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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분홍 리본의 시절|권여선

때때로 2008. 7. 16. 00:00

권여선의 단편 모음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읽었습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먹먹함과 쓸쓸함에 다 읽은 뒤에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하고 책장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우선은 기억에 남던 문장 몇몇 만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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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소설집­|창비

'가을이 오면'
여름 한낮의 시장 거리는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가 길바닥에 쓰러져 너울거리는 공기 너머로 본 것은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긴, 이를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이었다. 발목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오감은 극도로 민감해졌다. 타는 햇볕과 눅눅한 습기, 지글거리는 화인(火印)이 가려운 부위에 선명히 찍히는 듯한 고통과 희열, 매운 고추 향과 찌르르한 매미 소리, 집요한 열정과 짜증스러운 절망, 정지한 바람과 짙은 녹음, 자장을 볶는 냄새와 앓는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이 한데 몸을 맞대고 춤을 추는 듯한,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 그녀를 덮쳤다. 뺨에 닿은 씨멘트가 따뜻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녀는 이 여름의 언젠가부터 자신이 이 순간을 절실히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17~18pp.

'분홍 리본의 시절'
현실은 한 입 속에 두 혀를 갖지 않는다. 나는 노끈을 리본 모양으로 단단히 묶으면서, 그래도 혀가 한쌍이었다면, 비록 고통 속에서라도 철판 위의 곰을 춤추는 듯 보이게 하는 한쌍의 곰발바닥처럼 내 혀가 번갈아 내디딜 수 있는 찰나의 유예를 허락하는 한쌍의 분기하는 욕망이었다면, 내 삶은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서른살의 반이 지나가고 반이 남아 있는 갈림길에서였다.
77p.

'약콩이 끓는 동안'
이번에도 세상의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거나 늦게 알아들은 댓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102p.

'솔숲 사이로'
사내는 자신이 오랫동안 솔향기에서 몇가지 작은 즐거움만으로 여생을 보내려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빼앗겨야만 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즐거움의 규모를 줄이면 줄일수록 금욕적이 되기는 커녕 매우 조그만 즐거움에까지 악착을 떨게 된다는 사실을 늙은 사내는 몰랐다. 식사량을 줄이면 식욕이 증가하듯 그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43p.

'반죽의 형상'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결투에는 상대를 몇대 패주겠다거나 보상금 몇푼 받아내겠다는 식의 유치한 계산 찌꺼기가 없다. 나를 모욕한 자를 죽이거나 모욕당한 나 스스로 죽는 것만큼 모욕을 완전연소시키는 방식이 또 있을까. 모욕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칼이 둘 중 하나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모욕관계를 끊는다.
150~151pp.

휴가를 위해 사직을 불사하는 것은 제 뿔의 세기를 알아보고자 거대한 나무둥치에 뿔을 박고 고사하는 코뿔소처럼 어리석은 욕망이지만 어리석은지 아닌지는 당사자인 코뿔소에게 조금도 중요하지가 않다. 뿔을 박는 행위만이 코뿔소에게는 절대적인 생존 능력의 측정인 것이다. 자신이 어떤 모욕을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는지 생사를 걸고 증명한다는 점에서 결투 또한 그렇다.
160~16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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