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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매거진은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1917년 혁명의 여러 쟁점을 다양한 활동가ㆍ연구자들의 기고를 받아 연재하고 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혁명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아래 글은 자코뱅매거진에 실린 에릭 블랑의 '핀란드 혁명'[링크]에 대한 반박 글이다. 블랑의 글을 직접 옮기며 쌓인 여러 의문을 아래 글은 일부 해소해주고 있다. 참세상에 게재된 블랑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가진 의문을 이 글이 일부 해소해주길 바라며 여기에 옮긴다.


+ + +

핀란드의 교훈: 에릭 블랑에 대한 이견
던컨 하트ㆍ2017년 7월 11일(링크)

에릭 블랑의 글 '1917년 핀란드 혁명의 교훈'은 핀란드의 경험이 주로 카우츠키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정당화하는 혁명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오늘날 좌파에게 매우 해로운 정치적 논쟁거리들을 제기하고 있다. 블랑의 글을 처음 게재했던 자코뱅매거진은 안타깝게도 내 반론의 게재를 거부했다. 소수의 동지들이라도 이 글을 읽길 바라며 이곳(johnriddell.wordpress.comㆍ링크)에 글을 싣는다.


1917년에서 1918년의 핀란드혁명은 좌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핀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발전한 사회였고 러시아를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보다 노동계급의 사회혁명이 틀림없이 가장 진전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블랑의 최근 글이 혁명의 경험이 던져준 정치적 질문들의 해결을 위한 보다 깊이있는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앞서 밝혔듯, 핀란드혁명에 대해 블랑이 내린 정치적 결론에 이견이 있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블랑의 가장 큰 잘못은 혁명이 "카우츠키가 옹호한 혁명에 관한 전통적 관점, 즉 지난한 계급의식의 조직화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서 다수의 지위를 점하고 국가기구를 사멸시킬 권한을 획득해 사회주의자가 이끄는 혁명을 촉발시킨다는 생각을 승인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블랑은 그의 글을 핀란드사회민주당(SDP)이 대표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의 일부 '한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끝내지만 전반적 논조는 "볼셰비키 만이 제국에서 노동자권력을 이끌 수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것이다.

혁명은 SDP의 전략이 옳다고 입증해주지 못했다. 이어진 끔찍한 학살과 정치적 억압은 사회민주주의가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에 대한 혹독한 고발장이다. 핀란드의 비극은 오히려 볼셰비키의 개입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을 반증한다.

나는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18년 8월에 쓴 작은 책 '핀란드혁명: 자기 비판'을 깊이 참조해 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SDP의 지도적인 이론가였던 쿠시넨은 1911~1917년 당의장이었고 혁명 정부에선 교육인민위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는 다른 사민주의 지도자들 다수와 함께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으로 망명해있는 동안 핀란드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의 책 PDF 파일은 여기(링크)서 볼 수 있다.

●SDP 안의 '좌파'와 우파

블랑은 글을 쓰며 내내 사민당이 혁명가들과 온건파로 나뉘어있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실제로 당은 지도부의 다수를 점했던 '중앙파'와 의원단을 주도했던 공개적인 수정주의 우파로 분열돼 있었다. 쿠시넨은 중앙파가 "혁명을 믿지 않았다"며 "우리[중앙파]는 그것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언급하지도 않았다"고 묘사했다. 이들 정치적 경향의 특징은 이렇다.

1) 혁명적 계급전쟁보다는 지속적인 평화, 이와 함께
2)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지 않는 독립적 계급전쟁

이는 "가능한 평화적 수단을 통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이라는 비타협적 태도가 아니었다. 제임스 캐논[미국의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이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따르면 그들은 계급투쟁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수동적이고 운명적 태도를 채택했을 뿐이다. 쿠시넨은 이렇게 말했다.

사민당과 혁명의 일관된 관계는 관용적 역사가들이 과거의 혁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보였던 것과 꼭 같은 수동성이었다. 사민당이 가장 좋아한 표현은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였다.

사민당 중앙파와 우파 모두 의회를 통한 점진적이고 민주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묶여 있었다.

혁명적 좌파가 혁명 동안 구성돼있지 않았다거나, 지도부 없는 약한 조직이었다거나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11월 총파업과 유산된 혁명 기간 동안 적위대와 헬싱키노동자위원회의 지도부 사이에 혁명적 감수성이 팽배했었다는 건 분명하다. 이 두 기구는 모두 노동자들의 급진화에 대한 응답으로 새로 설립된 혁명기구였다. SDP 지도부가 파업을 철회하자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연합정부의 사회주의자 총리였던) 오스카리 토코이
[1873년 5월 생으로 SDP 지도자로 활동했다. 단명한 혁명정부에서 각료로 활동했다. 혁명의 패배 후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이후 미국에서 삶을 마감한다]를 소환해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에 맞서 더 강하게 파업해야 합니다. 정부기구를 통제해야 합니다. 산업, 토지와 그 산출물들을 공공의 소유로 전환해야 합니다. … 이제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열정과 권력이 필요합니다. …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철도노동자들은 쿨레보 마네르 SDP 대표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파업 철회에 대해 거세게 항변했다. 이와 같은 항의들은 [노동]계급 중 혁명에 앞장서던 부분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SDP가 공식적으로 파업을 종료한 뒤에도 이틀간 파업을 유지해 나갔다. 이 사태의 비극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도부를 SDP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혁명적 지도부로 인해 [파업의] 동력은 지속될 수 없었다.

SDP 외부에서 혁명적 분파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집단은 사실 아돌프 타이미와 라자 형제처럼 볼셰비키에 가입해 있던 소수의 핀란드인이었다. 이들 볼셰비키들은 헬싱키 적위대의 지도자로 선출돼
[조직을] 급진적 좌익으로 만들어 SDP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11월 총파업이 끝난 뒤부터 1월 반란 전까지 적위대는 혁명을 소리높여 호소했고 SDP 지도부가 소심하게만 있는다면 그들이 혁명을 이끌겠다고 위협했다.

●권력 획득을 거부한 SDP, 파멸한 혁명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반란에 앞서 레닌은 그의 볼셰비키 지도부 동지들에게 어떤 시기엔 정치적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잡는데 대해 의심을 하는지 의지를 북돋우는지에 따라 혁명의 성패가 나뉜다고 경고했다.

중앙위의 대화들이 지금 권력을 잡는 것을 삼가고 '기다리자'는 말로 채워지고 있는데, … 이는 혁명을 패배라는 파멸적 결과로 이끌 것이다.

사회민주당이 1917년 11월 총파업의 혁명적 잠재력을 밀어붙이지 못하면서 1918년 혁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18년 3월 공격에 나섰던 독일군의 압도적 군사력을 고려할 때 11월[의 봉기가] 승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고 블랑은 정확히 설명한다. 그렇지만 11월 상황에 대해 틀리지 않게 설명하려면 당시 노동계급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해야 한다. 쿠시넨은 1917년 11월 노동자 권력 수립을 거부한 것은 단지 내전을 미룬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부르주아지가 좀 더 준비될 때까지 그 시기를 미룬 것 뿐이었다. …

블랑이 언급했 듯이 볼셰비키 봉기를 지지하며 핀란드 노동자들에 공감하고 있던 러시아 병사들 다수는 1월에 여전히 핀란드에 남아있었다. 게오르기 불라첼[1]과 미하일 스페치니코프 같은 많은 러시아 병사들과 혁명적 장교들이 혁명의 편에서 싸웠고 이들 혁명적 병사들은 11월 핀란드 백군에 맞선 강력한 보호자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다는 것인데, 이와 달리 1918년 1월 그들은 만네르하임 남작[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남작은 1867년 아스카이넨의 독일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육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러시아혁명 발발 뒤 핀란드 내전이 일어나자 백위대의 군사부문 사령관으로 임명돼 내전을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이끌었다. 2차세계대전 말 핀란드 대통령으로서 소련ㆍ영국과의 평화협상을 주대했다. 1951년 삶을 마감한다]의 지도하에 핀란드 북부에 백위대 훈련소를 세워 적위대에 맞선 내전을 준비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러시아와 약탈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1918년 3월엔 핀란드에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조약은 3월 맺어졌다). 11월에 독일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에 매달려 있었고 핀란드 개입은 어려웠을 것이다.

1918년 3월 독일의 개입이 혁명에 치명타임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징후는 1917년 11월 혁명의 성공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능성은 SDP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꺾이게 된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당의 반란에 대한 태도

쿠시넨이 회상하듯 (그리고 당시 모든 SDP 지도부들이 공개적으로 말했듯이) SDP가 혁명에 적대적이었다면 1월 26일 그들이 봉기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SDP 지도부는 대개 정치적으로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덜 성장한 혁명적 노동자들의 압력하에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을 채택했다. SDP가 국가 기구에 참여하지 못하고 총파업 이후 부르주아지가 '안정'에 몰두하면서 SDP는 '혁명적'으로 됐다. 부르주아지의 계획은 적위대를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열망을 억누르는 것이었으며 이는 SDP가 설립한 기관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1918년 1월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진압하길 거부한 SDP가 주도하는 군대를 대신해 새로운 '보안군'을 창설하는 결정을 했다. 실제로 이는 이미 존재하던 '시민군'(노동자들은 이들을 '도살자 군단'이라고 불렀다)을 국가가 승인해준 것이다. 이 시민군은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병으로 구성한 조직이었다. 도살자 군단은 1월 26일 공식적인 군대로 승인됐고 이는 적위대와 노동 대중에 대한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순전히 '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토코이ㆍ위크 같은 SDP 내 우파조차도 반란에 동참하게끔 된다. 쿠시넨은 이렇게 설명한다.

따라서 혁명의 표준이 현실에 맞춰 제기됐고 이로써 혁명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SDP 정부가 제안한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2]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진전을 위한 최선의 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증진에 대해서만 말했다. 내전 때조차 SDP는 단지 '정상 상태'로의 복귀만 얘기했을 뿐이다.

혁명의 필요성을 자기 보호에서 찾는 것은 볼셰비키의 접근법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레닌이 1917년 9월 말부터 반란으로 나가야한다고 긴급히 주장한 것은 노동대중의 승리를 위해 소비에트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외적 사건에 흔들리기보다 노동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의 중요성을, 결정적 국면에서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는 지도력에 대한 행동주의적 접근이었다.

