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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5 00:52

의심스러운 민주주의 투사, 포포비치 2016.03.15 00:52

최근 스르야 포포비치의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이라는 책이 번역∙출간됐다. 한겨레 신문에서도 그의 책을 금요일자 북섹션의 톱으로 소개해줬다. 그러나 '민주주의 투사'로서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고려하기엔 조금 조심스럽다. 그의 경력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래 글은 US Uncut
(미국의 긴축정책 반대 단체) 활동가 칼 깁슨이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스트랫포의 e메일을 기초로 조사한 내용을 폭로한 것이다. 스트랫포는 미국 정부와 기업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 왔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해가 되는 정권을 교체하는 데 있어 폭격과 항모전단보다 해당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사회운동을 조장하는 게 더 유용하다고 폭로된 e메일에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CIA와 같은 물리적 힘(군사력 뿐 아니라 공작을 위한 조직ㆍ자금 등)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기업이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이익을 위한 정보 조사ㆍ분석 활동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폭로된 e메일에 따르면 스트랫포가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유럽과 중동지역에서 활용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르야 포포비치다. 스트랫포는 포포비치의 민주주의 활동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활용하고자 했다. 포포비치가 가진 세계적인 활동가 연락망을 이용해 주요 국가의 활동가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오큐파이 활동가들을 미행∙감시한 것이 폭로돼 논란을 일으켰다. 아래 글에 따르면 포포비치는 미국 활동가들을 접촉해 그 정보를 스트랫포에 전달했을 뿐 아니라 바레인에서 인권활동가들을 접촉해 그 정보를 넘겼고, 심지어 그가 명성을 얻은 세르비아의 오트포르! 운동 활동가들의 정보조차 사전 동의 없이 제공했다.

포포비치가 의식적인 프락치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개인적 부와 명성을 위해서일지라도 미국 정부와 기업을 위해 일하는 정보업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스트랫포의 임직원들을 위해 강연을 했고, 그의 아내는 스트랫포에서 직접 일했었다. 애초 포포비치는 자신의 결혼식에 스트랫포의 많은 임직원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더 위험한 것은 그가 말하는 '혁명'이다. 그가 주 대상으로 삼는 국가ㆍ정부가 주로 그 나라 안에서 압제와 전횡을 일삼는 독재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보더라도 그의 '혁명'은 미국의 외교 언어인 '정권 교체
(regime change)'이지 사회ㆍ경제 전체의 근본적 변혁으로서 '혁명'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정권 교체'를 노리는 정부는 거의 언제나 미국의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인 나라들 만이다. 그러니까 '터키'에 대해선 침묵하며 '베네수엘라'에선 적극적인 그와 그의 조직 칸바스(CANVASㆍ오트포르!의 후신)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포포비치는 차베스가 죽기 전 베네수엘라에서 그를 몰아낼 청사진을 제안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책을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어떤 '교범'으로 고려하고자 한다면 보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의혹을 지나치게 강조해 동유럽과 아랍에서의 격변을 모두 미국 정부 혹은 세계 그림자 정부의 음모 결과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 아래 글처럼 세르비아에서의 격변을 미국 정부가 후원하고 조직한 결과로 볼 필요도 없다. 내 생각으로는 오히려 과대망상에 빠진 개인과 기업의 주장에 언론이 부화뇌동한 결과 그 지역들의 격변에서 포포비치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된 듯 싶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들을 살펴봐야 하는 건 베네수엘라에서 실제로 그랬듯이 미국 정부와 기업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운동을 동원하기도 한다. 차베스에 반대한 자본가들과 기업노조들의 파업이 실례다. 비판적으로 살펴보기를 멈춰선 안 되는 이유다. 아래 옮겨놓은 폭로 글은 포포비치의 책을 비판적으로 읽기 위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s. 한겨레는 투쟁의 상징은 불끈 쥔 주먹이 포포비치의 조직 오트포르!가 만들어낸 것으로 소개하는 데,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운동에서 쓰이던 상징이다. 오트포르!와 포포비치는 이를 약간 변형한 것일 뿐이다.

※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인용하려면 반드시 원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대괄호[ ]는 이해를 위해 옮긴이가 추가한 것입니다.


정보기업 스트랫포와 협력해온 국제적 명성의 활동가
칼 깁슨, 스티브 호른|2013년 12월 2일ㆍ링크

세르비아의 스르야 포포비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동유럽과 그밖에 지역에서 체제 변화를 주도한 기획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2000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미국의 후원을 받은 활동가 그룹 오트포르!(Otpor!)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보다 덜 알려진 것으로, 오큐파이닷컴
(Occupy.com)의 독자적인 조사에 따르면 포포비치와 오트포르!, 그리고 그 후신인 칸바스(CANVASㆍCentre for Applied Nonviolent Action and Strategies)는 골드만삭스의 경영진, 민간 정보기구인 스트랫포(StratforㆍStrategic Forecasting, Inc.), 그리고 미국 정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포포비치의 아내는 스트랫포에서 1년여 일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위키리크스가 '글로벌 정보 파일'의 e메일 수천 통을 새로 공개한 여파로 알려졌다. 미국석유학회
(API)ㆍ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ㆍ다우케미컬ㆍ듀크에너지ㆍ노스롭그루먼ㆍ인텔ㆍ코카콜라와 같은 고객들을 위해 지정학적 사건들과 활동가들의 정보를 모아온 텍사스 오스틴에 위치한 민간 기업 스트랫포와 포포비치는 긴밀하게 협력했다.

'SR501'이란 제목의 e메일을 보면 스트랫포는 동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회사 내부 강연을 위해 2007년 처음 포포비치에 접근했다. 스트랫포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 이야기를 기밀로 유지하길 요청했다.

e메일 중 하나에서 포포비치는 미국이 무장시킨 바레인 정부에 의해 부상당하거나 살해당한 활동가들의 정보를 전달했다. 이 정보는 2011년 가을 바레인 정부가 민주주의 활동가들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바레인 인권센터로부터 얻은 것이다. 또한 포포비치는 2010년 9월 최근 사망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지 그 청사진을 스트랫포에 제안하기도 했다.

●스트랫포의 글로벌 활동가 연결고리

포포비치는 자신의 활동가로서의 명성을 활용해 세계적인 활동가들과 스트랫포의 만남을 여럿 주선했다. 스트랫포가 포포비치의 인맥으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차례로 그들의 기업 고객-스트랫포는 자신을 '그림자 CIA'로 홍보했다-에게 '유용한 정보'로 제공됐다.

포포비치는 필리핀ㆍ리비아ㆍ튀니지ㆍ베트남ㆍ이란ㆍ아제르바이잔ㆍ이집트ㆍ티벳ㆍ짐바브웨ㆍ폴란드ㆍ벨라루스ㆍ조지아ㆍ바레인ㆍ베네수엘라ㆍ말레이지아 등 세계 곳곳의 현지 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스트랫포에 제공했다. e메일을 보면 포포비치는, 자신의 e메일이 민간 보안기업에 전달되는 것을 알리 없는 활동가들의 정보를 그들의 동의 없이 스트랫포에 여러 번 제공했다.

미국에서는 이 글의 공저자인 칼 깁슨
(US Uncut의 대표)과 더 예스맨의 앤드 비클바움이 포포비치를 만났었다. 그들이 활동하는 두 단체가 GE의 세금 미납을 조롱하는 풍자를 한 직후였다.

그 둘은 자신들 단체의 다음 해 계획을 포포비치에게 얘기했고 이후 뉴스에선 스트랫포가 예스맨의 활동가들을 치밀하게 감시 중임이 보도됐다.

2011년 1월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에서 포포비치는 CNN에 보도될 인터뷰 진행을 제안받았다. 그가 논점을 펼치는 데 의지한 첫 사람은 스트랫포의 직원이었다. 스트랫포 직원은 그에게 다섯 가지 논점을 제시해 인터뷰를 이끌었다.

스트랫포는 포포비치가 자신들에게 유용한 이유로 세계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그의 풀뿌리 활동가들 연락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트랫포의 전 유라시아 분석가인 마르코 패픽이 2010년 5월 쓴 e메일을 보면 "다시 상기시키자면 이 만남에서 그의 주요한 유용성은 그가 접촉해온 세계 곳곳의 골칫거리들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줄 수 있는 능력이다. 현지의 상황을 파악할 그의 능력은 아마 제한적일 것이다. 그는 주로 정보 제공자와 기초적인 연락을 유지해 정보 제공자들이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끔 한다"고 적혀 있다.

포포비치는 그의 부인이 스트랫포에서 일할 만큼 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포포비치의 부인은 스트랫포에서 2010년 3월부터 2011년 3월까지 1년여간 '이주의 공개자료' 업무에 종사했다. 다른 지원자였던 엘레나 탄키츠 또한 칸바스에서 활동한 이다.

