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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밤 종로1가 광화문우체국 앞 거리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서 팔짱을 끼고 있는 시민들. [연합뉴스]

어청수(라 쓰고 개색희라고 읽는)가 '80년대식 진압' 운운하더니 최루탄만 안나왔지 정말 그만큼 하는군요. 시청쪽 상황을 들어보니... 아예 작정하고 뒷 골목(조선일보 편집국 건물이 있는)쪽으로 진압 경찰을 투입했더군요. 제가 있던 교보 앞쪽은 9시부터인가 계속 쉬지 않고 물을 뿌려대더군요. 멀리서도 살수 소리가 들릴정도로 강한 압력으로 뿌려댔습니다. 계속 의료진을 부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아마도 그들은 이 상황에서 양보를 하면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을 식물 대통령으로 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과 약간 거리를 두던 우파 세력들도 이명박이 무너지면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10년만의 보수우파의 '화려한 귀환' 자체가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결집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지지율의 부분적 상승은 이 때문이겠죠.

우리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촛불시위가 패배로 끝날 경우,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그들만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노총이 더 빨리 이 상황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선언' 이상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깃발을 들고 참여한 노조의 숫자는 늘었지만 여전히 촛불시위의 다수는 평범한 시민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좌파고 진보진영이라고 칭하던 이들이 지금의 상황에 굼뜨게 행동한다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음으로 지금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는 네티즌들도 우리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대책위는 17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실만한 분은 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은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고 실질적 책임은 몇몇 소수 단체에게만 가 있습니다.(전 이 단체들을 탓 하려는 건 아닙니다.) 많은 수의 시민을 실질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고 있는 네티즌들, 디피를 비롯해서 엠엘비파크, 소울드레서, 마이클럽, 82쿡, 화장빨, 쌍코, 아고라, 안티이명박카페 등은 지금의 촛불시위의 구체적인 진행에 개입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여하고 있는 시위의 행동과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부조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때문에 촛불시위 초기보다는 상당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대책위에 대한 합리적인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방향을 우리 스스로가 참여해서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입니다. 가능하면 여러 인터넷 카페ㆍ모임들과 함께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대책위에 요구 할 수 있다면 좋겠죠. 지난 국민대토론회에서 아고라의 '권태로운 창'(나명수)님이 이미 제안했던 바이기도 합니다.(정확하게는 새로운 대책위를 만들자고 제안했죠)

마지막으로 점점 강도를 높여가는 경찰의 폭력 앞에 저 스스로의 감정도 격앙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장 큰 무기는 우리 스스로의 참여 바로 그 자체입니다. 90년대 후반 운동의 궤적을 살펴봤을 때 정부의 폭력에 대한 군사적 대응은 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그것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일본과 독일의 적군파,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의 역사죠. 전 '비폭력'을 도전할 수 없는 원칙적 가치로 생각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이 '군사적 폭력'의 형태를 띄어야만 할 때라도 그것은 대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베트콩과 호치민의 북베트남 군대가 그랬듯이요.

경찰의 발작적인 폭력은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Posted by 때때로
2008.06.24 23:30

[스크랩]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2008.06.24 23:30

촛불시위는 매우 온건하게 시작됐습니다. 그저 청계광장에 앉아서 촛불을 밝혔을 뿐이었죠. 얼마나 엉성했냐 하면 혹시라도 이명박의 심기가 상할까봐 종로 경찰서장이 집시법에도 없는 내용을 갖고 초기 촛불시위 주최자들을 협박했었고 그게 먹혀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여차저차해서 촛불시위는 계속됐고 결정적 고비 때마다 조금씩 행동의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된 구호 중 하나는 '비폭력'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디까지를 비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매우 난감한 문제입니다. 사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경찰 버스를 끌어내는 일, 그 위에 올라가는 일 자체를 '폭력'이라고 했었죠. 지금에 와서 많은 시민들은 그것은 퍼포먼스고 '평화적인 한도' 내에서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는 '비폭력 저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폭력과 비폭력을 도덕적 잣대-단 한번도 합리적 의심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비폭력적 저항에 대해 많은 것을 되돌아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에 출간됐지만 지금 읽기에 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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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김은주 옮김|산눈