핀란드의 총파업 때조차도 볼셰비키는 SDP에 그들의 수동성을 벗어나 상황을 장악하라고 충고해야만 했다. 레닌은 "봉기, 지금 즉시 봉기해 조직 노동자들의 손에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SDP 지도부에 전보를 쳤다. 헬싱키에 주둔중이던 발틱함대의
[수병위원회] 의장이던 다이벤코 또한 반란을 충고했고, 볼셰비키는 핀란드 노동자신문에 자신들의 모범을 따라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기고했다.

총파업이 끝난 후에도 볼셰비키는 SDP에 계속 호소했다. 민족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은 11월 27일 SDP 전국회의 연설에서 그들에게 혁명에 대한 의심은 잊으라고 충고하며 "담대하라, 담대하고 또 담대하라! 바로 당통의 전술"을 채택하라고 애원했다. SDP 지도부가 봉기 계획에 따라 필요했던,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차로 보내주기로 했던 1만5000정의 소총과 200만 개의 탄창 수령을 봉기 당일에조차 거부했던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핀란드 혁명이 남긴 교훈

1917~18년 핀란드에서의 갈등이 러시아보다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블랑의 주장은 옳다. 핀란드의 정치는 자신이 그 일부였던 러시아제국보다 당대의 서구 사회와 훨씬 더 공통점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핀란드는 매우 소중한 사례다. 그렇지만 블랑이 SDP를 카우츠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실험해본 사례로 논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동료들과 달리 독특한 상황에 처해있던 SDP는 혁명적 행동으로 향해 나갔다. 차르 치하에서 그 어떤 권력도 지니지 않았기에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책임도 질 일이 없었던 핀란드 의회에서 SDP는 다수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차르의 강력한 억압기구들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핀란드에서 노동자 전투성의 고양과 러시아에서 노동자혁명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는 SDP를 자신들의 이익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도전장을 던졌을 때 SDP는 혁명에 나설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100여 년 전 핀란드 노동자들의 참혹한 패배로부터 쿠시넨이 얻은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917년 11월 벌어진 것과 같은 혁명적 위기를 이용할 뿐 아니라 내전을 지도해 승리를 위한 열정적 수단을 쟁취할 혁명적 지도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교훈이다. 핀란드 노동자들에겐 총파업을 반란으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열망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SDP에 도전할 만한 혁명적 지도의 부족 때문에 그들의 영웅적인 시도는 좌절됐다. 쿠시넨은 패배를 겪은 뒤 혁명적 전망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계급사회에서 계급들 사이엔 두 종류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하나는 피억압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군대, 법, 재판 등의) 폭력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평화적 수단으로 제한하는 억압적 상태다. 다른 하나는 억압 계급과 피억압 계급 중 미래를 결정할 계급을 결정할 폭력적 대결이 벌어지는 공공연한 계급투쟁 상태, 즉 혁명이다.

핀란드 노동계급 수 만 명이 목숨을 잃고 혁명가들이 수십 년간 감옥에 갇힌 걸 대가로 해서 이 질문에 대한 정치적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처럼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자리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줬기에, 역설적이게도 쿠시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관행을 버리고 볼셰비키에 동의하게 됐다.


주석
[1] 블라첼 중령은 핀란드에 주둔하던 다른 수 천 명의 러시아 병사드러럼 이후 핀란드 백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의 두 아들은 1918년 4월 비푸리주에서 같은 방식으로 살해됐다. 그는 [핀란드 서남부의 도시] 탐페르를 방어하던 북부전선 사령관 후고 살멜라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다.
[2]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란 이름은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이 붙인 게 아니다. 레닌은 3월 1일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우호조약 체결 때 이 이름을 고집했다. 볼셰비키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두 나라에서 완전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누릴 수 있길 바랐지만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주저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핀란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댓가 없는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

글쓴이는
던컨 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Socialist Alternative' 회원으로 있는 사회주의 활동가다.

올해로 러시아혁명 100년이다.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과 살육 사이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 만으로 혁명이 성공할 순 없었다. 다가올 사건을 대비하고, 노동계급 대중을 단결시킬 혁명적 조직 또한 준비돼있어야 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인터내셔널의 붕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런점에서 혁명을 향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과 세계의 인민에게 재앙이었던 이 사건은 노동계급 혁명 조직에게도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인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다. 제2인터내셔널이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서 연이어 전쟁 반대를 위한 전 세계 노동계급과 조직의 단결을 천명했던 사실은 무색해졌다. 1907년 2월 슈투트가르트에 모인 25개국 884명의 사회주의 조직 대표자들은 아래와 같이 결의했었다.

"전쟁이 임박하면 각국 노동계급과 그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인터내셔널 사무국의 굳건한 지원을 받아 가장 효과적인 수단-물론 계급투쟁과 일반적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정치 위기를 이용해 대중을 분기시켜서 자본가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레닌 평전’, 토니 클리프, 2권, 16쪽

카우츠키는 무기력하게 ‘기권’을 주장했을 뿐이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반발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국수주의적 배신을 멈출 수 없었다. 독일 사회주의 조직 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는 청년들에게 ‘조국 러시아’를 위해 참전할 것을 권했다. 심지어 자신이 젊었다면 직접 전선에 나갈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베라 자술리치와 알렉산더 포트레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주의 선구자들 다수가 전쟁 찬성에 돌아섰다. ’제국주의 독일’에 맞선 ‘조국 방어’전쟁을 핑계로 둘러댔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성장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던 제2인터내셔널과 유럽 각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분열하게 된다.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려 1915년 9월 중립국 스위스의 치머발트에 모인다. 8년 전 슈투트가르대회 참석자의 20분의 1도 안되는 38명의 대표가 11개 나라에서 와 참석했다. 회의 결과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치머발트 선언(Zimmerwald Manifesto∙링크)’이 채택된다. 선언 자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구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하며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8명의 동의만 얻는다. 1916년에는 키엔탈에서 다시 회의가 열려 두 번째 선언(Kienthal Manifest∙링크)이 채택된다. 이 두 번째 선언도 더 급진적으로 나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회의에서 레닌의 주장은 더 많은 공감을 얻는다. 두 선언은 변절한 제2인터내셔널의 노회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단절, 자국 정부와의 대결을 명확히 선언하지 않지만 이 회의는 이후 제3인터내셔널 건설의 초석이 된다. 아래의 글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가 강조해 인용하고 있는 치머발트 선언이 이 두 선언이다.

그렇지만 이 볼셰비키 학생위원회의 호소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주장은 레닌의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치머발트 선언이 제2인터내셔널과의 관계 단절을 명확히 선언하지 못한데 반해 이 학생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과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변절한 ‘사회주의의 옛 교사들’과 분명히 선을 그으며 차르에 맞선 노동계급과 농민의 대열에 학생이 함께할 것을 호소한다. 이들은 이를 위해 불법적인 조직활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1914년 9월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레닌이 발표한 전쟁에 관한 몇 가지 테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현재 사회민주당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아래와 같은 완전한 선전책(宣傳策)이 군대와 군대의 행동 영역에 전파돼야 한다. 곧,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동지들 및 다른 나라의 고용된 노예들을 위해서는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정부와 당에 투쟁의 총구를 돌려야 하는데, 이 목표를 위해서는 선전 방침이 각국의 국어로 번역돼야 하며 각국의 군대와 각 집단에 불법적인 세포책을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노동 대중의 혁명적 의식에 호소하는 것이 긴요하며 사회주의를 배신한 현 인터내셔널 지도자들과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독일∙폴란∙러시아, 그리고 기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여론을 조성해 유럽의 각 개체 국가들을 연방 공화국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러시아 혁명사’, 김학준, 751쪽.

아래의 글은 볼셰비키 학생위원회가 1916년 12월 발표한 지하 성명서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가 1923년 처음 출간한 것을 바탕으로 바바라 알렌이 영어로 옮겼다. 이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1편이다.


1915년 스위스 치머발트에 모인 11개 나라 사회주의자 대표들.

혁명적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1916년 12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오직 용감한 자에게만 영광의 승리는 주어진다,
투쟁에서의 패배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젊은이여, 우리의 노래를 당신에게 들려주마 -
영원한 영광을 당신에게…

동지여! 반동의 기간 활동은 더 어려워지고 지루해졌다. 그들의 대응에 따라 정확한 행동이 요구됐지만 어떤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 사이에 드러난 차이가 충분히 명확하게 밝혀질 수는 없었다. 조악한 헌법이 지배한 고약했던 10여년간 천박한 부르주아적 분위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더 강해졌다.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던 이 분위기가 이제 바로 폭로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적인 학생 단체들의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파산과 무모한 기회주의를 입증한다.

한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혁명적 민주주주의 깃발 아래 단결하는 듯했다. 최근 사회의 계급갈등이 격화하자 학생들은 두개의 대립하는 집단으로 갈라졌다. 먼저 이데올로기적으로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관된 부르주아적 기회주의 집단은 최근 더 강해졌다. 다른 집단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전자의 집단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신념을 공유하면서도 몇몇 이유로 여전히 사회주의적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거리를 두고 있는 동지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과거 대부분의 학생에게 이러한 작업은 그저 공감을 표하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혁명적 세계관은 행동할 의무를 이들에게 요구한다. 학생들이 그들의 공감을 포기하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한편인 부르주아적 학생들에게 투항하느냐. 그들이 글과 고민에서 벗어나 확신을 갖고 혁명적 행동에 동참해 현대사회의 노예제를 쓸어버릴 위대한 투쟁속 프롤레타리아트와 손잡느냐. 최근의 상황은 학생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 학생들은 무척이나 ‘동정적’이다. 그들은 ‘인민’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대한 가치라는 것을 내세워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을 실행할 수 있을지 따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최상의 학생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의식과 의지를 저 '가난하고 노예상태인 이들'에게 일치시키며 차르의 포악한 사냥개들과 맞서 어렵고 영웅적인 투쟁의 길로 전진했다.

신성에 의해 패배한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썩어빠진 감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우리에게 생생한 증언을 해준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그런데 학생들은?! 그들은 스스로를 이데올리적 지위로 한정시킴으로써 자신의 게으름과 나약한 의지를 정당화 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뚜렷한 ‘지위’를 갖지 못했음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신념의 이데올로기적-사회적 기반을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천박한 기회주의적 더러운 늪 위에 서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사기를 저하시키는 유해한 분위기에 그들은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자기애에 가득차 한껏 고무된 ‘지위’와 그들의 (퇴행적) 분위기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 늘어놓곤 한다. 학생들은 그런 분위기에 가라앉아 몇 년을 보내버렸다.

