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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매거진은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1917년 혁명의 여러 쟁점을 다양한 활동가ㆍ연구자들의 기고를 받아 연재하고 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혁명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아래 글은 자코뱅매거진에 실린 에릭 블랑의 '핀란드 혁명'[링크]에 대한 반박 글이다. 블랑의 글을 직접 옮기며 쌓인 여러 의문을 아래 글은 일부 해소해주고 있다. 참세상에 게재된 블랑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가진 의문을 이 글이 일부 해소해주길 바라며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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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교훈: 에릭 블랑에 대한 이견
던컨 하트ㆍ2017년 7월 11일(링크)

에릭 블랑의 글 '1917년 핀란드 혁명의 교훈'은 핀란드의 경험이 주로 카우츠키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정당화하는 혁명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오늘날 좌파에게 매우 해로운 정치적 논쟁거리들을 제기하고 있다. 블랑의 글을 처음 게재했던 자코뱅매거진은 안타깝게도 내 반론의 게재를 거부했다. 소수의 동지들이라도 이 글을 읽길 바라며 이곳(johnriddell.wordpress.comㆍ링크)에 글을 싣는다.


1917년에서 1918년의 핀란드혁명은 좌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핀란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발전한 사회였고 러시아를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보다 노동계급의 사회혁명이 틀림없이 가장 진전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블랑의 최근 글이 혁명의 경험이 던져준 정치적 질문들의 해결을 위한 보다 깊이있는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

앞서 밝혔듯, 핀란드혁명에 대해 블랑이 내린 정치적 결론에 이견이 있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블랑의 가장 큰 잘못은 혁명이 "카우츠키가 옹호한 혁명에 관한 전통적 관점, 즉 지난한 계급의식의 조직화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서 다수의 지위를 점하고 국가기구를 사멸시킬 권한을 획득해 사회주의자가 이끄는 혁명을 촉발시킨다는 생각을 승인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블랑은 그의 글을 핀란드사회민주당(SDP)이 대표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의 일부 '한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끝내지만 전반적 논조는 "볼셰비키 만이 제국에서 노동자권력을 이끌 수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것이다.

혁명은 SDP의 전략이 옳다고 입증해주지 못했다. 이어진 끔찍한 학살과 정치적 억압은 사회민주주의가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에 대한 혹독한 고발장이다. 핀란드의 비극은 오히려 볼셰비키의 개입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옳았음을 반증한다.

나는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18년 8월에 쓴 작은 책 '핀란드혁명: 자기 비판'을 깊이 참조해 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SDP의 지도적인 이론가였던 쿠시넨은 1911~1917년 당의장이었고 혁명 정부에선 교육인민위원으로 활동했었다. 그는 다른 사민주의 지도자들 다수와 함께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으로 망명해있는 동안 핀란드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의 책 PDF 파일은 여기(링크)서 볼 수 있다.

●SDP 안의 '좌파'와 우파

블랑은 글을 쓰며 내내 사민당이 혁명가들과 온건파로 나뉘어있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실제로 당은 지도부의 다수를 점했던 '중앙파'와 의원단을 주도했던 공개적인 수정주의 우파로 분열돼 있었다. 쿠시넨은 중앙파가 "혁명을 믿지 않았다"며 "우리[중앙파]는 그것을 믿지 않았을뿐더러 언급하지도 않았다"고 묘사했다. 이들 정치적 경향의 특징은 이렇다.

1) 혁명적 계급전쟁보다는 지속적인 평화, 이와 함께
2)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지 않는 독립적 계급전쟁

이는 "가능한 평화적 수단을 통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이라는 비타협적 태도가 아니었다. 제임스 캐논[미국의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이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따르면 그들은 계급투쟁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수동적이고 운명적 태도를 채택했을 뿐이다. 쿠시넨은 이렇게 말했다.

사민당과 혁명의 일관된 관계는 관용적 역사가들이 과거의 혁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보였던 것과 꼭 같은 수동성이었다. 사민당이 가장 좋아한 표현은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였다.

사민당 중앙파와 우파 모두 의회를 통한 점진적이고 민주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묶여 있었다.

