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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함께 읽기 제1장 자유의 또 다른 언어 - 3 본문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함께 읽기 제1장 자유의 또 다른 언어 - 3

때때로 2012. 2. 6. 17:00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 데이비드 하비 / 최병두
여러 논평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이론적 틀은 전혀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신고전경제학의 과학적 엄정성은 개인적 자유의 사상에 대한 정치적 집착과 병존하기 쉽지 않으며, 이들이 가정하는 모든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은 사유재산권이나 개인 및 기업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하고 강제적인 국가의 필요와도 맞지 않는다. 기업을 '법 앞의 개인'으로 규정하는 법적 기만은 그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며, 아이러니하게도 록펠러가 모든 것에 앞선 '개인이라는 최상 가치'라는 개인적 신조를 뉴욕 시 록펠러 센터의 초석에 새길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 볼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위상에는 많은 모순들이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교리의 가정된 순수성과 연관지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실행의 전개를 만들어내고 있다.
- 제1장/39

신자유주의는 하이에크, 미제스, 프리드먼, 포퍼가 참여해 1947년 몽페를랭회를 창립하면서 그 이론적 기초를 놓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케인스주의와 같은 국가 개입 이론에 강력히 반대했죠. 그러나 하비가 지적하 듯 그들의 교리는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일관성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이 부분은 이후에도 계속 지적할 것이니다.

신자유주의적 교리는 부유한 개인과 기업의 지원을 받은 싱크탱크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집니다. (이미 앞에 나왔 듯이 1973년 이후 칠레에서 실제 '실험'을 해볼 기회를 잡기도 했죠.) 대표적인 싱크탱크는 런던의 경제문제연구소와 워싱턴의 헤리티지재단입니다. 이 교리는 1974년 하이에크, 1976년 프리드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죠. 이 상은 다른 '노벨상'과 달리 스웨덴의 금융 엘리트들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공공 정책을 규제하는 새로운 경제적 정설"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79년 영국과 미국에서입니다.

 

대처는 …… 1970년대 동안 영국 경제를 특징지었던 스태그플레이션을 치유하기 위해 케인스주의를 폐기해야 하며 통화주의의 '공급 측면' 해법이 근본적이라는 견해를 채택했다. 그녀는 이 점이 재정 정책 및 사회정책에서 혁명에 가까운 것[임을] …… 알았다. 이는 노조 권력과의 대립, 경쟁적 유연성을 방해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협의체에 대한 공격, 그리고 복지국가에 대한 집착의 해체 또는 되돌리기, 공기업의 민영화, 조세 감면, 기업 선도의 고취, 외국 투자의 막대한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우호적인 사업 화경의 창출 등을 수반했다. "사회와 같은 것은 없으며, 단지 개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그녀는 뒤이어 그 개인의 '가족'을 포함시켰다-이라는 그녀의 선언은 유명해졌다. 모든 형태의 사회적 협의체는 개인주의, 사유재산, 개인적 책임성, 그리고 가족 가치를 위해 해체되어야 했다.
- 제1장/40~41

대처의 조치는 그야말로 혁명이었죠.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무래도 탄광노동자 파업에 대한 대처의 단호한 조치였죠. 이는 이후 영국의 문화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브래스드 오프' '풀몬티' '빌리 엘리어트'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에서는 '볼커 충격'이 노동계급 생활 조건에 첫 타격을 가합니다. 볼커는 기존까지 유지되어 오던 '뉴딜 원칙(완전 고용 목표와 케인스적 종합재정통화정책)'은 포기되었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최우선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었죠. 이를 위해 이자율을 급격히 올려(볼커 충격) "미국에서 공장을 텅 비게 하고 노조를 와해시켰으며 채무국들을 파산의 고비로 몰고 갔던 깊고 오래된 경기후퇴와 연이은 긴 구조조정기"가 시작됐습니다.

1980년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면서 볼커의 개혁은 더 큰 힘을 받게 됐고 여기에 기업 규제 완화, 조세 감면, 예산 축소, 노조에 대한 공격이 더해졌습니다. 1981년 항공관제사 노조에 대한 공격은 결정적 전투였죠.

 

[레이건 정부의] 탈규제는 항공과 원격통신부터 금융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에서 기업의 이해관계를 강력히 옹호하기 위해 무제한적인 시장 자유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투자에 대한 조세 파괴는 조합화된 북동부 및 중서부로부터 조합이 없거나 미약하게 규제된 남부 빛 서부로의 자본 이동을 효과적으로 보조했다. 금융자본은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점점 더 해외로 진출했다. …… 법인세는 엄청 감소했고, 최상위 개인의 세율은 '역사상 가장 큰 세금 감면'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70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줄었다.
- 제1장/43~44

상위 계급의 권력을 회복하기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후 과정은 불평등이 더욱 확대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부자에게로 부가 거꾸로 재분배되는 것이었죠.

오일달러의 미국으로의 유입도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이끌었죠. OPEC의 유가 인상 이후 공개적이거나 은밀한 미국의 군사적 압박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오일달러를 뉴욕의 투자은행에 맡겼습니다. 갑작스럽게 엄청난 돈을 갖게 된 투자은행들은 이 돈을 가장 안전한 투자처로 보이는 세계의 정부들에게 투자하길 원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국제 신용 및 금융 시장의 자유화"를 원하게 된 것이죠. 미국 정부도 1970년대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1982~1984년 멕시코에서 처음 드러났습니다. 볼커 충격으로 멕시코는 채무에 대한 막대한 이자부담에 시달렸고 결국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기에 이르죠. 뉴욕의 투자은행들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종 신자유주의적 개혁(복지 지출의 삭감,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이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멕시코에 강제됩니다.

 

그러나 멕시코 사례는 자유주의적 실행과 신자유주의적 실행이 갖는 중요한 차이를 드러냈다. 자유주의적 관행은 잘못된 투자 결정에 의해 발생하는 손실을 대출자가 떠안게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관행은 현지 주민들의 생계나 복지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용자가 부채 지불의 비용을 떠맡도록 국가나 국제적 권력들에 의해 강제된다.
- 제1장/48

지금도 지겹도록 반복되는 참으로 뻔뻔한 모습이죠. 그리스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채권자들은 잘못된 투자 판단에 대해 책임지기는 커녕, 어떤 투자가들은 그리스의 '디폴트'에 커다란 판돈을 걸어놓고 경제적 위기를 더 확대시키기도 합니다. 2008년 뉴욕의 투자은행들 (지금은 없어졌죠) 또한 사기성 짙은 투자행위들로 인한 위기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투자자' 살리기에만 급급할 뿐이죠. 지젝이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라고, 스티글리츠가 '기업 복지'라고 비판하는 것들입니다.

하비는 이렇게 세계의 여러 국가로부터 추출한 잉여가 "미국이나 선진 자본주의국가들 어디에서든 경제 엘리트와 상위 계급의 권력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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