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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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녹턴|세실 바즈브로 소설|홍은주 옮김

때때로 2008. 8. 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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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세실 바즈브로 소설|홍은주 옮김|문학동네

동해안에서 바라본 바다는, 그 망망함으로 인해 '끝'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곤 합니다. 남해안에서 본 바다는, 점점이 떠있는 섬들 사이로 이어지는 뱃길들, 하지만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로 때론 강제로 고립시키는 어떤 '운명'의 시작을 생각케 하더군요.

이틀에 걸쳐 해남에 다녀오면서 본 바다는 마침 때맞춰 읽은(하지만 의도하진 않았던) 세실 바즈브로의 소설집 '녹턴'의 바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페리의 밤' '등댓불' '바다로 보낸 병' '혼자라면' 4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입니다.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이곳의 바다는 사람을 혹은 어떤 사건을 만나게 하고 떠나게 하고 다시 그 사람을 '이해하게' 합니다. 헤어짐으로 이어주는 바다랄까요.

자세한 서평은 다음을 기약하며 몇몇 문장들을 옮겨봅니다.

페리의 밤
그무렵 나는 빌린 악기로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빌려온 삶들을 살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음악이었는데, 그나마 빌린 음악, 그러니까 대체 뭘 골라잡아야 할지 몰라 모든 스타일을 다 뒤섞은 음악이었다.
16~17pp.
선술집이나 콘서트 홀의 청중은 어둠 속에서 엇갈려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페리의 청중은 그렇지 않았다. 그네들이 가는 길에 우리도 동반하는 느낌이었다. 그네들의 삶과 그네들의 여행을 생각하는 연주는 우리 마음을 흩어놓기는커녕 음악의 본질로 이끌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페리에서의 연주를 더욱 즐겼다.
18p.

등댓불
그 배와 그렇게 가까이서, 백 년쯤 전에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세웠다는 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파도와 바람을 피한 채 시커먼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애를 태워도 저 요트에 있는 사내의 심중은 알 수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 그러자 불현듯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나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멀고 또 고독한 길이며 그 길에서 우리는 결코 오지 않을 사람들을 헛되이 기다릴 뿐이란 것을.
49~50pp.
가까스로 잠이 들 때면 나는 그 배를 다시 본다. 그리고 나와 그 사내 사이에 싹텄던 관계를 회복한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완전하며 온전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제 그 꿈만을 위해, 내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일치하는 그 환영의 순간만을 위해 사는 꼴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등댓불이 뭔가를(하나의 존재라도 좋고 하나의 사건이라도 좋다) 밝혀주기를 기다린다.
59p.

바다로 보낸 병
그 전화가 걸려온 후 우린 옛일들과 네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서 많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이 늙은이들의 기억이 늘 일치하지는 않았다만 결국 네 삶의 마디마디를 다시 짜맞출 수 있었고, 우리가 몇 번 문턱까지는 갔어도 끝내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곳으로도 들어가볼 수 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알아맞혔는지, 우리가 널 얼마나 깊이 이해하게 됐는지 네가 나타나 봐줬더라면 정말 좋을 텐데…… 얘야, 실은 네가 우릴 꼭 닮았다는 걸 알면 너도 놀랄 거다.
하지만 그러기엔 좀 늦었지. 게다가 네가 만일 사라지지 않고 우리와 같이 있었다면 우린 그 모든 걸 생각할 시간을 절대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흔히들 그런 것처럼 너의 거죽밖엔 몰랐을 거다. 으레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너무 강렬해서 외려 진실을 못 보는 법이거든. 사람들은 그 존재의 이미지에 매료되고 환상에 이끌리지. 알맹이는 알아보지 못하고 번쩍거리기만 하는 광택에 반하게 마련이야. 다들 겉모양이  그 속도 드러낸다고 믿지 않니. 그러다가 존재하던 게 사라지면 그것을 알고 싶은 욕망, 이해하고 싶은 욕망만 남는단다. 그래서 오지도 않을 사람을 향해 팔을 뻗고, 결국엔 허무함만 맛보게 되지. 그러면서도 기다림과 도착과 출발을 또다시 만들어내는 거야.
72~73pp.

혼자라면
일체감은 깨졌다. 그 현장을 떠나는 순간 홀로 갑판에 서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것이 속 쓰린 이별인지 홀가분한 해방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혼자란 기분이 들었다. 남이 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길을 걷는 기분. 야릇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애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들어줄 수 없었던 그 부탁은 둘 중 하나가 죽었을 때나 가능하다는 걸 비로소 이해했다. 둘이 같이 있는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인생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둘을 앞뒤로 세워 묶은 그 약속이 지켜지려면 제각기 상대를 주시하며 과거의 틀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바다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그애였을지도 모른다. 그애는 나보다 더 자유로웠고, 내가 가까스로 눈치채기 시작한 것들을 그애는 일찌감치 내다보고 있었다.
95~9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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