"칸바스맨
[포포비치][스트랫포에게] 친구이자 자원이고 그는 그녀를 우리에게 추천했다"고 스트랫포의 분석 담당 부사장인 스콧 스튜어트는 같은 날 면접한 두 사람을 제외하며 2010년 3월 e메일에서 쓰고 있다.

포포비치와 그의 부인은 스트랫포와 무척 가까워졌고 실제로 포포비치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연 그들의 결혼식에 스트랫포 직원 다수를 초대했다.

●스트랫포가 만들어낸 혁명을 돕기

스트랫포는 포포비치의 가치를 세계의 혁명가들과 운동가들의 활동 정보를 얻는 데 만 두지 않았다. 필요할 경우 그가 미국의 지정학적ㆍ금융적 이해관계에 적대적인 나라의 지도자들을 몰아내는 걸 도울 수 있다고도 여겼다. 따라서 스트랫포는 포포비치를 이용하기 위해 그에게 패픽이 '우리가 기업으로서 항상 이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원'이라고 부른 자유롭게 이용할 기금을 제공했다.

패픽은 2011년 6월 e메일에서 포포비치를 '훌륭한 친구'라며 '혁명을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세르비아 활동가'로 묘사했다.

"그들은 … 기본적으로
(미국이 좋아하지 않는) 독재자와 독재정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패픽은 e메일에 적고 있다. 그 e메일에 대한 답장에 대답하면서 그는 "그들은 지금 당장 그 나라들로 가서 사업을 시작해 정부를 무너뜨릴 노력을 펼쳐야 한다. 이는 적절히 사용할 때 항모 전단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트랫포 정보 담당 부사장 프레드 버튼은 '항모 전단' e메일에 대한 답장에서 그들을 이란으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포포비치는 현지 정보 제공자로 이란의 활동가를 소개했고 또한 스트랫포가 '민주주의 프로그램'을 위한 투쟁에 투자해 미국 정부가 '소프트 파워' 정책을 밀어부치도록 했음이 e메일을 통해 폭로되기도 했다.

2010년 3월 스튜어트는 버튼에게 보낸 또 다른 e메일에서 칸바스가 '차베스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에 대해 썼다. 2007년 칸바스는 차베스 전복을 위해 활동가들을 훈련시켰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고객들을 고려해, 정보원으로서 혁명적 NGO들을 세심하게 다루기 위해 그와 연락하는 데 허시메일을 사용한다"고 패픽은 2011년 1월 e메일에서 포포비치를 언급한다.

스트랫포는 칸바스가 정부를 전복을 조장하는 데 지닌 광범위한 능력에 반해 여행 경비를 지급해 가며 2010년 포포비치를 오스틴의 본사로 초대해 그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칸바스의 골드만삭스 현금

골드만삭스에서 경영진으로 있다가 2012년 6월 퇴직 후 자신의 새터유환투자관리(Satter Investment Management LLC.)를 운영하고 있는 무니어 새터는 칸바스의 주요 협력자 중 하나다. 스트랫포 CEO 시아 모렌즈는 10년여간 골드만삭스에서 투자관리 담당상무이사와 남서부 개인투자관리 본부장으로 종사했다.

새터는
[골드만삭스에 있던] 그 기간에 공화당의 주요 후원자였다. 그는 2012년 대통령선거 전 칼 로브의 수퍼팩[후보 개인이 아니라 지지세력 전체에 무제한의 정치자금을 후원할 수 있는 제도] 크로스로드 GPS에서 3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그리고 2014년 중간선거를 앞둔 2013년 상반기에는 공화당주지사협의회(the Republican Governors Association)에 10만 달러를 후원하기도 했다.

시카고 노스쇼어의 950만 달러짜리 거대한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무니어는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펀드에 5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포포비치는 세계적 정보기업 스트랫포와 무니어를 만나게 됐을 때 중개인으로서 그 기업의 대표 조지 프리드먼에게 새터를 소개했다.

스트랫포 홈페이지에 새터는 "세계적 사건 이면의 정보를 이해하고 싶어질 때면 나는 언제든 스트랫포를 찾는다"고 추천사를 적고 있다. "그들은 세계적 문제들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와 통찰력 넘치는 분석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주류 언론보다 100보 앞선 것"이라고 말한다.

●오토포르!: 거꾸로 된 역사

포포비치가 어떻게 스트랫포 정보 수집 활동의 수족이 됐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트포르!와 칸바스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포포비치가 스트랫포의 정보원이자 중요한 자문역을 맡게 된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밀로셰비치를 몰아냈던 '불도저 혁명'과 이후 동유럽 정권을 쓰러뜨렸던 운동들에서 풀뿌리 활동가들과 서방 언론의 역할로 인정받는 것들은 보여진 것보다 더 크다.

2000년 워싱턴포스트는 폭로기사에서 "원론적으로
[세르비아의 사건은] 미국 의회가 1999년 정부 예산에서 1000만 달러, 2000년 3100만 달러가량을 투입한 공공연한 작전이었다. 반밀로셰비치 운동에 참여한 몇몇 미국인들은 운동 주변의 CIA 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는 지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국무부와 국제개발처
(USAID∙the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가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정부의 해외 원조기관을 통해 민간 파트너에게, 그리고 NDI와 공화당의 협력단체인 국제공화주의연구소(IRI∙the 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 같은 비영리단체에 지원금을 보냈다."

패픽이 칸바스를 '항모 전단보다 강력한 힘'이라고 주장한 것이 과장 만은 아니었다. 칸바스는 1990년대 후반 세르비아에서 오트포르!의 경험에 기초해 설립됐다.

독립적인 학자 마이클 바커는 "실제로 1997년에서 2000년 사이 국가민주주의기금
(the Natioanal Endowment for Deomocracy∙이름과 달리 민간 단체다)과 미국 정부는 대략 나토가 3만7000회의 폭격을 통해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해냈다. 밀로셰비치를 몰아내고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인 보이슬라프 코슈투니차로 대체했으며 세르비아에 신자유주의적 전망을 확산시켰다"고 Z매거진에 썼다. "같은 방법으로 기업의 대리단체들과 가짜 시민단체들(astroturf groups)은 정말 순진한 지지자들을 모은 전략적으로 활용된 사회운동은 잠재적으로 우파의 후원(막대한 자금과 전문적인 지원)을 받은 시민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에서 오토포르!의 성공을 견본 삼아 미국 정부로부터 650만 달러를 후원받은 운동은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오토포르! 활동가는 미국이 지원하는 방송 자유유럽라디오
(Radio Free Europe)에서 "우리는 그들을 훈련시켰다. 어떻게 조직을 건설하고 지역 지부를 만드는지를 교육했다. 로고∙상징∙핵심 메시지를 만들고 '브랜드'를 구축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회의 약한고리와 사람들이 가장 고통받는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청년들이 투표함으로 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끔 동원할 수 있는 요소일 것이다."

세르비아에서 밀로셰비치를 쓰러뜨리는 데는 강력한 언론기구를 만들기 위한 미국 정부의 지원도 수반됐다. 이렇게 미국이 지원했던 라디오∙TV 중 하나인 B92에서 포포비치의 부인은 기자와 앵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 USAID는 2004년 정책보고서에서 "라디오 B92를 돕고 라디오방송국(ANEM)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국제적인 노력은 정부가 뉴스와 정보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약화시켰다"며 "세르비아에서 USAID와 국제적인 후원자들이 독립적인 언론을 도운 것이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핵심적인 건 동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어떤 말로 해도 정권 교체이지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틀랜드주립대 도시연구∙계획과 제랄드 서스먼 교수는 그의 책 '민주주의 브랜드 만들기: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동유럽에서 미국의 정권 교체'에서 "
[그것들은] 그것은 실제로 절대 혁명일 수 없다. 지배층 내부에서 권력이 이동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소비에트 붕괴 후 이 지역에서 현대적 선거운동 전술은 포퓰리스트처럼 불안정하고 취약한 상황을 정권 교체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오트포르!가 미국 정부 내 강력한 세력과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포포비치가 2010년 5월 미국 공사에서의 강의하면서, 또 2009년 12월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하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일찌감치 칸바스에 자금 지원을 위해 미국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친 권력가는 현재 주러미대사인 마이클 맥폴
[2014년 사퇴했다]이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교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서 포포비치를 도와 '밀접하게 협력'했다.

●확산되는 비판, 포포비치의 대답

바레인 인권센터의 책임자 마리암 알카와자는 포포비치를 몇 년간 활동가로 알고 있었지만 위키리크스가 스트랫포의 e메일을 폭로하기 전까진 그의 대외 관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스르야와는 여러 번 만났었다. 그는 바레인 혁명과 바레인에서 인권투쟁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알카와자는 전화통화에서 말했다. "그가 그들의 정보를 내게 전해줬을 때 나는 매우 놀랐었다."

