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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미래

때때로 2011. 12. 30. 14:06

2011년 11월 마지막 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재처리된 핵폐기물을 독일 고어레벤으로 옮기는 기차를 저지하기 위해 수천여 명의 반핵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독일 정부는 2만여 명의 폭동진압경찰을 동원해 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했다. 얼굴에 핵폐기물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넣은 반핵 시위대. 11월 24일 독일 뤼초브. [Johannes Eisele/ AFP/ Getty Images]

올해 최악의 과학ㆍ기술 분야 뉴스를 꼽자면 무엇보다 동일본 대지진 후 발생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빼놓을 수 없겠죠.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진도 9.0의 대지진과 해일이 가장 선진화된 과학과 기술력을 자랑한 국가의 원전을 골치덩어리 방사능 폐기물 덩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연이은 폭발과 지속되는 방사능 유출로 사고 등급은 어느새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넘어섰습니다.

반경 20㎞ 지역 안의 마을은 소개되어 유령 도시가 되었습니다. 7만~8만명의 시민이 자신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일본 시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산 요리를 먹은 TV 캐스터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에 걸렸다는 보도로 이 공포는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캐스터의 백혈병 발병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의 연관성은 아직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후쿠시마에게 최악의 자리를 내주기 직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최악의 기술적 재앙 중 하나로 꼽히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괴담'이 우리를 사로잡아 막연한 공포감에 떨게 했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체르노빌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괴물 메기' '괴물 지렁이' 사진이 떠돌았습니다. 피해자의 기괴한 모습을 담은 사진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후에는 체르노빌에 대한 신화만 남았다. 신문과 잡지는 더 무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경쟁한다. 특히 여기에 안와본 사람이 공포를 더 즐긴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 190쪽

우리는 공포를 즐기는 걸까요? 실제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지역 관광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기괴하게 변형된 인체와 괴기한 동물 사진의 유행은 진실을 알려하는 태도라기보다는 공포영화를 즐기는 듯한 태도로 보입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는 체르노빌을 둘러싼 공포의 이면을 체르노빌의 사람들 목소리로 전합니다. 지금 우리가 후쿠시마에 대해 그 어떤 정확한 사실도 전해듣지 못하듯 당시 프리피야트(체르노빌 원전이 있던 도시)의 주민, 원전 해체작업에 동원됐던 군인ㆍ노동자 모두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듣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더라면…….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이 쏟아지듯 밀려온다. 그곳에서 죽음은 일상이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 해체작업에 동원됐던 구소련의 군인, '체르노빌의 목소리' 130쪽

핵전쟁 대비 계획도, 원전 사고 발생시 긴급대응 계획도 소용 없었죠. 무수히 많은 '훈령'이 주민과 해체작업자들에게 쏟아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방사능에 대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방사선 측정기가 어떤 수치를 보여주면, 신문에는 완벽히 다른 이야기가 실렸다."
-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변 지역을 촬영한 카메라 감독, 167쪽

"체르노빌의 사건 일지는 없다고 보면 되오. 촬영을 못 하게 했고, 다 비밀에 부쳤소. 누군가 뭐라도 찍기만 하면 관련 기관에서 곧장 압수하고 못쓰게 된 필름만 돌려줬소. 주민을 어떻게 대피시켰는지, 어떻게 짐승을 데리고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물이 없소.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고, 영웅만 촬영하도록 허락해줬소."
- 당시 기자, 241쪽

"[체르노빌 인근의] 낙농공장은 계획대로 생산했다. 우리는 검사를 했다. 거기서 생산된 건 우유가 아니라 방사성 폐기물이었다. … [그곳에서 생산된 제품이] 모든 식품 진열장에 있었다. 용기 겉면 스티커에 생산지가 로가체프라고 적힌 걸 본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아 재고가 많이 남았는데, 갑자기 스티커가 안 붙은 제품이 등장했다. … 속이기 위해서였다. 국가가 속였다. 어떤 정보든 '공황이 조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개의 도장을 거치면서 기밀이 되어버렸다."
- 벨라루스 과학 아카데미 핵에너지 연구소 전 연구원, 277쪽

