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0

« 2019/10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ㆍ11
살바도르 아옌데ㆍ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정인환 옮김|서해문집


동지 여러분께 조용히,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사도도 메시아도 아닙니다. 저는 순교자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인민이 부여한 과업을 완수하고 싶은 한 명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자들, 인민 절대다수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이 분명히 깨닫도록 합시다. 비록 순교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인민이 부여한 과업을 완수한 뒤에야 라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물러날 것임을 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인민의 정부를 방어해내겠습니다. 그게 바로 인민들이 제게 부여해준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1년 12월 4일 산티아고, 쿠바 대표단 환송행사,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118~119쪽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 후보가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36.3%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10월 24일 의회에서의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결정되겠지만 아옌데의 집권 저지를 위한 칠레의 부자, 군부, 권력자들과 미국의 음모는 이미 시작됐죠.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위원장인 워싱톤의 '40인 위원회'는 1970년 3월 25일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아옌데의 대통령 당선 저지, 이에 실패할 경우 아옌데 정권의 전복을 위한 행동 계획이었습니다. 40인 위원회는 이 자리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흑색선전 지원을 위해 12만5000달러의 예산 집행을 결의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여 간, 미국은 이러저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80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습니다. 칠레의 경제를 혼란으로 몰아넣어 인민의 삶을 위태롭게 하고, 우파의 백색테러를 통해 공포를 부추기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우파 언론을 지원하거나 직접 인수해 인민연합에 대한 흑색선전을 확대하는 것도 계획에 포함돼 있었죠. 궁극적으로 쿠데타를 통한 아옌데 정권의 붕괴와 이를 통한 남미에서의 좌파 정치세력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이 이 계획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이들의 계획은 1973년 9월 11일 화요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통해 성공했습니다. 1970년 11월 4일 대통령에 오른 이후 살바도르 아옌데는 우파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우파는 미국 정부의 협력으로 칠레 경제를 효과적으로 파탄시켰습니다. 공개적인 사보타주를 통해 공장의 생산시설을 파괴하고, 생활 필수품을 (말 그대로) 땅에 파묻고, 운송과 교통망을 마비시켰습니다.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군부 요인에 대한 백색 테러가 자행됐죠. 미국 정부는 칠레와의 신용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심지어 지진 피해에 대한 긴급 구호 요청도 거부했죠. 칠레 군부의 무기 구입을 위한 지원은 계속되는 상황에서 말이죠. 아옌데는 대통령이었지만 군부와 경찰을 비롯한 거대한 행정부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지배자들과 우파에 의한 이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향한 인민의 단결된 힘은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우파의 사보타주에 맞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사장들의 공장파괴에 맞서 공장을 지키고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3년 상반기에만 3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민의 삶은 고통스러웠으나 인민연합 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욱 공고해져갔습니다. 1973년 3월 4일 총선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이끈 인민연합은 43.3%의 표를 얻어 압승을 거뒀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9월 11일 아옌데는 이러한 이민들의 굳건한 지지에 힘입어 재신임 투표를 발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공연도 예정돼 있었죠.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파괴됐습니다.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라는 아옌데의 예언 아닌 예언은 현실이 됐습니다. 9월 11일 이후 일주일간 3만여 명이 군부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대통령궁인 라 모네다 궁을 폭격하기 위한] 제트기의 급강하는 계속됐다. 우리 동네 위쪽에 있는 산악 지대와 인접한 '포블라시온(판자촌)'에 로켓을 퍼붓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환상까지 모조리 죽어버린 것 같다… 이게 우리가 맞서야 하는 상대라면, 희망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
- 조안 하라,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53쪽

