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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가장자리'의 격월간지 '말과활'이 창간됐다. 가장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홍세화 선생이 머리말에서 '민중'이란 말 대신 '인민'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이란 말이 우리 언어 생활에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세화 선생은 왜 인민이란 말을 썼을까?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보통은 이와 함께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를 말할 때 사용된다. 비슷한 단어로 '민중'이 있다. 둘 다 특정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지만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은 민중에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ㆍ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민이란 단어가 남북 분단 상황에서 금기시 된 때문이다. "늘 친하게 어울리거나 함께 노는 사람"을 뜻하는 '동무'란 단어가 분단 이후 잘 쓰이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즉 분단 상황에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인민 대신 민중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내가 보통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첫 번째 이유는 특정한 정세가 내 언어생활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서다
(북한 정권에 동의하지 않고 북한 인민이 스스로 나서 지배자들을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홍세화 선생도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홍 선생의 인민이란 단어의 사용이 반가운 것은 우선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민중 대신 인민을 사용하는 바로 그 이유와 연관된 다른 문제 때문에 홍 선생이 인민을 사용한 데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인민은 피지배 계급 일반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오직 노동계급의 조건 개선 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피지배 계급 일반의 조건,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지배와 피지배의 조건을 결정짓는 핵심 고리에 노동계급이 위치해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는 인민 일반의 해방을 목표로 하지만 그 해방에서 노동계급이 핵심적 역할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민중 담론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편 위에서 지적한 내면화한 반공주의의 연장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다.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가 대체한 사정과 같다.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는 민중 담론이 노동계급의 핵심적 역할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ㆍ농민ㆍ학생의 연대를 강조하는 민중 담론은 이들 세 사회적 집단을 수평적으로만 파악한다. 핵심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다. 홍세화 선생이 사용한 인민이란 단어가 불길한 것은 그것이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머리말에서 안개에 싸여있던 인민의 의미는 뒤이은 지젝과 이진경의 글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나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이란 개념을 포기할 수 없게끔 할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그 개념을 실존적 차원으로까지 급진화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주체에 대한 더 급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 주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을 제거한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무상의 지점으로까지 환원되는 주체다. 이런 이유에서 새로운 해방의 정치는 더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각기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인 결합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으나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젝은 그것을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유로 들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이전으로 후퇴하는 주장일 뿐이다. 무정형의, 단지 지배받는 집단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 말이다. 마르크스가 한 작업은 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로마 시절로부터 비롯한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원리에 입각한 개념으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노동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여러 사회적 집단 중 억압받고 착취받는, 지배받는 유일한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지배 사슬의 핵심적 고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지젝의 주장은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진경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이진경은 지젝보다는 덜 철학적인 언어로 노동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M'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제가 혁명성을 말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트였다는 것을 일단 상기해주길 바랍니다. …… 역사적 조건에 따라 누가 무산자인가가 달라지는 거지요. 16세기에는 토지 잃고 부랑하던 농민들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였다면, 19세기에는 끔찍한 조건에서 노동해야 했던 산업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였던 것이고, 당신(이진경)이 생각하듯이 안정적으로 노동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버린 지금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들이 새로이 무산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거지요."

마르크스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노동계급을 바라봤다는 것은 아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에서 여러 번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계급(the proletariat, the modern working clas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마르크스는 당대 자본주의의 발전, 아직은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추적해 노동계급이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진경의 주장 대로 노동계급이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게 만드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진경은 마르크스를 사칭할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추적할 능력은 없는 듯하다. 그가 기껏 내세우는 것은 인상주의적 비평에 불과하다.


"지금은 정규직이란 단어와 함께 유사하게 사용되는 '노동자계급'……은 바로 옆에서 똑같은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정규직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게 차단하고, 그들이 옆에서 투쟁할 때 연대는커녕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통상적인 게 되었죠."

정규직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관한 비난에 불과한 것으로 마르크스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듯 보여도 말이다. 불길하게도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에게 동의하는 것 같다. 다시 들춰본 머리말에서 홍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민도 이제 하나의 인민이 아니고, 노동자도 이미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과의 대화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가치가 상승하기를 바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가입조차 안 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노동자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인가, 더구나 이들이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인가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홍세화 선생은 이진경과 공명한다. 물론 우리는 홍 선생 외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런 주장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향인가? 우리는 마르크스 시절부터 이미 인민이 하나의 인민이 아니었음을,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자는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영국의 노동자와 그 식민지 아일랜드의 노동자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내 분열에 대한 인상주의적 비평이 아니다. 그 분열의 물질적 조건을 살피고 단결의 단초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고려하게 된 조건, 그리고 그것을 벗어날 계기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홍세화 선생과 이진경은 분열만 얘기할 뿐 그 역사적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어물쩍 넘어간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만들고 재생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과 여성, 지역 공동체가 담당하던 많은 역할이 점점 더 자본주의적 경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과거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위계제는 마르크스가 설명한 방식 그대로 사회에 더 많은 위계와 복잡한 지배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파악을 도외시한 채 현실을 지양하는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이 가능할까. 최근 잇따라 창간된 여러 진보 잡지들(월간 좌파, 진보신당-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말과활)이 현재 세계를 휩쓰는 반란의 물결에 침묵하는 것과 함께 2008년 이래 6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을 피하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p.s.'말과활' 창간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마르크스는 신성한 이름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한계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즉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면 그의 주장은 틀린 게 될 수 있다. 마르크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주장에서 변형되어야 할 부분과 이어받아야 할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점에서 이진경이 마르크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를 뭐라 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마르크스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름 뒤에 숨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