지배계급과 정부의 약탈정책 결과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모든 이들이 시급히 답해야 할 예민한 질문이 의제로 제기됐다. 이 뜨거운 질문과 벌어진 놀라운 사건에 러시아의 여러 사회 계급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제기된 질문들로 인해 학생들은 더 이상 동일한 태도를 지닐 수 없게 됐다. ‘민족의 단결’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그토록 많은 거짓말에도 인민(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 중 소수는 인민과 함께해왔다. 소위 ‘사회’와 함께한 것이 아니다. 1905년 첫 혁명의 바리케이트에서 인민과 한편에 선 학생들은 반동으로 고난스러웠던 몇해 동안 인민과 함께 고통받았고, 이들 인민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 취급하는 부르주아지의 핏빛 복수극에 이들이 동원되는 걸 막기 위해 애써왔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선 학생들은 단결한 인터내셔널의 붉은 깃발을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지금은 변절한] 몇몇 사회주의 옛 교사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했다. 물론 어떤 학생들은 국수주의에 속아 적극적으로 전쟁을 받아들였고 ‘조국’-국가와 부자가 이것의 심장과 영혼이다-을 가상의 압제자로부터 구하기 위해 학살극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세계적 학살이 시작된 이래 이들은 단지 ‘반대 만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는 데 실패해 왔다. 이중에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첨예화된 표현이라고, 현대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일찌감치 얘기해왔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전쟁은 부르주아지와 잔혹한 니콜라이2세의 폭정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 압제자에 맞선 노예들의 전쟁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대 만이 아닌’ 결단을 내린 이들은 자신의 동료 다수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등을 돌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방탕에 빠졌다. 억압받는 인민을 방어하기 위해 양손을 치켜들었던 이들은 전쟁이 28개월 지난 지금에 와서야 차르에 매수된 공포를 기반으로 한 형제애에 자신의 두 손이 엮여있음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아왔다고, 군주제에 대한 친밀감이 전쟁이 끝없이 지속되는 오래된 주요 이유였다고 느끼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내부의] 국제주의자와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던 평화적 시기에조차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절치 못했다. 그들 다수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혁명적 행동이 시급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혁명적 행동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결집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부족했고 기회주의에 의해 이 행동들은 소모적으로 이뤄졌다. 실천적 자세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종종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얻기도 했다. 평화시에도 인민에게서 군국주의의 견장을 떼놓을 수 없으면 거대한 살육이 시작했을 때 그러기는 더 힘들다. 세계의 부르주아지가 인터내셔널에 맞서 단결했을 때, 하지만 아직 단일한 대오를 이루지 못했을 때 단호한 걸음을 내디딜 필요가 있다. 제2인터내셔널이 실천적 자세에서 파산을 맞은 것은 단호한 행동이 필요할 때 그 조직과 의지가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세계대전의] 피와 눈물의 바다 위로, 상이군인의 신음소리 사이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과 행동을 위한 조직으로 떠오를 것이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를 새로 만들어질 인터내셔널의 주력으로 모아내고자 한 첫번째 치머발트 회의의 ‘선언’을 우리는 환영한다.

전쟁이 시작되던 때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나라별 단체 사이의 조직적 연결은 끊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에 반대해 단결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까지 독차지하려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조직적 파편화의 단계를 벗어나 혁명적 행동의 기반 위에 단결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동지들이여, 이제 사회주의적 조직화 과정에서 우리가 참여한 정도가 우리 각자에게 내려질 판결의 증거가 될 것이다.

동지들이여, 활동을 시작하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의 불법 조직에 뛰어들자! 전쟁과 그 주모자들에 맞선 투쟁에 학생들을 조직하자! 이 조직들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연계시키자! 사회주와 혁명적 선동의 요새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합법적인 민주주의적 조직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활동과 연설에서 주도권을 잡자! 모든 러시아 폭군의 총검으로 인민이 해방될 수 있다는 잘못된 공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소하자! 활동하라! 조직하라! 동지들이여!

"노동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과부와 고아, 상처입고 불구가된 이들, 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우리는 호소한다. 모든 국경과 파괴된 도시, 시산혈해의 건너편에 있는 이들과 손을 잡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자!"는 호소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치머발트 회의의 첫번째 선언이다. 이런 말도 들어봤는가? "세계대전 2년. 유린당한 2년. 피에 젖은 희생자와 미친 반동의 2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화약통에 불을 붙인 저들 뒤엔 누가 숨어 있는가? 전쟁을 원한 건 누구이고 오래전부터 이를 준비해온 건 또 누구인가? 바로 지배계급이다!"

동지여 보았는가. "전쟁의 막다른 길에서 무덤에 누운 수백 만 명을, 슬픔에 빠진 수백 만 명의 가족들을, 수백 만 명의 과부와 고아를, 폐허 위 잔해의 무더기를, 파괴된 대체할 수 없는 문화재"를. "여기엔 승자도 승리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흘려 허약해진 이들, 파괴된 이들, 피폐해진 이들 모두가 패배자다. 이것들이 이 잔혹한 전쟁의 결과물들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의 환상은 허구가 됐을 뿐이다."

시민이여 들어보았는가? "평화적 시기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에게서 삶의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전쟁 동안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삶 그 자체도 말이다. 살인은 이제 그만! 고통은 이제 그만! 약탈도 이제 그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능한 빨리 이 학살을 중단시키자!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인민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 일어서자! 더 대담하게 행동하자! 당신들이 다수임을 기억하라. 당신들은 스스로 원한다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모든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정부에 보여주자. 그 후에야 인민은 평화의 시기에 도달할 것이다. 전쟁을 끝장내자!"

‘약탈당하고 파괴된 인민에게’는 치머발트 회의의 두 번째 선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초대장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건의 문턱에 서있다. 이 사건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머뭇거리지 말자 동지여! 사건이 늦게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학살을 중단시키고 가증스러운 노예제를 폐지시킬, 무엇보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만들어나갈 전장에 인터내셔널의 전위는 이미 들어섰다. 거대하고 새로운 모든 세력이 혁명의 승리와 인민이 반란을 일으킨 축제의 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뒤에서 따를 것이다. 그렇게 나가자 동지여! 자랑스러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타협없는 투쟁의 붉은 현수막을 든 대열의 노동자들과 함께 발걸음을 함께하자!

차르주의 군주제는 답하라! 전쟁을 중단하라! 혁명이여 영원하라! 전진하자! 임시혁명정부를 위하여! 러시아민주공화국 만세! 사회주의 만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제3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자료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1916년 12월 러시아사회민주당 고득교육기관 담당 조직위원회 발표. A.G. Shliapnikov, ‘Kanun Semnadtsatogo goda’, Moscow/Petrograd, Gosizdat, 1923, vol.2, pp.63~67.

영어 번역 바바라 C. 알렌 미국 필라델피아 라살레 대학 역사학 부교수. 저서로는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 1885~1937:고참 볼셰비키의 삶(Alexander Shlyapnikov, 1885~1937: Life of an Old Bolshevik)’가 있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1885~1937) 러시아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숙련 금속노동자이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랐다. 1908~16년 서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볼셰비키의 출판물을 러시아로 밀수하는 일을 조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전러시아 금속노동조합 의장이 된 그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 노동인민위원에 임명됐다. 1919~21년 노동자반대파의 지도자로서 그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을 옹호했다. 노동자반대파가 패배한 후엔 혁명에 관한 역사적 회고록을 작성했고 이 글들은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인 1935년 날조된 혐의로 체포돼 1937년 9월 사형당했다.

2016.11.28 00:25

카스트로, 1926.8.13-2016.11.25 쟁점2016.11.28 00:25


1955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피델 카스트로(오른쪽)는 멕시코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혁명 동지 체 게바라를 만나고 1956년 돌아와 3년여의 분투 끝에 1959년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에 성공한다.

'역사의 심판'.

언제부터인가 흔한 말이 돼버렸다. 내 기억 속 처음은 1993년 김영삼이었다. 그는 그해 5월 13일 5ㆍ18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이런 뜻의 말을 했다. 스스로 5 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후계자임을 내세운 담화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마무리된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상 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 담화

그러나 때때로 '역사의 심판'은 미래의 과제를 수행하는 현재의 혁명가들에겐 단단한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11월 25일(현지시간) 90년의 삶을 마친 피델 카스트로가 그 중 한 명이다.

1953년 몬카다 병영을 습격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카스트로는 미숙함 때문에 오히려 사로잡혀 재판을 받는다. 어떤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채 진행된 재판에서 그가 유일하게 보장받은 단 하나의 권리는 최후진술이었다. 물론 그조차 그가 그토록 믿었던 민중의 참관은 군인들에 의해 차단된 채 가능했다. 그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킨 바티스타야 말로 법정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며 자신을 법이 아닌 역사의 이름으로 변호한다.

"이 법정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70명이 살해된 사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학살이었던 사건 말입니다. 학살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들이 석방된 뒤 무장을 하고 다니고 있어 우리 시민들은 계속 위협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만약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함, 법원의 방해로 그들에게 엄중한 법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애석하게도 여러분의 명예는 실추될 것이며 여러분이 내린 판결은 유례없는 오명을 쓰게 될 것입니다. …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최후진술,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398쪽.

독재정권의 법원은 그에게 15년형을 결정한다. 2년 만에 여론의 지지에 힘입어 특별사면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혁명 동지 체 게바라를 만난다. 1956년 다시 쿠바로 돌아온 그는 결국 3년여 만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한다.