알카와자는 당시 스트랫포가 어떤 기업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던진 질문을 읽자마자 의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스트랫포로부터 온 e메일에 의혹을 느껴 결단코 그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그 e메일들은 정말 정보기관의 질문들 같았다. 그들은 인권센터에서 내가 한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야권 연합을 누가 후원하는지, 그들에겐 얼마나 많은 회원이 있는지와 같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물어왔다"며 "그러한 질문들 때문에 내가 받은 e메일 배후의 동기에 의심을 갖게 됐다. 그것이 내가 답변하지 않은 이유"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e메일을 받거나 정보기관처럼 보이는 질문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접촉해오면 우리는 보통 그들을 차단해린다. 우리가 알기엔 그런 이들은 거의 정부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라고 알카와자는 말을 이었다. "기자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알기 때문에 첫 만남에서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나는
[스트랫포의] e메일을 받자마자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고 내가 실제로 절대 답변을 보내지 않은 이유다."

오토포르!의 공동 설립자 중 한 사람
(그는 그 운동에 남아있기에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은 화상 인터뷰에서 위키리크스에 폭로된 e메일 중 포포비치가 활동가들의 정보를 사전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포비치는 인터뷰에서 칸바스에 대해 사뭇 다른 어조로 말한다. 그는 "우리는 우리 활동가들을 위태롭게 하는 어떠한 일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사전 동의 없이는 그 누구에게도 그들을 노출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포포비치는 칸바스가 누구나, 그리고 모두에게나 그 어떤 차별 없이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해 말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디에서든 칸바스가 대변하려 한 것은 저 헌신적인 활동가들과 비폭력 투쟁이지 여전히 냉전시대에 사로잡혀 평범한 사람들이 이끄는 대중운동이 아니라 탱크와 비행기∙핵폭탄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믿는 이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가 워싱톤, 크렘린, 텔아비브, 다마스커스에 있는 세계 정세의 주재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외국 군대의 개입이 아니라 우리가 해온 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인 비폭력 투쟁 덕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포포비치의 경력을 고려해보면, 특히 그의 활동가 경력 내내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해왔던 과거를 따져보면 그는 스트랫포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고 비판가들은 말한다.

서스먼 교수는 인터뷰에서 "세르비아의 단체는 세르비아 바깥의 어떤 곳에서도 저항운동을 이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술은 어떤 정치적 목표를 쟁취하는 데 유용했다"며 "또한 그는 그 과정에서 민간과 정부 정보기관에 유용한 정보를 취합해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스트랫포가 그에게서 찾은 유용성"이라고 말했다.

칼 깁슨은 기업을 위한 긴축정책 중단을 위한 비폭력적이고 창조적인 직접행동 운동을 펼치는 US Uncut의 대변인이자 조직가이다.
스티브 호른은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탐사보도 전문기자이자 이 기사가 먼저 발표된 DeSmogBlog의 연구원이다.


마천루에서의 점심
|찰스 에버트가 1932년 촬영한 사진. 당시 건축 중인 뉴욕 록펠러 센터 69층(지상 260m)에서 철골 구조에 앉아 위태롭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노동자들.

아래는 조슈아 B. 프리먼의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서문이다. 뉴욕주립대학교 퀸스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수송 중: 뉴욕 운송 노동조합 1933-1966'을 썼고 '미국을 만든 건 누구인가? 노동 인민과 국민경제, 정치, 문화 그리고 사회' '파렴치한 민주주의: 노동, 지식, 그리고 미국 사회의 재구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의역이 많고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주석은 후주로, 옮긴이가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은 본문 대괄호 안에 담았습니다. 저자가 이탤릭으로 표기한 것은 굵은 글씨로 강조했습니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삶과 노동
조슈아 B. 프리먼

서문: 무엇이 뉴욕을 위대하게 만들었나

20세기 중반 뉴욕의 거리를 거니는 방문자는 노동계급이 그곳의 사회적 중추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산한 항구와 도시 심장부의 공업지대, 브루클린ㆍ브롱크스ㆍ맨하탄의 무질서하게 뻗어나간 주거지역, 주기적으로 지역을 마비시키던 파업들,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미국 노동당과 진보당, 국제적 명성을 얻은 뮤지컬과 코메디 스타일, 지역사회 주민들 내에서 통용되는 은어 등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뉴욕 노동계급은 정치 집단, 지역 주민들의 조합, 친목 또는 민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통해 도시의 사회ㆍ경제ㆍ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곳곳에서 기여했다. 지식인ㆍ예술가ㆍ엔터테이너ㆍ상인들이 전유하고 전파한 그들의 문화ㆍ스타일ㆍ세계관 등의 요소는 도시와 국가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조직 양식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뉴욕 노동 대중의 세계시민주의ㆍ열정ㆍ교양은 2차 세계대전 후 권력ㆍ혁신ㆍ현대성의 세계적 중심이 되고자 한 뉴욕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노동자와 그들의 단체들은 자신을 소외시킨 일련의 사건 전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스스로 힘들게 일해온 다수가 뒷전으로 물러나는 사이 1990년대 뉴욕의 행로와 궤적은 시장과 유행의 선구자라는 세계적 도시로서의 위치에 점점 더 이끌렸다.

'뉴욕, 노동계급의 도시'는 승리와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주민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했었지만 미래에는 더 이상 중심적 열할을 하지 못할 단체들이 권력을 얻고 영향력을 잃는 대하소설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대중과 산업, 권리와 평등을 위한 끈질긴 투쟁, 계속되는 차별과 불평등의 거대한 변동에 관한 이야기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뉴욕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주목할 만한 역사가 그곳에 살았던 이들 계급 외에는 거의 모두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이다. 전후 뉴욕을 기념하는 방대한 문학작품들-E. B. 화이트, V. S. 프리쳇, 쟌 모리스, 트루먼 카포티, 윌리 모리스 등등-은 전성기에 인구ㆍ경제ㆍ정치ㆍ사회 모든 면에서 뉴욕이 노동계급 도시로 보통 묘사되던 동안 놀라울 정도의 맹목적인 태도로 바로 그 노동자의 존재를 대개 무시한다. 노동자가 이야기에 등장할 때면 이 작가들은 대개 범죄의 온상,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다채로운 배경으로서만 그려진다.
[1] 뉴욕의 기록가들은 너무 자주 그곳에 살고 있는 수백 만명의 노동자, 그 남편과 아내, 아이들, 즉 뉴욕을 경제ㆍ정치ㆍ문화적으로 중요하게 만들고 그곳의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무시한 채 자신과 같은 작가ㆍ예술가ㆍ기업가ㆍ정치인들을 도시와 그 정신의 창조주(the creator)로 간주한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뉴욕의 노동계급 역사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적게 써왔다.[2]

노동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뉴욕의 과거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도시의 정치ㆍ사회ㆍ경제, 심지어 물질적 발전에서조차 전국적 표준에서 그토록 벗어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뉴욕을 살펴보는 것은 미국 노동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뉴욕 노동계급과 단체는 보통 대량생산 산업과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ㆍCIO)와 연결돼 있던 남성 중심적 산업노조를 강조한 2차 세계대전 후 노동의 역사에 기초한 묘사에 들어맞지 않는다.
[3] 뉴욕에선 작은 회사와 공방 또는 복합기업[다각기업ㆍ하나의 기업이 여러 종류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형태]에 많은 수의 여성 조합원을 거느린 노조들-흔히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ㆍAFL)과 연결된-이 지배적이었다. 거기에 또 뉴욕에서 노동조합주의는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회복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2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 사이 나라 전체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뉴욕에선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그래서 1990대 뉴욕의 노동조합가입률은 전국의 두 배 이상이었다).[4] 그뿐 아니라 보통 조직된 노동자가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묘사되는 데 반해 뉴욕 노동운동의 힘은 1950년대 초와 1970년대 중반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이 약해지는 동안 뉴욕이 노동조합 중심지로 남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노동운동의 특징과 그것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의도적으로 학술적ㆍ정치적 유행을 거스른 것이다. 현대적 담론에서 바로 그 '노동계급'이란 단어는 불쾌한 느낌을 준다. 한 세기 동안 이 단어는 흔히 공업에 관한 어휘에 속했다. 보통 단순하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총괄해 가리켰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용어를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 그들의 직계가족을 포함해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계급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요즘 미국인들은 보통 그것을 사람들이 일하는 형태가 아닌 사람들의 소득이나 재산 수준에 따라 정의한다. 때때로 나 역시 중산층 또는 빈곤층이라는 단어와 같은 그러한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 논지는 뉴욕의 노동자들이 많은 경우와 상황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경제에서 그들의 구조적 위치로부터 제약받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도시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5]

