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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9월 6일 고대 강연 '신념과 근본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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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9월 6일 고대 강연 '신념과 근본주의'

때때로 2010. 9. 8. 17:35

테리 이글턴이 한국을 방문 중입니다. 9월 6일 고려대에서 공개강의를 열었죠. 이 강의의 강연문 전문이 올라왔습니다. 전문은 링크를 눌러주세요.

신념과 근본주의 |테리 이글턴 9월 6일 고려대학교 강연문(링크)

이글턴은 이 강연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로 근본주의적 종교의 믿음과 과학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회의는 동전의 다른 두 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구가 직면한 근본주의 세력의 도전에서 과학적 합리성으로 대응하는 건 오히려 상대방을 강화시켜준다는 겁니다. 여기서 두번째,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서 신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념은 어떠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신념은 지식(앎)이 아니지만 이성적 회의를 배제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유토피아, 아직 오지 않은 이상에 대한 실천적 믿음으로서 신념의 유용성을 강조합니다. 이글턴의 이날 강연과 최근 저작을 비롯해 좌파 내에서 신념 혹은 신학이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서 검토되고 있습니다. 이는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프랑스에서 카톨릭 공동체의 믿음을 대체하는 새로운 덕, '이성의 신'을 유사 종교로 만들어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좌파의 이러한 검토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좀 더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는 위 강연문을 나름 요약한 것입니다. 요약을 한다곤 했는데 그냥 원문을 보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요약한 것이니 지우진 않고 납겨둡니다.



이글턴은 최근 서구에서 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가 대표적 사례겠죠. 그는 이보다 더 중요한 논의를 주제로 삼습니다. 무신론자들에 의해 "신학이 우리가 처한 전지구적 곤경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어려운 시기에 봉착한 정치적 좌파는 새로운 종류의 지적 원천에 기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우선 가정해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는 점도 있겠죠.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서구가 새롭게 직면한 '정치적 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급진적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은 "유물론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쉽게 인식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지리학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대신 전지구적으로 퍼져 있다. 이 적은 단순히 정치적 이념뿐 아니라 신념의 확실성과도 굳게 맺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원래의 주제(정치에 있어서 신적 존재의 귀환)를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우회를 거칩니다. 이글턴은 '신념의 확실성'이라는 표현이 모순적이라는 데서부터 설명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무언가 '확실'하지 않을 때(의혹ㆍ회의) 믿고 넘어갑니다. 신념이란 그런 것이죠. 신념은 지식과 다르며 절대적 확신과도 다릅니다. 이는 근본주의자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믿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혼돈을 피하기 위한 절대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절대적 확실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절대적 기반이 이러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절대적 기반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서 유대교-기독교의 신이 등장합니다. 이 신은 "기댈 수 있는 반석이라기보다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에 가깝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신은 제단이 아닌 황야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기독교 복음서의 메시지는 "신의 가장 완전한 표상은 파편화된 몸-사랑과 정의를 주창하다 국가에 의해 사형당한, 고문당하고 더럽혀진 정치범의 몸이다. … 메시지는 어둡고 단호하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고, 사랑을 베푼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신념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신념은 어딘가 저 너머에 제법 흥미로운 특질을 가진 신적 존재가 있을지 모른다는 식의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에 내포된 신념의 표상은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정치범의 모습으로, 어둠과 당혹 속에 표류하면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아마도 모르지만, 그러에도 스스로 '아버지'라 부르는 현세를 뛰어넘는 힘의 약속에 대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충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빅풋이나 외계인 납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것은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인 것이다."

즉, 신념은 근본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에 대한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짜 지식(앎)도 아닙니다. 이글턴은 미국 흑인을 예로 듭니다. "미국 흑인들은 심하게 착취당한 부류의 사람들임이 확실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진실들처럼 이는 실험실에서 증명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죠. 여기서 그는 신념을 '사랑'과 비교합니다. "신념을 지닌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사랑 역시 확실성과 관련 있지만 그 확실성이 합리적으로 증명 가능하지는 않은 종류라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누구나 이성적으로 인정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진 않습니다. 사랑이 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신념은 이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지만, 후자로 환원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념과 이성적 회의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것처럼 확실성과 회의도 반대인 개념은 아닙니다. 현대 문명은 이성적ㆍ과학적ㆍ기술적 확실성으로 넘쳐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학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란 단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틀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거죠. 이 것의 반대는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교조', 혹은 '직관적 통찰'입니다.