국가를 관리ㆍ운영하는 이들에게 정보의 통제가 무엇보다 급했습니다. 그들은 서방과의 대치상황을 들먹이며 사고에 대한 정보 공개가 적들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했죠. 인근 지역 공산당 지역위원회의 일등서기관은 "공황은 무서운 것이다. … 공포와 소문……. 사람들은 방사선이 아니라 그 때문에 죽었다"며 자신들은 "그래야만 했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정보가 통제된 자리에는 곧 괴담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ㆍ질병ㆍ죽음에 대응하는 방법은 타조처럼 구멍에 머리를 드리밀고 외면하거나, 인간의 힘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ㆍ원리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인근 농장의 늙은 농부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감자와, 달걀, 우유를 먹으며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죠. 해체작업자들은 고된 작업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를 보드카를 마시며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방사능 감지기와 안전을 위한 방호복ㆍ방독면,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몸을 지켜줄 최소한의 요오드 요법 처리를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엔은 2005년 '체르노빌 포럼'에서 직접적인 방사능 누출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56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암 발생 건 수도 4000~9000건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죠. 그린피스의 추정은 다릅니다.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27만 건의 암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중 9만3000 건은 상당히 치명적인 암입니다
('체르노빌 피해 사망자 9만3000명 달할 것' 프레시안ㆍ링크). 영국 인디펜던트지에 의하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2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후쿠시마 핵재앙, 앞으로 100만명 이상 죽는다' 프레시안ㆍ링크).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진실 게임은 1986년 사고가 난 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폐쇄적이고 경직된 공산주의 국가 만의 문제일까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에도 서유럽 국가들의 방사능 검출로 사고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 듯, 후쿠시마 사고의 심각성도 유럽과 미국 등 외부 국가들의 잇딴 경고와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그랬듯이 자본주의 국가 일본도 사고의 규모를 축소하고, 숨기고, 속이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시 우리 조사팀은 이이다테무라의 전체적인 오염도를 바로 발표했다. 이곳은 일본의 허술한 방제 대책 지침에 비추어도 바로 피난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정부 쪽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서 4월 22일에 계획적 피난 지역으로 지정됐다. 그 이후 6000명의 마을 사람들이 피난했다. 정부의 오염에 대한 대응이 이토록 늦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분명 대책 본부는 오염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정보 공개도 하지 않았고, 피난을 가라거나 외출을 삼가라, 식품을 조심하라는 등의 주의도 하지 않았다. 그 책임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 이마나카 데츠지 교토대학 원자력연구소 연구원, '후쿠시마 핵재앙, 4~5년 후에는…', 프레시안

일찍부터 탈핵을 에너지 정책의 중요한 원칙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뤘던 독일도 기민당-자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선 이후 탈핵 정책이 좌초할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다시 독일은 탈핵 원칙을 재천명해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지시키기로 햇습니다. 이러한 독일에서조차 외부에서의 견제와 감시는 '안전한 원전'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의 원자력발전소가 장애나 사고에 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현재와 같이 경제사상 가장 안전한 산업시설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더 필요했다. 즉, 여론의 항상적인 문제제기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판적인 논의장'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결론도 가능하다는 우려가 있다. 여론의 감시가 사라지거나 권위주의 정권이 이런 감시를 억압한다면, 원자로의 안전성도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게르트 로젠크란츠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 29~30쪽

핵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로젠크란츠의 결론은 핵에너지를 둘러싼 정부와 기업의 태도에 근본적인 한계를 고려하면 보다 급진적인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독일에서도 그렇듯이 원자력발전소를 둘러싼 정부와 기업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비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정초를 세웠다는 노무현 정권 하에서 벌어진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에 대한 폭력을 상기해봐도 될듯 합니다. 올해 들어서 고리의 원전이 잇딴 사고로 가동 중단을 반복했습니다. 고리1~4호기, 신고리1호기 중 올해 중단 없이 가동된 것은 4호기 뿐입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국 원전에 대한 일제 점검을 했는데도 이모양인 것이죠. 여기에 '납품비리'까지 터졌습니다
('고리ㆍ울진원전 잇단 가동중단 신뢰도 '땅바닥'' 연합뉴스 12월 14일ㆍ링크). 11월 프랑스에서 재처리된 핵폐기물의 이송을 막기위해 독일에선 반핵 시위대 수천명이 철로를 가로막았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 시위대를 2만여 명의 폭동진압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죠('Protesters Disrupt German Nuclear Waste Shipment' the Atlanticㆍ링크). 독일이든 한국이든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는 1985년 당시 냉전이 열전으로 변할 위험을 근거로 원자력발전 반대를 천명했습니다.

