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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Posted by 때때로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



1492년 콜롬버스가 도착한 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일한 사탕수수 농장은 18세기 프랑스 교역에서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이었죠. 식민지의 부는 인간이 아닌 노예에게는 그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았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됩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외치며 노예의 해방을 인정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노예들이 그 반란에 동참합니다. 1791년의 일이죠. 투생 루베르튀르와 동료들은 13년 간 이어진 저항으로 1804년 결국 해방과 독립을 얻어냅니다.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해방 혁명의 역사는 이후 200년 간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1804년 해방을 얻는 조건으로 지급하기로 한 1억5000만 프랑의 배상금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배상금은 140여년이 지난 1947년에야 겨우 다 갚았죠.

독립 이후에도 미국의 개입과 끊임없는 군부 쿠데타, 독재로 고통받아왔던 아이티는 1986년 반란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합니다.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으로 1990년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뽑히죠. 포르토프랭스의 신부였던 아리스티드는 민주화 이전부터 독재에 저항하고 가난을 극복하는 행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통령궁에 입성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요. 그는 당선 7개월 만에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게 됩니다.

1994년 미국과 유엔의 개입으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1년 정도 남은 임기 동안 가난 극복과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두 과제에 몰두합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군부 쿠데타 기간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제 금융기구는 시장 개방과 민영화를 강요하고 있었죠. 그가 2000년 재선에 도전한 이유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무려 92%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번 임기도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던 프랑스와 미국은 아이티에 대해서 만은 일치된 의견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시 아이티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쫓겨난 건 아마도 제3의 길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앤서니 기든스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길은 가난과 굴종 사이의 아주 좁은 길을 말합니다. 그는 라팡미 셀라비에 오는 여러 아이들에 빚대 그  길을 설명합니다. 콜라와 술 중에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스가 좋아요"라고 답하는 아이. "기브 미 워터"라는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자신은 초콜릿을 원한다며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말하는 아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굴종을 강요하곤 합니다. 고분고분하길 원하죠. 우리의 뜻에 따르길 바랍니다. 그것이 가난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아이티의 사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아리스티드가 '존엄한 가난'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도움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가난한 이들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움'이 아닌 '연대'가 필요한 거죠.

이 책은 아리스티드와 함께 가난과 굴종 사이 가늘게 난 '제3의 길'을 찾아 떠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 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 이야기(링크)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