이제 여기서 다시, 정치에 있어서 신적 존재-신념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돌아가보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본래적으로 회의적, 불가지론적, 합리주의적, 실리적, 상대주의적인 곳"으로서 "믿음은 사회적 질서를 통합하는 요소"가 전혀 아닙니다. 사회를 통합하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골적인 자기 이익 혹은 완전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훨씬 효율적으로, 하지만 거칠게 사회의 결속을 유지합니다. "문제는 지나친 믿음을 가진 이들과 믿음이 지나치게 없는 이들로 세계가 현재 양분돼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 양쪽 집단은 서로를 존재하도록 돕는다는 점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합니다.

"서구가 신념을 결여하고 불가지론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서구는] 점점 더 물질적 이득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 이득을 향한 이와 같은 병적인 욕망이 다른 국가들을 짓밟는 결과를 야기하면 할 수록, 서구는 점점 더 그 나라들 안에서 타협 없는 정체성의 형이상학이 자라나도록 만들 것이다."

피정복자나 박탈당한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협 없는 정체성에 몸을 던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자신이 누구인지, 즉 정체성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억압과 속박에서의 탈피란 정체성을 넘어설 때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런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선 우선 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역설입니다.

이들 박탈당하고 정복당한 이들에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와 자신이 처한 위치", 즉 '지식(앎)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 필요한게 있습니다. 그것이 신념입니다. "신념은 자기포기의 한 형식으로, 이 자기포기 행위는 위험하고 그 결과가 불확실한 지금의 행동이 풍요롭고 진기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신뢰 하에 행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풍요로운 자본주의에서 신념이 부족해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글턴은 이러한 논지에 따라 아무 것도 없는 자들, 억압받는 이들의 자기기포기 행위로서의 신념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강연의 마지막을 준비합니다.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기를 포기하는 형식의 신념을 가지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며 바로 이것이 유대교 경전의 약속이 실현되고 가난한 이들이 권세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한 가지 이유다"라는 것이죠.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잃을 것은 쇠사슬이오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라며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주장한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글턴은 이 모든 논의를 그리스 비극과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죽음이든 상징적 죽음이든 간에 철저한 자기포기만이 변화된 삶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이 복잡한 기획은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비극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극은 단순히 실패나 파멸에 관한 것이 아니다. 비극이 함의하는 사실은 인간이 실패와 파멸을 인간 조건의 궁극적 현실로 인지할 때에만-상실, 정신적 외상, 그리고 무의미라는 메두사의 머리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 때에만-비로소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죽음이 새 지평 대신 막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는 비극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절망스러운 곤경에 빠져있는 것이다."




신념과 근본주의
테리 이글턴, 2010년 9월 6일 고려대학교 강연문
※ 링크가 깨질 때를 대비해 퍼옵니다. 녹취와 번역을 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제목을 클릭하면 원문으로 연결됩니다.


한국인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몇 년 간 서구에서는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해 왔다. 신에 대한 재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그리고 이는 서구문명이 탈종교적, 탈형이상학적, 그리고 심지어는 (혹자에 따르면) 탈역사적 시대로 이행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시점과 일치한다. 강조하건대, 이와 같은 재논의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이다―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에서 특히 잘 나타난 것처럼, [이러한 논의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아마도 덜 알려진 사실은, 서구의 몇몇 무신론자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신이 좀 더 긍정적인 복귀를 연출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주목할만한 사실은, 신학 분야에 있어 가장 활발할 관심사 중 일부가 극좌파―무신론적 좌파―내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성 바오로에 관해 저술한, 생존하는 가장 훌륭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대표적인 독일 사상가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영국의 정치 이론가 존 그레이(John Gray) 및 그 외 몇몇 사상가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들 중 한 순간이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들 모두는 신에 대한 논의, 즉 신학이 우리가 처한 전지구적 곤경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긴다.