다른 언급이 없다면 나는 뉴욕을
[펜실베니아주 북부와 온타리오호 사이에 있는 주가 아닌] 엄밀한 의미로 뉴욕시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 전후 뉴욕에 관한 많은 연구는 도시의 어느 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체로서 대도시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6] 이 연구는 도시 주민들 매일의 일상을 빚어내는 도시의 단체들과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과 거의 모든 내 성년의 삶을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 동안 뉴욕에서 보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든 회고록인 건 아니지만 나는 종종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삽화처럼 끌어내곤 했다. 대부분의 뉴요커처럼 나는 도시에 대해 큰 긴장감을 느껴 왔다. 그러한 어려움과 무자비함에 끝없이 좌절하면서도 다른 곳에서의 삶은 아무리 상상해보려 해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뉴욕을 지키는 것은 박물관이나 콘서트홀의 고급 문화 때문도, 비할 데 없는 일자리ㆍ식사 기회 또는 뉴요커들이 흥청대며 보내곤 하는 곳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명백하게 너그럽고, 개방적이지만 회의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가식 따윈 없는, 폭발적인 열정과 활동에서의 헌신과 같은 노동계급 감수성 때문이다. 이것은 힘든 하루일을 마친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노동조합 모임, 친구들 사이의 일, 강연 또는 놀이공원에서 보내온 내 조부모들의 감수성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을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봉양하고, 지방을 전전하며, 그리고 대단친 않지만 자부심을 갖고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사회 변혁을 모색했다. 지하철과 거리, 공립학교에서 나는 이러한 감수성을 여전히 느끼곤 한다.

노동계급이 영향력을 잃으면서 뉴욕에서 문화는 후퇴했고 공동체는 소원해졌다. 나 또한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때로 돌아갈 가능성을 원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50년 전 다저스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의 원래 연고지는 브루클린이었다. 1958년 현재의 LA로 옮긴다]는 브루클린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겠지만, 뉴요커 대부분에게 50년 전의 삶은 힘든 노동, 불안한 치안, 더 큰 적대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와 나라를 만드는 데 오늘날보다 더 위대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에 이 책이 빛을 비추길 바란다. 그들의 노동, 투쟁, 농담, 노래가 뉴욕을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다. 이를 잊는 것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1] E. B. 화이트 『Here Is New York』(뉴욕, 1949, 국역 『여기 뉴욕』), V. S. 프리쳇 『New York Proclaimed』(뉴욕, 1965), 쟌 모리스 『Manhattan'45』(뉴욕, 1987), 안드레아 와이어트 섹스톤과 앨리스 레세스 파워스가 편집한 『The Brooklyn Reader: Thirty Writers Celebrate America's Favorite Borough』(뉴욕, 1994)에 실린 트루먼 카포티의 「A House on the heights」, 윌리 모리스 『New York Days』(보스톤, 1993).

[2] 최근 나온 데브라 베르나르와 레이첼 번스타인의 『Ordinary People, Extraordinary Lives』(뉴욕, 2000)은 예외다.

[3] 예를 들면 데이비드 브로디의 『Workers in Industrial America: Essays on the 20th Century Struggle』(뉴욕, 1980) 5장과 6장, 스티브 프레이저와 게리 게슬이 편집한 『The Rise and Fall of the New Deal Order, 1930-1980』(프린스턴, 1989)에 실린 넬슨 리히텐시타인의 「From Corporatism to Collective Bargaining: Organized Labor and the Eclipse of Social Democracy in the Postwar Era」, 킴 무디의 『An Inujury to All: The Decline of American Unionism』(런던, 1988)을 보라.

[4] 뉴욕과 전국의 노동조합 조합원 수에 관해선 3장과 17장에서 다룬다.

[5] R. 에메트 머레이 『The Lexicon of Labors』(뉴욕 1998) 187쪽. 계급에 관한 문학은 막대하다. 이라 카츠넬슨과 아리스티드 R. 졸버그가 편집한 『Working-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프린스턴, 1986)에 실린 이라 카츠넬슨의 「Working-Class Formation: Constructing Cases and Comparisons」는 이에 관한 유용한 안내를 제공한다.

[6] 특히 이러한 관심은 1950년대 동안 지역개발연합[the Regional Plan AssociationㆍRPAㆍ1922년 설립된 비영리 기구로 뉴욕ㆍ뉴저지ㆍ코네티컷 3개 주 31개 카운티의 경제적 경쟁력과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했다]의 후원을 받은 일련의 연구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요약된 것은 에드가 M. 후버와 레이몬드 버논이 쓴 『Anatomy of a Metropolis』(케임브리지, 1959)에서 볼 수 있다.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문성원ㆍ안규남 옮김|아고라 프락시스 총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궁전에서 쫓겨났다. 황제가 물러난 겨울궁전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공장과 군대에는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권력 기관이다. 이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 때 처음 등장했었다.

세계 여성의 날인 2월 23일
(신력으로 3월 8일) 시작된 혁명은 구권력을 무너트렸지만 아직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울궁전의 임시정부는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도 임시정부를 넘어서진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교착된 전선처럼 러시아 내부에서도 지리한 고착상태가 들어서는 듯 싶었다. 노동자와 병사의 가장 급진적인 부위에서 당장의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불만이 위험스럽게 쌓여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는 머뭇거렸다.

카데츠와 멘셰비키ㆍ사회혁명당의 연립 임시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전선에서 군사 규율을 강화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6월 18일엔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2월 혁명의 반란이 시작됐던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지구에서 설익은 반란이 계획된다. 레닌과 볼셰비키 중앙위는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지만 7월 3일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 때는 아니었다.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다수는 아직 볼셰비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연립정부, 즉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연립정부는 즉각 반격했다. 7월 5일 정부는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사무실을 습격했다. 6일에는 레닌 체포령을 내렸다. 이어 트로츠키와 주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도 이어졌다. 경찰과 우익 깡패 집단 흑백인조가 활개쳤다. 레닌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국경을 넘어 핀란드를 향했다.

국가, 전진하는 혁명의 피할 수 없는 벽

7월 사태 후 핀란드로 피신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국가와 혁명'을 쓰는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이제 막 수립된 부르주아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봉건 권력에 맞선 혁명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 대중의 무장을 용인하곤 한다(여러 혁명을 겪은 후인 1836년 스페인 혁명 당시 부르주아는 이러한 무장조차 허락하길 꺼려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로서는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첫 번째 계율이었다. 따라서 노동자가 쟁취한 모든 혁명 이후에는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는 새로운 투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레닌 재인용ㆍ126쪽,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 대한 엥겔스의 1891년 서문)

1848년 2월 혁명은 파리 노동계급의 협력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을 승리로 이끈 파리의 노동계급은 '사회공화국'의 전망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오를레앙 왕조를 몰아낸 파리 부르주아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조롱하고 모독했다. 분노한 노동계급은 6월 봉기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무장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잔혹하게 진압당한다.

레닌이 떠올린 것은 이러한 역사였을 것이다. 이미 레닌은 7월 사태를 겪으며 부르주아지의 음험한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7월의 공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나아가려 했다. 연립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장군과 손을 잡고 볼셰비키와 노동자ㆍ병사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코르닐로프는 더 과감했다. 8월 25일 자신의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향해 진격시켰다. 26일에는 지금까지 협력자였던 케렌스키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코르닐로프의 이름은 혁명을 압살하는 데 성공한 장군으로 1936년 스페인의 프랑코, 1961년 한국의 박정희,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앞에 놓였을 것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인 상비군과 경찰ㆍ감옥과 같은 억압 기구를 국가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들은 …… 공공생활이 복잡해지고 기능이 분화된다는 등의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지적은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여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다."(21쪽)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와 궁전의 부르주아지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였다. 엥겔스가 국가의 존재를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봉착했고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레닌 재인용ㆍ15쪽,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고 설명한 것은 레닌에게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겨울궁전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ㆍ병사와의 대립을 견딜 수 없기에 자신의 힘을 소비에트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의 무력화에 집중해야 했다. 국가는 "계급 간의 충돌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힘이 있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재인용ㆍ25쪽, 앞의 책). 혁명이라는 역동적 시기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17쪽).