혁명적 좌파가 혁명 동안 구성돼있지 않았다거나, 지도부 없는 약한 조직이었다거나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11월 총파업과 유산된 혁명 기간 동안 적위대와 헬싱키노동자위원회의 지도부 사이에 혁명적 감수성이 팽배했었다는 건 분명하다. 이 두 기구는 모두 노동자들의 급진화에 대한 응답으로 새로 설립된 혁명기구였다. SDP 지도부가 파업을 철회하자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연합정부의 사회주의자 총리였던) 오스카리 토코이
[1873년 5월 생으로 SDP 지도자로 활동했다. 단명한 혁명정부에서 각료로 활동했다. 혁명의 패배 후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이후 미국에서 삶을 마감한다]를 소환해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에 맞서 더 강하게 파업해야 합니다. 정부기구를 통제해야 합니다. 산업, 토지와 그 산출물들을 공공의 소유로 전환해야 합니다. … 이제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열정과 권력이 필요합니다. …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철도노동자들은 쿨레보 마네르 SDP 대표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파업 철회에 대해 거세게 항변했다. 이와 같은 항의들은 [노동]계급 중 혁명에 앞장서던 부분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헬싱키노동자위원회는 SDP가 공식적으로 파업을 종료한 뒤에도 이틀간 파업을 유지해 나갔다. 이 사태의 비극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도부를 SDP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혁명적 지도부로 인해 [파업의] 동력은 지속될 수 없었다.

SDP 외부에서 혁명적 분파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집단은 사실 아돌프 타이미와 라자 형제처럼 볼셰비키에 가입해 있던 소수의 핀란드인이었다. 이들 볼셰비키들은 헬싱키 적위대의 지도자로 선출돼
[조직을] 급진적 좌익으로 만들어 SDP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11월 총파업이 끝난 뒤부터 1월 반란 전까지 적위대는 혁명을 소리높여 호소했고 SDP 지도부가 소심하게만 있는다면 그들이 혁명을 이끌겠다고 위협했다.

●권력 획득을 거부한 SDP, 파멸한 혁명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반란에 앞서 레닌은 그의 볼셰비키 지도부 동지들에게 어떤 시기엔 정치적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잡는데 대해 의심을 하는지 의지를 북돋우는지에 따라 혁명의 성패가 나뉜다고 경고했다.

중앙위의 대화들이 지금 권력을 잡는 것을 삼가고 '기다리자'는 말로 채워지고 있는데, … 이는 혁명을 패배라는 파멸적 결과로 이끌 것이다.

사회민주당이 1917년 11월 총파업의 혁명적 잠재력을 밀어붙이지 못하면서 1918년 혁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18년 3월 공격에 나섰던 독일군의 압도적 군사력을 고려할 때 11월[의 봉기가] 승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고 블랑은 정확히 설명한다. 그렇지만 11월 상황에 대해 틀리지 않게 설명하려면 당시 노동계급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해야 한다. 쿠시넨은 1917년 11월 노동자 권력 수립을 거부한 것은 단지 내전을 미룬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부르주아지가 좀 더 준비될 때까지 그 시기를 미룬 것 뿐이었다. …

블랑이 언급했 듯이 볼셰비키 봉기를 지지하며 핀란드 노동자들에 공감하고 있던 러시아 병사들 다수는 1월에 여전히 핀란드에 남아있었다. 게오르기 불라첼[1]과 미하일 스페치니코프 같은 많은 러시아 병사들과 혁명적 장교들이 혁명의 편에서 싸웠고 이들 혁명적 병사들은 11월 핀란드 백군에 맞선 강력한 보호자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다는 것인데, 이와 달리 1918년 1월 그들은 만네르하임 남작[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남작은 1867년 아스카이넨의 독일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육군에 입대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러시아혁명 발발 뒤 핀란드 내전이 일어나자 백위대의 군사부문 사령관으로 임명돼 내전을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이끌었다. 2차세계대전 말 핀란드 대통령으로서 소련ㆍ영국과의 평화협상을 주대했다. 1951년 삶을 마감한다]의 지도하에 핀란드 북부에 백위대 훈련소를 세워 적위대에 맞선 내전을 준비했다.

독일 제국주의는 러시아와 약탈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키 조약을 맺음으로써 1918년 3월엔 핀란드에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조약은 3월 맺어졌다). 11월에 독일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에 매달려 있었고 핀란드 개입은 어려웠을 것이다.

1918년 3월 독일의 개입이 혁명에 치명타임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징후는 1917년 11월 혁명의 성공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능성은 SDP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꺾이게 된다.

