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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때때로 2012. 4. 10. 01:57

경제와 정치, 사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르크스는 재빨리 다시 호출되곤 합니다. 위기가 워낙 자주 찾아와서인지 마르크스가 호출되는 빈도도 더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에 공감하며 그의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실제로 더 늘어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입니다. 주류 언론에서조차 마르크스를 언급하고, 출판 시장에서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 더 많이 나온다는 얘기죠.

지난해 나온 책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쓴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갈라파고스ㆍ링크)'와 다니엘 벤사이드의 '마르크스 사용설명서(에코리브르ㆍ링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국내 저자가 쓴 또하나의 책이 나왔습니다. 류동민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입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류동민|위즈덤하우스(링크)

마르크스 사상의 입문을 위한 책은 보통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크게 나누자면 '철학' '역사' '정치경제학' '계급투쟁'과 같은 것이죠. 여기에 마르크스의 간략한 전기가 덧붙여지는 형식입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책갈피ㆍ링크)'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현재 왜 마르크스를 읽어야만 하는지는 보통 서문에서 다루거나, 책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됩니다. 즉 기존의 마르크스 입문서들은 (전에 마르크스를 읽었든 안 읽었든) 이미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들인 거죠. 그렇기에 지난해 말 나온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는 매우 새로웠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는 내용 자체가 새롭진 않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의 부제목입니다.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가 부제인 것이죠. 부제는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도 반복됩니다. 일본의 패기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권을 휘둘러온 앎"(9쪽)으로써 마르크스를 읽을 것을 권합니다.

류동민의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이러한 시도를 한발 더 앞으로 밀고 나갑니다.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라는 부제에서 드러나 듯, 마르크스의 주요 주제들을 위로와 소통ㆍ교감이라는 틀로 다시 정리해냅니다.

그래서 책은 낯선 파티장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외로움ㆍ위로에 가장 어울리는 마르크스의 주제는 '소외'입니다. 보통 소외는 마르크스에게 남겨져 있는 헤겔의 흔적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류동민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경우는 더 그렇죠. 소외를 다루는 경우도 엄밀한 정치경제학적 입장에서 생산물이 상품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런식으로 해서는 요즘 한창 인기인 '위로'와 연관된 주제로 이어지긴 어렵습니다. 당연히 저자는 보통의 마르크스 해설과 다른 방향으로 우회합니다. 인용하기 가장 좋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입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개별적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그 현실에 있어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 그런 까닭에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된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6, 강유원 역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 87쪽

첫 단추는 매우 잘 맞춰졌습니다. 이어서 류동민은 이렇게 씁니다.

사람을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마주치는 슬픔과 기쁨, 그 혼란스러움의 미세한 결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38쪽

이제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ㆍ소통ㆍ교감을 소재로 이어갈 수 있게 된 듯이 보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로부터 이어받은 '유적 존재'라는 개념은 책 전체에서 중심적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부터 시작한 1장의 이야기는 소외에서 물신(페티시즘)으로 이어집니다. 물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넘겨받은 2장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을 펼쳐놓습니다. 유물론을 다룬 2장에서 류동민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그것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중심적 개념인 '클리나멘'을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연과 마주침의 유물론이라고 할까요.

소외에서 페티시즘으로, 다시 유물론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드디어 3장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죠.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류동민을 거치지 않고 마르크스를 살펴보죠.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본질이 참된 현실성을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저 세계, 즉 종교를 자신의 정신적 향료로 삼는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함은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적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탄식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고, 또한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강유원 역 8쪽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인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꼭 종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값비싼 자동차와 오디오에 빠지는 것, 명품의류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을 버리라는 요구만으로는 부족하죠. 문제는 그 배경, 현실세계에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가 현실세계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것을 예고합니다. 그 결실은 완성되진 않지만 '자본론'으로 맺어지죠.

따라서 류동민의 책도 3장에서부터 경제적 운동법칙들에 대한 이야기가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출몰'이라고만 적은 것은, 이 책 전체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적 연구가 부차적 지위로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하면 떠오르는 '노동가치론'이나 '착취'가 강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착취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경쟁과 차별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가 노동자로부터 분리되고 차별받는 상황을 강조합니다.

착취와 경쟁 차별로부터 우리는 정의의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류동민은 4장 '능력, 공정함 그리고 정의'에서 마르크스의 정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경쟁의 원리는 능력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신분은 적어도 법률적, 제도적으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근대사회에서 성과의 차이, 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는 오로지 능력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요?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165~166쪽

먼저 능력의 기원이 불평등함을 설명합니다. 애시당초 자본주의가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는 것"을 돌이켜보면(자본의 시초축적: 인클로저 운동 등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탈취) 자본가들이 자신의 부의 기원을 개인적 근면함과 검소한 생활로부터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더 근본적으로는 능력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라쌀레를 따르던 이들과 마르크스를 따르던 이들이 1875년 고타에서 당 통합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건설하면서 채택한 강령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는]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377쪽) 분배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쟁과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결코 불공정한 거래ㆍ사기ㆍ협잡의 결과는 아닙니다. 이는 '노동력'이라는 특별한 상품의 지극히 공정한 등가교환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투쟁에서 어떤 초월적 기준의 정의는 없습니다. 오직 힘과 힘의 맞부딛침, 즉 투쟁이 있을 뿐이죠.

이제 류동민은 5장 '관계의 비대칭성,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마르크스를 따라 계급투쟁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순화된 언어로, 장의 제목이 말하듯 정치와 민주주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중요한 소재로 다뤘던 너와 나, 소통과 교감의 이야기는 앞선 4장에서 잠시 약해졌다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뚜렷이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현실정치적 발언이 가장 많이 드러난 장이기도 합니다(류동민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민주주의(혹은 계급 투쟁)로 만들어가야 할 사회, 그리고 나와 너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요. 류동민은 6장에서 마르크스적 희망을 설명하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공산주의적 미래를 그린 마르크스의 텍스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공산당 선언'이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강유원 역 41쪽

류동민은 이러한 연합체를, 개인의 소외가 극복된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라는 어려운 과제를 목표 삼아 달려온 책의 결론으로서 훌륭한 마무리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아프냐고 물은 마르크스는 어떤 결론을 답변으로 준 것일까요? "역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류동민 234쪽),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류동민 239쪽)는 마르크스의 말은 결국 해결은 인간 스스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나, 혹은 너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인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의 어떠한 결심,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죠(이는 대개의 자기계발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이 바로 저 부제입니다. 마르크스를 휴머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없지 않긴 하지만 대놓고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이라니 막막해 보였습니다. 저자와 편집자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은 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을 유연하게 연결시켜 설명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물론 마르크스를 안내하고자 하는 이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아직 의문이긴 합니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키워드로 [알랭 드] 보통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의(설탕옷)'는 자칫 잘못하면 이만 썩게 하고 약효과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저는 우회하는 것보다 직접 가는 것이 대개의 경우에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쉽지 않았을 시도에 기꺼이 나선 류동민과 편집자에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는 다른 더 많은 독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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