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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그리스 정부에 의해 18개월 넘게 불법적으로 구금돼 있는 아나키스트 활동가 코스타스 사카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 코스타스 사카스는 6월 4일부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 Teacher Dude 플리커 페이지]

2010년 12월 테러 조직 가입 혐의로 체포된 코스타스 사카스(Κώστας Σακκάς, Kostas Sakkas)는 여전히 사전심리 과정에 놓여 있다. 그는 그리스 헌법이 정한 최대 구금 기간인 18개월 넘게 구속돼 있다. 6월 4일부터 단식 투쟁 중인 그는 의사에 의하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간으로 7월 10일 오전.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양심수 코스타스 사카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무장한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소수의 시위대는 그 어떤 무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의 공격은 가차 없었고 그 장면을 촬영 중이던 카메라도 공격받았다
[▶유튜브 동영상].

우리는 예전보다 더 자주 경찰이 곤봉과 최루탄 등을 사용해 시위대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태어난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ㆍ사회적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의 회원인 지아나 쿠루토비크는 "현재 경찰의 행동이 지난 10여년 동안 그 이전보다 더 잔인해졌다"고 말한다.

"경찰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특수부대는 군대의 장비로 무장했다. 이 무장에는 불법적인 것도 있다. … 유럽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수도에서도, 심지어 이스탄불(이곳은 수도가 아니다)에서도 이처럼 노골적인 경찰은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리스와 터키의 독재 시절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경찰의 폭력은 그리스와 터키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 브라질 시위도 경찰의 잔인한 행동, 특히 기자들에 대한 폭력이 도화선이 됐다. 2012년 10월 스페인을 뜨겁게 달궜던 시위도 기폭제는 경찰 폭력이었다. 해리 라디스는 그리스 정부가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폭력에 의지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더 이상 '당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현 정부가 "오래 전부터 '당근과 채찍'으로 알려진 방법을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08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가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7월 8일 유로존 재무장관 회담에서는 그리스에 68억 유로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을 결정했지만 그 조건은 공무원 4000명을 해고 하고 2만5000명을 재배치 하는 것이다. 임금도 25% 삭감해야 한다. 참세상에 의하면 정리해고 규모는 1만5000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7월 10일자 10면, 참세상 7월 11일]. 인민은 '빵'을 찾고 있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정부는 주먹으로 대응할 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무시는 경제위기 시대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리스 연정을 주도하고 있는 신민당의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정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다른 정당들과 사전 논의도 거치지 않고 6월 국영 방송국의 폐쇄를 결정했다.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들은 그리스의 여러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급속히 성장하자 노골적으로 정치적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급진좌파연합이 정부를 구성하면 지원은 없을 것이라며 말이다.

이집트에서는 아예 군부가 나섰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임기를 채우지 않고 끌어내린 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게 아니다. 군부는 국민의 뜻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들이 내놓은 것은 무르시의 파라오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만수르 과도 정부 대통령은 1992년 무바라크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한 자다. 총리로 지명된 하젬 엘베블라위는 BBC 보도에 의하면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이집트 경제 전문가"다. 이집트 인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자유시장 경제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참세상 7월 10일].

경찰의 폭력은 민주주의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다. 정치인 대부분이 소수 경제 엘리트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리스 정부는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대변인이다. 이집트 군부와 과도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자유시장 경제와 구 무바라크 세력의 후계자다. 심지어 브라질에선 전투적 노동계급 운동으로 탄생한 노동자당(PT)의 호세프 대통령과 정치인들도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에 배신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정치인이 세계 어디서나 가장 인기 없는 이유다. 그리스의 법률가 지아나 쿠루토비키는 심화되는 경찰 폭력이 대표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권위주의적 변형은 그것이 역사적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 한계는 바로 소수 경제 엘리트와 이에 기반한 정치인들의 기득권이다.

Landscapes of emergency from Ross Domoney on Vimeo.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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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30일 이집트 제2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인민들.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전국적 봉기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위기에 처했다. 장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군부도 나섰다. 군부는 "정치 세력은 48시간 이내로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라"며 "국민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부는 마치 봉기한 인민의 편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11월 군부는 '신(新)헌법 기본원칙'을 발표했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선거법을 매우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또한 가로막았다. 인민에 의한 정부로의 권력 이양도 최대한 늦추려고 했었다. 이에 분노한 이집트 인민이 거리로 나서자 군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저격수가 시위대의 눈을 조준사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2012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이 내세운 '파라오법'은 종교적 색채만 덧칠됐을 뿐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군부의 지배와 다를 바 없었다. 무르시와 군부는 때론 갈등하고 싸우지만 인민의 삶을 억압하고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데는 같았다.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군부는 인민의 친구가 아니다.

6월 30일 봉기로 무르시 정부는 식물정권이 될 듯 싶다. 다시 경계해야 할 것은 군부다. 시위대가 자신의 당면 목표를 달성한 후, 즉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이 권력에서 물러산 후 거리로 나선 인민이 다시 집과 직장으로 얌전히 돌아간다면 군부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2011년 보여줬 듯이 말이다.

