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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자본가는 으스대며 앞서 걸어가고 노동자는 풀이 죽어 뒤따라간다. 그들은 공장ㆍ농장ㆍ광산ㆍ공사장ㆍ상가ㆍ사무실로 들어간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구매했다. "노동력(勞動力)의 사용이 바로 노동(勞動)이다"(235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우선 사용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사회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7장 1절에서 사용가치 생산의 일반적 성질, 즉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검토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다. 인간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사용해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자신도 변화시킨다. 자연과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는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과 다른 것은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236쪽)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目的)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organs)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合目的的)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236쪽)

노동과정에서 인간의 의지ㆍ정신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한 규제와 통제를 요구한다. "노동의 내용과 수행방식이" 노동자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236쪽)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노동 일반은 인간 생존의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찬 받아야 할 어떤 이상적 상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육체노동'으로만 한정짓지 않았음도 알 수 있다. 신체의 활용은 '머리', 즉 정신 또는 관념의 사용도 포함된다. '합목적적 의지'는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든, 자기 자신에 의해 강제되든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노동과정에는 노동 그 자체(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와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요소로 필요하다. 노동대상은 인간의 노동이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다. 노동수단은 노동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와 노동대상을 연결해주는(중개하는) '전도체(conductor)'다. 노동과정 수행에 필요한 다른 모든 개체적 조건들도 노동수단에 포함된다. 벌목꾼에게 숲의 나무는 노동대상이다. 나무를 베기 위한 톱과 도끼는 노동수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재는 목수에게 노동대상이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 등의 노동수단을 이용해 노동대상인 목재를 책상과 의자로 만든다. 목수가 책상과 의자를 만드는 작업장(땅과 기둥ㆍ천장 등)도 노동수단이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비록 그 맹아적 형태는 약간의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 그러므로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인간을 '도구(道具)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遺物)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되는가이다."(238쪽)

선사시대를 석기시대ㆍ청동기시대ㆍ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여기서 '석기ㆍ청동기ㆍ철기'는 그 시기 인간이 사용한 주요 도구(노동수단)다. '자연과학적 연구'로 취급되긴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생산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올바르다.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變化)를 일으킨다"(239쪽).

노동과정의 결과물인 생산물 입장에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또 다른 노동과정에 투입돼 생산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結果)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條件)이기도 하다"(240쪽). 생산의 결과인 사용가치가 다음 과정의 생산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가변적이다. 면화는 그 자체로 솜옷과 이불에 사용된다. 때론 실을 뽑아내기 위한 원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치가 변하는 데 따라 그 사용가치의 규정도 변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 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242쪽). 결함이 없는 생산물에는 과거의 노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소비'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생산적 소비(productive consu mption)'라고 부른다. 개인적 소비(individual consumption)는 소비자 자신을 만들어 내지만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소비자 자신과 구별되는 생산물을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勞動過程)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밀죽의 맛을 보고 누가 그 밀을 경작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노동과정을 보아서는 그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행해지는지 알 수 없다. 즉, 노예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밑에서인지 또는 자본가의 주의깊은 눈초리 밑에서인지, 또는 킨킨나투스【Cincinnatus: 고대 로마의 장군, 은퇴 한 뒤 농사를 지었다.】가 자기의 작은 토지의 경작으로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돌로 야수를 쳐죽이는 미개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244쪽)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특수하고 역사적인 사회형태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한 자본가의 공장에서도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동일하다(마르크스는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의 생산방식에서의 혁신에 대한 찬사(?)로 유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음 절(가치증식과정)로 넘어가기 전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 노동과정의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所有)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둘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所有物)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245쪽).


제2절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

노동과정의 결과물 그 자체를 위해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환가치를 지닌 사용가치, 즉 판매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의 총액은 그 자신이 생산을 위해 투하한 화폐의 총액(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든 총액)보다 커야 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交換價値)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價値)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려고 한다."(247쪽)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노동과정은 상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價値形成過程)의 통일이어야 한다"(247쪽). 이번 절에서는 바로 이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한다.

마르크스는 면사의 생산과정을 예로 들어 가치형성과정을 살핀다. 10파운드의 면사 생산에 10파운드의 면화와 1개의 방추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면화 10파운드의 가격은 10원, 방추 1개의 가격은 2원이라고 하면 면사 10파운드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은 12원이다. 12원의 금량을 생산하는 데 2노동일(24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생산수단 12원에는 2노동일의 사회적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이다.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가 된다. "여러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249쪽).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우선 면화와 방추가 실제 생산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면화와 방추의 생산에 (이후 면사의 생산에도)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해서 면사가 더 많은 가치를 얻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살피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노동과정으로서 면사의 생산을 살필 경우 방적공의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특수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한 그 노동은 대포를 만드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면화재배ㆍ방추제조ㆍ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250쪽), 즉 동일한 노동과정의 각각의 단계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량의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변화시킨다. 즉 면화에 일정량의 노동이 첨가된다. 여기서도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일정한 [경험적으로 확정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251쪽)

이제 면사 10파운드에 들어있는 총가치를 검토하자. 우선 면사 10파운드 생산에는 면화 10파운드와 방추 1개가 필요하다. 이는 12원이고 모두 2노동일이 대상화돼 있다. 방적 노동자는 1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로 변화시킨다고 가정하자. 1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6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방적 노동자의 하루 노동력 가치는 3원이다. 따라서 면사 10파운드에는 모두 2와1/2노동일의 노동이 응고되어 있고, 그 가격은 15원이다. 면사 10파운드를 생산하는 데 투하한 가치 15원은 여전히 15원이다. 이래서는 자본가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해 생산에 나설 이유가 없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252~253쪽)



그러나 노동력 재생산에 6시간(3원, 1/2노동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6시간만 일을 시킬 이유는 없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7쪽)

이제 자본가는 노동력을 12시간동안 사용하려 한다. 작업장에 들어간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한다. 노동자는 20파운드의 면화(20원, 3과1/3노동일), 2개의 방추(4원, 2/3노동일)을 발견한다. 24원의 생산수단과 3원의 노동력이 생산에 투입된다. 3원의 노동력은 추가된 6시간동안 3원의 가치(6시간, 1/2노동일)를 더한다. 이제 생산물의 총가치는 30원이 된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258쪽).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칙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방추·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258쪽)

가치증식과정은 가치창조과정이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로 보상되는 점을 넘어 계속되는 과정이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은 오직 양적 측면에서만 다뤄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259쪽).

가치형성과정의 고찰에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259쪽). 즉 사회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 평균적인 조건하에서 노동력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뮬 자동 방적기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인 사회에서 물레로 방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레를 이용해 면사를 생산할 때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은 가치를 형성하지 못한다.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260쪽). 하지만 현실에서 자본가들은 화폐를 아끼기 위해 정상보다 뒤쳐진 생산수단을 투입하면서도 노동력에게는 정상 이상의 활동을 요구하기도 한다(이는 한편 이윤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아껴야 하는 내적 동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260쪽). 자본가는 시장에서 평균적인 능률 이상의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사회적 평균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력-이주노동자-을 구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생산과정에서 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260쪽). 낭비된 원료와 생산수단도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지 않기에 자본가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절약을 위해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다(261쪽). 이 차이는 생산과정의 두 측면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261쪽)

Posted by 때때로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