카스트로 스스로 인정한 바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언급했을지라도 미국의 무력 봉쇄 앞에 살아남기 위한 방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걸 폄훼할 수 없는 건 그가 최후진술에서 "쿠바의 정치는 아메리카 대륙의 민주적 민중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쿠바는 독재정치의 치욕스러운 사슬의 고리가 아니라 자유의 보류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를 지키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옌데와 칠레 인민에게, 만델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민에게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정치가 갖는 한계를 잊지 말아야 겠지만 인민에 대한 그의 태도에선 배워야 할 교훈도 분명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투쟁에 앞서 실직했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등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60만 쿠바 민중을 생각합니다. … 농민들은 비참한 오두막에서 살며 1년 중 4개월 동안만 일할 수 있고 나머지 기간은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 산업노동자와 날품팔이들은 노후연금을 횡령당하고 재산을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들의 거처는 지옥 같은 기숙사이고, 봉급은 사장의 손에서 고리대금업자의 손으로 넘어가고, 미래는 임금삭감과 파면이며, 생활은 끊임없는 노동뿐이고 유일한 휴식처는 바로 무덤입니다. … 교사와 교수들은 후세대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으며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지만 매우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세 상인들은 경제위기 때문에 파산했고 … 의사ㆍ기술자ㆍ변호사ㆍ수의사ㆍ교육자ㆍ기자ㆍ예술가와 같은 젊은이들은 곧 자신들의 탄식과 도움을 구하는 소리를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사방이 막힌 막다른 골목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민중입니다. 온갖 불행을 겪은 나머지 분노에 가득 차 투쟁에 뛰어들 수 있는 민중에게 우리는 "당신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겠다"가 아니라 "당신들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와 행복을 당신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해 투쟁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953년 피델 카스트로 최후진술,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386~387쪽.

※카스트로의 최후진술은 일부 수정했습니다.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1월 16일 집회와 시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독재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거리 시위가 격화됐다. [사진 Ilya Varlamov]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과의 통상 강화 협상을 중단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의 복귀를 천명했다. 대외정책 전환은 이후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거리 시위를 촉발시켰다. 가라앉을 듯 보이던 시위는 새해에 다시 폭발하고 있다. 1월 16일 시위를 억압하는 강력한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하면서부터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화염병이 날라다니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시위는 지난해 터키ㆍ브라질ㆍ이집트와 달리 국제주의적 좌파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지 않다. 시위 초기 외신을 탄 레닌의 동상을 쓰러뜨리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그 사진의 시위를 주도한 것은 스보보다
(Svobodaㆍ자유)라는 이름의 극우파 정당의 당원들이었다. 이후 거리에서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극우파다.

처음부터 극우파가 시위를 주도한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과의 협상 중단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가 지난해 11월 30일 경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한 후 눈앞의 경찰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12월 초 며칠 간 시위가 계속되면서 유럽연합과의 통합은 시위의 중요 의제에서 벗어났다. 이 저항이 여전히 '유로마이단'이라고 불림에도 말이다. 키예프-모힐라 대학의 미하일로 비니치키야
(Mychailo Wynnyckyj) 교수는 12월 1일 시위에 직접 참여한 후 "키예프의 상황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민들은 더 이상 유럽연합과의 통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것을 요구할 때조차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서 드러난 야누코비치의 권위주의적 통치,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에 쌓여온 불만이 폭발했다(최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이후 우크라이나는 모건스탠리에 의해 서든스톱 위험이 가장 높은 네 개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동부 산업지대 기반의 지배집단은 지금의 위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그 배경엔 세계적 경제위기와 함께 러시아와 서방의 점증하는 제국주의적 갈등이 있다. 2010년 빅토르 유센코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 심지어 중국까지 끼어든 갈등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수출의 21.2%, 수입의 28.4%가 러시아와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고 석유와 가스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지하는 나라에서 친서방 정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을 견제해 왔다. 유센코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인 2005년 말부터 2006년 사이 원유가격 갈등으로 러시아는 공급을 중단했고 우크라이나는 결국 두 배 인상된 가격으로 수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가 친유럽연합 행보를 이어가자 러시아는 8월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의 수입과 가스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지난해 시위가 시작된 뒤인 12월 17일 러시아를 방문한 야누코비치에게 푸틴은 150억 달러 지원과 가스가격의 33% 인하라는 '통큰'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야누코비치가 12월 초 중국을 방문하는 등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드네프르 강 동쪽의 산업지대에 기반한 야누코비치로는 대외 관계는 물론 국내적 지지기반 때문에도 러시아와의 거리 두기가 쉽지 않다.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게 야누코비치가 인기가 없는 이유다. 게다가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상황은 서부 농업지대의 젊은이들이 극우파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손쉽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극우파 성장의 첫 이유다.

극우파 성장의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동부의 러시아인들, 특히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동부에서도 자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소련 시절 옛 지배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 소련이 실제 정체와 상관없이 마르크스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사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가 성장할 공간은 여전히 비좁다.

그렇다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야당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때는 유센코라는 명확한 대안이 있었다. 그러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이 유센코가 통치한 우크라이나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또는 과거의 우크라이나보다 더 나은 사회인지는 분명치 않다. 집권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급격히 하락한 경제성장률과 지지부진한 개혁 때문에 최악의 인기를 이어갔다. 유센코는 2010년 대선 땐 3위권의 군소호보로 전락했다. 2010년 야누코비치와 겨뤘던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는 직권남용 혐의로 수감돼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파가 부재한 상황에서 제도권 정당의 허약함은 극우파의 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가능한 정치적 대안의 부재는 극우파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여기에 권위주의적 통치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거리 시위를 이끌면서 이 비민주주의적 집단이 가장 '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대중의 정서적 공감을 얻고 있다. 결국 극우파의 성장은 단호한 좌파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현재 극우파가 주도한다고 해서 좌파가 기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게다가 1월 16일 독재법의 통과 이후 적은 규모지만 좌파 또한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 역사적 경험, 정치 전통이 여러모로 좌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에서 우리와 비슷한 여러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국외자로서 우리가 우크라이나 좌파의 분투로부터 적지 않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아래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의 인터뷰다. 마흐노 반란의 역사가 있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와 손잡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와의 이 인터뷰는 사실은 부족할지언정 진실의 측면에서 많은 것을 들려준다.

※ 의역을 했기에 원문과 상당히 다릅니다. 오역도 많이 있으니 퍼가거나 인용하시려거든 꼭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괄호 []는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1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키예프 거리의 바리케이트. 시위대가 힘을 합쳐 거대한 새총으로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사진 Ilya Varlamov]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와의 인터뷰
유로마이단 "우리는 당신 투쟁을 지지하지만 파시스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레볼루션 뉴스, 2014년 1월 30일

키예프의 자율 노동조합(Autonomous Workers' Union) 조합원과의 이 인터뷰는 2014년 1월 28일 이뤄졌다. 이 인터뷰는 유로마이단을 둘러싼 사건들 몇 가지를 해명해준다. 저항 이면의 원인들, 대통령에 초점이 맞춰진 분노, '오렌지 혁명'과의 차이, 우익의 역할, 사회적 투쟁의 약점과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Q: 키예프의 사진을 보면 바리케이트에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다. 그들이 함께 하게 된 이유를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바리케이트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그 지지자들은 무엇을 토론하고 있나? 단지 경찰에 맞선 싸움이 실제 쟁점인가? 아니면 바리케이트와 그 밖의 곳에서 그들의 집회 또는 어떤 다른 형태의 토론 '조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A: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주요 동기는 극단적으로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에 있다. 물론 실제 원인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부패, 공공 서비스의 쇠퇴, 가난, 실업에 있다. 이러한 불만의 목록이 사람들을 오늘날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이건 좌파의 견해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쟁점들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엌 구석에서 투덜거리기를 그만두고 큰 소리로 저항하게 된 것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감정 때문이다. 대통령 사임 요구는 가장 근본적인 요구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찰력에 대한 순수한 분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위대는 단지 경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만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유리 루첸코가 내무장관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베르쿠트
[우크라이나의 특수 경찰]와 다른 특수 경찰력이 늘 그래왔듯이 행동했을 때 루첸코 그 자신은 최루 가스를 사용해 시위 군중을 해산할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그래서 지금 역시 그와 같은 (이곳의 모든 사회 계급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한) 경찰에 맞선 시위는 비교적 무해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 생각에 대통령과 그의 정부, 경찰이 주요 토론 주제다. 시위대의 주요 목표는, 그들이 보기에 지역당
[야누코비치가 이끌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당]을 몰아내는 것, 그것 뿐이다. 일부에선 헌법의 권력 균형을 대통령에서 의회로 바꿀 것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주요 주제는 사실 최루 가스, 음식, 방패, 화염병, 거리 전투의 전술과 끝없는 루머와 목전한 국가비상사태 선포 위협, 스나이퍼, 폭동진압경찰(그들이 러시아인인지 아닌지, 그들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개입할 것인 지 등)과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집회에 관해서 말하자면, 난 아무 것도 모른다. 내 생각에 상황은 매우 역동적이고 불안정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바리케이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민주주의로 발달하는 기미는 확인하지 못했다.

Q: 정부 청사에 대한 많은 공격과 점거가 있는 것 같지만 도시에서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키예프에서 사람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바리케이트로 가는 것인가? 시위대가 하는 다른 형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듣기론 점거된 대학교도 있던데? 이를테면 최근 임금 미지급에 맞서 작업장에서 어떤 다른 것이 진행되고 있는가?

A: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서 기업 활동이 아무런 방해 없이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되는 동안 키예프 중심가만 시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국적인 정치 파업 선언 시도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실패했다. 반대파는 이를 위한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했고, 어떤 정치조직도 작업장에 뿌리내린 전국적 조직을 갖지 못했으며, 단순히 인민 자신이 파업과 같은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오래된 관료주의적 우크라이나 노동조합연맹(the Federation of Trade Unions of Ukraine)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학생조합인 '직접행동(Direct Action)'은 학생 파업을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대학, 키예프-모힐라 대학에서만 부분적으로 가능했다. 네, 그렇게 사람들 대부분은 업무와 학업을 계속하며 그들의 자유시간 만을 바리케이트에서 보내고 있다.

아우토마이단이라고 불리는 자가용 소유자들의 모임은 그들의 차로 교통, 특히 중요한 정부청사 부근이나 권력자들의 주거지 인근의 교통을 차단하는 행동을 주도하고 있다. 근로자들이 벌이는 저항 형식 중 하나는 지역당 소속 자본가들이 만든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이다. 최소한 몇몇 보도에 의하면 이러한 운동은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한 대학에서 점거가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당신이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직접행동'에 속한 우리의 동지는 모든 캠퍼스를 점거하고 그곳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려 시도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여전히 실질적인 점거는 아니다.