● [2011년 11월]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
● [2011년 11월] 이집트 총선 첫날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2012년 12월] 끝나지 않는 이집트 혁명, 코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의 2011년과 2013년.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쫓아낸 지 2년 만에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 이집트 인민들. 다시 출발한 이들이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의 주요 도시 거리에 수 백만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이미 2011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떠난 자리에 오른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종교의 탈을 쓴 또 다른 독재자였을 뿐이다. 이집트의 동지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물론 일시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다시 일어섰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애초 2011년 이후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 스페인의 분노하라 운동, 2012년 터키와 브라질 반란에 영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동지들이 다시 터키와 브라질 반란으로부터 고무받아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다시 시작된 이집트의 운동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전에 멈춘 곳에서 출발하게 된 운동은 그 결과가 인민의 승리든 패배든 더 격렬하게 지배자들과 충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30일 시위 전날인 29일 로어매그(ROARMAG.org)에 실린 이집트 활동가들의 편지는 그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스스로를 '카이로의 동지들'이라고 칭한 이들은 단지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합법성에 대한 강조"가 체제의 진정한 핵심을 가리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번 행동이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들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목표가 거리로 나온 시위대 모두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어제의 시위는 이들의 주장이 허언 만은 아닐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집트 활동가들의 공개 편지를 아래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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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속 탁심과 리우의 동지들에게
Roarmag.org 6월 29일ㆍ링크

우리와 함께 투쟁하는 당신에게,

우리에게 6월 30일은 2011년 1월 25일과 28일 시작된 반란의 새로운 단계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경제적 착취와 경찰 폭력, 고문과 살해의 더 심한 판본일 뿐인 무슬림형제단의 통치에 맞서 일어선다.

'민주주의'의 도입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적절한 생계수단과 존엄의 [향상을 나타내는] 어떤 지표를 지닌 괜찮은 삶을 누릴 가능성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선거 과정에서의 합법성에 대한 강조는 이집트에서 우리가 투쟁을 계속해야 만 하는 이유, 즉 얼굴만 바뀌었을 뿐 탄압과 긴축, 경찰 폭력의 원리는 그대로인 억압적 체제의 영구화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정권은 여전히 공중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고 고위직은 개인의 권력과 부를 획득할 기회로만 이해된다.

6월 30일 다시 시작될 혁명의 외침은 이거다: "인민은 체제의 폐지를 원한다". 우리는 비겁한 권위주의나 무슬림형제단의 식민주의적 자본주의,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삶의 목을 죄는 군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무바라크 시대의 구체제로 돌아가지 않는 미래를 찾고 있다. 6월 30일 거리로 쏟아져나올 시위대 구성원들은 아직 이 요구로 하나가 되진 않았지만, 피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 [활동가] 네트워크는 여전히 약하지만 최근의 봉기, 특히 터키와 브라질의 봉기로부터 희망과 영감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정치적ㆍ경제적 현실에서 비롯했지만 우리 모두는 인민에게 도움이 될 것은 생각도 안하는 체제를 영구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최상층의 지배를 받아왔다. 우리는 2003년 브라질 바히아의 무상교통운동의 수평적 조직과 터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민중의회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지역화된 신자유주의 원리가 인민의 삶을 짓밟는 과정에 오직 종교적 허식만을 추가했을 뿐이다. 민간 부분을 공격적으로 성장시킨 터키의 전략은 반대자들과 진보적 계획에 대한 시도를 억압하는 주요 무기로서 경찰의 폭력적 지배와 같은 원리의 권위주의적 지배로 변화했다. 브라질에서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둔 정부는 그들의 과거가 인민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협력하는 자신을 가리는 가면일 뿐임을 입증했다.

최근의 이러한 투쟁들은 보다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쿠르드족과 라틴 아메리카 토착민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 지난 10여 년간 터키와 브라질 정부는 생존을 위한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시도해왔지만 실패했다. 정부 탄압에 맞선 그들의 저항은 터키와 브라질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저항 물결의 선구자다. 우리는 각자의 투쟁이 중대함을 인식하는 것의 절실함을 알고, 새로운 공간과 주민, 공동체로 확산되는 반란의 양식을 찾아냈다.

우리의 투쟁은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 무바라크와 군부, 무슬림형제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위기 때 국가가 권력을 사용해 저들의 부와 특혜를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해 [인민의] 재산을 빼앗고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투쟁하는 우리는 고립돼 있지 않다. 우리는 바레인, 브라질, 보스니아, 칠레, 팔레스타인, 시리아, 터키, 쿠르디스탄, 튀니지, 수단, 사하라 서부 지역과 이집트에서 공통의 적에 맞서고 있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모든 곳에서 그들은 우리를 폭력배, 파괴자, 약탈자,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제적 착취, 적나라한 경찰 폭력, 부조리한 법질서에 이상의 것에 맞서 싸우고 있다.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역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착취할 수 있게 하거나 세계적 권력이 우리 매일의 삶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하는 중앙집권적 억압기구로서 국가에 반대한다. 총탄과 방송,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투쟁을 [억지로] 통일하려 하거나 동일시 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투쟁들의 배경에는 우리가 싸우고 해체해 쓰러뜨리려 하는 지배와 권력의 동일한 구조가 있다. 함께하면 우리의 투쟁은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체제를 쓰러뜨리길 바란다.

카이로의 동지가.

※ 위 편지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임의로 옮긴 것임으로 인용하거나 퍼가시려면 꼭 원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잘못 옮겼거나 틀리게 이해한 데 대한 지적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무르시 대통령의 새 헌법에 반대해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든 이집트 인민. [사진=RoarMag.org]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후 휴전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쓸모를 인정받은 무르시는 국내 정책에도 과감한 전환을 시작했다.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새 헌법은 무슬림형제단이 장악하고 있는 제헌의회와 상원(슈라위원회), 무르시 대통령에게 견제받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2011년의 혁명적 열정이 충분히 식었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한 반혁명 시도일 것이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여준 이집트 인민의 용기는 혁명이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줬다. 물론 아직 어느 한쪽도 승리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내려온 무슬림형제단은 설탕과 빵, 고기를 미끼로 빈민을 반혁명의 도구로 동원하고 있다. 군대의 움직임도 여전히 큰 변수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표현한 이집트 혁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나딤 페타이가 RoarMag.org에 기고한 아래 글은 이집트 혁명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설명하고 있다.

