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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9일

앰네스티 협조로 만들어진 '아랍의 봄'(장 피에르 필리외 글, 시릴 포메스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이라는 만화가 지난 3월 번역돼 출간됐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은 '아랍의 봄'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가득찬 책으로 읽지 않기를 강력히 권한다.

1. 이 책은 '아랍의 봄' 원인을 오직 독재와 권위주의 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2008년 경제위기 후 곡물투기로 인한 국제 곡물가 상승이 아랍지역 인민의 생활수준 하락을 불러왔던 점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몇년 전부터 성장하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몇몇 훌리건 팬클럽 이야기는 다루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이 아랍의 봄 이전 지역 국가들이 서구식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빅아들여왔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2. 아랍의 독재ㆍ권위주의 정권과 서방 '민주주의' 국가의 협력적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곳의 독재가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일 뿐만 아니라 현재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임을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이책에 의하면 제거돼야 할 악은 오직 아랍의 독재자들과 그들 나라의 비민주적 관습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의 봉쇄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스라엘과 서방보다는 하마스 비판에 더 열을 올린다. 그래서 아랍 인민의 서방에 대한 분노는 오직 음모론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로 설명한다.

3.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를 아랍 독재자들과 상관없이 다루는 것은 물론 유럽의 리비아 폭격이 리비아 인민의 해방에 도움을 줬다는 식으로 다뤄진다. 서방의 이와 같은 개입들이 아랍과 그밖의 지역에서 반민주적 근본주의자들을 성장시켰음을 침묵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국가의 성장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만 살펴도 충분히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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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열한 살의 한잘라: 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카툰집
나지 알 알리 그림|조 사코 서문|강주헌 옮김|시대의창

'열한 살의 한잘라'라는 팔레스타인 만화가의 카툰집이 나왔습니다. 1936년 태어나 1948년 나크바 때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난 나지 알 알리는 레바논, 쿠웨이트, 영국을 오가며 팔레스타인에 관련된 카툰을 그려왔습니다.

주인공(?) '한잘라'는 그의 모든 카툰에 등장하는 뒤돌아서있는 허름한 차림의 소년의 이름입니다. 한잘라는 아마도 알리의 분신이겠죠. 비슷한 나이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의 마음은 성장을 멈춘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 미국의 사기와 협잡, 중동 지배자들의 위선을 놓치지 않고 직시합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슬림의 편협한 시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중동의 지배자들처럼 위선적인 타협을 선호하지도 않습니다. 열한 살 한잘라의 눈에는 레바논 기독교인의 아픔도 함께 담기곤 합니다. 그와 민족의 고통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고통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의 잔인함과 욕심을 비난하는 데 촛점을 맞추면서도 중동 지배자들의 비열한 태도에 대한 비판을 놓치 않습니다. 1987년 그를 암살한 범인의 배후로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여러 나라들도 꼽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만화 '팔레스타인'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가 서문을 썼습니다. 각 장과 카툰마다 간략한 해설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카툰이 그리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원혜진이 연재하고 있는 만화 '아! 팔레스타인'(링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_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글|폴리테이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은 최장집 교수가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으고 보충해 낸 책입니다. 잘 안알려져 있지만 최장집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은 '노동'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학문적 여정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셈이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 그는 30년 전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영등포 공단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현대차 노조 사무실 앞에는 회사 관계자인지, 경찰인지 모를 인물들이 진을 치고 노조 사무실 방문자들을 상시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30년 전 '빨갱이' 색출을 위해 공단 입구에서 감시의 눈길을 돌리지 않던 군사독재 정권의 모습과 겹칩니다. 지난 30여년간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에게 민주주의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최장집 교수의 관심과 주장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책 제목에서 직설적으로 말하 듯 노동이 배제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상처를 안겨줄 뿐이라는 겁니다. 그 자체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도 고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복지를 시혜가 아닌 사회적 권리로서 바라볼 것을 주장합니다. 즉 혜택을 받는 이들을 무기력한 상태로 놓아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그 권리를 요구하고 설계하고 시행할 민주적 권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새로운 이론에만 눈을 희번덕 거리며 몰려다니는 요즘 세태와 달리 하나의 주제를 뚝심있게 탐구하는 노학자의 자세가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있었던 저자와의 대화에 나온 최장집 교수는 칠순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동감 넘치는 눈빛과 지치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이 책은 본격적인 이론을 펼치진 않습니다. 현대차 노동자, 건설노동자, 이주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소규모 봉제공장 노동자 등을 만나며 떠오른 화두를 제시한 책일 뿐이죠. 따라서 그가 말하는 '노동'은 아직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에서도 드러나듯 영세 자영업 '사장님'도, 농민도 '노동'이라는 범주로 얘기됩니다. 하지만 이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많은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176쪽이지만 판형이 작고 글자가 커 쉬엄쉬엄 읽어도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진 화두를 고민하기에 두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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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osaja 2013.01.17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해의(이제서야!!) 첫책은 이것으로 해야겠네요.

