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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4 23:30

[스크랩]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2008.06.24 23:30

촛불시위는 매우 온건하게 시작됐습니다. 그저 청계광장에 앉아서 촛불을 밝혔을 뿐이었죠. 얼마나 엉성했냐 하면 혹시라도 이명박의 심기가 상할까봐 종로 경찰서장이 집시법에도 없는 내용을 갖고 초기 촛불시위 주최자들을 협박했었고 그게 먹혀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여차저차해서 촛불시위는 계속됐고 결정적 고비 때마다 조금씩 행동의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된 구호 중 하나는 '비폭력'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디까지를 비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매우 난감한 문제입니다. 사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일, 그 위에 올라가는 일 자체를 '폭력'이라고 했었죠. 지금에 와서 많은 시민들은 그것은 퍼포먼스고 '평화적인 한도' 내에서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는 '비폭력 저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폭력과 비폭력을 도덕적 잣대-단 한번도 합리적 의심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비폭력적 저항에 대해 많은 것을 되돌아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에 출간됐지만 지금 읽기에 딱인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김은주 옮김|산눈

조금 길지만 아래 이 책의 머리말을 옮겨놨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물론 당연하게도 책 전체를 다 읽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억압의 토대가 되는 규칙을 만들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게임에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의 규칙으로 게임을 하지 말라!
이것은 새로운 게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무엇인가가 변하고 있음을.
-맬컴 엑스