스페인ㆍ한국ㆍ칠레의 경험은 이러한 국가의 본질이 여전히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최근 이집트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평화적인 시기에는 군대ㆍ경찰과 같은 억압 기관이 국가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기의 시기면 군대는 어김 없이 자신의 존재를 만방에 과시하며 역사의 주재자로 등장한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는 '평화적인 시기'임에도 이러한 국가의 본질을 얼핏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부예산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미국 정부는 10월 1일 폐쇄됐다. 그러나 "국방, 경찰, 소방, 우편, 항공 등 '핵심 서비스' 업무는 정상 운영됐다". 국립위생연구소가 심각한 암 환자 200명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노동통계청은 실업률 발표를 연기했으며, 식품의약국은 수입 식품과 의약품에 대한 안전검사를 중단했다.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도 활동이 마비됐다. 노동계급 대중을 위한 필수적 공공서비스가 중단된 이 와중에도 미국 군대의 세계적 활동은 계속됐다.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는 핑계의 10월 5일 리비아와 소말리아에서 군사 작전은 정부 폐쇄에도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됐다. 군대를 운영하는 데 종사하는 민간 군무원도 복귀했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산물이자 지배계급의 계급지배 기관이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먼저 할일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본다면, 당신은 내가 프랑스 혁명의 우선적 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ㆍ군사기구를 한편의 수중에서 다른 편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현실적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65쪽,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4권 425쪽)

그러나 혁명의 시기 부르주아지는 내각의 일부를 노동계급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한다. 1848년 혁명 후 프랑스에서 그랬고 레닌이 이 책을 쓰고 있던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그랬다.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가 수상이 됐고 멘셰비키 7명이 내각에 들어갔다. 1936년 스페인 인민정부 내각에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국가에 대한 근본적 반대파인 아나키스트까지 포함돼 있었다. 1970년 칠레에선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된다.

위기가 이러한 권력의 '재분배'를 통해 해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관료기구의 자리가 여러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정당들에 많이 '재분배'되면 될수록, 피억압계급들과 그들의 정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화해 불가능한 적개심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가장 민주적인 정당들조차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바로 그 억압장치인 국가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53~54쪽). 자유주의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였던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강화되거나 여전히 유지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공통되게 경험했던 바다. 브라질 정부는 올해 6월 대중교통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반란과 10월의 교사 노동자 파업을 강력한 경찰력으로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 정부의 수장인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사회주의 게릴라 출신이다. 정치권력의 일부를 분배받거나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국가권력을 향해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키고,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절멸시킬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된다."(54쪽)

부르주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핀란드로 피해있던 레닌에게 과제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와의 대결 만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겐 국가기구의 파괴가 끝일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점차적으로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량을 있는 대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었다(레닌 재인용ㆍ42~43쪽, '공산당 선언' 이론과실천판 39쪽).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은 아직 국가 일반을 없애지 못한다.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멸할 테지만 이제 막 혁명을 시작한 러시아에서는 "착취자의 저항을 억누리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농민ㆍ프티부르주아ㆍ반(半)프롤레타리아 등을 지도하기 위해서도, 국가권력ㆍ집중화된 권력조직ㆍ폭력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46쪽).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특수한 폭력조직으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역할의 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다"(47쪽).

한국의 어떤 자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강신준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볼셰비키는 ……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ㆍ링크).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48년과 1871년 혁명을 경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술로부터의 빼곡한 인용으로 가득하다. 레닌이 인용한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나를 두고 말하자면, 나의 공적은 근대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그들 상호간의 투쟁을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나보다 훨씬 전에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나의 새로운 점은 ①계급의 존재는 다만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 ②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간다는 것, ③이러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지양하고 무계급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58쪽,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2권 497쪽)

파괴된 부르주아 국가를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철저하게 수행"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줬듯이 "다수의 인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72쪽). 파리 코뮌은 이러한 완전한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조치도 보여준다. 코뮌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보수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조정된다. 각종 특권은 폐지된다. 법관들도 표면상의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 코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직접적인 실행기구이고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을 여는 것이다. 혁명의 발전은 이러한 조치들에 덧붙여 구체적 상황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의 대체는 단지 행정부에 대한 것 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입법ㆍ행정과 함께 사법도 노동계급의 직접적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육과 종교 등도 예외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코뮌은 옛 정부의 권력의 물질적 도구였던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하고 나서, 곧바로 정신적 억압도구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789년 혁명 이후 종교는 혁명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종교는 인민을 교육하는 기관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의 교육은 언제나 가장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었다. 즉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핵심이었다
(71~72쪽).

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국가의 폭력적 전복,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행. 민주주의가 아직 확립되지 않고 국가가 여전히 폭력에 의한 지배에 머무르던 제정 러시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민주적 제도의 진전은 사회의 부정의를 교정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확대할 것이라는 게 보통의 기대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방법이 아직 덜 발전했고 대중이 민주주의에 익숙치 않아서 그렇다고 말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레닌에 의하면 "'부'의 전능함이 민주공화국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부의 "전능함이 정치적 메커니즘의 개별적 결함이나 자본주의의 열악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외피다. 따라서 자본은 이 최선의 외피를 획득한 뒤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물이나 제도나 정당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자기의 권력에는 하등의 동요도 없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다."(27쪽)

이는 "고대 공화정들에 있었던 자유"가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선거가 확립된 한국의 2012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다. 12월 18대 대선의 투표율은 17대보다 12.8%나 급증했음에도 75.8%에 불과했다. 그것은 레닌에 따르면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146쪽). 게다가 미국에는 아직 스스로 등록한 사람 만이 투표할 수 있고, 최근까지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이 포함된 조직적인 투표 등록 방해가 존재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동지역 최대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엔 민주주의라는 건 눈꼽만치도 없다. 1970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에 뽑히자 자본가들은 온갖 사보타쥬를 자행했으며 민주 국가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미국은 올해 7월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자행했음에도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자본가들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매우 예민한 눈으로, 특히 피억압계급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우 소중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기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서나, 즉 선거권의 '사소한', 아니 사소하다고 이야기되는 세부 조항들에서만이 아니라 대의기관들을 구성하는 기술상의 문제에서, 단체조직권에 대한 실제적 방해에서, 일간지들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구성에서, 그 밖에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도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제한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제한, 예외, 배제, 방해들은 특히 가난을 직접 체험해본적이 전혀 없고 피억압계급들의 실생활을 가까이 접해본적도 없는 자들의 눈에는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들은 빈민을 정치로부터,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제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147~148쪽)

국가 없는 삶의 시작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대체는 국가 일반의 사멸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나서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가 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행하는 마지막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 한 한 영역에서 차츰 불필요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스스로 조락한다. 인간에 대한 통치 대신에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레닌 재인용ㆍ31~32쪽, 엥겔스 '반 듀링론')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것이다. 그러나 억압자와 자본가들에 대한 제한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만 말하지는 않는다. "억압이 있고 폭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도적이고 하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다. "인민의 착취자ㆍ억압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 즉 그들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변화"인 것이다(149쪽).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떠한 계급도 없는(즉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 전혀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자유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으로 완전하고 참으로 아무런 제외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적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의 무수한 참상ㆍ야만성불합리추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옛날부터 알려져왔고 수천 년에 걸쳐 모든 교훈서에서 반복된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하는 특별한 강제기관 없이 준수하는 데 점차 습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사멸하기 시작한다."(149~150쪽).


즉 사회주의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인민 다수가 "투표와 선거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 사무에도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누구나 다 '국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 때 국가 일반은 사멸의 길로 접어든다(197~200쪽).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고비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트는 이전의 국가기구를 인수해 이용할 수 없다.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괴돼야 한다. 즉 혁명 러시아의 임시정부와 군대ㆍ경찰, 부르주아적 두마와 제헌의회는 제거돼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를 무너트린 자리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들어선다. 소비에트는 이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인민의 공적 생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대표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고 보수는 노동계급의 평균 임금으로 제한돼야 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하지만 아직 억압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억압자를 억압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멸을 향한 길을 닦는다.