2차 세계대전 패전의 결과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던 독일. 1989년 베를린 시내를 가르던 장벽의 붕괴는 공산권 국가 해체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 학살은 인류사에서 최악의 사건으로 꼽힙니다(저는 인디언 학살과 유럽의 남미 점령이 더 잔혹한 학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국제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을 세웁니다. 시온주의 단체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학살을 시온주의 국가 건설의 정당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참 씁쓸한 일입니다(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ㆍ링크).

학살 피해자들의 후예가 세웠다는 이스라엘은 1989년 이후 지구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장벽을 2002년부터 세우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다시 한 번 우리 시대의 상징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가릅니다. 꼭 콘크리트 장벽만은 아닙니다. 때론 철조망과 이스라엘군의 총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가릅니다(영화 '레몬트리'ㆍ링크).

퀘벡 출신의 만화가 기 들릴은 1년간의 예루살렘 생활을 바탕으로 그린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장벽에 가로막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다룹니다.


굿모닝 예루살렘|기 들릴 지음|서수민ㆍ맹슬기ㆍ이하규 옮김|길찾기

그가 이스라엘을 찾은 것은 딱히 어떤 사명감이나 목표를 가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임무로 이스라엘에서 일하게 된 아내를 따라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됩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그가 1년간 살게 된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지역. 성지가 있는 구시가지의 동쪽에 자리한 이곳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합병된 지역입니다. 국제법상으로는 팔레스타인에 속하는 지역으로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죠.

팔레스타인을 관찰한 많은 이가 주목하듯 그도 이스라엘 정부의 부당한 억압에 분노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냉정한 태도를 취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 삶이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관찰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이 사는 동예루살렘보다 훨씬 깨끗하고 풍요로운 정착촌을 둘러봅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슈퍼마켓. 국경없는 의사회의 원칙(정착촌 확장 반대)상 정착촌 슈퍼마켓에서 물견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구경만 하고 나오는 그가 목격한 것은 "슈퍼마켓에서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가는 무슬림 여성"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이슬람ㆍ유대교ㆍ기독교의 성지가 모여있는 구시가지. 성지순례객들이 끊이지 않죠. 이곳을 찾은 이 중에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 들릴에 의하면 "한 아랍인 가족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연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대여"줍니다. "체험이 끝나면 점원은 그것을 다시 가게까지 가지고 와야" 하죠.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 갈등의 장벽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폭력적인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특정 '지역'의 상황입니다. 갈라지고 끊어진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삶도 온전치는 못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으로 훨씬 깨끗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인구 5만명의 소도시인 피스갓 제브는 그가 자주 찾은 정착촌입니다. 이곳 정착촌의 임대료는 다른 곳보다 싸기 때문에 유대인 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유대인 정착촌이 성장하면서 그 내부에서부터 이민족ㆍ타종파의 정착촌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정착촌의 상황은 더 아이러니합니다. (적대적일 것이라고 단정된)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역에 고립된 정착촌 사람들은 직업도 없이 오직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만을 유일한 일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ㆍ이스라엘 정부의 총탄과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지원 때문입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정착촌 투어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후원을 호소하는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정착촌은 가난한 유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되는 것이죠.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이스라엘의 양심적 세력과 함께한 부분입니다. 앞서 얘기한 정착촌 투어와 달리 정착촌의 부조리함과 부당함을 고발하고자 하는 정착촌 투어도 있습니다. 이 투어는 정착촌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사람들이 만든 NGO 'Breaking The Silence'에 의해 진행됩니다. 그가 처음으로 장벽을 통과하는 검문소를 찾은 것도 그곳에서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는 이스라엘 여성 인권단체 '마흐솜 와치'와 함께였습니다.