임금 등과 관련된 작업장에서의 저항은 지금까지는 정치적 저항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도시 교통을 통제하는 공기업인 키예프패스트란스
(Kyivpastrans)의 노동자들이 12월 시위를 벌였고 몇몇 좌파 조직이 그들을 도왔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준법투쟁(이탈리아식 파업 Italian strikeㆍ준법투쟁 내지 태업과 같은 형식의 노동쟁의를 이르는 속어)조차 시도하지 않았고 마이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실제로 12월 말 지방정부는 최선을 다해 밀린 임금을 지급해 그들의 시위를 가라앉혔다.

Q: 우크라이나에서 최근 있었던 가장 거대한 시위는 '오렌지 혁명'이다.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은? 누군가는 그 '역사'를 고려하겠죠? 시위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그리고 유럽연합 가입을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A: 무엇보다도 '오렌지 혁명'은 매우 개인적인 것에 맞춰진 저항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빅토르 유센코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겠다는 구체적 목표에 집중했다. 유센코의 정치체제는 대중을 꽤 치밀하게 통제했고 모든 것을 매우 부드럽게 조직했다. 현재 야당 지도자 세 명은 시위대 다수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마이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럴 권한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난 목요일[1월 23일]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았고 마이단은 그들이 야누코비치와 협상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화가 났지만 대중을 따라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대표자들'보다 더 급진적이다. 11월의 모든 시위는 그들에게 뜻밖의 일이었고 그 이후 그들은 사태를 통제하고나 이끄는 게 불가능했다. 이러한 진공상태는 곧 극우파에 의해 채워졌다.

또 다른 차이점은 2004년에는 토론되는 쟁점의 범위가 더 넓었다는 것이다. '혁명' 전체는 대통령 선거에 바쳐졌지만 여전히 좌파적 의제를 합법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고, 사회적ㆍ경제적 쟁점을 토론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저항은 현재의 시위보다 더 비주류적이었다. 현재는 오직 부르주아 정치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자 하면 당신은 곧 '선동가'로 딱지 부쳐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2004년의 사건과 현재 시위의 유사점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동이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가 지난 10년 사이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시위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번째로 빅토르 유센코는 '오렌지 혁명'의 참가자 모두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다.

당연히 시위대는 법치가 이뤄지는 진정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부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발상에서 그들을 구별해주는 유일한 것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연합 가입이 민주주의 또는 번영과 그 밖에 좋은 모든 것과 같은 뜻이라고 확신한다. 유럽연합은 그들의 모든 희망이 집약된 신화다. 세계에 대한 이 신화적 관점에서 러시아가 모르도르[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이 왕국을 세운 암흑의 땅을 이르는 명칭] 취급을 받는 동안 말이다.

Q: 우파 정당과 파시스트 그룹도 시위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가? 그들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나? 다른 시위대는 그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나?

A: 극우파 정당 스보보다는 시위를 이끌고자 노력 중인 세 개의 큰 정치집단 중 가장 조직적이다. 그들은 다양한 지역에 실질적 활동에 기반한 실제로 활동하는 세포조직을 지닌 유일한 정당이다. 그래서 세 곳 중 가장 조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조직으로서 그들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스보보다를 제외하면 네오나치 전투 조직의 광범위한 연합이 있다. 그들은 '라이트 섹터(Right Sector)'라고 불린다. 그들은 시위 초기에 형성돼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큰 명성을 얻는 성공을 거뒀다. 그들은 공개적인 전투성과 공격성으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고 대중은 이 기민하고 젊은 애국자들의 어떤 잘못도 보지 않고 있다. 최근 네오나치 훌리건들이 경찰, 친정부 폭력배와 맞서 싸운 주요 돌격대로 드러나면서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1월 19일 시위에 비정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심지어 좌파인 여러 부류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까지 파시스트의 헤게모니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1월 16일 통과된 '독재법
[최고 5년형과 고액의 벌금형, 노동교화형을 시위 참가자에게 내릴 수 있게 한 11개의 법안. 이 법은 의회에서 찬성 450표, 반대 235표로 통과됐다]' 폐지로 시위 의제가 바뀌면서 그렇게 됐다. 그로 인해 극우파가 약간 후퇴했지만 결국 이 시위에서 누가 승리하든 극우파가 큰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반대파가 승리할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경찰력과 특수기구 등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야누코비치가 이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절반이 극우파, 추측컨대 독재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애국주의적 급진파로서 극우파의 확고한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좌파 활동가 또한 저 법들에 의해 극심한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1월 19일 이후 좌파 대부분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이 비상병동에서의 간호와 같은 사회기반 활동들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찰과 폭력배들이 부상자를 납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기에 머물러야만 했다. 좌파가 활동하는 다른 영역은 위에서 언급했던 정치 파업 시도다.

Q: 외부에서 보기에 시위는 지난해 이스탄불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물론 확실히 강도는 다르지만 …). 키예프 혹은 우크라이나 다른 곳의 시위대에게서 지난 몇 년 간 세계적 봉기와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가?

A: 확실히 몇몇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주관적 관점의 우크라이나 시위대는 저 다른 시위대를 눈에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사건을 저항의 국제적 물결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역사에 위치지우려 노력하며 순수한 민족적인 투쟁으로 바라본다.

Q: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것에 덧붙여 질문하자면, 당신은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그것을 뒤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발표한 몇몇 보고서를 읽었다. 당신이 시위에서 바라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이 떠올리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인가? 당신은 우크라이나 외부에 어떤 종류의 지지를 바라는가?

A: 내가 말했던 것처럼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야누코비치의 승리다. 이는 1970년대 남아메리카의 독재를 닮은 냉혹한 권위주의적 체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야누코비치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절반의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는 그와 같은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한 시나리오는 1980~90년대 북아일랜드 IRA와 다르지 않은 게릴라 운동 하에서의 군사적 대립의 증가다.

다른 결과는 야당의 최종적 승리가 될 것이다. 이는 허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지만 기본적 자유는 유지되는, 우크라이나에서 2005~2009년 사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파시스트가 권력의 전당과 거리 모두에서 더 강해질 것이다.

여기 세 번째, 아마도 최악의 하나가 될 시나리오도 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키예프를 포함한 중부 사이에, 다른 한 편으로는 남부와 동부 사이에 본격적으로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편의 민족주의적 괴물을 위해 싸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최악의 참사가 될 것이다. 다른 한 편 우크라이나와 같이 거대한 산업국가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와 다른 세계적 권력들은 주요 가스ㆍ석유 송출관과 15개의 원자로를 가진 나라가 전쟁의 혼란에 빠지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다.

내 생각에 그와 같은 조건에서 해외로부터의 최상의 지원은, 하지만 극우파와 연대하지 않는 지지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물러서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당신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당신의 파시즘적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와 같은 메시지가 해외에서 압박을 가하기 위한 최선의 형태일 것이다.


Marina Ginestà 1919.01.29 - 2014.01.06

프랑코 쿠데타에 맞서 투쟁한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마리나 히네스타가 1월 6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당시 17세로 카탈루냐통합사회당(PSUC)의 투사였다. 이 사진은 1936년 7월 21일 PSUC의 본부로 사용되던 콜론 호텔 옥상에서 찍었다. 프랑코가 17일 쿠데타를 일으킨 지 5일째 되던 이날 반파시즘 의용군중앙위원회가 구성됐다. 혁명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긴 사진.

히네스타는 1919년 프랑스 툴르즈에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여단에 지원해 프라우다지 특파원 미하일 콜소프를 도와 번역과 통신원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 부상으로 프랑스 몽펠리에로 휴양을 떠난다. 2차 대전이 일어나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자 멕시코로, 다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서 벨기에 외교관과 결혼해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1970년대 초 파리로 이주해 1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문다.

공산당과 파시스트 프랑코 사이에 길을 잃은 스페인혁명처럼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그녀도 여러 나라를 전전하게 된다. 사실 혁명은 그녀가 사진을 찍은 이 때로부터 1년쯤 후에는 사실상 질식 직전에 이르게 된다. 1년 후 1937년 5월 이 호텔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카탈루냐 광장 인근의 전화교환소에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조지 오웰이 '카탈루냐 찬가'에서 다뤘던 바로 그 사건에 등장했던 곳이다. 파시즘에 맞선 젊은 사회주의 투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그녀의 영면을 바란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로 이어지는 신호탄을 올린 것은 그리스다. 치솟는 실업률과 계속되는 임금 삭감과 해고에 그리스 인민의 고통은 더해만 가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SYRIZA)를 제치고 집권에 성공한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ㆍ신민당(ND)ㆍ민주좌파당(DIMAR) 연정은 이전 정부와 다르지 않은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정책은 그리스의 부자와 기업을 구하기 위한 지원금을 유럽연합으로부터 얻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노동자 등 가난한 인민을 위한 국가의 지원을 축소하고 있다. 집권 연정은 이전 정부보다 더 반노동적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한과 파업권을 크게 축소하는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참세상] 그리스 총리, 파업권 제한… 연정 내부 반발 확산, 붕괴 임박ㆍ링크).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투쟁은 작업의 중단 만이 아니다. 이미 기업가들이 버리고 간 공장은 노동자의 의지와 상관 없이 활동이 중단돼 있다. 이러한 자본가들에 의한 사보타쥬는 그리 낯선 것 만은 아니다. 기업가들은 자신에게 이윤을 안겨주지 못할 때 공장을 닫는다. 때론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공장을 폐쇄하곤 한다. 노동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한다. 1970년 칠레에서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벌어진 일이 그것이다(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무력으로 짓밟힌 사회주의 향한 평화적 길ㆍ링크).

노동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든, 이윤이 남지 않아서 때문이든 그리스의 많은 공장과 기업은 그 활동을 멈췄다. 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실업과 빈곤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비오-미 공장도 그러한 곳 중 하나다. 사장은 공장과 노동자를 버리고 떠났다. 노동자들은 2011년 5월 이후 임금을 받지 못했다. 2013년 2월 12일 이 비오-미 노동자들이 공장을 스스로의 힘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1970~1973년 자본가들의 사보타쥬에 맞서 칠레 노동자들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고 유통을 연결하려 한 것처럼 말이다.

