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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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통권 60호 '건국 60주년'에 묻다

때때로 2008. 9. 1. 00:08

8월 15일 100회를 맞은 촛불이 숨고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일이 넘는 촛불은 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줬습니다. 경쟁 지상주의 교육의 폐해와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 경찰의 폭력, 의료를 포함한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비정규직 ….

이 모든 걸 하나의 범주로 아우르긴 쉽지 않을 겁니다. 편의를 위해서 일정한 개념을 제시하자면 그건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일 듯 싶네요.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래도 방점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부분이겠죠.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대의에 의한 위임권력의 근본적 한계와 한국적 현실을 맨살 그대로 드러냅니다. 물론 순수한 의미에서 대중이 지배자이면서 피지배자인 직접민주주의는 이상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 과제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와 직접 민주주의적 이상의 실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기준점으로서 삼아야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선 '근본적 한계'냐 '한국적 한계'냐는 두 물음 사이에서 길을 잃게 할수도 있습니다.

황해문화 통권 60호(2008년 가을호)는 마침 터져나온 '건국절' 논란을 기회로 이 문제를 우회,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검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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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2008년 가을호 통권 60호


촛불시위가 한참 진행 중이던 올해 6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 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으로 선회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막상 논란이 된 것은 과거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정부의 대응이 아니라 대통령이 언급한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였다.
-'상처받은 건국이념 : 공공성' 박태균, '황해문화' 60호 32p.


한홍구는 1948년 정부수립 당시의 헌법이 가졌던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로서의 긍정성이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산업화 속에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어떻게 변형해 왔는지를 간략하게 역사적으로 살펴봅니다.

박태균은 지금까지 잊혀져왔던 제헌헌법에서의 공공성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좌파는 물론이고 중도세력까지도 제외됐던 제헌의회였지만 당시의 계급투쟁 상황에서 좌파적 요구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던 우파들은 지금의 뉴라이트가 봤을 땐 '빨갱이'나 주장했음직이 분명한 내용을 제헌헌법에 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이익균점권'이 헌법에 담기고 15조의 재산권 보장은 '공공복리에 적합'한 한도 내에서만 인정됐었습니다. 물론 이후 여러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이 부분들은 삭제됐죠.

신용옥은 '대한민국 헌법의 경제사상'에서 제헌헌법의 공공성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과 비교하며 그 의의와 한계를 보다 자세히 검토합니다. 특히 49년 이후 한국전쟁과 반공주의의 득세, 대자본 중심의 산업화가 어떻게 제헌헌법 경제조항의 '사회국가적 지향'을 좌절시켜왔는지를 밝힙니다.

신용옥의 글 앞에 있는 이완범의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은 '대한'이라는 국호가 어디서 연유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이승만이 '대한'이란 국호를 헌법 제정 당시 이후에 더 많은 논의를 통해 다시 결정하자고 했음에도 하위법에 의해 국호에 대한 논쟁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남북한의 통일을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한반도의 과제로 놓을 때 국호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근대 국가는 국민과의 관계에서 아래로부터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동의의 과정 또한 중요합니다. 봉건적 국가에서 하층민들에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국가에 대한 일체감, 민족정신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의 국민적 동원, 또는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같은 전쟁과 같은 수준의 국민적 동원을 위해선 그만큼 국민적 '동의'가 절실히 필요하기도 합니다. 김영미는 이러한 국가와 국민의 관계 맺기에 주목합니다. 국민의 국가정체성의 내면화와 동의에는 그만큼의 통제와 강제 또한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 수립 당시 지배자들에게 일제시대 주민에 대한 통제장치는 매우 유용한 자산임에 틀림 없었죠. '대한민국의 수립과 국민의 재구성'에선 일제 시대 주민의 동원과 관리를 위한 '호적제'와 '기류제'가 해방 후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재구성'에 이용됐는지를 밝힙니다.

특집을 마무리하는 이광일의 '제왕적 대통령의 기원'은 애초의 우회를 돌아 보다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의 한국적 한계를 들여다봅니다. 아주 짧은 대한민국 정치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이광일의 글을 통해 지금까지의 대통령들이 어떻게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들조차도 시시때때로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며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반공주의'와 '산업화'를 이념으로 강력한 (군대를 포함한) 경찰기구를 통해 유지되어 온 제왕적 대통령제는 민주화시대를 맞아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결합되며 그 새로운 장을 열게되면서 우리에게 그에 걸맞는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을 얘기하며 이 특집은 마무리를 짓습니다.

황해문화는 이 외에도 '새로운 주체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두개의 글을 통해 이번 촛불시위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검토를 시도합니다. 전효관의 글은 촛불세대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차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미 10년도 더 전, 90년대 초반의 '신세대론'에 비해서 그 어떤 발전된 논지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에 반해 김진석의 글은 제목에서처럼 '조금 삐딱하'게 촛불시위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번 촛불시위의 주체성이 어떻든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훌륭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 외에도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을 되돌아보며 '문학의 종언'에 대해 고민하는 짧은 글이 눈에 띕니다. 서평에서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저자 박세길의 신작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에 대한 김정한의 비판적 읽기가 도움이 됐습니다.

촛불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어지러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시즌2를 기대하며 더 흥겹게 촛불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자 한다면 이번 황해문화 통권 60호가 작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 창작과 비평 가을호(141호)에서도 촛불이 특집으로 다뤄졌습니다. '촛불항쟁'이란 표현을 쓰는 데서 보이 듯 창비의 입장은 황해문화 가을호의 전효관의 글과 비슷한 위치에 서서 촛불을 바라봅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의 낙관주의와 이성의 비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행동하는 데 있어서 낙관주의는 과하면 과할 수록 좋다는게 제 생각입니다만 행동하기 전, 또는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우리의 비판적 이성은 가능한 비관적으로 상황을 검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효관과 창작과 비평류의 촛불에 대한 무비판적 찬가는 무분별한 '반지성주의'를 확산시킬 뿐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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