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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와 반유대주의 본문

레닌과 친구들/1917년

볼셰비키와 반유대주의

때때로 2020. 2. 29. 22:56

러시아혁명 100주년 자코뱅 JACOBIN 온라인 시리즈 ⑧ 볼셰비키와 반유대주의
혁명의 해에도 반유대주의는 러시아의 정치적 분열 전반에서 확인된다

브렌든 맥기버_ 영국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에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Antisemitism and the Russian Revolution(반유대주의와 러시아혁명ㆍ2019년)'을 썼다.

※ 20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한 JACOBIN 온라인 시리즈를 번역한 것이다. 다른 동료와 함께 작업을 진행하다 멈췄다. 번역한 글은 참세상에 연재됐고 일부는 Marxists Internet Archive의 관련 페이지에 실렸다. 마무리 못한 작업이지만 온라인에서 잊혀지기 전에 내가 초벌번역한 것들을 개인 블로그인 이곳에 백업해놓는다. 이 글(볼셰비키와 반유대주의)은 참세상에 게재되지 않은 것이다.

유대인 분트 회원들이 러시아 1905년 혁명 때 오데사에서 살해당한 동료의 시신 앞에 모여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917년 10월 25일 이른 아침, 노동자들은 거센 바람이 부는 페트로그라드 거리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점령해 나갔다. 겨울궁전의 임시정부 수장 알렉산더 케렌스키는 분노에 가득찬 채 도주에 사용할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전의 밖에선 적위대가 중앙 전화국을 통제했다. 볼셰비키는 모든 곳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겨울궁전은 전기도 전화도 끊긴 상태였다. 케렌스키가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궁전으로 통하는 다리도 볼셰비키 수병들에 의해 점령돼 있었다. 마침내 안전한 미국 대사관의 차량이 도착했고 케렌스키는 붉은 페트로그라드로부터 탈출을 시작했다. 차량이 길모퉁이를 돌 때 케렌스키는 궁전의 벽에 이제 막 쓰여진 몇몇 낙서를 바라봤다. 그 낙서들은 이런 내용이었다. "유대인
[Yidㆍ유대인을 비하하는 말] 케렌스키는 물러나라, 트로츠키 동지 만세!"

그 구호엔 한 세기 전의 부조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온당치 않게도 케렌스키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었다. 그렇지만 이 구호는 반유대주의가 혁명과정에서 한 역할의 골치 아프고 모순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러시아혁명의 많은 문헌들에선 반유대주의를 반볼셰비키 우파의 전유물로서 '반혁명'
[선동]의 한 형태로 적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차르 체제는 반유대주의 정권이었고 10월혁명에 뒤이은 내전 기간(1918~1921년)의 거대한 반유대인 폭력 물결과 잔학행위 대부분은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한 백군과 여타 세력들에 의해 자행됐다. 게다가 이게 다가 아니다.

혁명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정치적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회집단의 결속과 정치적 충성에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인종주의와 정치적 급진주의는 자주 논쟁하던 주제였다. 그렇지만 1917년 반유대주의와 계급적 분노는 대립하는 세계관이었던 만큼 중첩되곤 했다.

●2월:유대인 삶에서의 혁명

2월혁명은 유대인의 삶을 변화시켰다. 차르 니콜라이 2세의 퇴위 뒤 단 며칠 만에 유대인에 대한 모든 법적 규제가 폐지됐다. 1000여 쪽에 달한 140개 이상의 법령이 하룻밤 새 제거됐다. 이 역사적 [차별]철폐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특별한 회합을 소집했다. 이 회합은 유월절[1] 전날밤인 1917년 3월 24일 열렸다. 유대인 대표는 회합의 연설에서 이러한 연관성을 바로 지적했다. 그는 2월혁명을 유대인이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된 것과 비교했다.

그러나 형식적 해방과 달리 반유대인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에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는 1917년에도 지속돼 혁명의 성쇠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17년 혁명 동안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최소 235번 벌어졌다. 유대인은 인구의 4.5%에 그쳤지만 그해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자행된 물리적 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3분의 1이 그들이었다.

2월혁명 때부터 유대인 집단학살이 바로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휩쓸었다. 그에 따라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첫 회합 주제 중 가장 시급히 다뤄진 것이 반유대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6월에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유대인'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살 선동가들의 목소리에 길거리의 '노동 대중'이 귀기울이고 있다는 보도가 유대인 언론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그와 같은 반유대주의에 직면하곤 했다. 나중에 레닌의 비서가 되는 블라디미르 본치-브루예비치
[2]는 7월 초 거리를 걷던 중 공개적으로 유대인 제거를 주장하는 대중과 맞딱뜨렸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급히 자리를 피했다. 비슷한 모임에 대한 보고가 점점 더 늘어났다.