어째서 그러한가는 별개의 질문이 되겠으며, 또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려운 시기에 봉착한 정치적 좌파는 새로운 종류의 지적 원천에 기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우선 가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들―죽음, 고통, 초월, 성 (섹슈얼리티), 삶의 찬양, 공동체, 악, 구원 등―을 다루는 신학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현재 그 유용함이 증명되고 있다. 그 단점이 무엇이든 간에, [신학은] 정치적 실용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문화적 천편일률성과 만연하는 경험주의 사이의 불경한 혼합으로서 현재 세계 체제의 대부분을 관장하는 얄팍하고 이차원적이며 과학기술 주도적인 합리성(rationality)보다 훨씬 더 심오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좌파에 속한 급진적 사상가들과 복음서를 현세의 권력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여기는 기독교 신학자들 간에 낯설고도 엉뚱한 공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신에 대한 논의가 갑작스럽게 출현한 하나의 이유임에 틀림없다―자신이 애당초 가장 작은 분자 하나라도 창조했다는 사실 [즉,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통하게 후회하면서 (물론 도날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를 창조한 것만은 후회하지 않겠지만), 신이 공적인 영역에서 충분히 자격 있는 은퇴를 결심할 법한 바로 그 시점에 말이다.

하지만 종교적 논의가 이처럼 부활하게 된 데는 매우 다른 이유들이 또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급진적 이슬람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재 서구가 직면한 정치적 적은, 길고도 척박했던 냉전시절 서구가 대면했던 적수와 거의 정반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듯 하다. 이 적은 유물론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쉽게 인식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지리학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대신 전지구적으로 퍼져 있다. 이 적은 단순히 정치적 이념뿐 아니라 신념의 확실성과도 굳게 맺어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체로서 그 적은 서구와의 대립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도전을 제시한다.

이 시점에서 잠시 이 글의 주요 주제에서 벗어나, ‘신념의 확실성’이라는, 외관상으로 역설적인 표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분명 신념이 확실성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언가가 확실하지 않을 때―어떤 이유에서든 완벽한 지식을 얻을 수 없을 때―우리는 그것을 그저 믿고 받아들인다. 회의[의혹]가 지식[앎]의 반대선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념 역시 그러하다 [지식의 반대선상에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사실 상당히 의문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첫째로, 텍사스에 있는 기독교 분파든 탈레반의 한 분파든 간에 종교적 근본주의는 신념과 지식[앎]을 혼동한다. 근본주의자들은 믿음에 대해서 요란하게 구는 데 비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신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신념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신념은] 그들에게 혼돈, 무정부 상태,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종류의 탄탄한 기반을 제공하지 못한다. 근본주의는 무엇보다 불안감과 자신감 결여의 문제이다―즉, 발밑의 땅이 최대한 공고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의 문제이다. 이러한 면에서 근본주의자들은 회의주의자들의 거울 이미지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진실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명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들 간의 차이는, 회의주의자는 그와 같은 절대적 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반면, 근본주의자는 자신이 바로 그 절대적 확실성을 소유한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이 점을 제외하면 이들 둘은 진실의 본질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근본주의자는 자신과 자신의 믿음을 떠받치는 기반이 바로 [자신의 생각 속의] 경전 구절처럼 자명하면서도 자기 타당성과 자기 적법성을 보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절대적 기반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근본주의자의 생각은 옳은데, 만약 자기 타당성이 없다면 타당성을 외부에서 구해야 하고 이는 곧 그 기반이 더 이상 궁극적인 기반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언급하듯, 이 같은 기반이 야기하는 문제점은 그 기반을 상상함과 동시에 그 밑에 존재하는 또 다른 기반을 언제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기반이 확정적이며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설명가능한 현실이라면, 바로 그 순간 [그 기반은] 기반적 현실을 잃고 세계에 존재하는 단지 또 하나의 실체로 상대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절대적 기반이 이러해야 된다고 파악하는 근본주의자의 관점은 틀리지 않다. 그가 틀린 부분은 이와 같은 절대적 기반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근본주의는 사실상 의미의 본질, 혹은 글(writing)의 본질에 대한 오류이다. 근본주의자는 글의 한 종류인 텍스트가 전적으로 안정적이고 자명하기를―빛을 발산하고, 투명하며, 애매하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지니기를―꿈꾼다. 그러나 우리가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서 배웠듯, 글은 이들 모든 특징들과 정확히 반대선상에 있다. 근원적이고도 기반적인 의미―의미들의 의미 혹은 초월적 기표―는 존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의미를 설명하거나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의미의 집적체, 즉 또다른 언어에 기대야 하며, 그렇게 되면 이른바 궁극적 의미가 즉각적으로 궁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적 언어[메타언어]나 언어들의 대표언어란 존재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들 언어는 언제나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초월적 언어[메타언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는 의미를 돌에 새겨 그 의미를 영구화하기를 원하지만, 의미는 그 정의상 고정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만약 고정될 수 있다면, [의미는] 지금처럼 쓸모있는 것이 아니리라. 언어가 그토록 경이롭게 효과적인 것은 바로 언어가 거칠고 정확치 않고 미확정적이며 다양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이다.

