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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쌓은 벽, 그를 지켜줄 수 있을까

때때로 2014. 5. 11. 19:48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2012년 8월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찾았다. '과거와의 화해'를 위해 전태일 동상 앞에 헌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우 지부장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와 김 지부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뉴시스]

5월 9일 KBS 길환영 사장이 사과하고 김시곤 보도국장이 사임함으로써 세월호 피해자가족들의 청와대 앞 20여 시간 농성이 마무리 됐다. 또 하나의 요구였던 대통령 면담을 청와대가 완강히 거부했음에도 말이다.

박근혜는 왜 그리 강경하게 유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일까. 국정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바로 그 시간 청와대 안에서 박근혜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위축된 소비심리를 살려내야 한다며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청와대와 박근혜에게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면 민생대책회의가 아닌 유족들과의 면담을 우선했어야 할 것이다. 사고 후 수습과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에 사람들은 경악하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게 됐기 때문이다. 소비심리의 회복과 경제생활의 정상화는 바로 이러한 불신과 불만을 어루만지는 데서 시작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박근혜는 유가족이 청와대 앞에서 경찰 수천 명에 고립돼 있는 동안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한국여행업협회장, 대한숙박업중앙회장, 한국관광협회중앙회 부회장, 현대ㆍLG경제연구원장을 만났다. 결국 그가 어루만지려는 국민, 그가 소통하려는 국민은 이 나라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우리 편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다.

박근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국민 다수와 사이에 투명한 벽을 쌓고 있다. 팽목항을 처음 찾았을 때 경호원에 둘러싸인 박근혜는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오열하는 유가족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만 움직인다. 4월 29일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았을 때 그는 가짜 유가족을 앞세워 우아한 워킹으로 사진과 영상을 위한 촬영에만 최선을 다했다. 경호원에 의해 박근혜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로막힌 '순수' 유가족이 거센 목소리로 정부의 무능력에 항의하는 중에 말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시절인 2012년 8월 28일,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며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려 했을 때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이 거센 항의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박근혜, 전태일 유족 반발에 발길 돌려ㆍ뉴시스ㆍ링크).

세월호 사고 초기부터, 아니 취임 전부터 일관되게 보여왔던 박근혜의 어떤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개인적 기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마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
(위로하는 몸ㆍ4월 23일자 13면ㆍ링크)에서 이렇게 적었다.

"박 대통령의 경직된 얼굴은 국민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독재성)이 합쳐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은 미개한 민초'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자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불쾌감으로 대응했다. 굳은 얼굴, 위로하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화가 난 것이다. 뻔뻔스러움조차 넘어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몸이다."

이 구절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떠올린 인물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닌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였지만 말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에서 지배계급 개인의 특성이 역사의 운동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물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나는 개인의 특성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러한 개인들을 매개로 움직인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주장대로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에게 관심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는 지금 분노의 초점이고 정국의 핵심이다. KBS 본관 앞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꿈쩍 않던 사장과 보도국장이었다. 청와대는 공개적으로는 KBS의 사과와 보도국장 사임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과와 사임을 한 것이다. 이는 국영방송국을 움직이는 핵심 권력이 청와대에 집중돼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고 박근혜의 권력을 강력한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지난해 12월 철도노노조의 총파업은 박근혜 정부를 위기로 몰아갔다. 나는 지난해 12월 이 블로그에서 노동자들의 단호한 집단행동이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분열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몰아부쳤고 중도층을 박근혜정부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민주노총이 물러섬으로써 그 기회를 놓쳤지만 말이다
(민주노총, 흔들리는 정부ㆍ새누리당 앞에서 후퇴하다ㆍ링크). 이와 비슷한 일이 KBS를 둘러싸고 다시 벌어졌다. 조금 작은 규모지만. 김시곤 국장은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며 사장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규모 있는 집단적 행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SNS로 표출되는 대중의 불만과 분노 만으로도 지배계급은 균열을 드러냈고 청와대도 둔하지만 조금씩 움직였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에 가득찬 박근혜와 청와대는 둔하게만 움직일 수 있다. 트로츠키가 그린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역사의 파도에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박근혜의 무감각으로부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짜르와 역사 사이의 침투할 수 없는 '매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매질이 만들어낸 박근혜의 무감각이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이 '매질'은 역사의 파도로부터 짜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박근혜의 경우 이 '매질'이 분노를 자아내고 대중을 움직이고 있다. 5월 10일 안산에는 2만여 명이 모였다. '엄마들의 노란손수건' 대표 김경래씨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조작하고 은폐하는 정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필요없다"며 국민과 사이에 투명한 매질로 벽을 쌓는 박근혜정부를 비난했다. "우리가 나라를 바꾸겠다"는 주장에 크게 동감하는 것이 나 만은 아닐 것 같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산 거리 가득 메운 촛불ㆍ경향신문ㆍ링크). 우린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역사가 움직이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 일부를 아래 발췌해 옮겨놓는다. 최규진이 옮기고 풀무질에서 발행한 책이다.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짜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 역사발전 과정 중에서 짜르는 혁명과 마주쳤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짜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짜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니콜라이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이고 혁명마저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주(州)나 군(郡)을 통치할 자질도 물려받지 못했다. 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저 역사의 파도를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러시아군이 … 러일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치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 그리고 다시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 경악, 충격을 느꼈을 때였다. 그러나 짜르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 … 이것의 핵심은 기질적 무관심, 정신력의 빈곤, 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 ……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짜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버티고 있었다. ……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은 잔인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라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늦게 태어나 자기 운명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온 정성을 다해 인간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 국가예산에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집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들었다. 이들 중 누가 야당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었을 경우에는 사면조치를 내렸다. ……

니콜라이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한편, 지난 몇 십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 그런 까닭에 짜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처져 있었다.

짜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움츠러들 뿐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이 더욱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

구 체제의 신봉자인 참의원 의원 타간체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체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실이 담겨있다.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反)사회적 기생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깡패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행패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깡패짓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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