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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2권이 최근 출판됐다. 출판사는 책을 소개하면서 옮긴이가 "『자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비의 계산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으며, 적재적소에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권을 읽으며 도움을 많이 받은 나로서도 역서가 얼른 나오길 바라왔다. 그렇게 펼쳐 든 책의 앞 부분에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해 여기에 적어놓는다. 우선 간단한 오역이다.

"한때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던 상인은 이제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덕분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잉여가치 부분만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6쪽

자본주의에서 상인이 얻는 수익의 근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상인이 '화폐를 저렴하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걸로 수익을 얻었던가. 화폐를 이용해 돈을 버는 건 상인이 아니라 금융자본 아니었던가. 원문을 확인해봤다.

"Merchants, who once made their money buying cheap (or by robbery and stealing) and selling dear, can appropriate only that share of the surplus-value that accrues to them by virtue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surplus-value production and realization."
- 영문판 30~31쪽

'made their money …' 부분이다. 내가 보기엔 "한때 저렴하게 사들여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돈을 (혹은 강도행위와 도둑질로) 벌던 상인은 …"이라고 옮기는 게 맞는 것 같다. 괄호 안 'or by robbery and stealing'을 옮기지 않은 것도 아쉽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 하에서 '수탈'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상업자본이 정직한 부지런함과 상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민한 대처 만으로 돈을 벌어온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하비의 기존 주장들을 고려했을 때 괄호 안의 문구를 삭제한 것은 그의 주장을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옮긴이 주에서의 실수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M1: 122. 뒷 문장은 출처를 알 수 없음. 하비는 펭귄판 202~03면에 있다고 표시해두었지만 해당 부분에는 그런 구절이 없음-옮긴이)
- 하비 2권 강신준 옮김 58쪽

강신준 교수는 해당 부분을 찾지 못해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펭귄판 '자본론'에 분명히 있다. 물론 여기엔 하비의 잘못과 실수도 있다. 잘못은 앞뒤를 바꿔 조합해 인용했다는 것이고 실수는 펭귄판 202~203쪽이 아니라 201~202쪽에 해당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We see then that commodities are in love with money, but that '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는 펭귄판 202쪽에 있고 "오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던 생산물이 내일은 다른 비슷한 상품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Today the product satisfies a social need. Tomorrow it may perhaps be expelled partly or completely from its place by a similar product)"는 201쪽에 있다. 강신준 교수가 MEW에서 직접 옮긴 길판에선 앞 문장이 176쪽, 뒷 문장은 175쪽에 나온다.

"알다시피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참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6쪽

"오늘 생산물은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그러나 내일은 그 생산물 가운데 전부 또는 일부가 다른 유사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그 자리에서 밀려날 수 있다."
- 강신준 옮김 '자본' Ⅰ-1 175쪽

지난해 작고한 김수행 교수의 2015년 개정판에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40쪽

"오늘 어떤 하나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생산물이, 내일에는 어떤 비슷한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139쪽

하비가 앞뒤를 바꿔 인용하고 출처 표기를 실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런 구절이 없음'이라고 단정적으로 옮긴이 주를 단 것은 강신준 교수의 명백한 잘못이다. 그 앞뒤로 조금만 더 살폈어도 충분히 찾아내 하비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론의 번역자이고 연구자인 강신준 교수의 이런 실수는 너무 아쉽다.

오역의 문제는 1권에도 있었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 찾아보니 1권 55쪽의 문장이다.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우리가 교환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 하비 1권 강신준 옮김 55쪽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의 변증법적 관계를 말하는 부분이다. 원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앞 문장과 뒤 문장이 똑같이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원문은 이렇다.

"Can you talk about exchange-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you can't. Can you talk about value without talking about use-value? No."
- 영문판 24쪽

즉 뒷 부분의 '교환가치'는 '가치'가 맞다. 최근 판매되는 책에서 고쳐졌는지는 확인 못했다.

연구자와 번역자들의 노고는 내 독서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강신준 교수의 번역 작업에도 항상 고마움을 느껴왔다. 하지만 이런 실수들로 인해 그의 작업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강신준 교수와 출판사는 서둘러 이런 오류들을 찾아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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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생 2016.03.20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신준씨를 지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다보니, 그의 번역서들에 대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게 됩니다. 하비를 비롯해 몇권의 맑스 관련서를 번역한것 같던데, 오역을 판별해낼 능력이 없는 저같은 일반독자가 과연 이 사람의 번역을 그냥 믿고 읽어도 될런지...ㅠ

    • 때때로 2016.03.21 1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강신준 교수의 학자적 능력을 판단할 능력이 안 됩니다. 오역은 어느 책이나 있는 법이고 차분히 읽다보면 어느정도 걸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좀 지난 일이지만 8월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작은 논쟁이 있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되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에게 비판을 받았던 강신준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가 그 중심이다. 사실 논쟁이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강신준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기존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사용하며 시종일관 말돌리기와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다. 내 비판에서도 촛점은 강신준 교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기초적인 지식에 대한 왜곡과 날조였다. 정치적 이념 혹은 학문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강신준 교수는 논쟁에 정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마르크스의 적자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한 사민당은 점차 우경화 하다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그 핵심인 계급투쟁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영국 노동당이 국유화 강령을 포기한 것보다 30여 년 앞선 것이다.

