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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동아대 교수가 경향신문에 '자본(자본론)' 해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는 제목으로 8월 25일 시작했습니다. 연재 기사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실립니다. 9월 1일에는 두 번째 연재로 '혁명에 사로잡힌 물음 - '자본'의 출생과 변증법'이란 기사가 23면에 실렸습니다.

●[경향신문] 9월 1일 23면|'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링크)

최근 마르크스의 생애, 그의 사상, 자본론(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출판도 늘고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신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지만 책보다는 읽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까지 읽고 나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더 커집니다. 마르크스 스스로 말년에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한 만큼 마르크스주의는 논란에서 자유로운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강신준 교수의 두 번째 연재기사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중을 위한 신문에서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학문적 방법을 사상한 게 문제가 아닌 것이죠. 문제는 일반적인 사실의 왜곡에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명색이 '자본 강독'이라고 시작한 연재라면 자신의 생각과 마르크스의 생각(글)을 구분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가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신준 교수의 경향신문 연재기사를 보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할 분들에겐 상당히 큰 오해를 심어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지만 간단히 제가 아는 한도에서 9월 1일 두 번째 연재기사에서 문제가 될 듯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주저 말고 지적해주세요. 아래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은 강신준 교수의 글입니다.


1_ "오늘날 사회변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혁명이란 용어는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대 혁명의 효시가 프랑스혁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완전히 틀린 설명입니다. 혁명(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혁명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을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단어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이고 돌연한 변화'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쓰인 것은 1688년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가 즉위한 사건을 '명예혁명(The Glorius Revolution)'으로 부르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링크).


2_ "1848년 혁명도 바로 이 [1789년] 프랑스혁명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의한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혁명의 다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민의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혁명가, 변혁가의 꿈은 과거와 현재 모두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의 점령자들은 자신을 99%라고 표현하며 결코 소수가 아닌 다수임을 강조했죠. 원래 '다수파'라는 뜻을 지닌 볼셰비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그 분열 초기에는 멘셰비키보다 소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시이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도 어찌보면 현재의 '우리는 99%다'라는 주장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이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후에 스스로 "모든 것이다"고 답하죠. 그러므로 "제3신분은 국민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고 "제3신분이 아닌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국민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사', 알베르 소불, 두레, 29쪽).

마르크스주의자 또한 과거의 혁명들을 '노동자 혁명'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강할 것입니다. 열망은 현실과 다르죠.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를 따르는 혁명가들은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일으킨 쿠데타를 다루는 책(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그들 앞에 전개되어 있는 원대한 전망에 대한 상상에 젖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몰두해 있었던 반면, 사회의 구세력들은 집단을 형성하고 회합을 개최했으며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에게서 예상치 않던 지지를 발견했다."
-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 21쪽.

마르크스는 분명하게도 1848년 혁명 당시 농민이 다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는 당시 프랑스에서 소수였고 그나마 파리에만 의미 있는 수를 형성하고 있었죠. 그렇기에 파리의 노동자들은 6월 봉기 때 "모든 계급과 정파"의 적으로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결국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위대한 세계사적 투쟁이라는 영예를 안고 쓰러"집니다(앞의 책 23쪽). 1848년 혁명의 다수가 노동자였다는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설명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저자의 설명도 강신준 교수의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명식 교수는 1830년 7월 혁명과 비교하며 이렇게 씁니다.

"[1830년]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중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책과함께, 343쪽.

분명히 1789년보다, 1830년보다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함은 프랑스 전역의 혁명에서 파리가 지닌 역할과 비견할 만한 것이죠(서로 연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1848년 혁명 당시 노동자가 '다수'였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혁명 패배의 교훈과 역사적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_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은 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있었고 경제의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것만을 소비했습니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경제구조에서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생산을 열심히 한 사람은 소비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교환'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생산과 소비가 일치"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이전 생산양식의 귀족과 노예 소유주를 위한 생산, 즉 착취를 (자본주의적 착취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준 교수가 깜빡하고 잊은 듯합니다.


4_ "[1848년 혁명의 패배를 지켜본 다음] 1849년 마르크스는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다시 유럽대륙에서 추방당해 마지막 망명지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영국으로 가는 뱃전에서 마르크스는 두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는 그 엄청난 혁명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혁명이 왜 실패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곧바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67년 드디어 '자본[자본론]' 제1권을 출판했습니다."

이 문구만 읽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계기,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마치 1848년 혁명 때문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 기초적 모습을 드러낸 '공산당 선언'이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나왔다는 사실과 배치됩니다.

이뿐 아니죠.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악명 자자한 문장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8쪽.

