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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러시아혁명 100년이다.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과 살육 사이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 만으로 혁명이 성공할 순 없었다. 다가올 사건을 대비하고, 노동계급 대중을 단결시킬 혁명적 조직 또한 준비돼있어야 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인터내셔널의 붕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런점에서 혁명을 향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과 세계의 인민에게 재앙이었던 이 사건은 노동계급 혁명 조직에게도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인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다. 제2인터내셔널이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서 연이어 전쟁 반대를 위한 전 세계 노동계급과 조직의 단결을 천명했던 사실은 무색해졌다. 1907년 2월 슈투트가르트에 모인 25개국 884명의 사회주의 조직 대표자들은 아래와 같이 결의했었다.

"전쟁이 임박하면 각국 노동계급과 그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인터내셔널 사무국의 굳건한 지원을 받아 가장 효과적인 수단-물론 계급투쟁과 일반적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정치 위기를 이용해 대중을 분기시켜서 자본가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레닌 평전’, 토니 클리프, 2권, 16쪽

카우츠키는 무기력하게 ‘기권’을 주장했을 뿐이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반발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국수주의적 배신을 멈출 수 없었다. 독일 사회주의 조직 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는 청년들에게 ‘조국 러시아’를 위해 참전할 것을 권했다. 심지어 자신이 젊었다면 직접 전선에 나갈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베라 자술리치와 알렉산더 포트레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주의 선구자들 다수가 전쟁 찬성에 돌아섰다. ’제국주의 독일’에 맞선 ‘조국 방어’전쟁을 핑계로 둘러댔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성장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던 제2인터내셔널과 유럽 각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분열하게 된다.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려 1915년 9월 중립국 스위스의 치머발트에 모인다. 8년 전 슈투트가르대회 참석자의 20분의 1도 안되는 38명의 대표가 11개 나라에서 와 참석했다. 회의 결과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치머발트 선언(Zimmerwald Manifesto∙링크)’이 채택된다. 선언 자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구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하며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8명의 동의만 얻는다. 1916년에는 키엔탈에서 다시 회의가 열려 두 번째 선언(Kienthal Manifest∙링크)이 채택된다. 이 두 번째 선언도 더 급진적으로 나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회의에서 레닌의 주장은 더 많은 공감을 얻는다. 두 선언은 변절한 제2인터내셔널의 노회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단절, 자국 정부와의 대결을 명확히 선언하지 않지만 이 회의는 이후 제3인터내셔널 건설의 초석이 된다. 아래의 글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가 강조해 인용하고 있는 치머발트 선언이 이 두 선언이다.

그렇지만 이 볼셰비키 학생위원회의 호소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주장은 레닌의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치머발트 선언이 제2인터내셔널과의 관계 단절을 명확히 선언하지 못한데 반해 이 학생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과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변절한 ‘사회주의의 옛 교사들’과 분명히 선을 그으며 차르에 맞선 노동계급과 농민의 대열에 학생이 함께할 것을 호소한다. 이들은 이를 위해 불법적인 조직활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1914년 9월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레닌이 발표한 전쟁에 관한 몇 가지 테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현재 사회민주당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아래와 같은 완전한 선전책(宣傳策)이 군대와 군대의 행동 영역에 전파돼야 한다. 곧,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동지들 및 다른 나라의 고용된 노예들을 위해서는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정부와 당에 투쟁의 총구를 돌려야 하는데, 이 목표를 위해서는 선전 방침이 각국의 국어로 번역돼야 하며 각국의 군대와 각 집단에 불법적인 세포책을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노동 대중의 혁명적 의식에 호소하는 것이 긴요하며 사회주의를 배신한 현 인터내셔널 지도자들과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독일∙폴란∙러시아, 그리고 기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여론을 조성해 유럽의 각 개체 국가들을 연방 공화국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러시아 혁명사’, 김학준, 751쪽.

아래의 글은 볼셰비키 학생위원회가 1916년 12월 발표한 지하 성명서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가 1923년 처음 출간한 것을 바탕으로 바바라 알렌이 영어로 옮겼다. 이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1편이다.


1915년 스위스 치머발트에 모인 11개 나라 사회주의자 대표들.

혁명적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1916년 12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오직 용감한 자에게만 영광의 승리는 주어진다,
투쟁에서의 패배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젊은이여, 우리의 노래를 당신에게 들려주마 -
영원한 영광을 당신에게…

동지여! 반동의 기간 활동은 더 어려워지고 지루해졌다. 그들의 대응에 따라 정확한 행동이 요구됐지만 어떤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 사이에 드러난 차이가 충분히 명확하게 밝혀질 수는 없었다. 조악한 헌법이 지배한 고약했던 10여년간 천박한 부르주아적 분위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더 강해졌다.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던 이 분위기가 이제 바로 폭로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적인 학생 단체들의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파산과 무모한 기회주의를 입증한다.