분명 유대교-기독교의 신은 근본주의자들이 꿈꾸는 그러한 기반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의 주류 신학에 의하면 신은 사물도, 기반도, 존재도, 생명체도, 현상도, 혹은 심지어 인간도 전혀 아니다. 신학이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유대교 경전에 나오는 신 혹은 야훼는 돌처럼 탄탄한 기반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이 신은 자신을 본뜬 우상을 금하는데, 왜냐하면 신의 유일한 이미지는 인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신은 안락한 생활이나 익숙한 공동체로부터 인간을 불러내 사막의 길없는 황야로 인도한다. 신은 기댈 수 있는 반석이라기보다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에 가깝다. 또한 무자비한 테러리스트 같은 그의 사랑은 인간의 자기확신적인 교조와 확실성을 모두 태워버리려 위협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자들 하늘로 끌어올려 지복을 주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는, 사랑의 테러리스트이다.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순간은 모든 적절한 제례들을 행할 때가 아니라(신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바치는 악취가 신의 코를 찌른다고 말한다), 추방되고 박탈당한 자들이 권력을 얻는 것을 보게 될 때이다. 신의 가장 완전한 표상은 파편화된 몸―사랑과 정의를 주창하다 국가에 의해 사형당한, 고문당하고 더럽혀진 정치범의 몸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정치적 범법행위에만 사용했다). 기독교 복음서가 주는 메시지는 어둡고 단호하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죽은 목숨이고, 사랑을 베푼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기반, 돌과 같이 탄탄한 확신, 정신적인 위로가 과연 있다면, 바로 이것이 메시지이다. 다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민하게 불안한 근본주의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정체성은 철저히 자신을 버림으로써만 이루어지며, 또한 [그런다고 해서] 바람직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은] 불경스러우리만큼 패자를 혐오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자들은 신념이 지식[앎]의 대체물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 신념은 지식[앎]과는 큰 관련이 없다. 신념은 리차드 도킨스 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불충분하고 비과학적이며 가짜인 지식[앎]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신념은 현실에 대한 일단의 명제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신념에 대한 설인(雪人) 이론이라고 예전에 기술한 바 있다. 이 관점에 따르자면, 신에 대한 신념은 [전설 속 괴물인] 설인(Yeti)이나 빅풋(Big Foot)에 대한 신념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어떤 이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다른 이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증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비행접시와 외계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신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신념은 어딘가 저 너머에 제법 흥미로운 특질을 가진 신적 존재가 있을지 모른다는 식의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에 내포된 신념의 표상은 고문과 조롱을 당하며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정치범의 모습으로, 어둠과 당혹 속에 표류하면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아마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아버지’라 부르는 현세를 뛰어넘는 힘의 약속에 대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충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빅풋이나 외계인 납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것은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행(performance)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가르침―예를 들어, 가장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념은 사색이나 추론, 혹은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문제가 아니라 확실성의 문제이다. 만약 신념이 일종의 지식[앎], 열등할지언정 그래도 일종의 지식[앎]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겠는가? 분명 그것은 모든 종류의 확실성이 합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 흑인들은 심하게 착취당한 부류의 사람들임이 확실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진실들처럼 이는 실험실에서 증명될 수는 없는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에 따르면, 신념을 지닌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사랑 역시 확실성과 관련 있지만 그 확실성이 합리적으로 증명가능하지는 않은 종류라는 사실이다. 사랑이 공허한 소음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그 이유가 가지는 힘을 이해하더라도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드러내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이 드러내는 바는, 사랑은 이성과 관련 있지만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 뿌리가 매우 깊으며, 이성이 없다면 우리는 소멸한다. 그러나 이성[의 뿌리]은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궁극적으로 사랑은 이성보다 더 심오하다. 신념과 이성 간의 복잡한 관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념은 이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후자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신념은] 자아가 선택하는 헌신이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는 종류의 헌신―그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는 우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냥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런 종류의 헌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가장 결정적인 헌신들과 마찬가지로 신념은 우선적으로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서구의 문화적 전통에서 의지라는 것에는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신념과 회의가 가끔 정반대의 개념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확실성과 회의 역시 종종 반대의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서구 근대철학은 잘 알려져 있듯 회의로부터―[즉] 확실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카르트(Descartes)의 노력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회의 역시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모든 것을 회의한다면, 그 회의가 유의미해질 수 있는 맥락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언어라는 기계 속에 있는 톱니바퀴가 다른 아무 것과도 맞물리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회의는 어떠한 힘도 전혀 가지지 못할 것이다. 회의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상의 확실성이라는 배경 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회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내 두 손을 얼굴 앞에 들어올리고는 ‘내가 두 손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순전히 공허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돈을 옮긴 후 금전적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은 ‘나는 내 키가 얼마인지 알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손으로 정수리를 짚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반면, 내가 손을 절단해야 할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막 마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고 가정해 보자. 옆 침대에 있는 남자가 너무도 무신경한 나머지 아직도 두 손이 붙어있는지를 내게 물어본다. 긴장해서 침대보 밑을 슬쩍 쳐다본 나는 두껍게 붕대를 감은, 손일지도 모르나 확실하지는 않은 두 개의 물체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대답한다. 이 경우 나의 의심은 사리에 맞는다. 이 회의는 의미도 있고 효력도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이 회의를 이해가능하며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만드는 전후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회의를 유의미하게 비출 수 있는 개념적인 배경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와 확실성은 신념이나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서로를 함의한다. 이들은 단순한 반대 개념이 아니다.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문명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문명은 확실성―이성적, 과학적, 기술적 확실성―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과학적’이란 단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틀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과학은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교조와 정반대이다. 과학적 명제는 언제나 틀렸음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과학적 명제들이 틀렸음이 증명됐었다. ‘과학적’이란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설을 버리거나 혹은 그 가설을 급진적으로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을 규정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의 반대개념은 교조만이 아니라 직관적 통찰(intuition)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 통찰은 도전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교조적이다. 나는 톰 크루즈가 악인이라고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이것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끝이다.

