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1회 -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본문

레닌과 친구들/1917년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1회 -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때때로 2017. 2. 24. 13:30

올해로 러시아혁명 100년이다.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과 살육 사이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 만으로 혁명이 성공할 순 없었다. 다가올 사건을 대비하고, 노동계급 대중을 단결시킬 혁명적 조직 또한 준비돼있어야 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인터내셔널의 붕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런점에서 혁명을 향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과 세계의 인민에게 재앙이었던 이 사건은 노동계급 혁명 조직에게도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인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다. 제2인터내셔널이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서 연이어 전쟁 반대를 위한 전 세계 노동계급과 조직의 단결을 천명했던 사실은 무색해졌다. 1907년 2월 슈투트가르트에 모인 25개국 884명의 사회주의 조직 대표자들은 아래와 같이 결의했었다.

"전쟁이 임박하면 각국 노동계급과 그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인터내셔널 사무국의 굳건한 지원을 받아 가장 효과적인 수단-물론 계급투쟁과 일반적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정치 위기를 이용해 대중을 분기시켜서 자본가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레닌 평전’, 토니 클리프, 2권, 16쪽

카우츠키는 무기력하게 ‘기권’을 주장했을 뿐이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반발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국수주의적 배신을 멈출 수 없었다. 독일 사회주의 조직 만이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는 청년들에게 ‘조국 러시아’를 위해 참전할 것을 권했다. 심지어 자신이 젊었다면 직접 전선에 나갈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베라 자술리치와 알렉산더 포트레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주의 선구자들 다수가 전쟁 찬성에 돌아섰다. ’제국주의 독일’에 맞선 ‘조국 방어’전쟁을 핑계로 둘러댔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성장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던 제2인터내셔널과 유럽 각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분열하게 된다.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려 1915년 9월 중립국 스위스의 치머발트에 모인다. 8년 전 슈투트가르대회 참석자의 20분의 1도 안되는 38명의 대표가 11개 나라에서 와 참석했다. 회의 결과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치머발트 선언(Zimmerwald Manifesto∙링크)’이 채택된다. 선언 자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구하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하며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8명의 동의만 얻는다. 1916년에는 키엔탈에서 다시 회의가 열려 두 번째 선언(Kienthal Manifest∙링크)이 채택된다. 이 두 번째 선언도 더 급진적으로 나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회의에서 레닌의 주장은 더 많은 공감을 얻는다. 두 선언은 변절한 제2인터내셔널의 노회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단절, 자국 정부와의 대결을 명확히 선언하지 않지만 이 회의는 이후 제3인터내셔널 건설의 초석이 된다. 아래의 글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가 강조해 인용하고 있는 치머발트 선언이 이 두 선언이다.

그렇지만 이 볼셰비키 학생위원회의 호소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주장은 레닌의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치머발트 선언이 제2인터내셔널과의 관계 단절을 명확히 선언하지 못한데 반해 이 학생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과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변절한 ‘사회주의의 옛 교사들’과 분명히 선을 그으며 차르에 맞선 노동계급과 농민의 대열에 학생이 함께할 것을 호소한다. 이들은 이를 위해 불법적인 조직활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1914년 9월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레닌이 발표한 전쟁에 관한 몇 가지 테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현재 사회민주당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아래와 같은 완전한 선전책(宣傳策)이 군대와 군대의 행동 영역에 전파돼야 한다. 곧,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동지들 및 다른 나라의 고용된 노예들을 위해서는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정부와 당에 투쟁의 총구를 돌려야 하는데, 이 목표를 위해서는 선전 방침이 각국의 국어로 번역돼야 하며 각국의 군대와 각 집단에 불법적인 세포책을 조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노동 대중의 혁명적 의식에 호소하는 것이 긴요하며 사회주의를 배신한 현 인터내셔널 지도자들과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독일∙폴란∙러시아, 그리고 기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여론을 조성해 유럽의 각 개체 국가들을 연방 공화국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러시아 혁명사’, 김학준, 751쪽.

아래의 글은 볼셰비키 학생위원회가 1916년 12월 발표한 지하 성명서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가 1923년 처음 출간한 것을 바탕으로 바바라 알렌이 영어로 옮겼다. 이 글은 존 리델이 편집해 그의 블로그(링크)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 Worker∙링크)’에 연재하는 ‘거리에서 본 1917:러시아혁명의 리플릿들’ 시리즈 1편이다.


1915년 스위스 치머발트에 모인 11개 나라 사회주의자 대표들.

혁명적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1916년 12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오직 용감한 자에게만 영광의 승리는 주어진다,
투쟁에서의 패배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젊은이여, 우리의 노래를 당신에게 들려주마 -
영원한 영광을 당신에게…

동지여! 반동의 기간 활동은 더 어려워지고 지루해졌다. 그들의 대응에 따라 정확한 행동이 요구됐지만 어떤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학생들 사이에 드러난 차이가 충분히 명확하게 밝혀질 수는 없었다. 조악한 헌법이 지배한 고약했던 10여년간 천박한 부르주아적 분위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더 강해졌다. 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던 이 분위기가 이제 바로 폭로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적인 학생 단체들의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파산과 무모한 기회주의를 입증한다.