여느 투쟁처럼 이 노동자 자주관리 생산의 성패도 이 새로운 생산모델이 다른 공장과 사업장으로 얼마나 많이 확산되고 일반화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당장에 공장을 돌리고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종잣돈도 필요하다. 비오-미 노동자들의 제안은 정부와 노동조합 관료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지역과 세계의 운동가들은 이 제안에 적극적인 지지로 대답하고 있다. 데이비드 하비, 나오미 클라인, 존 할러웨이, 조르지오 아감벤 등 저명한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비오-미 노동자들의 호소문은 viome.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roarmag.org에 올라온 비오-미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 오역과 의역이 많은 글이니 참고하실 분은 꼭 원문과 대조해 읽기 바랍니다.




그리스 공장이 노동자 통제하에 생산을 시작하다
roarmg.org 2013년 2월 11일ㆍ링크

실업자와 사장이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와중에 경제위기에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 비오-미(the Vio.Me. Viomichaniki Metalleutiki) 공장이 노동자의 민주적 통제하에 생산을 시작했다.

빵 반죽을 하는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We are the ones who knead and yet we have no bread,
석탄을 캐는 우리는 여전히 춥다.
we are the ones who dig for coal and yet we are cold.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We art the ones who have nothing,
우리는 세계를 가질 것이다.
and we are coming to take the world.
- 타소스 리바디티스(Tassos Livaditis, 그리스 시인, 1922~1988)


비오-미의 노동자들, 위기의 심장에서 착취와 빈곤의 심장을 정조준하다

실업률이 30%대로 오르면서 노동자들의 수입은 '0'에 다다르고 있다. 과장된 말과 약속들, 더 많은 세금은 진절머리가 난다. 월급은 2011년 5월 이후로 나오지 않았고 현재도 그들에게 일은 주어지지 않는다. 고용주들에게 버림받은 공장에서 비오-미 노동자들은 그들의 대중집회(General Assembly)의 결정을 통해 끝없는 실업상태의 희생자로 남는 대신 그들의 손으로 공장을 점거하고 운영하기 위한 투쟁의 의지를 밝혔다.

2011년 10월부터 정식 제안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의 참여로 통제되는 노동자 협동조합의 설립을 요청해 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법적 인정을 요구했다. 동시에 그들은 공장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사회의 부를 생산해온 노동자의 자격으로 그들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는- 돈을 요구했다.

작성된 계획은 정부와 노동조합 관료의 무관심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세계적 사회운동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지난 6개월 간 사회 전체에 비오-미의 주장을 확산시키기 위해 투쟁해온 테살로니키 연대를 위한 열린 제안(the Open Initiative of Solidarity in Thessaloniki)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많은 다른 도시들에서 비슷한 제안이 이어졌다.


이제 노동자들이 비오-미를 장악할 시간이다!

노동자들은 파산한 국가의 가능성 없는 지원 약속(그리스 노동부가 약속했던 1000유로 긴급지원조차 재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의 실현을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문을 닫거나 파산하거나 노동자를 정리해고 한 다른 공장들 뿐 아니라 옛 사장이나 새 소유주에 기대지 않고 노동자들에 의해 다시 문을 연 비오-미를 주목할 때다.

투쟁은 비오-미 노동자들이 승리하기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투쟁은 문 닫은 모든 공장과 업체들로 확산되고 일반화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관리 공장의 연결망을 통해서 만이 비오-미의 시도는 번창할 수 있고 착취ㆍ불평등ㆍ계급 없는 생산과 경제의 다른 체제를 향한 길을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그리스에서 실업자의 수는 200만 명에 다다르고 있고 전 정부의 정책을 지속하고 있는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ㆍ신민당(ND)ㆍ민주좌파당(DIMAR) 집권 연정에 의해 인구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빈곤과 고통에 처하게 됐다. 노동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공장 운영 요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재앙에 대한 유일하고 합리적인 대응이자 실업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비오-미의 투쟁은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우리는 노동자, 실업자, 위기로부터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 비오-미 노동자들과 연대할 것과 노동자들이 사장 없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그들의 노력에 지지해줄 것을. 우리는 테살로니키에서 3일간 절정에 달할 투쟁과 연대의 행진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가 작업장 안에서 사장 없이 직접 민주적 과정을 통해 그들 스스로 조직하고 싸울 것을 주장한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총파업에 모두를 초대한다.

우리가 바라는 더이상 지배자가 없는 경제ㆍ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공장을 넘어 모든 생산에 노동자 통제가 수립되기는 것을 목표로!

이제 비오-미의 시간이다. 일하러 가자!
모든 곳에 노동자 자주관리를 도입하자!
지배자 없는 사회 건설을 시작하자!



비오-미 노동자 투쟁 연대와 지원을 위한 열린 제안
Open Initiative of Solidarity and Support to the struggle of the workers of Vio.Me.

반자본주의 신당(NPA)의 활동가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프랑수와 사바도가 함께 쓴 '생존권 혁명'이 푸른숲에서 나왔다.

반자본주의 신당은 제4인터내셔널 계열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 주도로 만든 정당. 그 이름이 말해주 듯 최근 10여 년 간의 급진화와 반자본주의 운동 성장에 기반해 있다. 1974년생인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2002년과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와 돌풍을 일으켰다.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어 '붉은 집배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책은 브장스노와 사바도가 97개의 단어로 급진 좌파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이 단어 목록에는 '영구 혁명론'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나타내는 단어도 포함돼 있다. 무작위 대중을 위한 급진 사상 안내서는 아닌 듯 싶다. 300쪽이 좀 넘는 책에 많은 주제를 담았기에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실현하려는 사회 계획을 드러내기보다 기존의 사회적 논리와는 다른, 새로운 논리의 주요 골자를 소개하고자 한다"고 소개한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당 정치인 앙리 베베르가 쓴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좌파 이야기', 좌파전선의 장 뤽 멜랑숑이 쓴 '인간이 먼저다'와 함께 프랑스 좌파의 주요 정파의 주장을 살펴볼 책이 모두 나온 셈이다. 베베르의 '좌파 이야기'의 경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 타 정파와의 차이가 충분히 보여지진 않는다. 멜랑숑의 '인간이 먼저다'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공약집으로 쓰였다. 좌파전선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사회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프랑스 좌파 세력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을 가장 명확히 주장한 것은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 브장스노와 사바도는 들어가는 말에서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빼놓지 않고 있다. 표지는 브장스노와 사바도의 '생존권 혁명'이 가장 예쁜 것 같다.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좌파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특히 대안 사회의 미래를 그리려는 시도를 꺼리게끔 했죠.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운동쯤으로만 취급됐습니다.

이런 상황은 2000년대 들어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단속적으로 파탄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높아져갔죠. 특히 세계사회포럼의 성장과 베네수엘라에서의 격변은 좌파들에게 큰 영감을 줬습니다. 새롭게 성장한 젊은 세대는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않았고 그 만큼 사회주의에 대한 레드콤플렉스도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정치적 대안으로 성장하기 위해 보다 분명한 미래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기할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지역사회 차원에서의 대안 검토가 확산되고 있었죠. 지금은 진보정당의 기본 정책이 된 '참여예산제' 같은 경우 브라질 노동당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습니다. 생태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도시에 대한 대안으로 브라질의 '꾸리찌바'가 관심을 끌기도 했죠.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박용남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 재미와 장난이 만든 생태도시 이야기(박용남 지음, 녹색평론사)'는 이 분야의 필독서가 됐습니다.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안도 제안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Parecom): 자본주의 이후, 인류의 삶(마이클 앨버트 지음, 김익희 옮김, 북로드)'이 여기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파레콘은 참여와 경제의 합성어, 참여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를 말합니다. 앨버트의 책이 당시 좌파에 충격을 던져준 것은 그것이 '시장'과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마르크스를 따르는 고전적 좌파 안에서는 다수가 동의하는 내용일 겁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패 이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시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사적소유의 폐지를 앞세우는 것은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됐지요.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판적 입장임을 숨기지 않는 마이클 앨버트가 시장과 사적소유의 폐지를 포함한 미래사회 청사진을 제기한 것입니다.

마이클 앨버트에 의하면 자본주의 이후 건설될 파레콘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제거하고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자평의회가 할당과 생산, 분배 등 경제생활의 핵심 기구로 활용할 것입니다(할당이란 사회의 가용 자원을 어떤 부분에 얼마만큼 사용할 것인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각 부문별 투하비율을 결정하는 문제를 말합니다). 각각의 평의회는 그 내부에서, 또는 다른 평의회와 위계적이지 않은 합의 과정을 거쳐 경제의 문제를 결정합니다.

"평의회는 노동자와 소비자가 자신의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 수단이며, 매우 다양한 수준에 걸쳐 조직된다. … 결정될 정책의 상이성에 따라 투표와 의결 방식 또한 달라진다. 고정불변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책 때문에 파생될 영향의 정도에 비례해서 구성원들이 그 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규범이 지켜지기만 하면 된다." ('파레콘' 25쪽)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앨버트의 '파레콘'을 반깁니다. 하지만 거기에 썩 만족할 수만은 없었죠. 왜냐면 마이클 앨버트는 중앙집권적인 계획과 조정에 일반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기된 질문은 이미 세계적으로 연결되고 융합된 경제를 평의회 각각의 파편화된 자율적 결정과 합의에 의해 조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에서 지속가능한 경제로 이행하는 데 필요할 엄청난 재건작업과 방향 전환" 같은 것을 고려할 때 파레콘에서 제안한 "[각 평의회들 간 합의의] 반복을 통해 전반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민주적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 25쪽). 마이클 앨버트는 '비례적 결정권을 통한 합의'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하면서도 그것이 좌파 내에서 "끝없는 논쟁을 야기"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하긴 합니다('파레콘' 161~171쪽). 이 문제는 꼭 앨버트의 '파레콘'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죠. 뒤에서 더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관심은 김수행 교수에게도 이어졌습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의 주제를 새로운 사회로 잡아 발표했죠. 그 결과물이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발표한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김수행ㆍ신정완 외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입니다.

2007년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나온 후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황에 비견되는 위기를 겪습니다. 위기가 극복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남유럽에서의 위기로 EU 지도자들 사이에서 갈등의 불똥이 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갈등과 위기에도 한결 같은 것은 이 체제를 이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용(복지 정책 등)이 문제라며 긴축정책을, 즉 노동자계급과 서민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애시당초 재정위기가 위기에 빠진 금융기업들을 구해주기 위한 행동들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깔끔하게 잊혀졌죠. 금융기업들의 잘못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 모든 게 게으른 남유럽 노동자들 때문이라는 목소리만 높습니다. EUㆍECB(유럽중앙은행)ㆍIMF 트로이카는 심지어 그리스의 노동자들이 주 6일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노동시간은 연간 2109시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긴데도 말입니다(링크).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김수행 교수가 쉬운 글로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묻습니다.