계급적 분노와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적대감은 때때로 중첩되곤 했다. 7월 말 페트로그라드를 활보하던 길거리의 연사들은 대중에게 "유대인과 부르주아지에게 한 방 먹이자!"고 외치곤 했다. 2월혁명 직후 그러한 연설들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데 실패했었지만 이제 이들 연설은 다수의 청중을 거느리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첫번째 전러시아노동자ㆍ병사소비에트대표자대회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다.

●반유대주의 문제

첫 번째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역사적 모임이었다. 수백여 개의 지역 소비에트와 러시아 시민 2000만 명을 대표하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이 1000여 명 넘게 참여했다. 반유대주의적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쇄도하는 상황에서 6월 22일 대회는 반유대주의 문제에 관한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권위있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에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3]가 초안을 작성한 그 해법의 제목은 '반유대주의에 맞선 투쟁에 관해'였다. 유대인 대표는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초안의 낭독을 마치자마자 기립해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1905년 유대인 학살과 같은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며 유대인 공동체가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받아온 상처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해법이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말이다. 이 성명서는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이 결의안은 기본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반혁명과 마찬가지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관점을 재천명한 것이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가장 큰 위험은 반유대주의를 급진적 구호로 위장하는 것"이라고 낭독했다. 결의안은 뒤이어 혁명정치와 반유대주의의 이러한 수렴은 "인민의 해방을 우리 형제들의 피웅덩이로 타락시키고 모든 혁명운동에 불명예를 덧씌울 위협이 되기에 유대 인민과 모든 혁명 운동에 가장 큰 위험"이라고 주장했다. 급진정치와 반유대주의가 중첩될 수 있다는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발전에 충격을 줬다. 그때까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반유대주의를 극우파의 전유물로만 취급하려 했었다. 1917년 중후반 혁명과정이 심화하면서 노동계급과 혁명운동 내부의 반유대주의의 존재는 사회주의자들이 답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됐다.

●소비에트의 대응

늦여름 소비에트는 반유대주의에 맞선 광범위한 캠페인에 착수했다. 일례로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8월에서 9월 사이 공장 안에서 반유대주의에 관한 강연과 회합을 조직했다. 이전에 유대인지구였던 지역의 소비에트에선 학살의 분출을 막아내는 게 중요했다. 8월 중순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코프에서 '검은백인단'[4]은 유대인들이 빵을 매점매석했다며 반유대인 소요를 일으켰다. 이는 결국 키예프 소비에트 대표단이 소요 진압을 위해 지방군을 조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도 반유대주의에 맞선 행동에 착수했다. 9월 중순 정부는 "모든 학살 선동가들에 맞선 가장 과감한 수단"의 적용을 기대케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의 장관들에게 학살 시도를 "전력을 다해 제압"하라고 명령한 비슷한 내용의 성명서가 2주 뒤 발표됐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균형추가 소비에트로 넘어간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권위는 붕괴하고 있었다. 친정부 신문 '루스키 베도모스티'
[5] 10월 1일자에서 편집자는 이를 잘 포착하고 있다. "학살의 파고가 높아지며 널리 퍼지고 있다. … 소식이 매일 산처럼 쌓이면서 … 정부는 상황에 압도됐고 … 지역의 당국자들에겐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 무언가를 할 힘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달랐다. 정치적 위기가 심화하며 볼셰비키화가 가속화 됐고 많은 지역 소비에트가 반유대주의에 맞선 개별적인 캠페인에 착수했다.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50마일
[약 560㎞] 떨어진 비테브스크 지역 소비에트는 10월 초 도시에서의 학살을 막기 위한 군대를 창설했다. 그 다음주 오룔[6] 소비에트는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 폭력에 맞서 무장 대응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극동 러시아에서는 반유대주의에 맞선 대책으로 시베리아의 모든 소비에트가 모임을 갖고 그 어떤 학살도 일어나지 않도록 혁명 군대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는 선언을 했다. 이는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반유대주의에 맞선 싸움이 얼마나 뿌리깊었던 것인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유대인 수가 적고 집단학살의 경험도 적었던 극동 지방에서조차 지역 소비에트들은 그들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의 손아귀 아래서 고통받는 서부의 유대인들과 동일시 했다.

