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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꼭두각시, 한국의 야당

때때로 2016. 11. 14. 23:24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광장 인근의 서울시내는 100만 촛불로 완전히 마비됐다. 사람들은 퇴진을 외치며 거침없이 청와대를 향했다. 청와대로 통하는 종로구 새문안로 작은 골목에도 분노의 목소리는 넘쳐났다. [사진 自由魂]

프랑스에서 1830년 7월 혁명의 결과 들어선 오를레앙 왕조는, 금융 대자본의 왕조였다. 이들은 국가 재산에 대한 거리낌 없는 투기를 통해 부를 쌓아 갔다. 이들의 전횡은 당시 성장하던 산업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침범하기 일쑤였다. 철도 건설을 둘러싼 추문은 권력을 공유하지 못한 부르주아지 일부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급격히 고조시켰다.

'레미제라블'이 그려낸 1832년 봉기를 포함한 몇 번의 폭동을 통해 산업 부르주아지는, 당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을 힘들지 않고 진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만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우월한 자신감이 더 굳건해지는 만큼 그들의 정부에 대한 반란은 더 공식적이 돼갔고, 거침 없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반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끼어드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때론 부추기기도 했다. 1848년 2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봉기로서 부르주아지의 반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들 부르주아지는 거리에 널부러진 전사들의 시신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전리품을 나누는 데만 골몰할 뿐이었다.

이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지들은 갑자기 공정한 심판자인척 하며 파리의 투사들이 아니라 프랑스 인민 전체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며 공화국의 선포를 미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협 만이 이들 부르주아지에게 공화국을 선포하게끔 했다.

[1848년] 2월 25일 정오까지 공화정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는데 각료직은 이미 임시 정부의 부르조아 분자들과 '국민'지의 장군들, 은행가와 법률가들 사이에서 분배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번에는 1830년 7월처럼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새롭게 투쟁을 개시하여, 무력으로 공화국을 쟁취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가지고 라스빠일은 시청으로 갔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그는 임시 정부에 공화정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인민들의 명령이 두 시간 내에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는 20만 명의 선봉에 서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전사자들의 몸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고 바리케이드는 아직 그대로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민방위군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임시 정부의 정략적 고려도 법률적 양심의 망설임도 갑자기 사라졌다. 두 시간의 시한이 종료되기 전에 빠리시의 모든 벽에는 그 유명한 역사적 문구가 눈부시게 나붙었다.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임지현ㆍ이종훈 옮김, 소나무, 46~47쪽

한국의 야당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보다 우유부단하며 반란을 일으킨 부르주아지보다 소심하기 그지 없다. 이들은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승리를 얻은냥,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반란을 선동한 대자본의 언론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서울에서만 100만 명이 외친 '퇴진' 목소리보다는 질서있는 퇴각을 지시하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가이드에만 충실하다.

추미애의 독단적 영수회담 제안은 그의 개인적 성품에서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야당의 소심함과 착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100만 촛불의 열기가 아직 거리에 가득했기에 이 제안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프닝은 다시 또 반복될 것이다. 저들의 우유부단함, 이러한 품성에 동전의 뒷편처럼 따라붙는 독단은 애초 저들이 대자본의 이해관계에서 독립적이지 못한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프랑스에 공화국을 선포케 한 라스파일과 같은 담대함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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