교조적인 것이 반드시 갈등을 유발하거나 권위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드럽게 생각을 피력하는 교조주의자들도 많다. 그것은[교조주의는] 열정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열정적인 확신이 언제나 권위주의적인 것의 시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선 이는 사실이 아니고,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러한 믿음 역시 열정적인 확신을 바탕에 가져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유, 대화, 열린 결론, 다양성 등의 필요성에 대해 누구든 열정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강한 확신은 우리가 살고 있는 본래적으로 신념이 결여된 듯한 사회에서는 인기가 있지도 유행하지도 않는다. 시장[경제] 사회는 본래적으로 회으적, 불가지론적, 합리주의적, 실리적, 상대주의적인 곳으로서, 이 속에서 믿음은 사회적 질서를 통합하는 요소가 전혀 아니다. 믿음과 관련해 각 개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의 경우, 필요한 사회적 결속력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믿음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와 덜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 사이의 차이인 동시에, 발달된 근대 사회와 더 오래되고 전통적인 사회 간의 엄청난 차이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무고한 이를 삼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두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믿지만, 우리가 이에 동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한다. 아마 절대 동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중요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거칠면서도 효율적인 여러 종류의 방식들로 사회결속을 유지하며,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에 대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은] 예를 들면 노골적인 자기이익 혹은 완전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공 영역의 이념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북한을 [그렇지 않은] 남한과 대조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나친 믿음을 가진 이들과 믿음이 지나치게 없는 이들로 세계가 현재 양분돼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 같은 근본주의자들과 자신의 가족 및 은행잔고 이외에는 거의 믿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상류층 회사간부들로 양분되어 있다고 혹자는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구의 불가지론이 정말로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그 이유는 탈형이상학적이고 자유주의-실용주의적인 문명이 과격한 절대론자이자 근본주의자인 적과 맞서기 위해 동원해야 할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수단을 긁어모으기란 극도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서구가 자유주의를 유지한다면 (그리고 서구의 몇몇 지역에서는 자유주의를 유지하는 데 경우 성공하는 실정이다), 서구는 [적을 향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셈이다. 만약 서구가 급진적인 이슬람의 절대주의를 모방한다면, 이슬람에 대항해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모두 잃게 된다.