폭력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내걸며 이런 말로 시작해도 될까 싶지만 폭력과 비폭력을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뜻 이 기준이 매우 명쾌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선악의 가치를 명백히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런 명확한 이분법이야말로 우리의 감수성을 편협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 비폭력이라는 범주는 너무나도 다양한 힘으로 충만해 있는 이 세계를 해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단어가 아닐까? 예를 들어 일본에서 말하는 '게바(ゲバ)'-최근에는 거의 쓰이지도 않지만-의 어원은 독일어의 게발트(Gerwalt)이다. 발터 벤야민(Qalter Benjamin)이 쓴 『폭력비판론』의 원제도 'Kritik der Gewalt'이다. 과거 일본 학생운동에서는 국가에 의한 물리적 힘의 행사와 자신들의 대항적 힘의 행사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폭력, 후자를 게발트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여기엔 힘의 행사를 질적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비판적 의도가 있다. 게발트는 영어의 violence, 한자로 暴力이라는 의미와 단순히 등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게발트는 일테면 영어의 violence와 force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violence나 게발트 모두 라틴어 vir 혹은 vis를 어원으로 한다. 전자는 남자, 남편, 용사, 병사 후자는 힘, 무력 폭력 등을 뜻하는데 게발트는 violence와 달리 어떤 모순까지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지배하다. 관리, 감독하다'의 뜻을 지닌 walten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게발트는 지배 혹은 통치의 유지, 정당한 강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독일어에서는 국가권력, 권력분립이라고 할 때의 '권력'에 Gewalt를 쓰며, 'gesetzgebende Gewalt'를 번역하면 '입법권'이 된다. 한편 영어의 violence는 외부로부터의 침해나 파괴라는 느낌이 강하다. 라틴어의 violentia에는 '난폭'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배의 유지나 정당한 강제력이라는 표현에는 오히려 force가 적당할 것이다.
게발트라는 말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힘의 행사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명백히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와 비폭력이라고 말하는 상태 사이에 아주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또한 거기에는 좋은가 나쁜가, 혹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가치부여와 관련된 해석상의 게임이 난무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영역에서는 어떤 행동과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늘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 맥도날드의 '해체'로 유명해진 프랑스 농민들의 행동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일환으로서의 치밀하게 계획된 힘의 행사였으나 당시 행정당국이나 비판적 미디어로부터 적어도 초기에는 '습격'이라는 폭력적 활동으로서 취급되고 유포되었다.
이처럼 폭력과 게발트 식의 구분은 국가가 '부정한' 물리적 힘의 행사를 합법성이나 정당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향하는 국가의 폭력을 다시 국가로 되돌리는 대항적 폭력 행사를 게발트로 부름으로써 힘을 둘러싼 국가의 '폭력의 정의(定義)에 대한 독점'에 대항하며 그와는 다른 게임의 장을 열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moral)은 누구라도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여기저기 흘러넘치는 구호다. 부시 미 대통령도,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본의 보수 정치가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오히려 '폭력은 안 된다'고 외치면서 더 큰 폭력의 배치 및 대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사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이 폭력에 대해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높이기 위해서만 쓰여 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 된다, 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러한 논리를 '폭력은 안 된다'라는 구호가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종종(특히 오늘날)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는 자'로까지 확대되어 현실적으로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곳에 폭력이 발생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폭력이 행사되는 기묘한 사태마저 생겨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는 자들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도덕적 구호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폭력을 물리칠 수 있는 요소를 결코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잔인한 폭력적 요소를 농후하게 잉태하고 있는 경우조차 있다. 오늘날 널리 유통되고 있는 이런 설교적인 구호가 노리는 것은 이 세계에 충만해 있는 다양한 힘을 감시하고 해체하는 능력을 짓밟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감각을 마모 당하고 있다.
폭력으로 불리는 행위는 이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번번이 비난받고 있는 폭력, 이를테면 점령지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살해하는 강대한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을 몸에 칭칭 감고 경찰 앞에서 자폭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의 폭력이 과연 똑같은 힘일까? 미군의 데이지 커터(Daisy Cutter, 베트남 전쟁에 처음 사용된 제초기라는 뜻의 거대폭탄-옮긴이)에 의한 파괴와 아메리카의 게토(Ghetto, 주로 흑인이나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옮긴이)에서 자동소총을 휘두르는 흑인 폭력단의 폭력이 똑같은 힘일까?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서 비밀경찰을 고용해 노동조합 활동가를 살해하는 폭력과 마치 사기꾼 같은 기업 행태에 항의하며 자폭하는 한 노동자의 폭력 역시 똑같은 힘일까? 이제 폭력은 민족분쟁 중의 강간, 선진국에서의 유아학대,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엄청난 수의 자살과 사형 등 다양한 형태로 다양하게 행사되며 이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것들을 모조리 폭력이니까 똑같은 것으로 취급해버리거나 혹은 국가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과 단지 범죄일 뿐인 폭력으로 간단히 재단해 버리기에는 적어도 뭔가 망설임이 생기지는 않는가?
이런 폭력 중 어떤 것이 '올바른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원폭'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조금 믿기 어렵지만 과거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은 평화세력이니까 그들의 원폭은 올바르다는 식의 발상은 폭력을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힘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교조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시도되고 있는 비판은 폭력을 비폭력주의의 관점에서 단죄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칸트적인 비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비판'은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니다. 독일어의 Kritik는 어원적으로 krinein, 즉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폭력을 비판한다는 말은-폭력의 근절이라는 이념에 입각하면서도-폭력 자체의 내부에 어떤 구분 선을 긋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군사력을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 폭력수단의 독점과 압도적인 힘의 비대칭 속에 놓여있다. 아메리카와 그와 유사한 폭력수단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잇으며 나아가 그러한 폭력수단을-정도야 어떻든-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행위자와 이른바 '민중' 사이의 힘과 압도적 불균형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맹렬한 기세로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이 유포되고 있는 중이다. 테러리스트의 비애를 노래하던 시인도 '총을 들라!'고 외치던 가수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사태에 직면해도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선동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분노와 힘을 과시하는 시위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폭력적'인 것에는 이제 진절머리 난다고 말한다. 그런 한편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형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점점 더 소수파로 전락하고 있으며 '평화주의'라는 이상을 내던지고 핵무장을 노리며 군대를 증강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커지고 있다. 동시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긍정하는 의견까지 점점 활개 치며 명백히 폭력을 긍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이율배반적 사태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인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다. 예를 들어서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동시다발 테러와 이후의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누가 봐도 '올바른' 구호가 등장했다. 분명하게 '테러'는 찬성, '전쟁'은 반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는 반대, '전쟁'에는 찬성이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다. 테러도 전쟁도 폭력은 모두 다 싫다는 이 구호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책은 그런 폭력과 비폭력 또는 전쟁과 평화로 딲 잘라 구분되는 범주 앞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며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2008.06.24 23:13

[스크랩] 혁명가, 에릭 홉스봄 2008.06.24 23:13

역사는 시간을 뛰어넘어 반복되기도 하지만 그 장소가 꼭 같은 장소인 것 만은 아니죠. 지난 5월 초부터 시작된 촛불시위는 한국적 상황에서 시작되고 발전돼 왔지만 많은 부분 1968년 프랑스의 상황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운동의 원인과 발전 방향이 그렇다기 보다는 정부와 우파의 대응, 그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운동을 뒤쫓아 다니기에 급급한 좌파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거죠.

