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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 분노할 이유는 많지만 본문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 분노할 이유는 많지만

때때로 2011. 6. 8. 18:04


2010년 10월 14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프랑스 고등학생.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물결이 스페인을 뒤덮고 있습니다. 노동조합과 젊은이들은 광장에 캠프를 만들어 반란을 이어가고 있죠. 아랍의 불꽃이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붙은 듯 합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에서도 거대한 반란의 물결이 일었었죠.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노동조합과 청년들의 반란으로 프랑스는 거의 한 달간 마비됐었습니다. 같은달 34쪽의 얇은 책이 나왔습니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팔린 이책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연이어 번역 출간되면서 올해의 반란을 예고한 듯 합니다.

93세의 노(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그 책입니다.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


그는 젊은날 활동했던 레지스탕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레지스탕스는 단지 나치 독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자유 프랑스'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려 노력했죠. 그렇기에 그들은 금권이 아닌 노동하는 시민 일반에게 이로운 경제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마땅이 받아야 할 자유롭고 차별없는 교육, 국가ㆍ금권ㆍ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언론의 중요함을 새로운 국가의 원칙에 포함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복지제도를 만들고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구연한 '프랑스'를 만들어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내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친 세월, 그리고 프랑스의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70년 전에 구축한 개혁안을 여기서 돌이켜보고자 한다."
-9쪽

그러한 '자유 프랑스'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노 투사는 분노하라고, 자신들의 이상을 이어받아달라고 호소합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ㆍ경제계ㆍ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 15쪽

물론 분노의 대상, 분노의 이유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입니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세심한 눈으로 우리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는 분노의 이유를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불법체류자와 이주민에 대한 '불관용'에 분노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민에 대한 압제에 분노합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라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 22쪽

분노는 우리가 이 세계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 15쪽

그러나 우리는 이 '분노'가 폭력이라는 '절망'에 짓눌리는 걸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폭력이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압제자의 압도적 폭력 앞에서 '폭력'에 경도되는 인민의 '격분'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폭력의 필요성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할 때 우리는 희망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에셀의 글을 읽으며 더더욱 프랑스인들이 부러워졌습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전거로 세울 '경험'과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골에 대해 찬반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가 함께했던 레지스탕스 운동은 해방 이후 '자유 프랑스'의 원칙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에셀은 그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거가 없습니다. 헌법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적어놓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선언일 뿐 임시정부가 세운 어떠한 원칙도 대한민국 건국에는 적용되지 못했죠.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간신히 세운 원칙 마저도 하위법과 임시조치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온 게 한국 현대사죠.

다행히 한국 사회는 끊임없는 반란의 현대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중적 거리시위의 시대는 지났다라는 선언이라도 있을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대한 대중 시위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한국에서 적절한지는 의문입니다. 우선 위에서 말했 듯 우리는 프랑스와 같은 과거의 기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굳이 '분노하라'고 일깨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대중운동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히려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대중운동을 뚝배기 같이 서서히, 하지만 오랫동안 온기를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한국에선 더 필요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지금 다시 대학생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학생들, 깨어나다"는 경향신문 8일자의 1면 제목은 조금 과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6월 10일 집중 시위 이후 기말고사를 지나봐야 현재 운동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이후 무상교육, 반값 등록금 쟁점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쟁점들에 어떠한 공통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이상 이 사회가 우리가 버티고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라는 선언이죠. 이는 무엇보다 치명적으로 높은 자살률이 보여줍니다. 어제는 지나가는 뉴스로 한 노인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이 노인은 치매에 걸린 자신의 남편으로 인해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더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더군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정인을 스스로 죽여야만 하는 사회는 더이상 우리가 살아갈 만한 사회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할 이유'를 찾는 게 아닙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듯, 죽음의 행렬을 지금 당장 멈추게 할 새로운 상상력ㆍ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책이 그리 적절해보이진 않지만, 그러한 계기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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