※ 아래 글은 제가 읽기 위해 한글로 옮긴 것으로, 상당히 많은 의역과 오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링크한 원문을 참조하세요.


[RoarMag.org] 타흐리르, 파라오의 시작과 끝
2012년 12월 3일 나딤 페타이링크

이집트의 혁명가들이 타흐리르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그들이 시작한 것, 파라오를 무릎 꿇리고 진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끝내려 한다.

1970년 사다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치적 자유의 성장 속에서 불법 단체였던 무슬림형제단은 정치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결과에 상관없이 그들의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킬 수 있었고, 정부의 간섭 없이 아이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주입할 수 있었고, 이집트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풀뿌리 조직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났다. 따라서 한 세대 이상 폭력적인 체제에서 유일한 야당이었다는 것, 무바라크 타도를 계기로 대의민주주의를 시행하게 됐을 때 의회와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진짜 정당이었음은 분명하다.

2011년 1월 25일 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무슬림형제단은 저항에 동참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며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이 승리 없이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인민의 편에 섰다. 모스크의 이맘(이슬람 성직자)들은 거리에서 충돌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각의 기도를 중단하기 시작했다. 어떤 흠결도 없는 아름다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의 퇴진은 이집트 사람들이 본적 없는 빈 공간을 열어젖혔다. 무슬림형제단이 사태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2012년 여름 이집트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을 때 선택지는 서구의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이었다: 바로 차악을 선택하는 것. 그렇다. 구체제의 대리인인 아메드 샤피크와 무슬림형제단의 회원인 모하메드 무르시가 선택지였던 것이다. 구체제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은 무르시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그가 60년 만에 권력에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됐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믿음, 서구의 모든 이들이 듣고있는 이야기다. "혁명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이것이 이집트 인민들이 싸워서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다고 말이다. 그러나 혁명의 무대 뒷편에서 진정한 선택권의 부족함에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선거를 거부한 많은 인민들은 계속되는 국가 탄압과 이슬람 정당이 요구하는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에 맞선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 혁명은 국제적 압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예를들어 국제통화기금(IMF)은 누가 권력을 잡든지 상관 없이 이집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고, 긴급한 자금 지원에 대한 댓가로 극적인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해마다 12억 달러 규모의 군사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과 짝을 이룬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보여준다: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 체제와 그의 전임자들이 해왔던 것과 같은 세계적 군사력을 위한 또다른 애완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집트의 지정학, 크기, 아랍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한 문화적 중요성은 서구ㆍ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한다. 그렇기에 언론은 무르시를 그들의 동맹을 위한 이집트의 영웅으로 추켜세운다. 그들은 무르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협상을 이끌어낸 사람이라고 찬양한다. 바로 그들이 사다트에게 대했던 것 처럼 국제사회는 무르시가 독재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실용주의자이자 믿을만한 대화 상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휴전을 발표한 며칠 후 바로 무르시는 이집트 인민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충격을 준 법령을 공표한다.


새 법령의 진실
자료:알자지라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정화를 목표로 한 법령을 말한다.
-새 법에 의하면 4년 간 대통령이 검사를 임명할 수 있다.
-무르시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그 자신에게 부여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사실상 현직 검찰청장을 파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떤 권한으로도 대통령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르시는 시위대 살해와 관련한 재판의 재심을 명령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새로운 의회 선거 때까지 그의 권력을 유지한다.
-의회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선출될 수 없다.
-무르시는 또한 새로운 헌법의 제안을 위한 기간을 늘렸다.
-무르시는 그 자신이 혁명을 수호하는 절대 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법령은 무르시의 절대 권력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원[슈라위원회]이 (새 헌법 제정을 담당한) 제헌의회와 마찬가지로 [사법부에 의해] 해산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상원과 제헌의회] 둘 모두 동시에 무슬림형제단 대표자 다수에 의해 조정된다. 두 집단에서 몇몇은 저항에 참여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중단시키진 못할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새로운 법과 헌법의 일부에 의해 여성 권리가 억압받았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로 변화하면서 두려움은 현실이 되고 있다. 많은 혁명가들이 인민의 혁명을 도둑맞았다는 의식이 확산되길 기대하며 몇 달동안 거리를 점거한 덕에 무르시는 점차 정당성을 잃어갔다.

몇몇 자경단은 여성에게 (언어와 육체적인) 공격을 가하는 폭력배를 찾기 위해 카이로 도심을 수색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해질 때까지 스스로를 폭력배와 여성 사이에 서있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평화적인 데서부터 더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거리에서 여성을 학대한 남성의 눈에 페인트를 뿌리는 한 자경단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르시가 새 법률을 밝히자 마자 많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충돌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 악명 높은 타흐리르 광장에 횃불이 밝혔다. 상황은 무르시 얼굴의 절반은 무바라크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 무르시 무바라크". 그리고 그 안에 무슬림형제단의 실수가 있다: 그들은 대중의 혁명적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을 만큼 충분히 기다렸다고 믿었다. 그들은 확실히 틀렸다.

