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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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혁명가, 에릭 홉스봄

때때로 2008. 6. 24. 23:13

역사는 시간을 뛰어넘어 반복되기도 하지만 그 장소가 꼭 같은 장소인 것 만은 아니죠. 지난 5월 초부터 시작된 촛불시위는 한국적 상황에서 시작되고 발전돼 왔지만 많은 부분 1968년 프랑스의 상황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운동의 원인과 발전 방향이 그렇다기 보다는 정부와 우파의 대응, 그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운동을 뒤쫓아 다니기에 급급한 좌파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거죠.

[1968년 5월의 혁명이 결국 드골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과오는 다른 데 있었다. 혁명운동의 관건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바리케이드를 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조건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시기를 인식하고 그에 맞게 적절히 행동하는 데 있다. 프랑스공산당은 이렇게 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를 타도(당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하기는커녕, (당이 확실히 원했던) 인민전선정부를 세우는 데도 실패했다. 투렌이 비꼰 것처럼 공산당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개량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당은 시종일관 대중을 뒤쫓기에 급급했다. 바리케이드가 쳐질 때까지 학생운동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자발적인 농성에 이끌려 노조 지도자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노동자들의 무제한적인 총파업 의지를 인식하지도 못했고, 노동자들이 파업 타협안을 거부했을 때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가' 24장 1968년 5월 313~314pp.


물론 지금 한국에서의 촛불시위는 사실 1968년 프랑스를 비교하기엔 많이 부족하죠. 물론 '명박산성'이라는 전도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긴 했지만 시민들의 반란 수준, 또한 노동자 운동의 확산 정도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죠. 심지어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조차 엄청난 폭발력을 지닐 가능성이 있었던 건설노조와 화물연대의 파업에서 실질적인 연대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발전해왔던 촛불시위에서조차 운동의 뒷꽁무니를 쫓기에도 벅차보이는 좌파의 모습은 1968년 프랑스의 공산당 모습을 떠올리게 해요.

하긴 대다수의 좌파 혹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좌파에겐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없었죠.(흠... 이것도 1968년 5월 이전에 그 어떤 좌파도 그런 폭발을 예상치 못했다는 점에서 또 비슷한 거네요) 아마도 그래서일거에요. 그래서 더 궁금해진 것은 도대체 저 시민들은 어떻게 거리로 나왔을까 하는 점이에요.

물론 국민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그에 반하는 정부의 검역주권 포기, 어륀지, 강부자, 고소영 논란 등 인수위를 포함한 이명박 정권의 여러 실책들 때문이라고 분석하곤 하죠. 또는 최근의 경제적 위기감 때문이라고도 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그렇게 단순할 것이라고 보이진 않아요.

사실 서민들에게 경제적 위기감, FTA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각종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는 노무현 때부터 시작됐었고 좌파들은 이런 쟁점들에 계속 개입해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호응하지 않았었거든요.

에릭 홉스봄이 40여년 전에 쓴 이 글은 지식인이 왜 혁명가가 되는가에 대한 글이지만 지금의 상황을 고민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의식적인 혁명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목표에 대한 야심이 아니라, 그에 도달하는 모든 대안적인 방법의 명백한 실패, 모든 문들의 폐쇄이다. 집 밖에 있을 때 문이 잠기더라도,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기는 해야겠지만 다시 들어갈 가능성은 있다. 단지 그런 가능성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길 때 비로소 문을 부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문이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여지가 크다는 점은 지적할 만하다. 혁명가를 만드는 것은 일정한 절망뿐만 아니라 희망이다. 잘 알려진 억압받는 계급들이나 인민들 사이에서 수동성과 행동주의가 전형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혁명에 대한 헌신은 여러 동기들의 혼합에 달려 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과 그 이면에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실질적으로 풍요한 삶에 대한 꿈, 출구가 모두 폐쇄되었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려 열 수 있다는 느낌, 인내와 개량 혹은 점진적인 개선에 대한 호소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절박한 느낌 등이 있다. 이처럼 상이한 비율로 혼합되는 동기들은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중 두 가지 경우를 추출해낼 수 있다. 하나는 상대적이고 특수한 경우인데, 미국의 흑인처럼 사호 ㅣ내부의 특정 집단에게는 입구가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열려 있거나 적어도 열릴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이고 중요한 경우인데, 위기에 처한 사회는 어떻게 해도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상대적인 소규모 집단을 제외하고-모든 집단은 혼란과 좌절을 느끼면서,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확신한다. 제정 러시아가 고전적인 사례이다. 그 사회에서는 아무도 미래를 믿지 않았다. 서유럽 세계의 선진국가들 대부분은 1848년 이후 한 세기 이상 첫 번째 유형에 속해 있었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일부가 두 번째 유형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혁명가' 25장 지식인과 계급 투쟁 323~32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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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  에릭 홉스봄 지음|김정한ㆍ안중철 옮김|도서출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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