●볼셰비키와 사회민주당의 반란에 대한 태도

쿠시넨이 회상하듯 (그리고 당시 모든 SDP 지도부들이 공개적으로 말했듯이) SDP가 혁명에 적대적이었다면 1월 26일 그들이 봉기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SDP 지도부는 대개 정치적으로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덜 성장한 혁명적 노동자들의 압력하에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을 채택했다. SDP가 국가 기구에 참여하지 못하고 총파업 이후 부르주아지가 '안정'에 몰두하면서 SDP는 '혁명적'으로 됐다. 부르주아지의 계획은 적위대를 무장해제하고 노동자들의 열망을 억누르는 것이었으며 이는 SDP가 설립한 기관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1918년 1월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진압하길 거부한 SDP가 주도하는 군대를 대신해 새로운 '보안군'을 창설하는 결정을 했다. 실제로 이는 이미 존재하던 '시민군'(노동자들은 이들을 '도살자 군단'이라고 불렀다)을 국가가 승인해준 것이다. 이 시민군은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병으로 구성한 조직이었다. 도살자 군단은 1월 26일 공식적인 군대로 승인됐고 이는 적위대와 노동 대중에 대한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순전히 '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토코이ㆍ위크 같은 SDP 내 우파조차도 반란에 동참하게끔 된다. 쿠시넨은 이렇게 설명한다.

따라서 혁명의 표준이 현실에 맞춰 제기됐고 이로써 혁명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SDP 정부가 제안한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2]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는 분명해졌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진전을 위한 최선의 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증진에 대해서만 말했다. 내전 때조차 SDP는 단지 '정상 상태'로의 복귀만 얘기했을 뿐이다.

혁명의 필요성을 자기 보호에서 찾는 것은 볼셰비키의 접근법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레닌이 1917년 9월 말부터 반란으로 나가야한다고 긴급히 주장한 것은 노동대중의 승리를 위해 소비에트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외적 사건에 흔들리기보다 노동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의 중요성을, 결정적 국면에서 행동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는 지도력에 대한 행동주의적 접근이었다.

핀란드의 총파업 때조차도 볼셰비키는 SDP에 그들의 수동성을 벗어나 상황을 장악하라고 충고해야만 했다. 레닌은 "봉기, 지금 즉시 봉기해 조직 노동자들의 손에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SDP 지도부에 전보를 쳤다. 헬싱키에 주둔중이던 발틱함대의
[수병위원회] 의장이던 다이벤코 또한 반란을 충고했고, 볼셰비키는 핀란드 노동자신문에 자신들의 모범을 따라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기고했다.

총파업이 끝난 후에도 볼셰비키는 SDP에 계속 호소했다. 민족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은 11월 27일 SDP 전국회의 연설에서 그들에게 혁명에 대한 의심은 잊으라고 충고하며 "담대하라, 담대하고 또 담대하라! 바로 당통의 전술"을 채택하라고 애원했다. SDP 지도부가 봉기 계획에 따라 필요했던,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차로 보내주기로 했던 1만5000정의 소총과 200만 개의 탄창 수령을 봉기 당일에조차 거부했던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핀란드 혁명이 남긴 교훈

1917~18년 핀란드에서의 갈등이 러시아보다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블랑의 주장은 옳다. 핀란드의 정치는 자신이 그 일부였던 러시아제국보다 당대의 서구 사회와 훨씬 더 공통점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핀란드는 매우 소중한 사례다. 그렇지만 블랑이 SDP를 카우츠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실험해본 사례로 논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동료들과 달리 독특한 상황에 처해있던 SDP는 혁명적 행동으로 향해 나갔다. 차르 치하에서 그 어떤 권력도 지니지 않았기에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책임도 질 일이 없었던 핀란드 의회에서 SDP는 다수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차르의 강력한 억압기구들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핀란드에서 노동자 전투성의 고양과 러시아에서 노동자혁명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는 SDP를 자신들의 이익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도전장을 던졌을 때 SDP는 혁명에 나설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100여 년 전 핀란드 노동자들의 참혹한 패배로부터 쿠시넨이 얻은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917년 11월 벌어진 것과 같은 혁명적 위기를 이용할 뿐 아니라 내전을 지도해 승리를 위한 열정적 수단을 쟁취할 혁명적 지도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교훈이다. 핀란드 노동자들에겐 총파업을 반란으로 밀어붙이고자 하는 열망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SDP에 도전할 만한 혁명적 지도의 부족 때문에 그들의 영웅적인 시도는 좌절됐다. 쿠시넨은 패배를 겪은 뒤 혁명적 전망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계급사회에서 계급들 사이엔 두 종류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하나는 피억압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군대, 법, 재판 등의) 폭력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평화적 수단으로 제한하는 억압적 상태다. 다른 하나는 억압 계급과 피억압 계급 중 미래를 결정할 계급을 결정할 폭력적 대결이 벌어지는 공공연한 계급투쟁 상태, 즉 혁명이다.