잊혀진 꿈의 귀환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게 흐르진 못했다. 참혹했던 내전은 혁명적 노동계급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독일혁명의 패배로 인한 고립은 모든 과거의 오물을 부활시켰다. 옛 억압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관료의 독재로 대체됐고 국가는 사멸하지 않고 강화됐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모든 국가의 사멸이라는 희망을 백일몽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쓰던 100여 년 전과 다른 운명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 각 나라의 주권, 인민의 민주적 권리가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스 선거에서 급진좌파연합이 부상하자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부르주아 언론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는 짓도 개의치 않았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유럽연합헌법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아일랜드 국민들을 겁박했다. 프랑스에서도 헌법이 부결됐지만 유럽의 지배자들은 방법을 바꿔 국민투표 없이도 유럽연합의 원칙을 각 나라에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유럽에서 국가는 혁명가들의 행동이 아닌 지배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되고 곳곳에서 무시당하는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만은 그 강력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은 유럽과 중동, 남미의 저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 차원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폭력기구에 의지해 계급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고전적 국가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핵심 역할로써 억압기구의 활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공화당의 부시가 애국자법을 만든 데 이어 민주당의 오바마가 국방수권법을 만들어 인민의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은 연방정부가 조직한 계획에 따라 전국의 경찰에 의해 일제히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경제를 지닌 중국은 민주주의하고 거리가 먼 나라다. 천안문 광장을 점령한 것은 인민 대중이 아닌 공안이다.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는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전적 국가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킴 그림|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도서출판 길찾기

1931년 스페인에선 공화국이 수립된다. 인민에 기반한다고 주장하는 공화국이지만 실상은 소수의 지주, 대자본가, 귀족에게 지배받았다. 노동조합 활동가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작업대 한켠에 권총과 수류탄을 올려놓고 일해야만 했다. 언제 자본가가 사주한 우파의 테러가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36년 2월 좌파들이 모여 만든 인민전선은 총선에서 크게 승리한다.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됐지만 불안한 평화는 야심찬 장군 프랑코에 의해 끝난다. 모로코로 좌천됐던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장군에 올랐다. 1935년에는 노동자 봉기를 진압해 악명을 떨쳤다. 인민전선의 승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그 만큼 적격의 인물은 없을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오웰의 '카탈로니아
(카탈루냐) 찬가'. 최근으로 오면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 모두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의 승리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는 이제 끝장인 것처럼 보였던 시절 스페인에서의 내전은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이끌었다. 아마도 스페인 내전에서의 '국제 여단'과 같은 경험은 유일무이할 것이다.

스페인의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땅뙤기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하는 농촌의 갑갑함을 젊은이들이 버티긴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도서출판 길찾기)의 주인공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이 현실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반발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시골 청년의 동경은 어느 시대나 비슷할 것이다. 안토니오는 한 번 실패하지만 두 번째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는 도시로 가 꿈에 그리던 운전면허를 딴다. 그러나 그에게 자동차 운전은 여전히 먼 일이다. 실업이 도시를 옥죄고 있었다. 임금도 나날이 떨어진다.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아나키즘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립보다 화해, 갈등보다는 협조. 정치적 대립을 접한 대다수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안토니오도 다르지 않았다. 미싱 외판원을 하던 당시 그는 자신의 미싱이 천을 꿰듯 갈등과 대립으로 갈라진 스페인 인민을 하나로 만들어줄 수 있기를 꿈꿨다. 꿈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프랑코군에 징집된 안토니오는 목숨을 걸고 전선을 넘는다. 그는 의용군의 총격 앞에서 파시스트 군대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CNT-FAI'
(전국노동자연맹-이베리아무정부주의동맹)라고 외쳤다.

여러번 언급되지만 안토니오가 CNT와 FAI에 활동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까지 포함해 고작 네 명의 작은 동맹에 가입한 것이 다다. 전선에서 만난 그들은 총알을 모아 만든 반지를 나눠 끼는 것으로 자신들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을 맹세한다. 안토니오는 전선에서야 자신의 꿈이었던 운전을 하게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도 품는다.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프랑코군의 공세가 강화된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의용군의 정규군화는 더 고통스럽다.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에서 그리듯 정규군화는 의용군이 싸우는 '의미'를 빼앗는 짓이었다. 이어지는 패배. 이후 그의 삶은 패배와 배반으로 계속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스페인 내전 당시를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 만화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패배 이후의 삶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특별한 경험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아나키스트 혁명가 두루티는 1936년 내전 초기 목숨을 잃는다. 어쩌면 그는 이른 죽음으로 배반과 패배를 겪지 않았기에 더 행복했을런지 모른다.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안토니오는 친구로부터 물려받은 두루티의 신발과 함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의 전선을 누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배반을 겪으며 그는 스스로 그 신발을 태운다. 가까스로 지키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은 결혼과 함께 옛 동료에게 맹세의 반지를 되돌려 보내며 끝낸다. 종교적 결혼의 맹세가 아나키즘에 대한 맹세를 대체한 것이다.

1975년 프랑코가 죽으며 스페인의 독재도 끝난다. 안토니오와 동지들이 찾던 자유와 해방된 사회가 온 것일까.

"스페인은 민주국가니까요."

이 말보다 더 잔인하게 그를 파괴한 것은 없을 것이다. '민주국가' 스페인은 절차와 형식 속에, 그의 노쇠한 몸 속에 그를 가뒀다. 안토니오는 모든 실패 속에서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두더지가 자신의 가슴을 파먹도록 내버려뒀다. 동지들의 패배를 핑계로 자신의 신념을 배반한 삶을 사는 것은 그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듯 싶다. 자신의 마지막 존엄과 자유를 위해 그는 양로원의 5층 창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아흔에 다다라 스스로 비상한다. 이 책의 원제가 'El Arte de Volar'(비상의 기술)인 이유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안토니오는 스스로 맹세의 반지를 뺀다. 그러나 그는 곧 그 반지를 뒤늦게 얻은 자식의 손에서 발견한다. 실제로 이 책은 그의 아들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썼다. 게다가 최근 스페인에서는 그의 후예들이 다시 저항에 나서고 있다. 맞서 싸운 대상은 다르다. 그러나 인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조장하는 자본가들,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인민의 뜻을 무시하는 정치가들의 권력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싸움은 안토니오의 싸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비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지금은 절판된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지음, 변상출 옮김, 실천문학사)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아마 두루티에 관한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란 제목은 아마 이 책에서 따온 듯 싶다. 스페인 내전과 아나키즘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최근 나온 신광영 교수의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후마니타스)'는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의 불평등 현실을 실증적 연구로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20대와 그 기성세대의 불평등에 대한 말은 많았지만 이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피상적인 파악만으로 한국 사회 불평등 개선 방향을 모색할 수는 없다. 신 교수의 책은 우리가 불평등의 해결을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숙고하게 해준다. 배움이 모자라 많은 것을 얻을 순 없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계급을 고민해야 함을 되새기게 됐다.

매우 즐겁게 읽은 책이지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미뤄왔던 것은 '실증' 연구에 바탕한 책으로서 꽤나 심각해 보이는 결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결론을 바꿀 정도의 결정적인 결함은 아니지만 '실증'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는 꽤 많은 곳에서 데이터의 오류가 보인다. 이는 아마 글을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서의 오류일 것이다. 출판 과정에서의 실수가 연구의 성과를 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발견한 오기를 페이스북과 이메일을 통해 출판사에 알렸고 이에 대한 대답이 어제(5월 20일) 올라왔다. 책에 대한 더 진지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이 책에 관심있을 사람들을 위해 출판사 홈페이지의 정오표와 내가 출판사에 제기했던 오기 사항을 아래 옮겨놓는다. 내가 지적했던 것 중 일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다.

●출판사가 공지한 정오 사항(링크)




●내가 발견한 오기

1장 29쪽 "한국과 같이 외환 위기를 계기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금융시장 개방과 같은 거시적인 변화가 이루어졌고, 기업의 고용정책이 크게 바뀌면서 기존 취업자나 대학 졸업자들이 큰 영향을 받았다."
=> "한국과 같이 …… 영향을 받았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앞 문장에 없다. 앞 문장은 일반적으로 노동시장 정책과 노사관계 제도, 세계화는 정치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담고 있고 바로 이어지는 해당 문장은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변화가 이를 보여준다는 것으로 앞 문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같이"를 "한국의 경우"로 바꾸는 게 조금 더 부드럽게 문장을 이어준다.

2장 55쪽 "미국의 경우, 정부 복지 재정 지출이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2003년 16.23%에 달해 한국에 비해서 거의 두 배 정도 높았다."
=> 54쪽 [표 2-3]에서 2003년 미국의 복지 재정 지출은 16.59%.

3장 67~68쪽 [표 3-1]과 [표 3-2]
=> 67쪽 [표 3-1]의 2000년 한국의 지니계수와 68쪽 [표 3-2]의 2004년 지니계수가 0.352로 같다. 같을 수 있지만 4년 사이에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는 것이 의문. 확인 필요.
※확인해주지 않음

3장 69쪽 "또 [표 3-2]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2004년 한국의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비율은 7.44로 미국의 5.45보다 더 커서…"
=> 68쪽 [표 3-2] 한국의 2004년 P90/P10은 5.93으로 나와다. 이것도 확인 필요.

3장 74쪽 [표 3-3]
=> 여기는 잘못됐다기보다 오해를 불러올 수 있게 표가 만들어져 있다. 우선 둘째 항목인 "5천만 원 초과"에는 그 아래 세부 항목으로 "5천만 원 초과 1억 원 이하" "1억 원 초과"를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표에는 병렬적으로 표기돼 있어 마치 독립적인 데이터인 것처럼 보인다. 맨 아래 "5억 원 초과"도 마찬가지로 "1억 원 초과"에 포함된 세부 항목으로 구분되게 표를 만드는 게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언급 없음

4장 102쪽 [표 4-1]과 [그림 4-1]
=> 3차산업 월평균 임금이 106만900원이라고 적고 있는데 101쪽 [표 4-1]에는 155만8900원으로 나와있음. [표 4-1]과 [그림 4-1>] 건설업ㆍ사업서비스ㆍ유통서비스ㆍ개인서비스업 월평균임금이 다름.