지난 1년 반동안 이집트 사회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각 수준을 성취했다. 특히 무바라크 퇴진투쟁의 맨 선두에서 싸웠고 봉기에서 친구와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 혁명가들 자신의 혁명적 정서는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더욱 평범한 이집트 사람들이 무르시의 법률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자신의 투쟁이 소용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기보다 타흐리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른 점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인민은 분열돼 있다. 무르시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 거대한 규모의 - 지금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 종파간 분열이 성장했다. 한쪽에는 자유주의자, 좌파, 판사, 청년, 지식인, 혁명가들이 있다. 다른쪽에는 무슬림형제단 회원ㆍ동조자들과 설탕ㆍ빵 또는 (드물게) 고기에 매수당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 18일간의 타흐리르 광장 점거 기간에 낙타를 타고 공격한 그 날 동원됐던 같은 사람들 - 이 있다.

거리는 다시 한 번 작은 전쟁터가 됐다. 경찰은 최루탄을 뿌리고, 무슬림형제단 민병대는 평화적인 반정부 인사들을 공격하고, 혁명가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리던 군대가 제자리를 지키는 동안에 일어났다. 바로 혁명의 시작인 이러한 일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저울의 균형추를 움직일 것이다. 만약 군대가 반정부 인사들의 편에 선다면 무르시가 오랫동안 인민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의 파라오법은 그것이 제기됐던 만큼 빠르게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군대가 무슬림형제단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면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2011년 11월 뉴욕타임스는 이집트 혁명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시간, 그것은 진실이 됐다: 군사 최고위원회(SCAF)는 "과도정부" 형태로 권력을 잡았다. 이 기간 내내 시민에 대한 군사재판이 실시됐고 이집트 인민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하나의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체제에 맞서기 위해 단순히 투쟁한 것 같았다. 체제 스스로 무너지진 않았다. 단지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다. 무바라크로부터 SCAF로, 다시 무함마드 무르시로.

현재 우리는 느리고 고통스럽게 태어나고 있는 끝나지 않는 혁명의 마지막 무대를 목격하고 있다. 현실에서 대의민주주의적 과정에 포함된 내재적 오류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이집트 인민이 더 많은 무언가를 요구하며 봉기하는 게 가능할까? 세계 모든 곳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봉기를 고무한 후 거의 2년이 된 이집트 사람들이 바리케이트로 되돌아와 그들 스스로 그와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이집트 군대의 [앞으로의] 결정을 포함한 이러한 질문들에는 단지 시간 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변이 무엇이든 이 혁명이 시작된 후 거의 2년 지난 지금 그 끝이 가까워졌다. 끝나지 않는 혁명은 더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들은 2011년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11월 22일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가 진압군이 발사한 최루탄을 들어 던지고 있다. [the Atlantic/Reuters/Amr Abdallah Dalsh]

오늘(28일)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독재가 종식된 후 첫 선거가 열립니다. 하원 498명, 상원 390명의 의원을 뽑는 내년 3월까지 진행될 기나긴 선거의 시작입니다. 민주주의의 쟁취를 기뻐하고 그 권리를 향유해야 할 이집트 인민에게 오늘의 선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군부독재의 종료와 민주적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18일 시작된 저항이 열흘 넘게 이어지며 40여 명의 사망자 등 수 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기 때문이죠.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장악한 정권은 민주적 권리 확대에 있어서 불철저할 뿐 아니라 되레 무바라크 독재 종식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청년과 노동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민주세력을 탄압했죠. 엠네스티에 의하면 1만2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군사법정에서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 적어도 13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필립 루더 엠네스티 중동ㆍ북아프리카 실행감독은 무바라크의 억압적인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최고군사위원회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평화적 저항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수천명의 시민을 군사재판에 회부함으로써 평화적 저항을 분쇄하고 무바라크 비상법의 영향(소관)을 확대해왔다. 최고군사위원회는 1월 25일 시위대가 끝장내기 위해 싸워왔던 억압적인 지배를 계속하고 있다." - 필립 루더 엠네스티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 실행감독
● [엠네스티] 이집트: 군부독재가 1월 25일 저항의 희망을 깨뜨리다(링크)

"사회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는 깡패와 군사 법원을 동원해 시위 참가자와 파업 노동자 들을 공격했다. 노동자들은 법원의 사유화 철회 결정을 환영하며 사유화된 기업들의 재국유화를 바랐지만, 정부는 이 염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또, 정부는 옛 무바라크 정당 인사들의 선거 참가 금지를 명한 법원 결정을 무시했다. 현 이집트 정부는 자신이 무바라크 정권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 11월 20일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성명서
● [레프트21] "군사독재 물러나라, 무바라크 통치 종식하라!"(링크)

이집트 인민의 불만은 지난 몇 개월간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민주주의적 권리는 확대되지 못했으며 경제적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은 부정당했습니다. 10월 9일에는 군부가 콥트교도를 공격해 28명이 학살당하기도 했죠.

내년 3월까지 여러 단계에 걸친 복잡한 선거계획도 군부정권의 민주화 이행 의지에 대한 의심을 부추겼습니다. 오늘(28일) 열리는 하원선거도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게 아닙니다. 28일, 29일 이틀에 걸친 첫 선거는 9개 주 240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6번의 선거를 치뤄야 1단계가 끝나죠. 군부는 대통령 선거 등 정권의 민간이양에 관한 정확한 일정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죠.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1월 초 발표한 군부의 '신(新)헌법 기본원칙'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기본원칙은 민간정부가 군부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죠.

● [뉴시스] 이집트, 혼란 속에 하원 선거 실시(링크)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링크)


11월 20일 부상당한 시위대 한 명이 타흐리르 광장 인근 병원에서 진압군에 의해 사용된 탄피를 들어보이고 있다. [boston.com/Reuters/Amr Abdallah Dalsh]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사용된 최루탄. 'Made in U.S.A.'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the Atlantic/AP]

이집트 인민은 군부의 잔혹한 시위진압으로 더 큰 분노에 휩쌓이고 있습니다. 특히 진압군이 사용하는 고무총탄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죠. 시위대에 의하면 훈련된 저격수가 시위 참가자의 '눈'을 목표로 저격한다고 합니다.