한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혁명적 민주주주의 깃발 아래 단결하는 듯했다. 최근 사회의 계급갈등이 격화하자 학생들은 두개의 대립하는 집단으로 갈라졌다. 먼저 이데올로기적으로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관된 부르주아적 기회주의 집단은 최근 더 강해졌다. 다른 집단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국제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전자의 집단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신념을 공유하면서도 몇몇 이유로 여전히 사회주의적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거리를 두고 있는 동지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과거 대부분의 학생에게 이러한 작업은 그저 공감을 표하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혁명적 세계관은 행동할 의무를 이들에게 요구한다. 학생들이 그들의 공감을 포기하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한편인 부르주아적 학생들에게 투항하느냐. 그들이 글과 고민에서 벗어나 확신을 갖고 혁명적 행동에 동참해 현대사회의 노예제를 쓸어버릴 위대한 투쟁속 프롤레타리아트와 손잡느냐. 최근의 상황은 학생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 학생들은 무척이나 ‘동정적’이다. 그들은 ‘인민’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대한 가치라는 것을 내세워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을 실행할 수 있을지 따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최상의 학생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의식과 의지를 저 '가난하고 노예상태인 이들'에게 일치시키며 차르의 포악한 사냥개들과 맞서 어렵고 영웅적인 투쟁의 길로 전진했다.

신성에 의해 패배한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썩어빠진 감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우리에게 생생한 증언을 해준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라!…

그런데 학생들은?! 그들은 스스로를 이데올리적 지위로 한정시킴으로써 자신의 게으름과 나약한 의지를 정당화 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뚜렷한 ‘지위’를 갖지 못했음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신념의 이데올로기적-사회적 기반을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천박한 기회주의적 더러운 늪 위에 서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사기를 저하시키는 유해한 분위기에 그들은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자기애에 가득차 한껏 고무된 ‘지위’와 그들의 (퇴행적) 분위기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 늘어놓곤 한다. 학생들은 그런 분위기에 가라앉아 몇 년을 보내버렸다.

지배계급과 정부의 약탈정책 결과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모든 이들이 시급히 답해야 할 예민한 질문이 의제로 제기됐다. 이 뜨거운 질문과 벌어진 놀라운 사건에 러시아의 여러 사회 계급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제기된 질문들로 인해 학생들은 더 이상 동일한 태도를 지닐 수 없게 됐다. ‘민족의 단결’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그토록 많은 거짓말에도 인민(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 중 소수는 인민과 함께해왔다. 소위 ‘사회’와 함께한 것이 아니다. 1905년 첫 혁명의 바리케이트에서 인민과 한편에 선 학생들은 반동으로 고난스러웠던 몇해 동안 인민과 함께 고통받았고, 이들 인민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 취급하는 부르주아지의 핏빛 복수극에 이들이 동원되는 걸 막기 위해 애써왔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선 학생들은 단결한 인터내셔널의 붉은 깃발을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지금은 변절한] 몇몇 사회주의 옛 교사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했다. 물론 어떤 학생들은 국수주의에 속아 적극적으로 전쟁을 받아들였고 ‘조국’-국가와 부자가 이것의 심장과 영혼이다-을 가상의 압제자로부터 구하기 위해 학살극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세계적 학살이 시작된 이래 이들은 단지 ‘반대 만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찾는 데 실패해 왔다. 이중에는, 국가는 계급지배의 첨예화된 표현이라고, 현대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라고 일찌감치 얘기해왔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전쟁은 부르주아지와 잔혹한 니콜라이2세의 폭정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 압제자에 맞선 노예들의 전쟁뿐이라고 주장했다.

‘반대 만이 아닌’ 결단을 내린 이들은 자신의 동료 다수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등을 돌린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방탕에 빠졌다. 억압받는 인민을 방어하기 위해 양손을 치켜들었던 이들은 전쟁이 28개월 지난 지금에 와서야 차르에 매수된 공포를 기반으로 한 형제애에 자신의 두 손이 엮여있음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아왔다고, 군주제에 대한 친밀감이 전쟁이 끝없이 지속되는 오래된 주요 이유였다고 느끼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내부의] 국제주의자와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던 평화적 시기에조차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절치 못했다. 그들 다수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혁명적 행동이 시급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혁명적 행동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결집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부족했고 기회주의에 의해 이 행동들은 소모적으로 이뤄졌다. 실천적 자세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종종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얻기도 했다. 평화시에도 인민에게서 군국주의의 견장을 떼놓을 수 없으면 거대한 살육이 시작했을 때 그러기는 더 힘들다. 세계의 부르주아지가 인터내셔널에 맞서 단결했을 때, 하지만 아직 단일한 대오를 이루지 못했을 때 단호한 걸음을 내디딜 필요가 있다. 제2인터내셔널이 실천적 자세에서 파산을 맞은 것은 단호한 행동이 필요할 때 그 조직과 의지가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세계대전의] 피와 눈물의 바다 위로, 상이군인의 신음소리 사이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과 행동을 위한 조직으로 떠오를 것이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를 새로 만들어질 인터내셔널의 주력으로 모아내고자 한 첫번째 치머발트 회의의 ‘선언’을 우리는 환영한다.