1917년 중반 소비에트가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에 맞선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이 됐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브레이스카야 네델리아(주간 유대인)' 편집자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는 꼭 말해야만 하며, 그들에게 공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학살]에 맞선 투쟁을 열정적으로 수행해 왔다. 많은 곳에서 평화가 회복된 것은 오직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에 맞선 이 캠페인들이 또한 공장의 노동자들, 때론 광범위한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활동가들을 겨냥한 점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반유대주의는 급진좌파의 사회적 기반 내에서도, 심지어 혁명 운동의 영역에서조차
[내재한] 문제로 밝혀졌다. 이게 뜻하는 바는 반유대주의가 단순히 이전의 차르 체제에서 '위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노동계급 내부에 뿌리내려 있었기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내부의 적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반유대주의는 혁명적 정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식의 단순한 문제 만은 아니었다. 이 둘은 반정립의 관계였다. 1918년 당의 주요 신문인 '프라우다' 첫 페이지엔 이런 모토가 적혀 있었다. "유대인에 반대하는 것은 차르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를 레닌과 트로츠키의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평당원들의 감정과 생각을 '읽어들여'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실수일 것이다. 1917년의 사건들이 보여줬 듯이 혁명과 반유대주의는 항상 모순 관계에 놓여 있었다.

1917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 신문 보도를 보면 지역 볼셰키들이 반유대주의의 생명줄을 연장시켜주고 있고 때론 당의 사회적 기반 내부에 그들을 숨겨주고 있다는 혐의로 다른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난당하곤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신문 '에딘스트보'는 7월 중순 멘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의 비보르그 지구 내 모스크바 부대에서 연설을 하려 했을 때 볼셰비키의 선동에 넘어간 듯한 병사들이 "저들을 끌어내리자! 저들은 모두 유대인이다!"라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1917년 중반 플레하노프는 반볼셰비키 행동에 집착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주의깊게 다뤄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은 널리 퍼져나갔다. 같은 때 멘셰비키의 신문 '브페료드'는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멘셰비키를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온 유대인"이라고 비난하며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소문에 따르면 7월 18일 수십 만 명의 노동자들이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몇몇 볼셰비키들이 분트
[7]의 펼침막을 찢고 반유대주의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이에 맞서 분트의 지도자 미하일 리버[8]는 볼셰비키조차 "학살 선동가들에게 친화적"이라고 비난했다.

10월이 되면서 이러한 비난은 더욱 늘어났다. '에브레이스카야 네델리아' 10월 29일자는 더 나가 전국적으로 반유대주의 '검은백인단'에 "볼셰비키 당원들이 가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분명 큰 영향을 미쳤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반유대주의에 반대했고 당원의 다수도 공장과 소비에트에서 반유대주의에 맞선 전당적 대응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 반유대주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볼셰비즘의 판단이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은 아니었다. 뜻밖에도 반유대주의 극우파 신문인 '그로자(뇌우)'는 10월 29일 이렇게 쓰고 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영국과 세계의 은행가들에게 하인을 자처했던 유대인 케렌스키는 뻔뻔하게도 군대의 총사령관을 자임했으며 차르의 러시아에서 스스로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는 '중재자' 알렉산드르 3세가 남긴 유산인 겨울궁전을 차지하려 했지만 이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일 뿐이었며 결국 그곳에서 쫓겨날 것이다. 10월 25일 볼셰비키는 유대인 은행가, 반역적 장군들, 배신한 지주들, 도둑질하는 상인들로 만들어진 정부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모든 연대를 단결시켰다.

이 신문은 볼셰비키에 의해 즉각 폐간됐다. 이들의 달갑지 않은 지지가 당 지도부에 경고를 보낸 것이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와 혁명이 중첩하는 것을 수용하는 데 대해 우려를 보내며 강조한 것은 볼셰비키가 대중을 동원하고 계급적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사용한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10월 28일 혁명의 조수가 가득 차올랐을 때 멘셰비키의 페트그라드 선거위원회는 볼셰비키가 "무지한 노동자와 병사들"을 꾀어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치는 것은 "유대인을 타도하자, 상인들을 타도하라"는 구호로 넘어가기 십상이라고 수도의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자포자기한 듯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멘셰비키 리보프 로가셰브스키에게 러시아혁명의 "비극"은 "심연의 어두움에 빠져있는 대중이 선동가와 혁명가를, 유대인 학살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분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유대인 언론도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에브레이스카야 네델리아의 논평에 따르면 "레닌 동지와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말에서 행동으로 전환하라'고 호소했지만, 슬라브 군중이 모인 곳에서 '말에서 행동으로' 전환이 뜻하는 것은 '유대인(Yid)을 공격하라'"였다.

하지만 이러한 불길한 전망과 달리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몇 날 며칠간은 러시아 내부에서 대규모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반란이 반유대주의 폭력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러한 경고는 단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선동에 나선 사회주의 좌파 사이에서 '심연의 어두움에 빠진 대중'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을 보여줄 뿐이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폭력과 야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두려워했던 대개의 지식인들이 그랬다.