아흐메드 하라라는 1월 29일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는 그날의 싸움을 기억하기 위해 실명한 눈을 가린 안대에 그 날짜를 적어놨었죠. 하라라는 11월 20일 다시 시위에서 다른 쪽 눈도 잃었습니다. 그는 "이날 오후 3시쯤 타흐리르 광장에 나갔는데 7~10m 거리에서 진압군이 쏜 고무탄환에 눈을 맞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사메 나기브에 의하면 '11월 20일'이 적힌 새로운 안대를 한 하라라는 여전히 시위대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잔혹한 진압군 저격수는 시위대에게 '아이 헌터(eye hunter)'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군부는 고무총탄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최고군사위원회가 임명한 만수르 알에사위 내무장관은 "진압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은 물론 고무탄ㆍ새총 등을 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려면 손발이라도 맞아야죠. 히샴 시하 보건부 대변인은 "지난주 시위사태에서 실탄ㆍ고무탄ㆍ새총에 의해 최소 41명이 사망하고 325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죠.

● [레프트21] 정권에 맞선 이집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다(링크)
● [조선일보] 이집트 시위대 "아이 헌터 처형하라"(링크)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은 11월 25일 뉴욕 이집트 영사관을 방문해 군부정권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항의했다. 이들은 미국산 최루탄이 이집트 군부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며 12월 1일에는 펜실배니아 제임스타운의 군수공장으로 항의 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occupywallst.org]

이집트 군부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는 국제적인 연대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미국이 만든 최루가스와 무기가 이집트 인민에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 무기의 생산과 수출을 중단시켜달라며 연대를 호소했었습니다. 군부독재를 대변하는 이집트 대사관과 이집트 군사정권과 거래를 하는 자국 정부에게 항의해달라고도 요청했죠.

이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Occupy Wall Street) 참가자 수백명은 11월 25일 뉴욕의 이집트 영사관으로 항의행진을 진행했습니다. 12월 1일에는 이집트 군부독재 정권에 최루가스를 공급하는 펜실배니아 제임스타운의 공장으로 항의 행진을 할 계획입니다.

이집트 인민에 대한 연대의 행동은 한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시민ㆍ사회단체 회원 50여 명은 11월 25일 이집트 대사관 앞에 모여 군부정권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항의했습니다.

● [occupywallst.org] 이집트 인민의 연대 요청에 답하다(링크)


오늘 시작된 이집트 총선의 최대 수혜자는 군부가 될 듯 합니다.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온 무슬림형제단은 자칫 자신들이 '다수파'가 될 이번 총선이 무산될까 전전긍긍하며 18일 시작된 저항에 불참하고 있죠. 그들의 이러한 착각은 정권을 민간정부가 가져온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군부의 손을 들어줄 뿐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급진적 저항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온 이들이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행동에 얼마나 큰 해악을 미치는지 입증해주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종교적 반제국주의가 아닌 세속적 대안정치세력의 성장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집트는 앞으로 더 큰 변화의 혼란에 휩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때론 이란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퇴행적 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 대안정치의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번 이집트 혁명이 단순히 법적인 '민주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은 튀니지에서 노점단속을 당한 한 청년의 분신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 또한 최근 고통스러운 경제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무바라크 정권의 공기업 사유화 정책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수년 전부터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행동이 성장하면서 이번 혁명의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수의 참여로 만들어질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랍봉쇄에 협조한 댓가로 이집트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원조의 댓가는 결코 국민경제 전체를 살찌운 것이 아니었다. 예시적으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노선의 낫세르하인 1960년~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2배 증가했으나 이후 사다트, 무바라크를 잇는 70년~2000년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제로상태라고 한다. 이어 1991년이후 지금껏 314여개 국영기업 중 150개를 사유화(다수를 서방에 팔아먹은) 할 정도로 일방적인 신자유주의를 펴면서 경제가 파탄지경이다. 특히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후 세계경제 불황속에서 미국의 양적완화정책, 저금리기조는 전세계적으로 제삼세계 국가들에 물가압력(인플레이션)으로 전가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수요의 폭증에다 국제투기세력에 의한 곡물 및 석유 투기까지 겹치면서, 이집트에서도 빈곤과 물가상승, 실업난등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현재 이집트 시위는 이런 정치경제적 맥락하에서 발발했다.
현재의 시위는 ①애초에 두 명의 빈민노점상의 분신항의에서 촉발했듯이 사회경제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 ②그러면서 국영기업을 주축으로 한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이 나라에서는 정치엘리트=경제엘리트(소위 state business elite)인지라, 무바라크등 소수 정치엘리트에 대한 공격과 경제적인 요구의 양자가 구분되기 어렵다는 점이 특징이다(예를 들어 이 국가는 군부가 방산업체 대부분을 경영하는 식이다). 토니 블레어, 오바마등이 그래서 이집트사태 해결에 '경제개혁'이 중요한 과제라고 이미 말했었다." - 권영숙, 1월 31일
이집트 시위의 성격과 전망(링크)

이집트 인민의 봉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뉴욕의 점령하라 운동이 월스트리트에 맞서 싸우는 것, 유럽의 분노하라 시위대가 정부와 탐욕적 자본에 맞서 싸우는 것, 이집트의 인민이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 모두 99% 인민의 삶을 파괴하고 소수 1%의 이익만 늘려주는 이 체제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이 귀환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자신감 없는 급진적 정치세력의 외소한 모습이 너무나 아쉬운 때입니다.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11월 22일 타흐리르 광장 인근의 시위대. [the Atlantic/AFP/Getty Images/Mahmud Hams]