심지어 가장 근본주의적인 유대인 집단, 토라 연구를 일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초정통파 유대인 지역인 '메아 셰아림'은 시온주의와 자신들 사이에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플래카드에 이렇게 적어놓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자가 아니며, 시온주의자들도 유대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인종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우리는 시오니즘과 그들의 점령이 당장 중단될 것을 신께 기도드린다."

물론 그가 이스라엘 정부의 부조리함, 폭력에서 눈을 돌리진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잔인한 신무기 백린탄을 이용해 가자지구를 폭격한 2008년 12월 말, 그는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요. 그의 아내와 국경없는 의사회, 세계에서 몰려든 인권 단체들은 어떻게든 가자지구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의 방해 때문에 폭격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죠.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인 가자지구에 기 들릴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는 가자지구에 들어가보고자 시도하지만 불허 통보를 받습니다. "만화가는 안 됩니다"라고. 그 말을 들은 그는 "조 사코랑 나를 헷갈렸나?"라고 답하죠.

결국 가자지구엔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곳곳을 누비며 장벽을 스케치합니다. 그 장벽 자체가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영화 '레몬트리'에서처럼 콘크리트 장벽이 자신의 농장에 세워지면서 생업을 바꿔야 했던 이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1년간 예루살렘에 거주한다고 모두가 그와 같은 것을 보진 못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의 쉬지 않는 유머가 그와 같은 관찰을 가능케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넓은 시야는 우리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보통 놓치기 쉬운 초정통파 유대인,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베두인족, 사마리아인,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여러 종단도 놓치지 않습니다. 분노에 눈이 멀지 않고 극단적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의 이면까지 살피는 그의 사려깊음은 누군가에게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슬람과 유대교의 봉합할 수 없는 갈등 만을 강조한다면 우리에게 대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분할만이 대안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더 큰 갈등과 충돌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종교적이지 않은 세속국가의 건설 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대안을 얘기할 때, 그토록 '종교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그게 가능한 대안일까 하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제 자신도 의문이 들곤 했죠. 기 들릴은 비록 아주 미약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자신의 1년간의 예루살렘 생활을 담은 책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보여줍니다. 현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큰 갈등이 진행 중인 지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 가능성을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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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뎡야핑 2012.08.17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막숨'이라고 들리던데 '마흐솜'이라고 번역했군요 ㅎ 글 잘 가져갈게요~
    http://pal.or.kr

2012.08.16 18:34

시오니즘, 그들은 나치의 희생자일까 2012.08.16 18:34

※ 2006년 7월 26일 작성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피난민 행렬에 대한 공격은 물론이고 국제 적십자사의 구호 차량도 안전하지 못하더군요.

이스라엘 문제를 얘기할 때 어려운 것중 하나가 그들이 나치즘의 희생자로서 갖게 되는 도덕적 우월성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또는 아랍 민중들의 행동은 반 유태주의로 몰아붙여지곤 하죠.

