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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여기 사람이 있다 … '사람을 보라' 본문

[올해의 책] 여기 사람이 있다 … '사람을 보라'

때때로 2011. 12. 31. 14:35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뒤 동료 곁에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고 27년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가 그 동료를 지키겠다며 다시 이 크레인에 매달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흔드는손을 저들 중 몇 명이나 보고 있을까요."
- '사람을 보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의 한 청년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26살의 대학 졸업자인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과일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갔었죠. 그러던 중 경찰의 단속으로 팔던 과일을 모두 빼앗기자 그는 절망과 분노의 불길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새해의 네번째 날,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의 분신은 전 세계적 저항의 봉화로, 세계를 흔드는 2011년 투쟁의 도화선이 됩니다.('한 '청년 백수'의 분신, 23년 독재를 무너뜨리다' 프레시안ㆍ링크)

부아지지가 세상을 떠난 이틀 후, 부산 영도에서는 한 여성 노동자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조용히 오릅니다. "스물한살에 입사"해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두살"이 된 이 여성 노동자는 김진숙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김주익이 외롭게 죽어갔던 바로 그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크레인에 오르며' 김진숙ㆍ링크)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10년 전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있었고 2년을 싸워 노사가 합의를 했건만 그 합의를 사측이 번복하던 날. 키 큰 사내 하나가 숨죽이며 올랐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갇힌 짐승처럼 이 크레인 위를 서성이며 오늘은 동지들이 얼마나 모일까 노심초사 내려다보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숱한 날들을 매달려 있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도크에 배가 빠지던 날, 육중한 배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뒤돌아서던 조합원들을 보며 끝내 유서를 썼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 '사람을 보라'

누가 부르지 않아도 오는 사람들, 불꽃같은 사람들
- '사람을 보라'

부아지지의 죽음이 아랍에 봄을 불러왔듯, 김진숙과 김주익의 크레인 85호가 등대가 되어 사람을 불러모았습니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오는 사람들, 불꽅같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영도로 향했습니다. 6월 11일에는 500명, 7월 9일에는 1만명, 7월 30일에는 1만5000명이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100일 가까이 외롭게, 김주익처럼 죽음의 목마 위에 탄듯 했던 김진숙은 친구를 만났고 삶을 만났습니다. 사람을 만났습니다.

김진숙의 투쟁의 기록,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희망을 향한 애탄 몸짓의 기록, 희망을 배달한 사람들의 기록이 '아카이브'에서 나온 '사람을 보라'입니다. 우리가 잊었던 단어 '단결'과 '연대'는 삶의 동아줄이었습니다. 150여년 전 알렉시스 토크빌은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신분질서, 계급, 직종조합, 가족 따위의 낡은 유대가 더 이상 개인들 사이의 결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 이익에만 전적으로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응당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모든 공적 미덕이 질식당한 협소한 개인주의 속으로 칩거해버리는 것이다. 전제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기는커녕, 모든 공통된 열정과 욕구 및 모든 상호이해의 필요와 공동행동의 기회를 시민들에게서 앗아감으로써 오히려 그것에 저항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전제주의는 공적 미덕들을 사생활 속에 가두어버린다. 전제주의는 이미 산산이 흩어지고 차가와진 공적 미덕들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냉각시켜 버리는 것이다."
- 알렉시스 토크빌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서론 7쪽

2011년은 토크빌이 두려워했던 전제주의의 위협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음이 증명된 한해였습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부산으로 달려갔던 희망버스 탑승자들이 바로 그 산 증거였죠. 새해 벽두 정리해고의 차디찬 통보에 맞서 50여 일을 싸운 홍익대 청소ㆍ경비노동자의 옆에도 바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랍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남미에서도 단결과 연대의 발길은 이어졌습니다. 아랍에서 부아지지가 목숨을 잃고 한국에서 김진숙이 외로이 크레인이 올랐던 1월 미국 위스콘신의 주지사는 교사와 공무원노조 단체교섭권 박탈과 사회보장 혜택 축소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1월 15일 시작된 반대 시위는 위스콘신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노동자ㆍ시민의 연대가 미국에서도 가능함을 입증했습니다. 2월 19일 위스콘신주 주도 매디슨시에는 7만여 명의 노동자ㆍ시민이 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습니다.
('위스콘신 주지사는 미국의 무바라크?' 프레시안ㆍ링크) 사람들의 투쟁은 9월 17일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로 이어졌습니다.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시위대(The Protester)'를 꼽았습니다. 시위대는 기업의 이윤, 독재자의 폭정에 맞서 사람들의 참 삶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바로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사람을 보라'를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올 한해 세계에 울려퍼진 사람들의 목소리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적 미덕을 우리는 다시 찾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의 기억은 끊임없이 회고되며 삶의 원칙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라'는 309일 간 이어진 김진숙의 외침과 연대의 행동 모두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김진숙은 다시 땅을 밟았지만 사람의 외침은 쌍용자동차에서, 유성기업에서 계속 이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이 나를 살렸습니다. 다음엔 쌍용차로 갑시다' 프레시안ㆍ링크) 이 책은 결코 끝을 볼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목에 이 책이 하나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연극치료를 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동작을 해보라 해서 팔을 활짝 벌려 흔들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말을 해보라는데 '고맙습니다' 하며 목이 메였습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 묻는데 '감옥에 있습니다' 그 말을 미처 못 끝내고 울었습니다."
- 김진숙 트위터 12월 29일

사람을 보라|한금선ㆍ노순택ㆍ김홍지ㆍ오은진ㆍ이미지ㆍ이정선ㆍ임태훈 기획 및 편집|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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