한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혁명적 민주주주의 깃발 아래 단결하는 듯했다. 최근 사회의 계급갈등이 격화하자 학생들은 두개의 대립하는 집단으로 갈라졌다. 먼저 이데올로기적으로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관된 부르주아적 기회주의 집단은 최근 더 강해졌다. 다른 집단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전자의 집단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신념을 공유하면서도 몇몇 이유로 여전히 사회주의적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거리를 두고 있는 동지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과거 대부분의 학생에게 이러한 작업은 그저 공감을 표하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혁명적 세계관은 행동할 의무를 이들에게 요구한다. 학생들이 그들의 공감을 포기하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한편인 부르주아적 학생들에게 투항하느냐. 그들이 글과 고민에서 벗어나 확신을 갖고 혁명적 행동에 동참해 현대사회의 노예제를 쓸어버릴 위대한 투쟁속 프롤레타리아트와 손잡느냐. 최근의 상황은 학생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 학생들은 무척이나 ‘동정적’이다. 그들은 ‘인민’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대한 가치라는 것을 내세워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을 실행할 수 있을지 따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최상의 학생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의식과 의지를 저 '가난하고 노예상태인 이들'에게 일치시키며 차르의 포악한 사냥개들과 맞서 어렵고 영웅적인 투쟁의 길로 전진했다.

신성에 의해 패배한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썩어빠진 감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우리에게 생생한 증언을 해준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그런데 학생들은?! 그들은 스스로를 이데올리적 지위로 한정시킴으로써 자신의 게으름과 나약한 의지를 정당화 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뚜렷한 ‘지위’를 갖지 못했음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신념의 이데올로기적-사회적 기반을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천박한 기회주의적 더러운 늪 위에 서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사기를 저하시키는 유해한 분위기에 그들은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자기애에 가득차 한껏 고무된 ‘지위’와 그들의 (퇴행적) 분위기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 늘어놓곤 한다. 학생들은 그런 분위기에 가라앉아 몇 년을 보내버렸다.

지배계급과 정부의 약탈정책 결과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모든 이들이 시급히 답해야 할 예민한 질문이 의제로 제기됐다. 이 뜨거운 질문과 벌어진 놀라운 사건에 러시아의 여러 사회 계급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제기된 질문들로 인해 학생들은 더 이상 동일한 태도를 지닐 수 없게 됐다. ‘민족의 단결’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그토록 많은 거짓말에도 인민(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 중 소수는 인민과 함께해왔다. 소위 ‘사회’와 함께한 것이 아니다. 1905년 첫 혁명의 바리케이트에서 인민과 한편에 선 학생들은 반동으로 고난스러웠던 몇해 동안 인민과 함께 고통받았고, 이들 인민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 취급하는 부르주아지의 핏빛 복수극에 이들이 동원되는 걸 막기 위해 애써왔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선 학생들은 단결한 인터내셔널의 붉은 깃발을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지금은 변절한] 몇몇 사회주의 옛 교사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했다. 물론 어떤 학생들은 국수주의에 속아 적극적으로 전쟁을 받아들였고 ‘조국’-국가와 부자가 이것의 심장과 영혼이다-을 가상의 압제자로부터 구하기 위해 학살극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세계적 학살이 시작된 이래 이들은 단지 ‘반대 만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는 데 실패해 왔다. 이중에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첨예화된 표현이라고, 현대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일찌감치 얘기해왔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전쟁은 부르주아지와 잔혹한 니콜라이2세의 폭정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 압제자에 맞선 노예들의 전쟁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대 만이 아닌’ 결단을 내린 이들은 자신의 동료 다수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등을 돌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방탕에 빠졌다. 억압받는 인민을 방어하기 위해 양손을 치켜들었던 이들은 전쟁이 28개월 지난 지금에 와서야 차르에 매수된 공포를 기반으로 한 형제애에 자신의 두 손이 엮여있음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아왔다고, 군주제에 대한 친밀감이 전쟁이 끝없이 지속되는 오래된 주요 이유였다고 느끼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내부의] 국제주의자와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던 평화적 시기에조차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절치 못했다. 그들 다수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혁명적 행동이 시급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혁명적 행동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결집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부족했고 기회주의에 의해 이 행동들은 소모적으로 이뤄졌다. 실천적 자세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종종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얻기도 했다. 평화시에도 인민에게서 군국주의의 견장을 떼놓을 수 없으면 거대한 살육이 시작했을 때 그러기는 더 힘들다. 세계의 부르주아지가 인터내셔널에 맞서 단결했을 때, 하지만 아직 단일한 대오를 이루지 못했을 때 단호한 걸음을 내디딜 필요가 있다. 제2인터내셔널이 실천적 자세에서 파산을 맞은 것은 단호한 행동이 필요할 때 그 조직과 의지가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세계대전의] 피와 눈물의 바다 위로, 상이군인의 신음소리 사이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과 행동을 위한 조직으로 떠오를 것이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를 새로 만들어질 인터내셔널의 주력으로 모아내고자 한 첫번째 치머발트 회의의 ‘선언’을 우리는 환영한다.