5장 145쪽 [그림 5-1]
=> [그림 5-1]의 '1998소득' 범례가 '16998소득'이라고 오기돼 있음.

5장 146쪽 [표 5-2]
=> 본문에 표시된 2007년 세대별 상위 20% 비율과 147쪽의 [표 5-2]의 수치(합산)가 다름. 20대 본문 5.3% 표 5.0%, 30대 본문 23.8% 표 23.5%, 40대 본문 29.7% 표 28.0%, 50대 24.8% 표 22.6%, 60대 본문 7.3% 표 7.1%.

5장 147쪽 "[표 5-2]에서 30~39세의 상위 소득 40%에 속하는 비율은 55%로…"
=> [표 5-2]에서는 연령 세대 구분이 31~40세로 돼 있고 상위 40%에 속하는 비율도 56.1%임.


5장 149쪽 "세대 내 불평등에서는 40~49세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 [표 5-1]에서 3까지 세대 구분에 의하면 41~50세임.

5장 153쪽 "2007년 30~39세 비정규직 비율은 10%로"
=> [표 5-5]에는 세대 구분 31~40세의 비정규직 비율이 10%.

※ 147쪽과 149쪽, 153쪽의 세대 표시의 문제는 1998년으로부터 9년 후를 상정할 때 본문의 표기가 맞다. 그러나 이는 표와 다른 데이터. 예를 들어 별도로 30~39세의 상위 40% 비율의 별도 데이터가 있고 그걸 합산한 결과가 55%라면 그 자료를 각주로 알려줬어야 한다.

6장 180쪽 "[표 6-8]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 6장에는 [표 6-7]이 182쪽에서 183쪽 사이에 마지막으로 나올 뿐 [표 6-8]은 없음.

7장 189쪽 "그러나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50%를 상회하는 사회에서 부인들의 경제활동은 가족 간 소득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된다."
=> "되고"가 잘못 들어가 있다.

8장 229쪽 "그러므로 장년기 소득 획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기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인해 40대 중후반부터 자영업자가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점이다."
=> 마지막 "~는 점이다"가 어색하다. "그러므로 ~ 수 있도록 ~ 한다"로 끝내던가 "~는 점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고치는 게 좀 더 자연스럽다.

반자본주의 신당(NPA)의 활동가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프랑수와 사바도가 함께 쓴 '생존권 혁명'이 푸른숲에서 나왔다.

반자본주의 신당은 제4인터내셔널 계열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 주도로 만든 정당. 그 이름이 말해주 듯 최근 10여 년 간의 급진화와 반자본주의 운동 성장에 기반해 있다. 1974년생인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2002년과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와 돌풍을 일으켰다.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어 '붉은 집배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책은 브장스노와 사바도가 97개의 단어로 급진 좌파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이 단어 목록에는 '영구 혁명론'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나타내는 단어도 포함돼 있다. 무작위 대중을 위한 급진 사상 안내서는 아닌 듯 싶다. 300쪽이 좀 넘는 책에 많은 주제를 담았기에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실현하려는 사회 계획을 드러내기보다 기존의 사회적 논리와는 다른, 새로운 논리의 주요 골자를 소개하고자 한다"고 소개한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당 정치인 앙리 베베르가 쓴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좌파 이야기', 좌파전선의 장 뤽 멜랑숑이 쓴 '인간이 먼저다'와 함께 프랑스 좌파의 주요 정파의 주장을 살펴볼 책이 모두 나온 셈이다. 베베르의 '좌파 이야기'의 경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 타 정파와의 차이가 충분히 보여지진 않는다. 멜랑숑의 '인간이 먼저다'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공약집으로 쓰였다. 좌파전선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사회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프랑스 좌파 세력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을 가장 명확히 주장한 것은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 브장스노와 사바도는 들어가는 말에서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빼놓지 않고 있다. 표지는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이 가장 예쁜 것 같다.

1_ 열한 살의 한잘라: 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카툰집
나지 알 알리 그림|조 사코 서문|강주헌 옮김|시대의창

'열한 살의 한잘라'라는 팔레스타인 만화가의 카툰집이 나왔습니다. 1936년 태어나 1948년 나크바 때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난 나지 알 알리는 레바논, 쿠웨이트, 영국을 오가며 팔레스타인에 관련된 카툰을 그려왔습니다.

주인공(?) '한잘라'는 그의 모든 카툰에 등장하는 뒤돌아서있는 허름한 차림의 소년의 이름입니다. 한잘라는 아마도 알리의 분신이겠죠. 비슷한 나이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의 마음은 성장을 멈춘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 미국의 사기와 협잡, 중동 지배자들의 위선을 놓치지 않고 직시합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슬림의 편협한 시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중동의 지배자들처럼 위선적인 타협을 선호하지도 않습니다. 열한 살 한잘라의 눈에는 레바논 기독교인의 아픔도 함께 담기곤 합니다. 그와 민족의 고통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고통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의 잔인함과 욕심을 비난하는 데 촛점을 맞추면서도 중동 지배자들의 비열한 태도에 대한 비판을 놓치 않습니다. 1987년 그를 암살한 범인의 배후로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만화 '팔레스타인'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가 서문을 썼습니다. 각 장과 카툰마다 간략한 해설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카툰이 그리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원혜진이 연재하고 있는 만화 '아! 팔레스타인'(링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_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글|폴리테이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은 최장집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으고 보충해 낸 책입니다. 잘 안알려져 있지만 최장집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은 '노동'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학문적 여정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셈이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 그는 30년 전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영등포 공단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현대차 노조 사무실 앞에는 회사 관계자인지, 경찰인지 모를 인물들이 진을 치고 노조 사무실 방문자들을 상시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30년 전 '빨갱이' 색출을 위해 공단 입구에서 감시의 눈길을 돌리지 않던 군사독재 정권의 모습과 겹칩니다. 지난 30여년간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최장집 교수의 관심과 주장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책 제목에서 직설적으로 말하 듯 노동이 배제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상처를 안겨줄 뿐이라는 겁니다. 그 자체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도 고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복지를 시혜가 아닌 사회적 권리로서 바라볼 것을 주장합니다. 즉 혜택을 받는 이들을 무기력한 상태로 놓아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그 권리를 요구하고 설계하고 시행할 민주적 권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이론에만 눈을 희번덕 거리며 몰려다니는 요즘 세태와 달리 하나의 주제를 뚝심있게 탐구하는 노학자의 자세가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있었던 저자와의 대화에 나온 최장집 교수는 칠순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동감 넘치는 눈빛과 지치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이 책은 본격적인 이론을 펼치진 않습니다. 현대차 노동자, 건설노동자, 이주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소규모 봉제공장 노동자 등을 만나며 떠오른 화두를 제시한 책일 뿐이죠. 따라서 그가 말하는 '노동'은 아직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에서도 드러나듯 영세 자영업 '사장님'도, 농민도 '노동'이라는 범주로 얘기됩니다. 하지만 이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많은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176쪽이지만 판형이 작고 글자가 커 쉬엄쉬엄 읽어도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진 화두를 고민하기에 두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Posted by 때때로



1.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전성원 지음|인물과사상사

악당의 음모가 세계를 위협합니다. 의연히 일어선 영웅은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징치하죠. 세상이 이렇게만 돌아가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영웅 이야기로 먹고 살아가는 DC와 마블의 만화조차도 이러한 단순한 구도의 이야기는 버린지 오래죠.

그럼에도 여전히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매우 유혹적입니다. 좌파, 혹은 진보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잘못된 것은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폭력ㆍ착취ㆍ억압의 탓으로 돌려집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부터 시작해 여러 혁명가들이 지적해왔 듯이 지배자들이 단지 강압을 통해서만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의식ㆍ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의도적으로, 또는 우연하게 만들어냅니다. 지배계급의 힘은 눈에 보이는 폭력 만이 아닙니다. 피지배계급 스스로 지배계급의 보이지 않는 사슬에 얽매이게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힘입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ㆍ착취ㆍ억압의 사슬을 끊는 것과 함께 보이지 않는 사슬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내지 않으면 어느새 우린 또다른 지배계급의 사슬에 제발로 묶이게 될 것입니다. 지배받는 계급의 사람들이 체제에 맞서 자기계몽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자기계몽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행동과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반성적으로 살피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의 저자 전성원은 서문에서 바로 이 자기계몽, 즉 우리의 일상과 의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밝히는 것을 책의 가장 중요한 의도라고 밝힙니다.