※ 아래 링크에서 더 많은 이집트 저항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간혹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인한 잔인한 사진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the Atlantic] 이집트의 끝나지 않은 혁명(링크)
● [boston.com] 이집트, 새로운 저항이 폭발하다(링크)

이집트 군부의 '신(新)헌법 기본원칙'에 대한 반발로 18일 시작된 시위가 날로 격화되고 있다. 군경은 고무총탄과 최루가스를 사용하고 이로 인해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22일 내각 총 사퇴로 이 위기를 넘겨보고자 하지만 몸통인 '군부'가 분노의 초점이 되는 상황에서 시위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 하다. [http://www.stern.de]

2월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독재를 종식시킨 이집트 인민이 다시 거리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항은 18일부터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리는 최고사령관의 종말을 원한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고 요구하며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죠. 군부정권의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집트 인민의 저항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ㆍ수에즈까지 이집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고무총탄ㆍ최루가스 등을 이용해 강경진압을 하고 있고 이로 인해 30여 명 이상의 사망자를 포함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독재를 종식시킨 이후 최고군사위원회의 통치 하에 민주화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11월 28일 진행 예정인 총선을 시작으로 내년 1월까지 3단계에 걸친 선거로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드는 게 그 첫 단계죠. 하지만 군부는 의회가 구성된 이후에도 내년 말에서 2013년 초 사이에 예정된 대선까지 행정부를 장악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집트 인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붙인 것은 11월 초 군부가 발표한 '신(新)헌법 기본원칙'입니다. 군부가 제시한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민간 정부의 수립 후에도 예산 등에서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레드 파미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 교수는 "이집트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은 집권 군부"라며 "군부는 선거법을 매우 어렵게 꼬아놓고 감시ㆍ견제를 피할 수 있는 새 헌법원칙을 발표하는 등 장기집권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이집트 현재당'을 창당한 이슬람 로트피는 "이집트 군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막고 있다"며 민주화 혁명 이후 진전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지적했죠.

이집트 인민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군부뿐만이 아닙니다. 이집트 법원은 "이번 총선에서 무바라크 정권의 인사들도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해 독재정권의 부역 세력을 정치권에서 뿌리뽑고자 하는 이집트 인민의 열망을 배신했죠.

현재 시위대는 군부에게 정권을 조속히 민간정부로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권은 내각 총사퇴라는 방법으로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합니다. "에삼 샤라프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최고군사위원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는 모하메드 헤가지 이집트 내각 대변인의 성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이집트 정치권력의 핵심은 군부, 최고군사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내각 총 사퇴라는 꼬리자르기 시도에도 초점은 최고군사위원회 사령관인 후세인 탄타위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인민은 민주화를 위한 제2의 봉기에 나서고 있는 듯 합니다. '4월 6일 운동'과 '혁명청년연합' 등은 오늘 오후 4시(한국시간 11월 22일 오후 11시) 타흐리르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백만인 행진'이 예고됐습니다.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의 영광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물러날 때까지 이곳(타흐리르 광장)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간에 의한 국가를 원한다."
"지난 금요일(18일) 모든 정치적 계층의 사람들은 군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민간의 민주적인 국가를 원하며 이러한 합의는 군부를 굴복시킬 것이다."

●프레시안|"이집트 총선 지옥으로 가고 있다" 최악 유혈사태(링크)
●프레시안|이집트 정국 격랑 … 내각 총사퇴, 시위대 '조기 대선' 요구(링크)
●참세상|격화되는 이집트 反군부 시위(링크)
●참세상|다시 일어난 민중봉기 … 이집트 과도내각 총사퇴(링크)
●경향신문|이집트 군부 유혈진압에 민주선거 좌초 위기(링크)
●중앙일보|타흐리르 광장 또 유혈시위 … 이집트 '제2 혁명' 불붙나(링크)

지난 주 뉴욕 경찰의 주코티 공원 해산은 끓는 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10월 말 오클랜드에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11월 2일 도시 총파업을 불러일이켰 듯, 뉴욕 경찰의 점거운동 해산은 17일 거대한 항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3만명 이상의 사람이(뉴욕경찰에 의하면 3만2500명) 행진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학생 등 다양한 99%의 사람들입니다.
- 미국과 전 세계의 30 곳 이상의 도시에서 이날 저항 행동에 동참했습니다.
- 99% 운동 탄생 두 달을 기념해(11월 17일은 9월 17일 첫 점령이 있은 지 두달이 되는 날입니다) 브루클린 다리에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뉴욕 증권 거래소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습니다.
-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강력하고 다양한 운동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아래 OccupyWallst.org의 링크에서 확인하세요.
November 17: Historic Day of Action for the 99%(링크)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17일의 저항 행동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플리커 'occupy'로 검색한 사진(링크)

19일 일어난 UC 데이비스에서의 경찰 강제진압은 또다른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OccupyWallst.org는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이 유색인종, 성소수자, 성노동자 등 소외받는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일상의 현실이었다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OccupyWallst.org는 이들의 폭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물으며, 경찰들에게 1%의 부자들을 위한 행동을 중단하라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경찰이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 계급, 동성애자, 유색인종, 그밖에 소외받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강금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악하고 부정의한 체제를 위해 일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청합니다. 자랑스럽게도 99%와 연대한 경찰 지구대장 레이몬드 루이스와 다른 이들처럼 경찰관들이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말기를 호소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링크)