마르크스가 현실의 경제적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 '라인신문'에서 일하면서입니다. 마르크스는 훗날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마르크스가 이 미지의 영역[물질적 이해관계: 경제]에 처음 도전해본 것은 개인 소유 삼림에서 나무를 훔치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법을 길게 비판하게 되었을 때였다. … [이 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69쪽.

'라인신문'이 폐간되고 쫓겨난 마르크스는 당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울한 학문, 경제학에 대한 탐구에 몰두합니다. 당시의 공부 결과는 현재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1844년 쓰여서 '1844년 수고', 또는 파리에서 작성됐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립니다.


5_ "한나라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가 '잃어버린 10년'인데요. 이 말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이루어진 정치적 성과를 모두 없애고 10년 전의 상태로 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물의 운동법칙[변증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은 성숙해지면서 2가 되는데 이 2는 기존의 1에 1을 더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2=1+1). 만일 기존의 1을 없애버리면 새롭게 추가하는 1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보다 나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강신준 교수는 변증법을 설명하면서 '1+1=2'라는 공식을 내세웁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설명이긴 합니다. 보통은 정-반-합의 과정을 설명하죠. 강신준 교수의 설명만 보면 사물의 운동은 발전만 있고 퇴보는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기존의 사물은 새로운 사물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새롭기는 하지만 완전히 잘못된 설명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사물의 변증법적 운동이 발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을 인용하며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하지만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합니다
(최형익 옮김, 비르투, 10쪽). 마르크스의 설명이 강신준 교수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전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바로 그 한계 때문에 그들의 후예들이 과학적 입장에서 더 후퇴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사물의 운동법칙은 1+1=2처럼 단순히 계단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대립과 통일이라는 기존 설명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어서 많은 오해를 불러왔지만, 강신준 교수의 설명은 그보다 더 큰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6_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개혁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이루어집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강신준 교수의 '변증법' 해설의 더 큰 문제는 마르크스가 마치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그것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발견한 사람처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기사가 '강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최소한 마르크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구분할 수 있게끔 써줬어야 합니다.

19세기 후반 보통선거의 도입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적인 길의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합니다. 당시 아직 봉건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던 러시아를 살피면서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공산주의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존속'과 '개혁'을 주장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듭니다.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태도를 유지했죠.

"[1875년 라쌀레 추종자들과의 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독일사회주의노동당(1890년 할레 대회에서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의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즉각 베를린에 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격렬한 비난이 담긴 서한을 급송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도 리프크네히트에게 그 정도로 강력한 서한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렀다. … 마르크스가 보기에 고타 강령에는 너무나 많은 타협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었다. 고타 강령은 사회주의와 그 최대의 적인 국가가 영원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타 강령은 특히 그러했다. 또한 고타 강령의 밑바탕에는 프루동 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여러 모순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든가 상속법의 폐지 같은 사소한 목적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안규남 옮김, 미다스북스, 383쪽.

게다가 강신준 교수 스스로 인용했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든 영원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동 상태에 있으며 유동적이고, 따라서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파악됩니다.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을 좀 더 길게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ㆍ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ㆍ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쪽.

'긍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개인의 바람에 따라 왜곡해서 살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르크스가 한 때 속하기도 했던 청년헤겔파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들은 헤겔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바랐지만 사물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의 문제로만 파악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서문에서 청년헤겔파를 '무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유해 조롱하기도 했죠(박재희 옮김, 청년사, 34쪽).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며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김수행 옮김, 19쪽).

아나키즘과 마르크스 이전에 유행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생시몽과 푸리에 등) 비판이라는 맥락도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아닌 이상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변혁의 과학을 대치하려 했습니다(물론 그들의 '이상'은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혁명적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 지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연구로부터 끄집어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신준 교수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얘기하며 실컷 '혁명' 운운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강신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완전히 잘못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 "'변증법'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발전시키는 게 혁명"이라니요. 강신준 교수는 그나마 '개혁'이란 단어로 기사의 후반부에 대치시켰지만 경향신문의 편집기자는 그 차이를 이해 못하고 '혁명'이란 단어를 제목에 써버립니다. 하긴 이윤에 목매는 자본가들은 생산방식에 혁명적 방법을 도입해가며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켜왔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다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꿈꿨던 마르크스의 생각은 아니죠. 제목 아래 크게 자리잡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뿐입니다.


p.s. 강신준 교수는 '개혁'이란 단어를 쓰기 전 '자본론'의 프랑스어판 서문을 인용하며 '혁명'이 마치 길고 긴 개혁의 과정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고 있죠.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비봉, 21쪽.

그런데 이 문구는 프랑스어판 편집자의 '자본론'을 시리즈로 분책해서 내자는 제안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책(자본론)이 어렵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읽어야만 한다는 충고죠. 강신준 교수의 해석은 과도한 것입니다. 맥락에서 떼어내 문구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문과 실천 모두에서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