이 책이 다루는 16명, 책의 부제에 따르면 '헨리 포드부터 마사 스튜어까지' 16명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의식은 물론 현대 세계질서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흔히 '자기계발'을 위한 책들에서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할 인물들로 인용되곤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취엔 그 만한 그늘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기계적 균형감에 의거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하지만 숨겨져 있기 일쑤인) 규칙이 당대에 어떤 진보를 낳았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지금껏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인지에 의문이 이어집니다.

현대 자본주의를 만든 '영웅'의 이면을 드러내보이며 우리가 넘어서야 할 과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반영웅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 전성원은 '황해문화'라는 계간지의 편집장입니다. 2000년대 초반 개인 홈페이지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에겐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하죠. 그의 홈페이지(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ㆍ링크: 지금은 닫아놓은 상태입니다)에 담긴 문학ㆍ역사ㆍ인물ㆍ문화 정보는 아직 인터넷 '백과사전'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에 정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홈페이지의 편집(서체와 크기, 행간의 조절)ㆍ디자인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홈페이지는 웹의 '하이퍼링크'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사이트였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드러났던 그의 박학다식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인물과 그 주변, 당대의 역사ㆍ문화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책이죠. 순서에 관계없이 관심있는 인물 이야기 먼저 읽을 수 있으니 500쪽이 약간 넘는 이 책의 분량이 독서에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2.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장 지글러 지음|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

우리에게 다시 세계적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장 지글러. 그는 이번 책에서 바이오 연료와 곡물기업들의 투기 문제를 다룹니다.

그는 세계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이 유엔 기구로 만들어진 역사를 2차 세계대전의 기아 전략으로부터 찾습니다. '기아'가 제3세계 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 유럽도 기아 문제로 고통받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로부터 배운 교훈을 통해 세계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과 같은 기아 근절을 위한 국제적인 합의와 실천이 시작됐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합의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경제기구들은 기아 근절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적 곡물기업들과 바이오연료 전략이 있습니다.

장 지글러의 글은 언제나 쉽게 읽힙니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세계시민적 책임감은 우리에게 '정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3.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좌파 이야기
앙리 베베르 지음|임명주 옮김|에코리브르

저자인 앙리 베베르는 흔히 말하는 '68세대'입니다. 그는 68혁명 당시 혁명적공산주의청년회(JCR) 활동을, 이후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JCR의 후신) 회원으로 좌파 정치인의 길을 걸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사회당 당원으로 있지만 그가 '좌파' 정치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유럽의회 의원까지 했으니 좌파 정치인 중에서도 꽤나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고 봐야겠죠.

그가 자신의 딸과 나눈 대화 형식으로 좌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2000년 즈음 쓰여진 책이라 지금과 약간은 다른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정도 차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지역적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안할 수 있는 정도죠.

아무래도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딸에게 들려주는 형식이라 기본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좌파/우파의 이념이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은 우리나라의 성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때때로

2차 세계대전 패전의 결과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독일. 1989년 베를린 시내를 가르던 장벽의 붕괴는 공산권 국가 해체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은 인류사에서 최악의 사건으로 꼽힙니다(저는 인디언 학살과 유럽의 남미 점령이 더 잔혹한 학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국제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시온주의 단체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학살을 시온주의 국가 건설의 정당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참 씁쓸한 일입니다(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ㆍ링크).

학살 피해자들의 후예가 세웠다는 이스라엘은 1989년 이후 지구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장벽을 2002년부터 세우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다시 한 번 우리 시대의 상징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가릅니다. 꼭 콘크리트 장벽만은 아닙니다. 때론 철조망과 이스라엘군의 총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가릅니다(영화 '레몬트리'ㆍ링크).

퀘벡 출신의 만화가 기 들릴은 1년간의 예루살렘 생활을 바탕으로 그린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장벽에 가로막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다룹니다.


굿모닝 예루살렘|기 들릴 지음|서수민ㆍ맹슬기ㆍ이하규 옮김|길찾기

그가 이스라엘을 찾은 것은 딱히 어떤 사명감이나 목표를 가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임무로 이스라엘에서 일하게 된 아내를 따라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됩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그가 1년간 살게 된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지역. 성지가 있는 구시가지의 동쪽에 자리한 이곳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합병된 지역입니다. 국제법상으로는 팔레스타인에 속하는 지역으로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죠.

팔레스타인을 관찰한 많은 이가 주목하듯 그도 이스라엘 정부의 부당한 억압에 분노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냉정한 태도를 취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 삶이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관찰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이 사는 동예루살렘보다 훨씬 깨끗하고 풍요로운 정착촌을 둘러봅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슈퍼마켓. 국경없는 의사회의 원칙(정착촌 확장 반대)상 정착촌 슈퍼마켓에서 물견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구경만 하고 나오는 그가 목격한 것은 "슈퍼마켓에서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가는 무슬림 여성"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이슬람ㆍ유대교ㆍ기독교의 성지가 모여있는 구시가지. 성지순례객들이 끊이지 않죠. 이곳을 찾은 이 중에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 들릴에 의하면 "한 아랍인 가족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연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대여"줍니다. "체험이 끝나면 점원은 그것을 다시 가게까지 가지고 와야" 하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 갈등의 장벽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폭력적인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 '지역'의 상황입니다. 갈라지고 끊어진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삶도 온전치는 못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으로 훨씬 깨끗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인구 5만명의 소도시인 피스갓 제브는 그가 자주 찾은 정착촌입니다. 이곳 정착촌의 임대료는 다른 곳보다 싸기 때문에 유대인 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유대인 정착촌이 성장하면서 그 내부에서부터 이민족ㆍ타종파의 정착촌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정착촌의 상황은 더 아이러니합니다. (적대적일 것이라고 단정된)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역에 고립된 정착촌 사람들은 직업도 없이 오직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만을 유일한 일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ㆍ이스라엘 정부의 총탄과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지원 때문입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정착촌 투어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후원을 호소하는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정착촌은 가난한 유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되는 것이죠.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이스라엘의 양심적 세력과 함께한 부분입니다. 앞서 얘기한 정착촌 투어와 달리 정착촌의 부조리함과 부당함을 고발하고자 하는 정착촌 투어도 있습니다. 이 투어는 정착촌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사람들이 만든 NGO 'Breaking The Silence'에 의해 진행됩니다. 그가 처음으로 장벽을 통과하는 검문소를 찾은 것도 그곳에서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는 이스라엘 여성 인권단체 '마흐솜 와치'와 함께였습니다.

심지어 가장 근본주의적인 유대인 집단, 토라 연구를 일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초정통파 유대인 지역인 '메아 셰아림'은 시온주의와 자신들 사이에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플래카드에 이렇게 적어놓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자가 아니며, 시온주의자들도 유대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인종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우리는 시오니즘과 그들의 점령이 당장 중단될 것을 신께 기도드린다."

물론 그가 이스라엘 정부의 부조리함, 폭력에서 눈을 돌리진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잔인한 신무기 백린탄을 이용해 가자지구를 폭격한 2008년 12월 말, 그는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요. 그의 아내와 국경없는 의사회, 세계에서 몰려든 인권 단체들은 어떻게든 가자지구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의 방해 때문에 폭격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죠.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인 가자지구에 기 들릴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는 가자지구에 들어가보고자 시도하지만 불허 통보를 받습니다. "만화가는 안 됩니다"라고. 그 말을 들은 그는 "조 사코랑 나를 헷갈렸나?"라고 답하죠.

결국 가자지구엔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곳곳을 누비며 장벽을 스케치합니다. 그 장벽 자체가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영화 '레몬트리'에서처럼 콘크리트 장벽이 자신의 농장에 세워지면서 생업을 바꿔야 했던 이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1년간 예루살렘에 거주한다고 모두가 그와 같은 것을 보진 못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의 쉬지 않는 유머가 그와 같은 관찰을 가능케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넓은 시야는 우리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보통 놓치기 쉬운 초정통파 유대인,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베두인족, 사마리아인,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여러 종단도 놓치지 않습니다. 분노에 눈이 멀지 않고 극단적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의 이면까지 살피는 그의 사려깊음은 누군가에게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슬람과 유대교의 봉합할 수 없는 갈등 만을 강조한다면 우리에게 대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분할만이 대안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더 큰 갈등과 충돌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종교적이지 않은 세속국가의 건설 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대안을 얘기할 때, 그토록 '종교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그게 가능한 대안일까 하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제 자신도 의문이 들곤 했죠. 기 들릴은 비록 아주 미약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자신의 1년간의 예루살렘 생활을 담은 책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보여줍니다. 현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큰 갈등이 진행 중인 지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 가능성을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