""자본주의만이 인류의 등불"이라던 자본주의 옹호자들도 2007년 이래 세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업자의 대홍수, 빈민들의 울부짖음, 모든 노동자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 노동자계급 precarious proletariat)로의 전환, 민주주의의 후퇴, 제국주의적 침략의 확산, 성과 인종의 차별, 자연의 파괴 등에 직면하면서, 자본주의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4~5쪽)

김수행 교수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길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길'입니다. 이미 완성된, 우리의 도착만 기다리는 유토피아는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행기'입니다. 이행기에 우리는 사회제도 뿐 아니라 개인들의 습관ㆍ의식 모두 바꿔야 합니다.

"'수탈자를 수탈하는' 정치혁명의 개시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이 형성되기까지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가는 '진정한' 이행기입니다. 이행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사회적 점유'의 형태로 숨어 있는 '사회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로부터 분리ㆍ자립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의 손에서 빼앗아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면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임금노예'의 상태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행기에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 광범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사회의 생산수단 전체와 개인의 노동력 전체를 사회의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것의 우월성을 인식시키고, 개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기초가 된다는 것과 개인이 타인과 자연에 대해 '인류'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는 것이 모든 차별과 자연 파괴를 막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97~98쪽)

김수행 교수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자면 주식회사와 협동조합이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마르크스가 주식회사에서 "자본은, 이제 사적 자본과 구별되는 사회적 자본(직접적으로 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하며, 이런 자본의 기업은 사적 기업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기업의 형태를 취한다(80쪽; '자본론' 3권 상 541쪽)"고 말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렇듯 자본주의 안에 숨어있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로 가는 길의 이정표를 마르크스에 기대 찾을 수 있다는 게 김수행 교수의 주장입니다. 마르크스가 정리된 형태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려낸적은 없지만 그의 여러 저술 속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김수행 교수가 미래사회의 명칭으로 제시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습이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계급들과 계급대립을 가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연합이 나타나게 된다." (115쪽; '공산당 선언' 저작선집 1권 421쪽)

김수행 교수가 먼지 쌓인 마르크스의 책속에서만 미래사회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2007년 이후 세계경제위기라는 현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듯이 그는 소련과 베네수엘라라는 과거와 현재의 사례들로부터도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입니다. 현실 사회주의로 인정하자는 주장에서부터,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 국가, 국가자본주의, 새로운 계급사회 등 소련에 대한 다양한 규정이 좌파의 조직적ㆍ정치적 실천을 갈갈이 찢어놓았었습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는 소련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착취와 억압을 제거한다는 목표는 국가의 착취로 대체됐고, 사회적 소유라는 전망은 '국가소유' 아래 국가 관료의 전횡으로 실현됐다는 것입니다
(148쪽). 무엇보다 소련은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한 개인들의 전면적 발달이라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오랜 이상과 배치됩니다.

소련의 이탈은 어디서부터 비롯한 것일까요. 스탈린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자본주의의 가장 큰 폐해로 지적하고 이 무정부성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소유'와 '계획'을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앞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아닙니다.

"사회적 소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점유하여 사용하던 생산수단들이 정치혁명을 통해 자기들의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경우 '사회'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ㆍ경제적ㆍ이데올로기적 존재가 아니라, 자각한 개인들의 연합을 가리키거나 연합한 개인들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소련의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폐기되어, 이런 연합한 개인들의 사회적 소유가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가소유는 실질적으로 노멘클라투라의 소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8~159쪽)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사회를 고려할 때 '사회적 소유'라는 것은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앨버트가 평의회의 수평적 자율관리 커뮤니케이션을 주장하고, 캘리니코스가 이를 보충하며 민주적 계획을 강조한 것은 이 모호함을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 41~43쪽). 국가 혹은 이를 대체한 어떤 사회적 제도가 구성원 모두의 의사를 충분히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면 국가 혹은 대체 제도의 소유가 곧 사회적 소유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선 무엇보다 민주적 통제와 조정 과정 수립, 앨버트와 캘리니코스가 강조한 것 이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소련의 현실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면 어떤 사례를 또 찾을 수 있을까요. 최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베네수엘라를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김수행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베네수엘라 혁명을 이끌고 있는 차베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자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조직된 노동운동도 베네수엘라에서는 기득권층의 입장에 섰었죠. 차베스의 주요 지지자들은 광범위한 빈민들입니다. 차베스가 대자본가들의 쿠데타로 대통령궁에 갇혔을 때 그를 구해낸 것은 빈민들의 힘이죠.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변화를 위한 조치들도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차베스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제게 차베스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죠.

하지만 차베스가 우파 언론들의 데마고기와 자본가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참여에 기초한 대안 권력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정책이 남미에 뿌리 깊은 포퓰리즘 정치처럼 시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차베스는 2001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볼리바르 서클을 조직해 빈민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서클의 회원들은 빈민촌인 바리오에서 활동하면서 바리오의 상하수도ㆍ주택ㆍ의료ㆍ전기ㆍ노인복지ㆍ환경ㆍ취업ㆍ교육ㆍ범죄ㆍ질서유지ㆍ운동장ㆍ문화시설 등의 문제를 지역 주민들과 토론하여 각종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 프로젝트를 실행할 자금을 정부의 '플랜 볼리바르 2000'으로부터 받아 주면서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게 도와준 것입니다. 그러나 볼리바르 서클은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2006년 4월에는 법적 근거를 가진 주민자치회가 새로 설치되어 빈민촌의 공동사업을 볼리바르 서클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179쪽)

차베스는 이러한 인민권력의 강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다섯 개의 인민권력법을 만들어 "주민자치회ㆍ정부연방주민자치회ㆍ코뮌ㆍ노동자치회ㆍ주의회ㆍ지방의회 등이 전국의 공공계획과 예산ㆍ결산을 토론하고 결정하며 감찰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만듭니다(192쪽). 이행기에 필요하다고 강조된 광범위한 교육과 훈련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의 자기계몽 과정이라는 특징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아직 매우 불안정한 이행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이 혁명이 진정한 혁명으로 거듭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거대 기업의 자본가들과 언론, 미국의 방해와 견제가 여전히 심하기 때문입니다.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차베스의 정책이 타협의 길로 이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가장 최근의,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현장으로서 베네수엘라는 충분히 관심을 쏟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는 '파레콘'에 비해 정밀하진 못합니다. 국가소유가 곧 사회적 소유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개인적 소유의 회복으로서 사적소유의 철폐와 사회적 소유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지는 막연합니다. '계급투쟁'이란 것도 '99%' '서민' 등의 단어를 사용해 그 정체를 불분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베네수엘라 인구의 60~80%에 달하는 '빈민'의 계급적 분석이 없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는 자본주의가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꼭 참고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 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에 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이 책의 장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행동은 비참한 현실로부터 비롯하기보다 미래의 희망으로부터 더 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국제적 금융자본은 자기의 위험한 투기로 입게 될 손실을 국제적 국가기구를 통해 세계의 서민들에게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금융공황에서 금융자본이 2007~2011년에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으로부터 약 20조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자기의 손실을 납세자의 혈세로 메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리스 이외에도 포르투갈ㆍ스페인ㆍ아일랜드ㆍ이탈리아ㆍ프랑스ㆍ영국ㆍ미국 등 거의 모든 나라가 국가채무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데, 그리스 형식의 금융자본 독재가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금융자본을 세계적 차원에서 인류의 소유로 전환하는 정치혁명이 필요할 것이고, 자본이 자본가계급의 이윤 욕심에 봉사하기보다는 인류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에 기여하도록, 개인들이 연합하고 단결하여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203쪽)

2012.05.25 13:41

홉스봄,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다 2012.05.25 13:41


홉스봄, 역사와 정치|그레고리 엘리어트 지음|신기섭 옮김|그린비

'홉스봄, 역사와 정치'는 보통의 전기는 아닙니다. 그의 출생과 성장, 그가 부딛혔던 현실의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그리 자세히 설명되진 않습니다. 저자인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제목 그대로 그의 역사 서술과 정치적 실천의 비판적 설명에 집중합니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의 시대 4부작이 홉스봄과 함께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홉스봄은 매우 복잡하고 때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옮긴이는 그러한 홉스봄을 설명할 딱 한 단어를 꼽자면 '계몽주의'가 아닐까 싶다고 말합니다. 진보하는 역사와 이성의 힘을 믿는 그런 계몽주의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나치의 극적인 성장을 눈 앞에서 본 유대인 소년의 당연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무너지는 세계를 앞두고 제 자신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한다면 끝내 역사의 진보를 가져올 이성의 힘, 공산주의적 대안을 선택하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는 선택 앞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문명은 바로 공산주의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나치를 막아내기 위한 연합 전술은 지금도 그렇듯 당시에도 진보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일 것입니다. 저자가 강조하 듯 홉스봄에게 '인민전선'은 그의 정치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30년대 프랑스는 물론 그 이후에도 성공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나치를 물리친 것은 소련ㆍ영국ㆍ미국의 군사적 연합 덕분이죠. 중국의 국공합작은 공산당과 노동조합 내 좌파를 학살한 끝에 성공한 것일 뿐입니다. 저자는 인민전선에 대해 실패한 역사로 매우 간단히 적고 있지만 사실 인민전선의 역사는 당 내 좌파의 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에서 보여줬 듯이 말입니다. 게다가 인민전선을 전후로 한 시기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은 전술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는 행동을 거의 동시에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회파시즘'론은 파시스트 다음은 바로 공산당이라는 기대 하에 사회민주당을 파시스트보다 더 큰, 시급히 상대해야 할 적으로 삼기도 했죠. 군사적으로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 협약을 맺고 오히려 영국과 서방세계를 적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전술이 독일의 침공 이후 급격한 방향전환을 합니다. 우파 정당들과의 연합을 위해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자제하는 것으로까지 나가죠.