더 심한 왜곡은, 아니 왜곡이라기보다 뻔뻔한 사기라고 해야 마땅한 데, 마르크스를 개혁의 기수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 이런 경향은 꽤 오래전부터, 사실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존 당시부터 있어왔다. 엥겔스가 '반뒤링'을 쓴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뒤링이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없으니 그 시작은 베른슈타인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강신준 교수에 비해선 매우 솔직하다. 그의 후예들도 대부분 강 교수보다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왜곡하기보다는 마르크스를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한 예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학문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정도의 정직함을 지니지 못한 강 교수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변혁'과 '개혁'을 제멋대로 사용하며 마르크스를 자본주의 개혁 정치의 선구자로 그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학문적 논쟁이 될 수준도 못됐을 뿐더러 저열한 사기 공작에 불과한 강신준 교수의 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문제였을 수 있다. 게다가 기초적인 역사적 지식에서 잘못된 부분도 너무나 많아 비판 이전에 교정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비판을 준비하다가 그만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 잊혀진 논쟁을 내가 다시 끄집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잠언 26장 4~5절은 우리에게 여전한 딜레마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비슷해진다.
우둔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에 맞추어 대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지혜로운줄 안다.

아래는 미디어오늘에 연재된 김성구-강신준 교수 논쟁의 링크다.

김성구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강신준 1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김성구 2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강신준 2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김성구 3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강신준 3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김성구 4 자본론 논쟁의 결말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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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엉망진창 2013.11.15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정주의자도 못되는, 무슨 변종 우파 이데올로그 같은 인물이 <자본>의 한국어 번역자라니.... 기이하고, 기이하고, 기이한 나랍니다, 한국은.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자본론 1권, 김수행 옮김, 231쪽)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옛 물건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신문에 가끔 실리곤 합니다(링크). 기사의 출처와 물건의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죠. 의료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간ㆍ신장ㆍ혈액ㆍ안구 등)를 타인에게 기증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우리의 윤리의식과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거래'도 일부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18세기 이전의 잔혹한 풍습을 연상시키는 비유("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를 사용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예와 다릅니다. 노예는 그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능력 일부를 자본가에게 판매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만난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노동력 구매자(자본가)는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죠. 물론 현실에서는 근로계약서조차 제대로 안 만드는 경우가 많고, 만들어진 근로계약을 안 지키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긴 합니다.

"노동력의 소유자와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만나 서로 대등한 상품 소유자로 관계를 맺는데, 그들의 차이점은 한 쪽은 판매자이고 다른 쪽은 구매자라는 점 뿐이고, 양쪽 모두 법률상으로는 평등한 사람들이다."(같은 책 219쪽)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사업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거만하게 앞서 걸어가는 자본가의 모습과 주춤대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이 자체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법률적으로 공평하게 계약한 관계에서 구매한 노동력 상품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노동력의 소비는 곧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과정입니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같은 책 307쪽)

따라서 노동을 지휘하는 자본은 더 많은 일을 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잉여노동을 짜내고자 하는) 강제적 힘으로 발전합니다. 효율적 업무를 위한 합리적 동선ㆍ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연장노동은 기본입니다. 자본가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잉여노동을 뽑아내기 위해 출근 시간 전과 후에 조회ㆍ회의ㆍ교육을 강제합니다. 주말에도 다종 다양한 회사 행사에 동원하기 일쑤죠.

문제는 노동자가 판매한 노동력 상품이 노동자 그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력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강제를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 주장합니다. 법률적으로 공평한 근로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임금 노예'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죠.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같은 책 416~417쪽)

결국 노동자는 장화를 만들기 위해 무두질 당하는 가죽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그가 판매한 상품이 동물의 가죽처럼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인권의 발명은 더이상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과 같은 잔혹한 물건과 풍습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노예 노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노동력은 노동자 자신과 떨어질 수 없기에 공개적인 노예제는 은폐된 노예제로 변신하고, 사람의 가죽은 사람과 함께 무두질 당하게 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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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enai 2012.05.25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끔찍하군요. 임금 노예도, 무두질도, 인간 가죽으로 된 책도...

    • 때때로 2012.05.25 2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끔찍한 뉴스에 경악하곤 하지만, 노동자들의 일상도 정말 끔찍하죠. 사실 정말 약간의 진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기륭 노동자였을 겁니다, 다시 현장에 돌아가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을 한 경험을 담은 기사가 있었어요. 그의 글에 의하면 80년대 자신이 경험했던 노동보다 현재의 노동이 훨씬 더 강화됐다는 겁니다. 저도 지금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7년째인데,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강도와 지금의 강도를 비교하면 정말 이게 가능한 것인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 ienai 2012.05.25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노동 강도가 힘겨워서 다들 골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늘 한계를 느껴요. 이게 사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