전쟁이 시작되던 때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나라별 단체 사이의 조직적 연결은 끊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에 반대해 단결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까지 독차지하려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조직적 파편화의 단계를 벗어나 혁명적 행동의 기반 위에 단결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동지들이여, 이제 사회주의적 조직화 과정에서 우리가 참여한 정도가 우리 각자에게 내려질 판결의 증거가 될 것이다.

동지들이여, 활동을 시작하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의 불법 조직에 뛰어들자! 전쟁과 그 주모자들에 맞선 투쟁에 학생들을 조직하자! 이 조직들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연계시키자! 사회주와 혁명적 선동의 요새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합법적인 민주주의적 조직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활동과 연설에서 주도권을 잡자! 모든 러시아 폭군의 총검으로 인민이 해방될 수 있다는 잘못된 공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일소하자! 활동하라! 조직하라! 동지들이여!

"노동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과부와 고아, 상처입고 불구가된 이들, 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에게 우리는 호소한다. 모든 국경과 파괴된 도시, 시산혈해의 건너편에 있는 이들과 손을 잡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자!"는 호소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치머발트 회의의 첫번째 선언이다. 이런 말도 들어봤는가? "세계대전 2년. 유린당한 2년. 피에 젖은 희생자와 미친 반동의 2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화약통에 불을 붙인 저들 뒤엔 누가 숨어 있는가? 전쟁을 원한 건 누구이고 오래전부터 이를 준비해온 건 또 누구인가? 바로 지배계급이다!"

동지여 보았는가. "전쟁의 막다른 길에서 무덤에 누운 수백 만 명을, 슬픔에 빠진 수백 만 명의 가족들을, 수백 만 명의 과부와 고아를, 폐허 위 잔해의 무더기를, 파괴된 대체할 수 없는 문화재"를. "여기엔 승자도 승리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흘려 허약해진 이들, 파괴된 이들, 피폐해진 이들 모두가 패배자다. 이것들이 이 잔혹한 전쟁의 결과물들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의 환상은 허구가 됐을 뿐이다."

시민이여 들어보았는가? "평화적 시기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에게서 삶의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전쟁 동안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삶 그 자체도 말이다. 살인은 이제 그만! 고통은 이제 그만! 약탈도 이제 그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능한 빨리 이 학살을 중단시키자!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인민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 일어서자! 더 대담하게 행동하자! 당신들이 다수임을 기억하라. 당신들은 스스로 원한다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모든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정부에 보여주자. 그 후에야 인민은 평화의 시기에 도달할 것이다. 전쟁을 끝장내자!"

‘약탈당하고 파괴된 인민에게’는 치머발트 회의의 두 번째 선언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초대장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건의 문턱에 서있다. 이 사건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머뭇거리지 말자 동지여! 사건이 늦게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학살을 중단시키고 가증스러운 노예제를 폐지시킬, 무엇보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만들어나갈 전장에 인터내셔널의 전위는 이미 들어섰다. 거대하고 새로운 모든 세력이 혁명의 승리와 인민이 반란을 일으킨 축제의 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뒤에서 따를 것이다. 그렇게 나가자 동지여! 자랑스러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타협없는 투쟁의 붉은 현수막을 든 대열의 노동자들과 함께 발걸음을 함께하자!

차르주의 군주제는 답하라! 전쟁을 중단하라! 혁명이여 영원하라! 전진하자! 임시혁명정부를 위하여! 러시아민주공화국 만세! 사회주의 만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제3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자료 ‘러시아의 혁명적 학생들에게’. 1916년 12월 러시아사회민주당 고득교육기관 담당 조직위원회 발표. A.G. Shliapnikov, ‘Kanun Semnadtsatogo goda’, Moscow/Petrograd, Gosizdat, 1923, vol.2, pp.63~67.

영어 번역 바바라 C. 알렌 미국 필라델피아 라살레 대학 역사학 부교수. 저서로는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 1885~1937:고참 볼셰비키의 삶(Alexander Shlyapnikov, 1885~1937: Life of an Old Bolshevik)’가 있다.

알렉산더 실랴프니코프(1885~1937) 러시아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숙련 금속노동자이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랐다. 1908~16년 서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볼셰비키의 출판물을 러시아로 밀수하는 일을 조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전러시아 금속노동조합 의장이 된 그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 노동인민위원에 임명됐다. 1919~21년 노동자반대파의 지도자로서 그는 노동조합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을 옹호했다. 노동자반대파가 패배한 후엔 혁명에 관한 역사적 회고록을 작성했고 이 글들은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인 1935년 날조된 혐의로 체포돼 1937년 9월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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