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혁명 직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은 흔히 알려진 대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어있던 상태였다. 1917년 당시 혁명의 과제에 대한 이들의 입장 차이는 현실에서 당시 정부와 갈등을 빚던 자유주의자들, 자본가들에 대한 입장 차이로 드러났다. 아래의 두 호소문은 이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멘셰비키가 관여하고 있던 전쟁산업위원회 산하 노동위원회는 1월 24일[구력] 차르의 전제정과 부르주아지의 갈등이 노동계급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전개할 것이라며 두마[의회]를 지지하는 행동에 나설 것을 노동자들에게 호소한다. 노동계급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아무런 힘도 없을 의회를 위해서 말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위원회[혁명 당시 러시아 수도의 지명은 '페트로그라드'였다. 원래 이에 맞춰 통일해 ..
1905년 1월 9일,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의 겨울궁전 앞 학살과 이후 전국을 뒤흔든 1년여간의 사건을 빼놓고 1917년의 혁명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당장 아래 소개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스부르크 지구연합위원회의 1월 22일 시위 호소문만 해도 그렇다. 1917년 1월 러시아 노동자들은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세계대전의 핏빛 행진에 지쳐있었고 하루하루 더해가는 슬픔에 분노의 도화선은 짧아져만 가고 있었다. 1917년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은 현재의 비극을 1905년의 비극과 겹쳐 회상한다. 전쟁에서의 잇따른 패배와 노동계급의 희생, 이와 대비되는 지배계급의 호의호식과 귀족ㆍ관료집단의 무능은 190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은 러시아 지배계급이 허우대만 멀쩡한 종이 호랑이임을 세..
올해로 러시아혁명 100년이다.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과 살육 사이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를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 만으로 혁명이 성공할 순 없었다. 다가올 사건을 대비하고, 노동계급 대중을 단결시킬 혁명적 조직 또한 준비돼있어야 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인터내셔널의 붕괴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런점에서 혁명을 향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럽과 세계의 인민에게 재앙이었던 이 사건은 노동계급 혁명 조직에게도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조직인 독일사회민주당은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진다. 제2인터내셔널이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서 연이어 전쟁 반대를 위한 전 세계 노동..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