하지만 시오니즘과 시오니스트에 의해 건국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나치즘의 희생자라고 대변하며 지금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여기, 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잔인한 이스라엘|랄프 쇤만 지음|이광조 옮김|미세기

원제 "The hidden history of Zionism"의 "잔인한 이스라엘"입니다. 이 책은 시오니즘에 대한 잘못된 4가지 신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째 지금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땅은 지난 2000년간 비어있는 땅, 혹은 야만적인 비문명 지역이었다는 신화입니다.

뚤째는 중동지역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입니다.

셋째 '증오'와 '테러리즘'에 가득찬 중동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가장 강력한 신화로 시오니즘이 나치의 학살의 도덕적 계승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지난 2000년간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소수지만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잘 어울려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공인되고 제도화된 고문을 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유태인이 아닌 이상 그는 토지를 소유하거나 임차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만약 팔레스타인인라면 그 어떤 물질적 증거 없이도 구금될 수 있고 변호사의 접견도 거부될 수 있습니다.

아랍민족의 '테러리즘'에 대해선 쉽게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자체가 중동에 대한 편견을 어렸을 때부터 심어주다 보니(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 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 하고 있는 것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오'와 '분노'는 많은 부분 서구사회의 중동에 대한 개입의 역사 때문에 기인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러한 분노와 증오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는가를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입으로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가장 충격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시오니즘이 그 태동기서부터 서구의 지배자들, 가장 결정적으로는 나치와 파시스트들에 협력해온 사실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시오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거주하던 많은 유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좀더 민주적이 되어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길 바라거나 그러한 나라로 이민 가는 것을 바랬을 뿐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은 이들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2차대전 기간 진행된 서구 국가들의 유태인 망명 정책들을 방해합니다. 또한 독일과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동료를 구해내기 위한 여러 제안에 대해 명백히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 시오니스트들은 30년대 중반 경제적 위기에 처했던 나치 정권에 돈을 빌려줘서 그들의 동료들을 학살할 무기와 공장, 수용소를 만드는데 도움을 줍니다. 시작부터 그러했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점령이후 자신의 동료들이 독일에서 당했던 것과 똑같은 짓거리를 더 심하게 아랍 민중들을 향해 저지릅니다.

이 책은 이 모든 사실들을 다른 무엇보다도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줍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의 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한 행동이 성급한 이 때, 이 얇은 책은 우리의 행동이 어디에 기반해 있어야 하는지-반 유태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그에 협력해온 시오니즘에 대한 반대-를 호소력 있게 전해줍니다.

이 책 말고도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의 갈등과 저항을 심도 깊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으로는 "숙명의 트라이앵글" "인티파다"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가장 먼저 소개한 간혹 보이는 "히틀러의 선견지명"이라는 언급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잔인한 이스라엘)을 소개하면서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분명 홀로코스트 또는 서구 유럽의 '반유태주의'는 지금의 이스라엘을 비판하는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평화를 바라는 평범한 유태인들과 지금의 침략 전쟁을 주도하는 시오니스트들입니다. 현재의 중동 분쟁을 이해하기에 이 책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 시작으로서 유태민족, 이스라엘, 시오니즘에 대한 오해를 풀어준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훌륭한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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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이스라엘이 건국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수 천년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평화롭게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산지 60년이 되는 해죠.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두 가지 신화가 있죠.

첫 번째는 홀로코스트입니다. 물론 많은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어야만 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고통 속에 독일의 패망을 기다려야만 했죠. 분명 그들의 희생을 우린 기억해야만 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해서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되는 것이 용서받을 순 없습니다. 더구나 아랍인들이 유태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주역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진실.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온주의자들은 그 기원서부터 유태인 차별에 앞장서 왔던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협력해왔을 뿐더러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일정정도 협력하기까지 했죠.