핀란드 노동계급 수 만 명이 목숨을 잃고 혁명가들이 수십 년간 감옥에 갇힌 걸 대가로 해서 이 질문에 대한 정치적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처럼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자리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줬기에, 역설적이게도 쿠시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의 관행을 버리고 볼셰비키에 동의하게 됐다.


주석
[1] 블라첼 중령은 핀란드에 주둔하던 다른 수 천 명의 러시아 병사드러럼 이후 핀란드 백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의 두 아들은 1918년 4월 비푸리주에서 같은 방식으로 살해됐다. 그는 [핀란드 서남부의 도시] 탐페르를 방어하던 북부전선 사령관 후고 살멜라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다.
[2]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란 이름은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이 붙인 게 아니다. 레닌은 3월 1일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우호조약 체결 때 이 이름을 고집했다. 볼셰비키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두 나라에서 완전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누릴 수 있길 바랐지만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주저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핀란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댓가 없는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

글쓴이는
던컨 하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Socialist Alternative' 회원으로 있는 사회주의 활동가다.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지음|김유진 옮김|후마니타스

이 책의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양자의 극복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반대하고, 자유주의가 조성한 사회 구성원의 원자화ㆍ파편화를 극복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죠. 경제를 우선시하는 유물론과 달리 정치적 우선성을, 계급투쟁과 같은 갈등의 전략 대신 계급교차(계급간 연대) 전략을, 개인들의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주의를 앞세운 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특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특징은 가장 안정되고 성공한 체제인 스웨덴을 만들어냈고, 비록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정당들은 실패의 길을 걸었음에도 유럽 전역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의제가 받아들여져 전후 유럽의 빛나는 시절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셰리 버먼은 정치/경제의 이분법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치는 오직 각 정당의 행위로만 축소돼 이해됩니다. 경제 또한 시장의 행위로만 이해되죠. 그 스스로는 구조와 행위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경제와 정치에 대한 편협한 이해 때문에 20세기 유럽을 형성한 주요 사건, 1ㆍ2차 세계대전과 68년의 세계적 반란은 오직 정치 행위자들이 직면하는 외부적 사건으로만 그려집니다. 마치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날씨의 변화와 같이 말입니다.

셰리 버먼의 이해에 기반해서는 스웨덴의 성공조차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저 스웨덴의 사민당이 잘 준비돼 있었고 훈련돼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그들이 잘해서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의 정치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기반해서는 1920~30년대 스웨덴의 격렬한 노동계급 투쟁이 사민당의 성공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에게 정치란 오직 정치인들의 행위이며 노동계급을 비롯한 대중은 그들에게 표를 던지는 수동적 입장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대안으로 강조하기 위해 파시즘과 사민주의의 경제정책에 있어서 공통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의 서술에서 드러나듯 파시즘의 경제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온갓 것들의 잡탕입니다. 결코 하나의 일관된 이념으로 서명하기 어렵죠. 저자 자신이 설명하는 바지만 자본주의와 사적소유에 대한 급진적 반대를 수사로 해서 성장한 파시즘은 성공을 위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는 대자본가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유재산 몰수 조항들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변형됩니다.