[1968년 5월의 혁명이 결국 드골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과오는 다른 데 있었다. 혁명운동의 관건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조건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시기를 인식하고 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하는 데 있다. 프랑스공산당은 이렇게 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를 타도(당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하기는커녕, (당이 확실히 원했던) 인민전선정부를 세우는 데도 실패했다. 투렌이 비꼰 것처럼 공산당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개량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당은 시종일관 대중을 뒤쫓기에 급급했다. 바리케이드가 쳐질 때까지 학생운동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자발적인 농성에 이끌려 노조 지도자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노동자들의 무제한적인 총파업 의지를 인식하지도 못했고, 노동자들이 파업 타협안을 거부했을 때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가' 24장 1968년 5월 313~314pp.


물론 지금 한국에서의 촛불시위는 사실 1968년 프랑스를 비교하기엔 많이 부족하죠. 물론 '명박산성'이라는 전도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긴 했지만 시민들의 반란 수준, 또한 노동자 운동의 확산 정도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죠. 심지어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조차 엄청난 폭발력을 지닐 가능성이 있었던 건설노조와 화물연대의 파업에서 실질적인 연대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발전해왔던 촛불시위에서조차 운동의 뒷꽁무니를 쫓기에도 벅차보이는 좌파의 모습은 1968년 프랑스의 공산당 모습을 떠올리게 해요.

하긴 대다수의 좌파 혹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좌파에겐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없었죠.(흠... 이것도 1968년 5월 이전에 그 어떤 좌파도 그런 폭발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에서 또 비슷한 거네요) 아마도 그래서일거에요. 그래서 더 궁금해진 것은 도대체 저 시민들은 어떻게 거리로 나왔을까 하는 점이에요.

물론 국민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그에 반하는 정부의 검역주권 포기, 어륀지, 강부자, 고소영 논란 등 인수위를 포함한 이명박 정권의 여러 실책들 때문이라고 분석하곤 하죠. 또는 최근의 경제적 위기감 때문이라고도 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그렇게 단순할 것이라고 보이진 않아요.

사실 서민들에게 경제적 위기감, FTA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각종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는 노무현 때부터 시작됐었고 좌파들은 이런 쟁점들에 계속 개입해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었거든요.

에릭 홉스봄이 40여년 전에 쓴 이 글은 지식인이 왜 혁명가가 되는가에 대한 글이지만 지금의 상황을 고민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의식적인 혁명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목표에 대한 야심이 아니라, 그에 도달하는 모든 대안적인 방법의 명백한 실패, 모든 문들의 폐쇄이다. 집 밖에 있을 때 문이 잠기더라도,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기는 해야겠지만 다시 들어갈 가능성은 있다. 단지 그런 가능성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길 때 비로소 문을 부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문이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여지가 크다는 점은 지적할 만하다. 혁명가를 만드는 것은 일정한 절망뿐만 아니라 희망이다. 잘 알려진 억압받는 계급들이나 인민들 사이에서 수동성과 행동주의가 전형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혁명에 대한 헌신은 여러 동기들의 혼합에 달려 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 이면에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실질적으로 풍요한 삶에 대한 꿈, 출구가 모두 폐쇄되었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려 열 수 있다는 느낌, 인내와 개량 혹은 점진적인 개선에 대한 호소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절박한 느낌 등이 있다. 이처럼 상이한 비율로 혼합되는 동기들은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중 두 가지 경우를 추출해낼 수 있다. 하나는 상대적이고 특수한 경우인데, 미국의 흑인처럼 사호 ㅣ내부의 특정 집단에게는 입구가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열려 있거나 적어도 열릴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이고 중요한 경우인데, 위기에 처한 사회는 어떻게 해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상대적인 소규모 집단을 제외하고-모든 집단은 혼란과 좌절을 느끼면서,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확신한다. 제정 러시아가 고전적인 사례이다. 그 사회에서는 아무도 미래를 믿지 않았다. 서유럽 세계의 선진국가들 대부분은 1848년 이후 한 세기 이상 첫 번째 유형에 속해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일부가 두 번째 유형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혁명가' 25장 지식인과 계급 투쟁 323~32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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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  에릭 홉스봄 지음|김정한ㆍ안중철 옮김|도서출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