조금 길지만 아래 이 책의 머리말을 옮겨놨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물론 당연하게도 책 전체를 다 읽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억압의 토대가 되는 규칙을 만들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게임에 가까이 가지 말라.
그들의 규칙으로 게임을 하지 말라!
이것은 새로운 게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무엇인가가 변하고 있음을.
-맬컴 엑스

폭력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내걸며 이런 말로 시작해도 될까 싶지만 폭력과 비폭력을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뜻 이 기준이 매우 명쾌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선악의 가치를 명백히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런 명확한 이분법이야말로 우리의 감수성을 편협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 비폭력이라는 범주는 너무나도 다양한 힘으로 충만해 있는 이 세계를 해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단어가 아닐까? 예를 들어 일본에서 말하는 '게바(ゲバ)'-최근에는 거의 쓰이지도 않지만-의 어원은 독일어의 게발트(Gerwalt)이다. 발터 벤야민(Qalter Benjamin)이 쓴 『폭력비판론』의 원제도 'Kritik der Gewalt'이다. 과거 일본 학생운동에서는 국가에 의한 물리적 힘의 행사와 자신들의 대항적 힘의 행사를 구별하기 위해서 전자를 폭력, 후자를 게발트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여기엔 힘의 행사를 질적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비판적 의도가 있다. 게발트는 영어의 violence, 한자로 暴力이라는 의미와 단순히 등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게발트는 일테면 영어의 violence와 force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violence나 게발트 모두 라틴어 vir 혹은 vis를 어원으로 한다. 전자는 남자, 남편, 용사, 병사 후자는 힘, 무력 폭력 등을 뜻하는데 게발트는 violence와 달리 어떤 모순까지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지배하다. 관리, 감독하다'의 뜻을 지닌 walten이란 동사에서 파생한 게발트는 지배 혹은 통치의 유지, 정당한 강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독일어에서는 국가권력, 권력분립이라고 할 때의 '권력'에 Gewalt를 쓰며, 'gesetzgebende Gewalt'를 번역하면 '입법권'이 된다. 한편 영어의 violence는 외부로부터의 침해나 파괴라는 느낌이 강하다. 라틴어의 violentia에는 '난폭'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배의 유지나 정당한 강제력이라는 표현에는 오히려 force가 적당할 것이다.
게발트라는 말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힘의 행사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명백히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와 비폭력이라고 말하는 상태 사이에 아주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또한 거기에는 좋은가 나쁜가, 혹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가치부여와 관련된 해석상의 게임이 난무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영역에서는 어떤 행동과 어떤 사건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늘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몇 년 전 맥도날드의 '해체'로 유명해진 프랑스 농민들의 행동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일환으로서의 치밀하게 계획된 힘의 행사였으나 당시 행정당국이나 비판적 미디어로부터 적어도 초기에는 '습격'이라는 폭력적 활동으로서 취급되고 유포되었다.
이처럼 폭력과 게발트 식의 구분은 국가가 '부정한' 물리적 힘의 행사를 합법성이나 정당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향하는 국가의 폭력을 다시 국가로 되돌리는 대항적 폭력 행사를 게발트로 부름으로써 힘을 둘러싼 국가의 '폭력의 정의(定義)에 대한 독점'에 대항하며 그와는 다른 게임의 장을 열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moral)은 누구라도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여기저기 흘러넘치는 구호다. 부시 미 대통령도,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본의 보수 정치가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오히려 '폭력은 안 된다'고 외치면서 더 큰 폭력의 배치 및 대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사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이 폭력에 대해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높이기 위해서만 쓰여 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 된다, 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러한 논리를 '폭력은 안 된다'라는 구호가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종종(특히 오늘날)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는 자'로까지 확대되어 현실적으로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곳에 폭력이 발생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폭력이 행사되는 기묘한 사태마저 생겨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는 자들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도덕적 구호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폭력을 물리칠 수 있는 요소를 결코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잔인한 폭력적 요소를 농후하게 잉태하고 있는 경우조차 있다. 오늘날 널리 유통되고 있는 이런 설교적인 구호가 노리는 것은 이 세계에 충만해 있는 다양한 힘을 감시하고 해체하는 능력을 짓밟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감각을 마모 당하고 있다.
폭력으로 불리는 행위는 이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번번이 비난받고 있는 폭력, 이를테면 점령지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느닷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살해하는 강대한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을 몸에 칭칭 감고 경찰 앞에서 자폭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의 폭력이 과연 똑같은 힘일까? 미군의 데이지 커터(Daisy Cutter, 베트남 전쟁에 처음 사용된 제초기라는 뜻의 거대폭탄-옮긴이)에 의한 파괴와 아메리카의 게토(Ghetto, 주로 흑인이나 빈곤층이 거주하는 지역-옮긴이)에서 자동소총을 휘두르는 흑인 폭력단의 폭력이 똑같은 힘일까?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서 비밀경찰을 고용해 노동조합 활동가를 살해하는 폭력과 마치 사기꾼 같은 기업 행태에 항의하며 자폭하는 한 노동자의 폭력 역시 똑같은 힘일까? 이제 폭력은 민족분쟁 중의 강간, 선진국에서의 유아학대,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엄청난 수의 자살과 사형 등 다양한 형태로 다양하게 행사되며 이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것들을 모조리 폭력이니까 똑같은 것으로 취급해버리거나 혹은 국가에 의해 정당화된 폭력과 단지 범죄일 뿐인 폭력으로 간단히 재단해 버리기에는 적어도 뭔가 망설임이 생기지는 않는가?
이런 폭력 중 어떤 것이 '올바른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원폭'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조금 믿기 어렵지만 과거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은 평화세력이니까 그들의 원폭은 올바르다는 식의 발상은 폭력을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힘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교조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에서 시도되고 있는 비판은 폭력을 비폭력주의의 관점에서 단죄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칸트적인 비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비판'은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니다. 독일어의 Kritik는 어원적으로 krinein, 즉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폭력을 비판한다는 말은-폭력의 근절이라는 이념에 입각하면서도-폭력 자체의 내부에 어떤 구분 선을 긋는 것이다.