하지만 1929년 경제위기 이후 2차세계대전까지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는 결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파시즘만의 공통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국가가 공통적으로 실천했던 바죠. 전간기 사회민주주의적 주장이 주요 정치세력에서 의미있는 행동을 하지 못했음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이 실현됐다? 이데올로기의 중요성과 그 매개체로서의 정당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 입장에서 이러한 사실은 그 자신의 주장과 모순될 뿐입니다.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를 현재의 위기에 여전히 유효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서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던 유럽이 68년 거대한 사회적 반란에 직면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길들이기'에 성공한 사회민주주의적 유럽이 70년대 다시 자본주의의 고질병인 세계적 경제위기에 직면한 이유와 함께 이후 자유주의의 거대한 부활, 즉 신자유주의의 등장 또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더 생각해볼 것 1 스웨덴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1930년대 활발한 노동자 투쟁을 빼놓아선 안 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동쪽에 거대한 '사회주의 제국'이 존재하는 상황, 국내에서의 격렬한 노동자 투쟁은 당시 스웨덴 자본가들이 한 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스웨덴에서 노동조합은 사민당의 주도로 만들어져 당에 대한 높은 충성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직률 또한 높아, 노동조합과 당의 지도자들이 대중을 '통제'하기 유리한 조건이었죠(확인이 필요하지만 당시 30~40%, 이는 현재 80% 전후에 이르는 조직률에 비하면 낮은 수치이긴 합니다. 하지만 한국과 프랑스는 현재에도 10% 내외의 조직률을 가지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높은 수준이죠). 스웨덴 사민당의 계급교차 전략에 대해서도 더 고려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사민주의, 공산주의 정당도 '계급연합', 특히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ㆍ연합을 명시적으로 부정해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노동계급의 주도성이 얼마나 관철되느냐죠. 이 점에 있어 저자 셰리 버먼의 주장은 불충분합니다. 다른 연구에서는 스웨덴 사민당이 계급교차적 전략(1930년대 자유당과의 연합, 농민에게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놓친 적 없음을 강조하기도 하니까요.

더 생각해볼 것 2 위의 '더 생각해볼 것 1'에서도 언급했지만 공산주의를 앞세운 '사회주의 제국' 소련의 존재는 사민주의 정치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현대 사민주의 정당은 '반공주의'를 주된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자가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단절'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강조가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적 경제결정론 또한 (저자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갑니다만) 레닌에 의해 발전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과 말에 그러한 의심의 여지(기계적 결정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마르크스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저자는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대립을 강조하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사민주의는 모두 역사적 진보는 예정되어 있다는 식의 속류화된 유물론(원시공산주의-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의 역사발전 5단계론)에 기초해 사민당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했다는 공통점이 있죠. 마르크스의 핵심적 주장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여러 글을 종합해볼 때 그와 반대되는 면모 또한 무수히 많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죠. 당장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테제의 마지막 문장은 역사에서 인간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 셰리 버먼에 따르면 정치의 우선성을 선언함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마르크스를 기계적 유물론자로 모는 것은 저자인 셰리 버먼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천박한 이해만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어제(9월 2일) 작성한 '뉴라이트와 손잡은 '뉴레프트' 주대환?'에서 쓴 것과 달리 레디앙에 실려있는 주대환의 글을 읽어 봤습니다.

주대환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레디앙)

그의 글은 생각보다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NL과 PD(지금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지 않지만)에 대한 빈약한 근거의 비난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지난 10여년 간 NL과 PD의 후신들이 여전히 변치 않은 부분이 있음에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 왔고 '사회민주주의'를 자신의 현실적 대안으로 고민하고 적용해 왔음이 그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NL과 PD의 후신이 여전히 20세기 초반 코민테른식 전략과 전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 또한 19세기 페이비언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문제는 그의 비판 태도가 우파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겠죠. 그는 민주노당당과 진보신당 '실패'의 원인을 그들의 '속'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속'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현실의 표면에 영향을 끼쳐 실패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진 않습니다.

그는 항상 현실을 강조해왔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 그가 지금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건 열린우리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세력 내 좌파와의 연대, 미국식 민주당의 건설입니다. 미국식 민주당이 '현실'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의 더 나은 삶과 한반도ㆍ세계의 평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대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각종 폐해를 제어하거나 없애기 위해서라도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 필수적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지향점으로 삼는 유럽의 사회민주당, 대표적으론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추진에 가장 크게 기여해왔다는 것에는 침묵하더군요.

마지막으로 그는 원래 이 글을 좌파매체에 동시 게재를 조건으로 '시대정신'에 실었지만 좌파매체의 발간이 늦어지며 여러 사정상 '시대정신'에 먼저 실렸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변명할 꺼리가 못되죠. 아마도 제가 지난 글에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가 연대의 대상으로 생각한 자유주의 좌파 계열의 이론지의 부재 때문에 '시대정신'에 기고했겠죠. 구색 맞추기 식으로 '좌파매체에 동시 게재'를 조건으로 내세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왜냐면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그의 글은 자유주의 좌파, 결국엔 우파에 대한 짝사랑 고백 편지 이상이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