선 경제지라고 하죠)'이 이러한 사고를 퍼뜨리는 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스탠퍼드와 하버드 같은 특권적 대학에는 기업의 지원을 받아 경영학부가 만들어져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대학을 통해 해외의 인재들이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습득해 고국으로 돌아갔고 국제적인 신자유주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죠.

 

영국에서는 탄탄한 노동조합과 지역의 노동당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탱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금융중심지로서의 역할은 때론 산업자본과 충돌을 일으켰죠. 1970년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조합의 권력과 복지국가는 모두에게 비난의 대상이 됐습니다. 때론 성공적이었던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은 임금을 인상했지만 강력한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정부의 재정위기는 계속됐고 결국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복지 지출의 감축이 진행됐습니다. 이로부터 1978년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분출했고 이와 함께 노동조합에 대한 언론의 공격은 강화됐습니다. 결국 등 돌린 중간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대처가 집권하게 됐습니다.

 

노동에 대한 싸움,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에서 영국과 미국은 가장 큰 공통점을 드러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유지했고, 이는 곧 실업의 확산을 뜻했습니다. 실업의 증가는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약화시켰죠.

 

대처의 경제자문관이었던 버드(Alan Budd)는 후에 "경제와 공공지출을 압박함으로써 인플레이션에 대처했던 1980년대 정책은 노동자 타도를 위한 은폐물이었다"라고 주장했다. - 81

1984년 1년간 계속된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광부는 패했고 대처는 승리했습니다. 외국인 투자의 개방, 국유화된 영국 자동차 산업의 민영화로 노동자 계급의 힘은 더욱 약화됐습니다.

 

그녀는 인플레이션을 근절했고, 노조에 재갈을 물렸으며, 노동력을 순화시켰고, 진행 중인 정책에 대해 중간층의 동의를 구축했다. - 82

대처는 또하나의 전선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지방 정부에 맞서야 했죠. 1980년대 중반까지 이들 지방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격전지가 됐습니다.

 

대처의 광범위한 민영화 정책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공공주택의 판매입니다. 세입자에게 공공주택을 판매함으로써 10년간 주택 소유자 수를 급속히 증가시켰죠. 이를 통해 민영화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공공주택의 판매는] 노동계급의 꿈으로서 전통적인 개인 재산 소유권 이상을 만족시켰으며, 주택 시장에 새롭고 때로는 투기적인 역동성을 도입했다. 이는 그들의 재산 가치 상승-최소한 1990년대 초 재산 붕괴 이전까지-을 경험했던 중간계급에 의해 높게 평가받았다. - 84

대처는 중간계급을 배양(주택 소유자의 확대)과 소비문화의 확대를 통해 노동계급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면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는 계급 권력을 미국에서 만큼 복원시킬 수는 없었지만 런던의 금융 지구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로 탈바꿈 했죠.

 

[레이건과 대처] 이들이 협력해 공고하게 만든 세력 간 연합과 이들이 유도했던 다수파들은 후임 정치지도자 세대들이 제거하기 어려운 유산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의 가장 큰 증거는 클린턴과 블레어가 그 자신의 정책을 구현할 여지가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 심지어 그들 자신의 훌륭한 성향을 거스르면서까지 계급 권력의 회복 과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 86

미국에서 레이건은 기독교 보수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효과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대처는 영국에서 중간계급의 배양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해냈죠. 이들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 20년 가까이 그들의 정책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성공을 보여주는 바입니다.

 

'제3장 신자유주의적 국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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