수도에 가해진 폭격.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 군부의 폭력 앞에 인민은 숨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도 산티아고를 떠다녔지만 아옌데와 인민연합 정부가 이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우파의 백색테러와 협박 속에 그나마 중립적 입장을 표하던 카를로스 프라츠 국방장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쿠데타를 20여일 앞둔 8월 23일 사임했습니다. 그의 후임에는 쿠데타의 주역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임명됐죠. 공장파괴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고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애쓰던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우파의 압력으로 인민연합 정부에 의해 해산됐습니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평화적' 혁명정부는 군부의 후안무치한 테러와 폭력 앞에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쿠데타 직후 자신의 집을 수색하로 온 군인들에게 "마음대로 둘러들 보시게. 여기 당신들한테 위험한 것은 오로지 '시'밖에 없으니"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체제의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무기는 '말과 글'입니다. 빅토르 하라는 종합경기장에서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 '칠레 경기장에서'라는 쿠데타의 야만을 증언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와 같은 노력을 통해 우리는 군부의 야만적 폭력을 현재까지 전해들을 수 있고 이를 교훈 삼아 새로운 행동 계획을 만들 수 있었죠.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런 인상적인 행보를 보인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 무장하지 않은 이념은 대개 야만적 폭력에 무참히 짓밟혀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말과 글이 유일한 무기인 이념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야만적 폭력이 이 정도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전례가 없다."
- 피델 카스트로,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129~130쪽

카스트로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옌데의 죽음은, 인민의 패배로, 사회주의를 향한 평화적 길의 실패로 기록되었습니다. 결코 사용되길 바라지 않았을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은 미국산 전투기의 폭격에 맞서 사용될 수밖에 없었죠. 이후 30여년 간 칠레에선 군부 독재정권이 지속됐고, 지금도 당시의 부역자들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같은 이들의 노력 덕에 피노체트는 상대적으로 평안한 말년을 보내고 2006년 91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칠레에서와 같은 미국의 대외적 개입정책 또한 1973년 9ㆍ11 이후 40여 년 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의 9ㆍ11 테러는 세계적 고통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태도를 만들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그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숨겨져서 상상조차 어려운 운명의 결정인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 지원하고 북돋운 칠레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바로 그날,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한 테러가 발생했다. 어쩌면 운명은 미국인들 앞에 놓인 도전이얼마나 큰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날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미국의 젊은이들은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됐다. 사랑하는 이들이 실종된 뒤에도 주검이 없어 장례조차 지내지 못한 이들이 감내했어야 할 지옥 같은 세월이 어땠을지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9ㆍ11 테러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민족들이 견뎌내야 했던 비슷한 고통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 아리엘 도르프만,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29~30쪽

1973년 9월 11일 화요일의 기억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지니고 있던 노학자 아리엘 도르프만의 기대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짐짓 그 가능성을 알고 있음에도 무시하고자 했던 방향, 즉 2001년 9ㆍ11의 비극은 더 큰 악의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사악한 목적으로 악용"됐고, "전쟁을 부추"겼고, "복수의 명분"이 됐고, "한 사회를 군사화"하는 방향으로 이용됐죠.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선물한 AK-47로 무장한 아옌데 대통령. 그는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맞서 끝까지 라 모네다 궁을 지켰다.

1973년 9월 11일로부터 38년, 2001년 9월 11일로부터 10년. 우리의 삶은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억압, 세계적 분쟁으로 인한 참화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아옌데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인류의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동자ㆍ인민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비록 그의 꿈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인류의 이상은 미미하지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8년 이후 경제위기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에서, 프랑스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아옌데가 태어나고 죽은 칠레에서 정의를 향한 저항은 지독히도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9월 11일이면 2001년 미국의 비극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라도 이 책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ㆍ11'을 통해 1973년 칠레의 9월 11일을 기억하고 라 모네다 궁에서 생명을 다한 아옌데의 꿈에 공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나라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
제가 노동자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단 하나뿐입니다. 저는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고귀한 의식 속에 뿌린 씨앗은 결코 영원히 묻혀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쿠데타군이 무력을 장악했으니 우리를 박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진보를 막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범죄행위나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인민이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으로 쓰디쓴 순간을 이겨낼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히 나아갈 드넓은 거리가 열리게 될 것임을.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제가 남기는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제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최소한 제 죽음이 범죄자와 비겁자, 반역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라 모네다 궁, 라디오 마가야네스에서의 마지막 연설,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38~41쪽



칠레의 대표적 민중가요 '우리 승리하리라(Venceremos)'.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 직후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기 직전 이 노래를 불렀다고 알려졌다.

Posted by 때때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DidISay 2013.01.18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미쪽 문학작품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그때그때 구글에 의존해서 해소하느라 아는 것들이 좀 파편화된 느낌이었거든요. 도서관에서 책을 좀 찾아봐야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