이러한 태도는 80년대에도 (아마 지금까지도) 계속됩니다. 홉스봄에 의하면 대처에 맞서기 위해 노동당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선 안됩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노동조합의 극렬한 투쟁이 오히려 대처의 성공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홉스봄의 그러한 입장에 대해, 그 결론이 겨우 블레어(사실 대처와 그리 다르지 않은)였다며 비웃음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합니다. 홉스봄과 그의 공산당이 뒤늦게 (이미 해체했지만) '맑시즘 투데이'를 통해 제3의 길을 비판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꼴이죠(사실 그 비판도 그리 충분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이름이 높지만 저자에 의하면 그조차도 의문입니다. 특히 '극단의 시대'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급'이 빠졌다며 집중적으로 비판받습니다. 물론 그 뿐만은 아닙니다. 부르주아 혁명에 관한 설명도 지나치게 제멋대로라고 비판받죠. 저자는 홉스봄이 자서전 '흥미로운 시절'(Interesting Times, 국역 '미완의 시대')에서도 자신이 마르크스의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책은 제가 읽은 것 중 가장 신랄하게 홉스봄을 비판합니다. 매우 얇은 책이지만 읽기 쉽지는 않습니다. 인민전선은 홉스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저자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부르주아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의 기초지식이 있다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있는 것이죠. 논쟁이 될만한 내용이 많지만 한국에서 그러한 논쟁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5월 5일)은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쩌다보니 오늘 한 독서모임에서 류동민 교수가 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읽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마르크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제가 아는 한에서 간단하게 끄적거려 봅니다.


1882년 병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알제리에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 마르크스는 1882년 4월 28일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 예언자의 턱수염과 왕관처럼 머리를 덮었던 영광을 없애버렸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의 트리어 지방에서 태어납니다. 마르크스는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힌 바는 없습니다.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에 따르면 자신의 유대인 혈통에 저주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합니다.

당시 독일은 영방국가들로 이뤄져, 아직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전국적인 통일된 정치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았었죠. 영방국가 체제에서 산업의 발전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이 프랑스와 영국에서와 같은 발전을 빗겨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디지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또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헤겔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 일부는 교회와 권위주의적 국가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헤겔 좌파, 흔히 '청년헤겔파'라고 부르죠. 헤겔과 동시대의 지성 다수가 그러했 듯이 헤겔도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에 강하게 열광했죠. 노년의 헤겔이 프로이센과 구체제를 옹호하는 철학자로 몰렸던 것과 달리 그의 철학은 혁명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었습니다. 청년헤겔파는 헤겔을 급진적으로 해석하며 좌파로서 교회와 구체제를 비판했죠.

고향을 떠나 본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된 마르크스는 곧 자신의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고 베를린으로 학교를 옮깁니다. 마르크스 또한 청년헤겔파와 교류합니다. 이미 대학에서 급진주의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 마르크스는 학교에 자리 잡지 못하고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첫 정치 생활을 시작합니다. 라인신문은 자유주의적 좌파로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국가의 검열을 피한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 덕이죠. 이 시기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인간의 물질적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평생의 친구인 엥겔스를 만난 것도 라인신문 시절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 아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죠. 그가 공산주의자로 변하는 것은 탄압 때문에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파리로 간 이후입니다.

파리에서 그는 당대의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엥겔스겠죠. 파리에서 다양한 공산주의ㆍ사회주의 흐름을 검토한 그는 이 시기 헤겔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자신이 헤겔의 제자임을 결코 숨기지 않았고, 그의 여러 저작들에는 헤겔적 방법이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파리에서도 결코 혁명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독불연보'를 통해 독일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합니다. 이 독불연보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 실리죠. 마르크스는 파리에서도 추방돼 브뤼셀로 자리를 옮깁니다.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노동자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의뢰로 '공산당 선언'을 씁니다. 이 선언은 1848년 2월에 처음 출간됩니다. 선언 출간 후 곧 1848년 혁명의 서막이 프랑스에서 열립니다. 브뤼셀에서도 쫓겨난 마르크스는 다시 파리로 갑니다. 프랑스 혁명의 불꽃이 독일로 옮겨붙자 마르크스는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 '신라인신문'을 창간합니다. 당시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거부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이번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후에는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동맹을 주장하지 않죠.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태도는 정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때론 불가피한 동맹을 통해서라도 정치적 개입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 타 계급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신랄한 어조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과 별개의 정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서도 그러한 동맹과 협력을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과감히 관계를 청산하는 것 또한 그의 정치개입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독일에서의 혁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 결국 패배로 끝납니다. 마르크스의 신라인신문 또한 폐간되죠.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는 붉은색 잉크로 인쇄됐다고 합니다. 혁명의 물결이 지나간 후 그는 다시 여러 국가들에서 쫓겨나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가인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런던에 머물죠.

런던에서의 첫 10년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은 그의 아이들 목숨을 앗아갔죠. 상황 때문에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그의 필생의 역작인 '자본론' 저술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본론은 20여년이 지난 1867년에야 발간됩니다. 마르크스는 생계를 위해 뉴욕 트리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주제에 관한 의뢰는 엥겔스에게 맡기기도 했죠. 물론 기사는 '마르크스' 이름으로 나갔고, 고료도 마르크스에게 돌아갔죠. 마르크스를 따라 영국에 자리잡은 엥겔스는 멘체스터에 방직공장을 운영합니다. 당시엔 아직 수입이 많지 않아 그도 마르크스의 빈곤한 상황의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저 기꺼이 마르크스를 대신해 뉴욕 트리뷴 기사를 써주긴 했습니다.

1857년의 공황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합니다. 1864년 런던에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출범합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제3인터내셔널처럼 단일한 정치를 지닌 정치집단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와 남부 유럽의 아나키즘적 경향,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독일의 라쌀레주의가 혼재한 상황이었죠. 그러함에도 마르크스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술수로 제1인터내셔널을 최대한 자신의 의도와 전략대로 운영합니다. 바쿠닌과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1870년까지는 잠재적이었습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은 인터내셔널에게 결정적 상황을 맞게 합니다. 프로이센의 점령 하에서 우유부단한 부르주아지의 대응(나폴레옹 황제는 이미 프로이센 황제의 포로가 된 상황)에 분노한 파리의 상퀼로트는 봉기합니다. 1871년 파리코뮌이 바로 그것입니다. 파리코뮌의 성립 전까지 마르크스는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을 최대한 자제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코뮌이 만들어지고 잔인하게 탄압받자 그는 가장 앞에서 파리코뮌을 방어합니다. 당대사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지는 '프랑스 내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쓰여집니다. 이 책은 1848년 혁명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함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불립니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으로 불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파리코뮌으로부터 그 구체적 상을 얻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평균적 임금을 받는 언제나 소환 가능한 대표, 입법과 행정의 통일 등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으로 자리잡습니다.

파리코뮌의 진압 후 인터내셔널은 그 배후로 지목됩니다. 물론 사실과는 다르죠. 파리코뮌에는 공산주의자들 뿐 아니라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들 그야말로 다양한 경향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어쨌든 파리코뮌 이후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의 해산해야 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바쿠닌과의 갈등도 더 이상 참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를 미국으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현합니다. 공식적 해산은 더 이후지만 1872년 미국으로의 이전으로 실질적인 해산이 됐다고 봐야죠.

인터내셔널 해산으로 마르크스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이 성장하면서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충고와 의견교환은 계속됩니다. 1875년 라쌀레의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민당을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타에서 만들어진 강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강력한 비판을 받죠. 그 서한은 '고타 강령 비판'이라고 불리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유명한 정식,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나옵니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런던 망명 초기보다 생활이 한결 나아졌지만 그 시절의 가난은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짧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았죠. 결국 1883년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 그는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200년 전에 태어난, 150여년 전 사람의 글과 지혜를 우리가 참조할 필요가 있는가?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우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는 그보다 더 오래전 사람이지만 그들의 지혜는 인류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특히 현대 사회과학의 방법에 그가 미친 영향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이사야 벌린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둘째로 그가 자본론을 쓰던 시절, 영국과 몇몇 국가에서나 그 발전의 초기 상태를 보여주던 자본주의는 지금에 와서 지구 전체를 뒤덮으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기파괴적 방식에 의해 지구와 인류의 생활이 지배받고 있습니다. 체제를 옹호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조차 위기가 반복될 때면 마르크스의 귀환을 목소리 높여 외치곤 합니다.

당연히 그의 글이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법은 그의 어떤 글에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진 않습니다. 소련 공식철학자들의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체계와 달리, 마르크스의 방법은 어떤 상황의 변수만 주어지면 이를 대입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방정식이 아닙니다. 그가 '자본론'의 기본적 개념들을 1840년대 이미 갖고 있었지만 '자본론'으로 묶어내기 위해 무려 20년 가까이 영국 대영박물관의 열람실에서 현실의 증거들을 찾은 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도 파리코뮌이라는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죠. 타협하지 않는 냉철한 지성은 현실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부터 비롯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잠시 진정되는 듯 싶었습니다. 국가 부문으로 전가된 부채는 체제 전체를 더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 첫 희생자는 남부 유럽입니다. 위기가 언제나 혁명적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에 대한 의문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살이라는 개인적 절망의 형태일지라도 말이죠. 이러한 개인적 절망은 집단적 저항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의 지혜는 집단적 저항을 만들기 위한 유용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마르크스를 만나고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만날 수 있는 비교적 짧고 이해하기 쉬운 몇몇 추천도서를 아래 붙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개관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다니엘 벤사이드 지음|양영란 옮김|에코리브르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정성진, 정진상 옮김|책갈피

마르크스의 생애
마르크스 평전|프랜시스 윈 지음|정영목 옮김|푸른숲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이사야 벌린 지음|안규남 옮김|미다스북스

주요 저서 1 : 마르크스주의의 요체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공상에서 과학으로|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나상민 옮김|새날

주요 저서 2 :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임금 노동과 자본|칼 마르크스 지음|김태호 옮김|박종철출판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칼 마르크스 지음|김호균 옮김|중원문화

주요 저서 3 : 마르크스의 역사·정치 이론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칼 마르크스 지음|최형익 옮김|비르투
프랑스 내전|칼 마르크스 지음|안효상 옮김|박종철출판사

주요 저서 4 : 마르크스의 철학
헤겔 법철학 비판|칼 마르크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강유원 옮김|이론과실천

다큐멘터리 '칼 맑스'(2010년 12월 ZDF 방영, 찬별님 자막ㆍ링크)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