문제는, 어떤 이는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는 믿음이 결여돼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이들 양쪽 집단이 각각 상대가 존재하도록 돕는다는 점이다. 서구가 신념을 결여하고 불가지론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서구는] 점점 더 물질적 이득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 이득을 향한 이와 같은 병적인 욕망이 다른 국가들을 짓밟는 결과를 야기하면 할수록, 서구는 점점 더 그 나라들 안에서 타협 없는 정체성의 형이상학이 자라나도록 만들 것이다. 자신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회사간부의 수만큼, 산너머에는 외계인이 산다고 생각하는 [산너머 세상에 적대적인] 부족 족장이 존재한다. 세계는 현재 이들 둘 간의 정체된 변증법적 관계 속에 갇혀 있다. 어떤 이들은 너무 과도하게 정체성에 몰입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정체성에 관심을 너무 적게 가진다. 정복자나 식민주의자가 되었을 대 좋은 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피정복자나 박탈당한 이들은 정체성의 문제를 일상의 짐처럼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한다. 후자가 자유로워지는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 순간이다. 문제는, 정체성이 더 이상 억압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어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정체성을 없애는 노력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계급, 인종, 국가, 민족성. 이것들이 가지는 역설은, 이런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확실성이 살인을 초래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9/11이 그러했다. 또한 과거의 9/11에도 그러했다―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기 정확히 삼십 년 전, 미국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부를 폭력적 방법으로 전복한 후 그 자리에 추악한 독재자를 앉혔으며, 이 독재자는 미국과의 연줄을 등에 업고 세계무역센터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훨씬 웃도는 수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문제는,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혼돈 역시 살인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선의를 가진 자유주의자는 이 점을 종종 간과한다. 어떤 이들은 의심이나 망설임, 그리고 불명료함을 누릴 여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일반적으로 속한 가진 자의 위치에서는 확실성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만큼 운이 좋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들은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와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지식[앎]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신념 역시 필요하다. 신념은 자기포기의 한 형식으로, 이 자기포기 행위는 위험하고 결과가 불확실한 지금의 행동이 풍요롭고 진기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신뢰 하에 행해진다. 이는 우리처럼 비교적 풍요롭고 안락하며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인데, 이것이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질서에 일반적으로 신념이 결여된 또 다른 이유이다.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기를 포기하는 형식의 신념을 가지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며, 바로 이것이 유대교 경전의 약속이 실현되고 가난한 이들이 권세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박탈된 상태는 치명적 약점인 동시에 일종의 힘이기 때문이다. 박탈이 일종의 힘인 까닭은, 인간은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대 기이하게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현 상황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언가 얻고자 하는 기대가 없으며, 따라서 현재 그대로의 상태에 더 매여 있는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더 크다.

이러한 행위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죽음이든 상징적 죽음이든 간에 철저한 자기포기만이 변화된 삶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이 복잡한 기획은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비극이라고 알려져 있다. 비극은 단순히 실패나 파멸에 관한 것이 아니다. 비극이 함의하는 사실은, 인간이 실패와 파멸을 인간 조건의 궁극적 현실로 인지할 때에만―상실, 정신적 외상, 그리고 무의미라는 메두사의 머리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 때에만―비로소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죽음이 새 지평 대신 막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는 비극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절망스러운 곤경에 빠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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