아메리카의 군사력을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 폭력수단의 독점과 압도적인 힘의 비대칭 속에 놓여있다. 아메리카와 그와 유사한 폭력수단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잇으며 나아가 그러한 폭력수단을-정도야 어떻든-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행위자와 이른바 '민중' 사이의 힘과 압도적 불균형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맹렬한 기세로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이 유포되고 있는 중이다. 테러리스트의 비애를 노래하던 시인도 '총을 들라!'고 외치던 가수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사태에 직면해도 이를 규탄하는 격렬한 선동은 거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분노와 힘을 과시하는 시위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폭력적'인 것에는 이제 진절머리 난다고 말한다. 그런 한편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형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점점 더 소수파로 전락하고 있으며 '평화주의'라는 이상을 내던지고 핵무장을 노리며 군대를 증강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커지고 있다. 동시에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긍정하는 의견까지 점점 활개 치며 명백히 폭력을 긍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이율배반적 사태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인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다. 예를 들어서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동시다발 테러와 이후의 미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대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누가 봐도 '올바른' 구호가 등장했다. 분명하게 '테러'는 찬성, '전쟁'은 반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테러'는 반대, '전쟁'에는 찬성이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다. 테러도 전쟁도 폭력은 모두 다 싫다는 이 구호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책은 그런 폭력과 비폭력 또는 전쟁과 평화로 딲 잘라 구분되는 범주 앞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며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