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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친구들

트로츠키, 크루프스카야를 떠나보내며

때때로 2015. 6. 3. 21:41

1939년 4월 '뉴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제5권 4호(1939년 4월)에 실린 트로츠키의 크루프스카야 추도문이다. 크루프스카야는 1869년 2월에 태어나 1939년 2월 숨을 거뒀다. 대괄호[]는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

크루프스카야의 죽음(링크)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대의에 대한 헌신, 열정적이고 청렴한 성격에 있어서 걸출한 사람이었다. 물론 레닌의 아내였던 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렇지만 레닌과 함께 있는 동안 그녀의 정치적 사고가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녀는 많은 경우에 있어 그의 정확함을 확신할 기회를 가졌었고, 그녀의 위대한 동반자이자 지도자를 믿는 데 익숙해졌다. 레닌이 죽은 후 크루프스카야의 삶은 비극적 변화를 겪었다. 그녀는 마치 행복에 대한 대가를 치르듯 영락했다.

레닌의 투병과 죽음은 절정에 이른 혁명과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테르미도르가 시작됐다. 이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 크루프스카야는 혼란에 빠졌다. 그녀의 혁명적 본능이 [당에 대한] 충성심과 충돌했다. 그녀는 스탈린파에 반대하는 시도를 했고 1926년 짧은 기간 반대파 진영에 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분열할 것이라는 전망에 겁먹고 달아났다. 자신감이 떨어진 그녀는 영향력도 완전히 잃었다. 지배 분파는 그녀를 정신적으로 파산시키는 데 자신들의 권력 모두를 사용했다. 겉으로는 존경받았고 상당한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콤소몰[Komsomolㆍ1918년 10월 29일 설립된 공산주의 청년 조직. 원문에는 'the YCL'로 적혀있다. 'All-Union Leninist Young Communist League'의 약자] 내에서 그녀에 관한 매우 우스꽝스럽고 역겨운 추문이 확산되는 동안 조직 자체는 그녀를 체계적으로 중상하며 음해했고 수모를 겪게 만들었다.

스탈린은 항상 그녀가 저항에 참가할까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역사에서 스탈린의 지위를 알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레닌의 옆자리를 부여한 오늘날의 모든 역사 기록은 그녀에게 혐오감을 줬고 그녀를 모욕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고리키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크루프스카야를 두려워 했다. 크루프스카야는 GPU[연방국가정치보안부. 1922년 설립. 1917년 제르진스키 주도하에 설립된 체카(CHEKA, 반혁명ㆍ투기ㆍ사보타주 방지 특별위원회)의 후신]의 철의 장막에 둘러싸였고 그녀의 오랜 친구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수명이 다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감시하에 놓였다. 그녀의 글들은 오직 끝없이 계속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검열관과의 절충 후에야 언론에 공개됐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 스탈린을 칭송하거나 GPU를 명예롭게 다룬 내용의 교정안을 채택하도록 강제됐다. 이러한 형식의 용납할 수 없는 모든 끼워 넣기는 크루프스카야의 의지에 반해 진행되든가 심지어는 그녀 몰래 이뤄졌다. 어떤 의지가 이 불행에 짓눌린 여성을 대신할 수 있을까? 완전히 고립돼, 심장 위에 무거운 돌을 얹고 사는 듯 해야 할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 질병의 올가미에 옭아매인 그녀는 자신의 부담스러운 실존을 힘겹게 이어갔다.

어떻게 살펴봐도, 스탈린 자신을 역사상 가장 야비하고, 가장 흉악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전 세계에 노출시키는 데 성공한 이전의 충격적인 재판[1936년부터 1938년 사이 벌어진 숙청재판을 말하는 듯. 여러 범죄행위가 조작돼 스탈린 반대파가 일소됐다]을 [다시] 벌일 의지를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종류의 새로운 재판도 안열리진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새로운 피고인은 야고다와 베리아의 지도하에 있는 크레믈린의 의료진이 크루프스카야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혐의와 연관될 것이다.

그러나 의료진이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든 그렇지 않든간에 스탈린이 그녀에 맞춰 고안한 [감시ㆍ검열] 체제가 그녀의 삶을 단축시켰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제즈다 콘스탄티노브나가 공개적으로 관료들과 결별할 정도의 단호함을 지니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탓할 순 없다. 정치적으로 뛰어나며 그녀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사람들도 동요하며 역사와 숨바꼭질 놀이를 시도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크루프스카야는 매우 큰 책임감을 부여받았었다. 난 그녀가 충분히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부족했던 것은 내적 용기였다. 레닌의 충실한 동료였고, 흠잡을 데 없는 혁명가였으며,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인 그녀에게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끼며 작별을 고한다.

1939년 3월 4일
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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