점령하라 운동은 현재 미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찰의 점령하라 운동에 대한 공격은 경찰 개개인의 자의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전국적으로 계획되고 준비된 정부와 1%의 반격이라는 것이죠. 이에 대항하기 위한 또 하나의 행동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주인공은 바로 오클랜드입니다. 오클랜드의 점령하라 운동은 미국 서해안 전역의 항구를 폐쇄하는 행동을 12월 12일 함께하자는 호소를 발표했습니다. 이 호소는 오클랜드 점령하라 운동의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미 항구와 (골드만삭스가 소유한) SSA 터미널을 봉쇄하기 위한 행동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한 이날 (12월 12일) 행동은 EGT의 공격에 맞서 투쟁중인 워싱턴주 롱뷰 부두노동자에게 연대를 하긱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EGT는 Bunge사가 이끄는 국제적인 곡물 수출기업이라고 합니다. 오클랜드 점령하라 운동은 EGT가 롱뷰의 부두노동자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Occupy Oakland Calls for TOTAL WEST COAST PORT SHUTDOWN ON 12/12(링크)

이들 점령하라 운동에게 자신감과 영감을 불어넣어준 아랍 또한 여전히 그 불만들이 가라안지 않고 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군부의 지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군대의 공격으로 최소 1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OccupyWallst.org에서도 이 알자이지라 홈페이지를 링크해 이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軍-시위대 충돌 '사상자 속출'(링크)

어쩌면 우리는 지금 1968년 이후 새로운 세계적 운동의 서막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의 좌파 활동가들이 '목격자'로만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분발해야 할 겁니다. 언론에서는 '유시민의 딸'이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장이 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대학생 지지모임 회원인 것에는 관심이 없죠. 언론 인터뷰에 의하면 그녀는 지난해 서울대 법인화 반대 점거투쟁(Occupy!)의 과정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급진화됐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소식입니다. 비록 '보이스카웃' 같아 보이고 유아적인 '동호회 활동'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학생운동에서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단체의 학생회원이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은 것은 무척 오랜만인 반가운 일입니다. 그녀 개인이 이후 어떤 길을 가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많은 학생이, 청년들이 그녀와 같은 길을 모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의 한 시민이 아랍세계 독재자들의 사진을 들어보이며 퇴진 촉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미 축출된 자인 엘아비딘 벤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맨 왼쪽)과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사진에는 ‘제거’를 뜻하는 표시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지도자(가운데)와 하마드 빈 이사 알칼리파 바레인 국왕(오른쪽 두번째),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의 사진에는 물음표가 붙어있다. [한겨레, 카이로=AP 뉴시스]


아랍혁명은 지난 2009년의 이란 시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트위터 혁명' '페이스북 혁명' 등이라 불립니다. 이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공통된 것이죠.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SNS는 민주주의의 열망에 새로운 도화선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 이에 부정적인 편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도구가 혁명을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창출할 수 있겠지만 결국 결정적인 전투는 오프라인의 거리에서,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에 관련해 읽어볼 글은 조동원의 '아랍 혁명과 페이스북 '반'혁명'입니다.

아랍 혁명과 페이스북 '반'혁명, 조동원,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링크)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전역으로 번진 아랍의 사회 변혁운동이 처음에 튀니지에서 퍼져나오고 이집트로 확산되는 것처럼 보일 때, 지배 언론은 이를 '재스민 혁명' 말고도 '페이스북 혁명' '트위터 혁명' '위키리크스 혁명'으로 불렀다. 물론 사회운동 조직과 활동가들이 독재체제 하의 억압적인 미디어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해외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시위 조직화와 대중동원을 이뤄낸 것이 사실이다(jadaliyya). 하지만 '페이스북 혁명'의 이면에는 페이스북 '반'혁명이 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이른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는 사회운동에 도움이 된 것 이상으로 지배 권력이 봉기와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민을 감시하는데 써먹고 있는 도구다. (… 생략)

위 글에선 지적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 SNS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도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인터넷(모바일을 포함한) 보급률이 지나치게 높다보니 세계인의 대다수가 우리와 다를바 없는 모바일 생활을 누리는 것인냥 착각하기 쉽죠.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대다수의 아랍 인민들은 새로운 기술의 혜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SNS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중산층 이상이 아닌 하층 노동계급의 참여에 의해 무바라크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점은 리비아 카다피의 반격과 학살에 맞선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보통은 유엔 혹은 미국과 서방 세계에 의한 군사적 개입, 비행금지구역의 설정 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리비아 국민위원회조차도 카다피의 폭격을 막기 위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카다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금 당장이라도 군사적 개입을 할 것 처럼 나섰던 미국이 오히려 카다피가 힘을 되찾는 듯 보이는 어제와 오늘 군사적 개입에서 한 발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죠. 어쨌든 이와 관련해 진정한 국제연대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혁명 이후 레디앙에 뛰어난 분석을 연이어 기고한 문이얼(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은 리바아 인민의 승패는 알제리 인민의 저항에 달려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우선 카다피가 어떻게 힘을 되찾았는 가를 묻습니다. 그는 카다피의 배후로 알제리 정부를 지목하죠. 그렇기에 카다피의 목숨줄을 죄기 위한 결정적 힘은 바로 알제리 인민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튀니지 혁명 이전부터 알제리에서도 반란과 시위가 계속됐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것은 그의 글을 읽어보세요.