이 기간 지식인들에게 그토록 두려움의 대상이 됐던 페트로그라드 군중과 얼마나 친밀한지가 바로 볼셰비키를 규정하는 척도였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혁명적 정치의 중첩은 실제였다. 이후 다작으로 이름을 날린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계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크
[9]는 10월혁명 직후 며칠간 자리를 지키며 그곳에서 벌어진 중대한 사건들로부터 떠올린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의 이야기는 1917년 혁명 과정과 반유대주의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 아마도 가장 생생한 설명일 것이다.

어제 내가 제헌의회 의원 투표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유대인(Yid)에게 반대한다면 5번(볼셰비키)에 투표를!" "세계 혁명을 위해 5번에 투표를!"이라고 말했다. 지나가던 [정교회의] 대주교는 성수를 뿌리며 축복해줬고 그들 모두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지나가던 일군의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기가 정말 지옥이란 말인가?

이 놀라운 회고에서 혁명적 볼셰비즘과 반혁명적 반유대주의 사이의 차이는 모호했다. 사실 에렌부르크의 묘사는 내전을 다룬 아이작 바벨[10]의 책 '붉은 기병대(Red Cavalry)'에서 제기된 혼란스러운 의문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혁명이냐, 반혁명이냐"는 질문 말이다.

볼셰비키는 반유대주의를 순전히 '반혁명적' 현상의 틀로 고집스레 주장했지만 이는 그처럼 간단히 분류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정치적 분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고도로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를 띄었다. 10월 혁명으로부터 6개월 후인 1918년 봄 옛 정착지에서 혁명 후 첫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을 때 이는 가장 극명하게 보여졌다. 글루호프
[현재 흘루히브]와 같은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마을과 도시에서 볼셰비키 권력은 당과 적위대의 지역 간부들을 통해 반유대인 폭력에 결부돼 있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반유대주의에 대항했지만 그것은 흔히 자신의 사회적 기반에 내재한 반유대주의에 맞선 대립이었다.

10월혁명 100주년을 맞은 우리는 이를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의 순간, 즉 새로운 세계가 가능함을 보인 순간으로 기념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혁명의 그 모든 복잡함도 기억해야 한다.

반인종주의는 계속해서 장려하고 갱신해야 한다. 우리는 인종주의가 계급정치에 가하는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한 세기 동안 노력해왔다. 1917년의 경험은 이러한 반동적인 사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하지만 이를 어떻게 다루고 이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옮긴이 주
[1] 유대인들이 이집트로부터 탈출, 이른바 '출애굽' 또는 천주교에서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명절. 유대력으로 1월 14일이다.
[2] 블라디미르 본치-브루예비치(Vladimir Dmitriyevich Bonch-Bruyevich)는 1873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노동조합'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한 그는 1896년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로 이주한 그는 '이스크라' 멤버로 활동했다. 1905년 혁명 때는 페테르스부르크 봉기 조직자 중 한 명이었다. 1912년부터는 '프라우다'의 편집부에서 활동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실행위에서 활약했다. 1955년 7월 눈을 감았다.
[3] 에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Yevgeni Preobrazhensky)는 1886년 2월 볼코프 지방에서 태어났다. 레온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그는 1920년대 좌익반대파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당에서 쫓겨난 그는 1937년 대학살 기간에 처형됐다. 그는 농민 중심의 러시아에 산업화가 긴급히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4] 푸리슈케비치가 설립한 반유대주의 준군사조직.
[5] 루스키 베도모스티(Russkiye Vedomosti)는 1863년부터 1918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자유주의 일간지다. 1912년부터는 카데츠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
[6] 모스크바 서남부에 위치한 도시.
[7] 분트는 러시아ㆍ폴란드 전 유대인 노동자 연맹을 말한다. '분트'는 독일어에서 기원한 이디시어로 '연맹'을 뜻한다.
[8] 미하일 리버(Mikhail Liber)는 분트 지도자이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 멘셰비키 활동가다. 2월혁명 때 소비에트서 활약했지만 10월혁명에는 반대했다.
[9] 일리야 에렌부르크(Il'ya Erenburg)는 1891년 키에프의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5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부하린과 함께 비합법 활동을 하다 차르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1908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다. 파리에서 그는 레닌의 동료가 돼 활동했지만 곧 볼셰비키로부터 멀어진다. 러시아로 귀환한 에렌부르크는 10월혁명 때 볼셰비키의 반대편에 섰다. 1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그는 1967년 삶을 마감한다. 그가 쓴 '해빙'은 스탈린 사후 소련의 자유화를 뜻하는 대표어가 됐다.
[10] 아이작 바벨(Issac Babel)은 1894년 오데사에서 태어난 유대계 작가이자 언론인. 고리키의 눈에 들어 그의 잡지에 글을 발표하곤 했다. 바벨은 자신의 자서전을 고리키에게 헌정했다. 1939년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돼 트로츠키주의 테러리스트와 외국 간첩 혐의로 1940년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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