자신들의 고향, 시온 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이미 수 천년동안 유럽 곳곳에서 뿌리내려 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고싶어할리가 만무했죠.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은 유럽에서의 유태인 억압이 유태인들의 '귀향'을 도울 것이라는 생각에 유럽 지배자들의 차별 정책에 협조하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까지 이어집니다. 더구나 새로운 나라를 일궈야할 의무에 가득차있던 시온주의자들은 고국 건설에 필요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할 뿐 늙고 힘이 없는, 무능력한 유태인은 필요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기까지 했었죠.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 지역,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 비어있는, 사람이 살지 않던 땅이었다는 신화입니다. 하지만 시온주의 운동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미 많은 수의 유태인과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했었습니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고통받았었지만 최소한 팔레스타인인과 유태인 사이의 갈등이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거죠. 시온주의자들은 무던히도 팔레스타인 땅이 버려진 황폐한 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했고 성공했죠. 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올리브 나무를, 레몬 나무를 길러왔던 땅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영화 '레몬 트리'는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년의 여인 살마(히암 압바스)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레몬농장을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과 함께 가꾸며 홀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미국으로 돈 벌러 갔고 남편은 일찍 사별했죠. 무척 평범한, 이곳이 이태리이거나 미국이라고 해도 이해할 만한 일상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 일상은 신임 국방장관이 농장의 이웃으로 이사오면서 하나씩 깨져나갑니다.

에란 리클리스 감독은 영화의 첫 부분에선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건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보입니다. 살마의 농장은 평화롭고 그녀의 집은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입니다. 단 하나의 힌트라고 한다면 그건 낡은 TV겠죠. 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곤 볼 수 없을 겁니다.

2002년 시작된 장벽 건설에 의해 물리적으로 가로막혀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해는 이토록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삶을 하나하나씩 깨뜨려나갑니다. 국방장관이 이사오면서 신변상 안전의 이유로 전망대와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고, 살마의 농장을 가로질러 철조망이 설치됩니다. 살마는 철조망을 넘어 그의 나무들을 보살피러 농장에 들어가지만 그녀의 나무와 열매는 점점 시들어만 가죠. 농장 근처에서 일어난 테러를 이유로 그녀의 집에 난입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녀의 몇 안되는 세간살이들을 깔끔하게 부숴놓습니다. 그때서야 감독은 그의 카메라로 살마의 집 주변을 비춥니다. 소박하지만 단정했던 그녀의 집은 곳곳이 부서진 모습을 하고 있죠. 살마가 제기한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합법적인 허가를 받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통행금지' 됐다는 이유로 그녀의 예루살렘 진입을 허가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감독의 이러한 세심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차분하게 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유태인으로서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직시하기란 정말 어렵겠죠. 하지만 감독은 차분하게 자신이 접근해간 진실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냉소하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차분히.

이 영화에선 잊을 수 없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국방장관 관저에서 열릴 파티를 준비하던 중 '레몬'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국방장관은 살마의 농장에서 레몬을 가져오게 시킵니다. 그때 살마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레몬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군인들에게 달려듭니다. 그곳에서 살마와 국방장관 부인 미라는 서로를 직시하고 살마는 떨리는 손으로 히잡을 쓰며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습니다. 살마를 연기한 히암 압바스의 연기는 여기서 가장 빛납니다.

두 번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콘크리트 장벽을 치고 레몬농장의 나무를 잘라버렸지만 국방장관 나본은 오히려 그 콘크리트 장벽에 갇혀있는 듯 그려집니다. 이건 한편 감독이 자신의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선 이스라엘 국가의 폭력성에 대해선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방장관이란 사람조차 그저 '안보국' 핑계만 댈 뿐입니다. 21세기 가장 파시즘적 국가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건 그저 약간 아쉽다고 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단지 이웃간의 갈등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건 침략자와 침략받은 민족의 관계죠. 이 영화 '레몬 트리'는 레모네이드처럼 상쾌한 느낌의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약간은 씁쓸한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죠. 그렇기에 더 많은 분들이 '레몬 트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참고할 만한 책
잔인한 이스라엘  랄프 쇤만|이광조 옮김|미세기
팔레스타인  조 사코|함규진 옮김|글논그림밭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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