리비아 해결 열쇠는 알제리 민중?, 문이얼, 레디앙(링크)
이와 관련해서 서방 언론을 비롯한 주류언론들이 애써 주목하지 않는 점 한가지를 다뤄보자. 최근의 외부의 군사적 개입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카다피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그토록 완강하게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해서다. (… 생략 …) 알제리 통치자들은 리비아의 카다피가 몰락하면 다음 차례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인근의 튀니지가 혁명으로 무너졌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금 더 거대할 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리비아마저 무장항쟁으로 카다피가 몰락 위기에 놓이자 알제리 정부는 다급해진 것이다. 결국 알제리 통치자들은 바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카다피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 생략 …) 이 점에서 현재 리비아 내전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서방의 공습이 아니라-중동 혁명에 영향 받아 알제리 군부에 저항하고 있는 알제리 민중들이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이 알제리 정부를 붕괴시킨다면, 그 자체로 카다피에 대한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타격일 것이다.


"Egypt supports Wisconsin workers"

2월 11일, 무바라크의 항복 선언 이후 이집트의 저항은 아랍  세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비아와 바레인에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레인의 왕세자는 강경한 시위대의 모습에 한 발 물러서 대화를 하자고 나섰지만 가다피는 더욱 강경하게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통신망을 마비시킨 리비아 정부 때문에 정확한 소식은 들어오지 않지만 무바라크가 이집트에서 시도했던, 깡패와 흉악범을 동원한 유혈사태 기도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집트의 저항은 아랍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것과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선 침묵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의 건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는 언제나 혁명의 예측할 수 없는 급작스러움과 신기술의 영향력을 떠들기에 급급합니다. 우리나라의 1987년 6월 항쟁을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그 전해의 건대항쟁과 5ㆍ3 인천 항쟁, 다시 그보다 앞선 85년의 구로동맹파업과 일일이 거론하기 힘든 여러 싸움들이 1987년 6월 항쟁을 준비해왔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죠. 이번 시위의 중심적 역할을 한 청년 운동인 4월 6일 운동은 2008년 4월 6일의 노동자 파업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레디앙에 실린 문이얼의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에서 이집트 노동자 투쟁의 역할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이집트 혁명은 지난 몇 년 전부터 이집트 내에서 가열되기 사작한 좀 더 긴 과정의 클라이맥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200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이집트 노동자들의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4월 6일에도 또다시 파업이 발생하였다. 파업이 발생하고나서 수시간만에 파업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파업 참여자들은 무바라크의 포스터를 끌어내리고 이를 짓밟았는데, 급기야 파업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는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면은 무바라크가 통치한 지난 30여년 동안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으로 이집트 정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파업으로 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또다시 보너스와 임금 인상 등의 양보를 획득했고, 이 파업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청년운동인 '4월 6일 운동'이 탄생했다.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 문이얼, 레디앙(링크)

노동자 투쟁이 중요한 것은 2008년의 경제위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유럽은 2008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발생한 노동자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금은 가라앉은 듯 하지만 그 투쟁이 언제 다시 터져나올 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은 이집트 투쟁과 지난 며칠간의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이 보여줍니다.

이런 추세는 지난 2004년 이후 기업가들로 구성된 소위 '개혁 내각'이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한 개혁 노선을 밀어붙이면서 더욱 더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들 사이에 부패가 만연했고, 인플레이션과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인해 이집트 서민들의 생활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곤궁해졌다.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 문이얼, 레디앙(링크)

위스콘신주는 1959년 주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최초로 제정한 주이지만 지난달 취임한 공화당 스캇 워커 주지사와 주의회가 재정적자를 이유로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연금 및 건강보험 혜택을 축소하는 내용의 공직사회 구조조정 입법을 추진했다.
'"공무원 단체교섭권 박탈" 법안에 위스콘신주 7만여명 찬반 시위', 한국일보(링크)

위 한국일보 기사의 제목은 참 재밌습니다. 저 제목만 보면 7만여명이 반으로 나뉘어 찬반  시위를 벌인 듯 하지만 사실 대다수는 반대 시위대입니다. 김낙호(트위터 아이디 capcold)씨가 트위터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날로 연대가 확산되어 간다고 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위스콘신주 주도인 매디슨의 인구는 2006년 현재 22만7642명입니다. 인구 20만명의 도시에서 7만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거죠. 서울로 치면 3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과 마찬가지죠.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주지사는 '침묵하는 다수' 드립을 하고 있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저항에 나선 이유가 하나의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죠. 스티글리츠가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2008년 경제위기를 맞은 미국 정부가 기업 살리기(기업복지)에 나서는 가운데 더 가난한 다수의 삶은 내팽겨쳐지고 있습니다(물론 의료보험 등에서 부분적인 개선이 있었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유럽 각국의 대응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죠. 재정적자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복지혜택 등을 축소하는데 골몰하고 있는게 지난해 노동자 투쟁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집트와 아랍 세계 인민은 경제위기로부터 더욱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유럽 정도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타격은 생존을 위협하는 더욱 직접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지난 몇 십년간 지배해온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결합된 것이죠. 사실 이 둘은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하나를 강제로 분리하려 했을 때 나머지 절반(정치적 민주화)도 기형적 변화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죠.

아랍의 투쟁은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합니다. 1960년 4ㆍ19, 1979년 박정희 암살부터 12ㆍ12 쿠데타, 1980년의 5ㆍ17 쿠데타, 5ㆍ18 광주항쟁, 1987년의 6ㆍ10 항쟁과 이어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 …. 아랍의 투쟁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비록 그 투쟁이 독재자의 총탄 앞에 스러진다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아랍의 정치에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칠 게 틀림 없습니다.

가볼 만한 사이트
2011년 아랍 혁명 : 연구공간 L의 블로그, 아랍혁명에 관한 다양한 해외 소식을 번역해서 올리는 곳, 지젝ㆍ바디우ㆍ네그리의 글도 볼수 있다.
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 : 중동ㆍ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관계 분석 블로그. 아랍혁명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