"전 세계로 핵에너지가 관철되면서 전 세계의 정치구조도 극단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핵에너지의 전 세계적인 사용은 인류 문명과 함께한 '전쟁'이라는 정치제도를 반드시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 56쪽

원전의 안전에 대한 위협은 전쟁 뿐만이 아닙니다. 시민의 민주적 통제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의 유착 또한 심각한 위협임이 올 3월 후쿠시마 사고로 다시 한 번 드러났습니다. 원전의 안전 문제는 단지 과학과 기술의 문제가 아닌 정치의 문제이기도 한 겁니다. 더구나 여전히 비민주주의적인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은 2010년 현재 20기의 원자로를 건설 중이고 2030년까지 50~60기의 원자로를 완공할 계획입니다. 21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전력의 31%를 원전에 기대고 있는 한국도 2024년까지 원자로 14기를 더 건설해 전력의 48.5%를 원전이 담당하도록 할 계획입니다('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 152~153쪽, 182쪽). 정부는 12월 22일에는 삼척과 영덕을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 후보지로 발표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원전을 폐기하거나 확대하는 것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는 와중에도 아시아 국가들은 비민주주의적으로 원전 확대 정책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미래의 연대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공포가 일상화된 미래의 모습을 체르노빌레츠의 현재 삶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만화)'는 땅과 함께 오염된, '해독'되어야할 오염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류의 미래를 쓸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알렉시예비치가 들려주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이미 그러한 미래가 시작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관련된 구체적인 과정, 정보를 얻기는 힘듭니다. "이 책은 너무나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지만, 핵 발전의 위험을 알리는데 효과적인 계몽의 도구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이계삼은 지적합니다.
('당신 남편은 방사성 덩어리야!' 프레시안ㆍ링크)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정치적 대안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분에게는 게르트 로젠크란츠의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를 권합니다. 이 책은 ①원자력은 정말로 안전하다 ②핵무기화와 원전 테러는 불가능하다 ③핵폐기물 걱정은 쓸데없다 ④핵연료 우라늄은 얼마든지 있다 ⑤원자력은 기후보호를 위해 존재한다 ⑥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은 늘어나야 한다 ⑦부흥기를 맞이하는 원자력 ⑧아시아에서 원자력 신화가 부활한다는 8가지 원자력 신화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물리학과를 졸업해 독일에서 과학기술사 석ㆍ박사 학위를 따고,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번역자 박진희는 책 곳곳의 역주와 부록을 통해 한국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원전과 사고현황도 그래픽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첨부했죠. 부록에는 국내 탈원전운동 관련 시민단체 목록도 정리해놓았습니다. 번역서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화된 산업사회에서 대규모 발전을 위한 원전의 유혹은 떨치기 힘듭니다. 프랑스, 한국, 일본과 같이 원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선 더 힘들겠죠. 한국에서 핵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재생에너지 비율이 가장 높고 가장 앞선 기술을 지닌 독일에서조차도 반대 목소리가 잦아들 때 원전은 다시 확대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 우리는 원전 없는 미래를 만들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지 모릅니다. 로젠크란츠의 책이 지적하듯 재생에너지 관련 기술은 충분히 사용 가능할 뿐 아니라, 원전이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확대를 가로막고 있기도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후쿠시마의 경고에 귀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게르트 로젠크란츠의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를 읽기 바랍니다.

"재앙적인 지구온난화를 지금에라도 저지하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가장 느리고 가장 비싸며 가장 효과가 떨어지고 가장 유연하지 못한, 아울러 가장 위험하기까지 한 기술을 선택해야 하는가? 1957년에 원자력에너지로 시도해본 것은 올바른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원자력에너지는 단지 지속 가능한 전력수급으로의 이행에 오직 걸림돌이 될 뿐이다."
- '네이처(nature)' 2007년 10월호,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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