전쟁이 시작되던 때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나라별 단체 사이의 조직적 연결은 끊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에 반대해 단결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까지 독차지하려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조직적 파편화의 단계를 벗어나 혁명적 행동의 기반 위에 단결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동지들이여, 이제 사회주의적 조직화 과정에서 우리가 참여한 정도가 우리 각자에게 내려질 판결의 증거가 될 것이다.

동지들이여, 활동을 시작하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의 불법 조직에 뛰어들자! 전쟁과 그 주모자들에 맞선 투쟁에 학생들을 조직하자! 이 조직들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연계시키자! 사회주와 혁명적 선동의 요새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합법적인 민주주의적 조직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활동과 연설에서 주도권을 잡자! 모든 러시아 폭군의 총검으로 인민이 해방될 수 있다는 잘못된 공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소하자! 활동하라! 조직하라! 동지들이여!

"노동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과부와 고아, 상처입고 불구가된 이들, 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우리는 호소한다. 모든 국경과 파괴된 도시, 시산혈해의 건너편에 있는 이들과 손을 잡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자!"는 호소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치머발트 회의의 첫번째 선언이다. 이런 말도 들어봤는가? "세계대전 2년. 유린당한 2년. 피에 젖은 희생자와 미친 반동의 2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화약통에 불을 붙인 저들 뒤엔 누가 숨어 있는가? 전쟁을 원한 건 누구이고 오래전부터 이를 준비해온 건 또 누구인가? 바로 지배계급이다!"

동지여 보았는가. "전쟁의 막다른 길에서 무덤에 누운 수백 만 명을, 슬픔에 빠진 수백 만 명의 가족들을, 수백 만 명의 과부와 고아를, 폐허 위 잔해의 무더기를, 파괴된 대체할 수 없는 문화재"를. "여기엔 승자도 승리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흘려 허약해진 이들, 파괴된 이들, 피폐해진 이들 모두가 패배자다. 이것들이 이 잔혹한 전쟁의 결과물들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의 환상은 허구가 됐을 뿐이다."

시민이여 들어보았는가? "평화적 시기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에게서 삶의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전쟁 동안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삶 그 자체도 말이다. 살인은 이제 그만! 고통은 이제 그만! 약탈도 이제 그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능한 빨리 이 학살을 중단시키자!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인민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 일어서자! 더 대담하게 행동하자! 당신들이 다수임을 기억하라. 당신들은 스스로 원한다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모든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정부에 보여주자. 그 후에야 인민은 평화의 시기에 도달할 것이다. 전쟁을 끝장내자!"

‘약탈당하고 파괴된 인민에게’는 치머발트 회의의 두 번째 선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초대장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건의 문턱에 서있다. 이 사건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머뭇거리지 말자 동지여! 사건이 늦게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학살을 중단시키고 가증스러운 노예제를 폐지시킬, 무엇보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만들어나갈 전장에 인터내셔널의 전위는 이미 들어섰다. 거대하고 새로운 모든 세력이 혁명의 승리와 인민이 반란을 일으킨 축제의 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뒤에서 따를 것이다. 그렇게 나가자 동지여! 자랑스러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타협없는 투쟁의 붉은 현수막을 든 대열의 노동자들과 함께 발걸음을 함께하자!

차르주의 군주제는 답하라! 전쟁을 중단하라! 혁명이여 영원하라! 전진하자! 임시혁명정부를 위하여! 러시아민주공화국 만세! 사회주의 만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제3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자료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1916년 12월 러시아사회민주당 고득교육기관 담당 조직위원회 발표. A.G. Shliapnikov, ‘Kanun Semnadtsatogo goda’, Moscow/Petrograd, Gosizdat, 1923, vol.2, pp.63~67.

영어 번역 바바라 C. 알렌 미국 필라델피아 라살레 대학 역사학 부교수. 저서로는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 1885~1937:고참 볼셰비키의 삶(Alexander Shlyapnikov, 1885~1937: Life of an Old Bolshevik)’가 있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1885~1937) 러시아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숙련 금속노동자이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랐다. 1908~16년 서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볼셰비키의 출판물을 러시아로 밀수하는 일을 조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전러시아 금속노동조합 의장이 된 그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 노동인민위원에 임명됐다. 1919~21년 노동자반대파의 지도자로서 그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을 옹호했다. 노동자반대파가 패배한 후엔 혁명에 관한 역사적 회고록을 작성했고 이 글들은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인 1935년 날조된 혐의로 체포돼 1937년 9월 사형당했다.

2016.12.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12.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