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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에 해당되는 글 1

  1. 2012.05.17 무두질 당하는 자, 그대 노동자 (3)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