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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교과서'에 해당되는 글 1

  1. 2014.01.03 1937년 울워스 여성 노동자의 점거파업


철도노동자 투쟁에서 용기를 얻은 청년들이 교학사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에 반대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박근혜정부와 단호하게 싸우는 법을 철도노동자로부터 배운 학생들은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이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부당함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고 작은 승리를 쟁취하고 있다. 2013년 12월 1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철도파업 지지 촛불시위에 참여한 젊은 여성. [사진 自由魂]

지난해 12월 9일 시작한 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이 30일 막을 내렸다. 22일 간의 대담하고 단호한 투쟁은 박근혜정부에 실망해온 대중에게 큰 자신감을 전해줬다. 꺼져가던 부정선거 규탄 촛불시위가 다시 불타올랐다.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묻는 대학생들의 자보는 안녕한 삶을 위한 연대를 건설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물음은 중ㆍ고등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됐다. 특히 교학사의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투쟁을 다시 불붙였다. 동우여고와 청문여고 학생들에서 시작된 저항은 하루만에 학교 측의 후퇴로 끝났다. 노동자 투쟁이 일으킨 파문이 일반 민주주의적 쟁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철도노동자들이 박근혜정부에 맞서 싸우는 법을 대중에게 보여줬고, 대중은 자신의 위치에서 수 많은 작은 박근혜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우리와 정반대로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을 자극해 성장시키고 있다. 2011년 9월 뉴욕에서 '점령하라' 운동은 학생, 예술가, 전문직 종사자, 실업자들이 중심이 돼 시작됐다. 참여한 인원이 절대적으로 다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곧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연대로 발전했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서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2011년 11월 2일 오클랜드 시민들은 총파업을 벌여 항구를 봉쇄했다. 그 다음달 12일에는 롱뷰 부두노동자들에 연대한 항만 봉쇄가 시도되기도 했다. 2012년 9월 10일 시카고에서는 교사들이 25년 만에 파업에 들어갔다. 교육 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이었다(이 파업은 결국 패배했다). 2012년부터는 월마트와 맥도날드 등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 투쟁도 확산되고 있다. 2012년 10월 미국 전체 12개 주 28개 월마트 매장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이는 월마트 50년 역사상 첫 파업이다.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점에서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도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2012년 11월, 2013년 8월, 12월…. 패스트푸드노동자의 파업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100개 도시에서 동시에 파업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에, 미국에서는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에 힘을 불어넣어주며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전통적인 조직 노동자 운동은 민주주의의 위축에도 사회의 다른 부문보다 단호하게 투쟁을 조직하며 자신감을 전해준다. 이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청년들이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취업연령이 높아지면서 편의점, 카페, 패스트푸드점,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등에서 일하는 저임금 '아르바이트'가 청년의 '노동'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이는 더 이상 청년 문제 만은 아니게 됐다. 지난해 마지막 날 박근혜 퇴진과 특검 실시를 요구하며 분신한 이남종(40)씨도 저임금 노동에 종사했었다고 한다(이를 두고 '생계 비관' 운운하며 고인의 뜻을 모욕한 보수 언론의 기사들은 역겹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임금 노동 분야에서 투쟁을 조직하기는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소수의 사람들로 여러 곳에 흩어져 근무하고 있고, 저임금이라는 조건 자체가 단호하고 단결된 투쟁을 어렵게 만든다. 월마트 노동자들의 50년 만의 파업과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최초로 알바노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했던 것이 관심을 받은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 투쟁이 역사상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7년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벌어진 디트로이트 울워스 노동자 투쟁이 대표적이다. 모두가 여성인 이 소매점 노동자들은 법원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매장에서 강력한 점거파업을 이어갔다. 연대와 점거파업의 확산으로 당대의 월마트라 할 울워스는 결국 항복해야만 했다.

한국에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점거파업이 파업의 일반적 형태였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대한 우려로 철도노조는 지난해 12월 파업에서 점거를 시도하지 않았다. 철도뿐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서도 정부의 탄압 때문에 점거파업은 쉽지 않다. 1930년대 이전까지 파업은 보통 작업장에서 물러나 공장과 사무실 앞에서 파업 파괴자(대체인력) 투입을 막기 위한 피케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36년 12월에서 1937년 2월까지 진행된 GM 노동자들의 플린트 공장점거파업의 승리가 점거파업을 노동자 투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로 부각시켰다. 모든 조건에서 점거파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파업전술은 유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80여년 전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단호한 투쟁은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과 영감을 전해줄 것이다. 마크 노튼이 2012년 나온 '파업 여성들, 매장을 점거하고 결국 승리하다(Women Strikers Occupy Chain Stores, Win Big: The 1937 Woolworth's Sit-Down)'를 소개한 글을 아래 옮긴다. 이 소책자는 역사학자 다나 프랭크가 썼다. 마크 노튼은 '유나이트히어!'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조합원이다.

※ 의역이 많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글 아래의 각주는 이해를 위해 옮긴이가 단 것입니다.


1937년 디트로이트 슈퍼마켓 연좌농성:
오늘날 저임금 파업 노동자를 위한 교훈, 마크 노튼*, 2013년 12월 11일

1937년 울워스는 오늘날의 월마트와 같은 것이었다._1 이회사는 주로 젊은 여성인 저임금 노동자에 의해 운영되는 전국적 점포망을 만들어 소매 시장을 변화시켰다. 값싼 음식을 판매하던 이 매장의 간이조리매장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 거대 패스트푸드 기업의 선구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디트로이트 울워스 점거파업의 성공으로부터 오늘날 비슷한 상황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블랙프라이데이와 12월 5일의 월마트와 패스트푸드 노동자 파업 여파로 이 운동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물어야할 때가 됐다. 목표는 무엇인가? 장기간의 투쟁에 노동자들이 계속 조직될 수 있을까? 우리는 승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디트로이트 연좌농성은 당시 전국적인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역사학 교수 다나 프랭크는 최근 발행한 소책자에서 이 역사와 그것의 교훈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범상찮은 토요일

"1937년 2월 27일 언뜻 보기에 가장 평범했던 토요일, 미국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디트로이트 시내에 있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4층 건물에 있는 울워스의 5~10센트 상점
_2에서…"라는 말로 프랭크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른 울워스 매장이 그렇듯 이 매장도 붉은색과 초록색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굵고 큰 글씨의 체인점
[울워스] 간판이 앞에 걸려 있었다." 기업의 브랜드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은 당시에는 새로운 일이었다. 오늘날은 매우 흔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장 평범한 토요일'은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 디트로이트 북부 플린트에서 GM 자동차 노동자들이 법원의
[공장을] 떠나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경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몇 주간 공장을 점거한 후 역사적 승리를 쟁취했다.

실제로 정부가 파업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방위군을 보낼 정도로 노동자들은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결국 GM은 굴복하고 이제 막 태어난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UAW로 몰려들어 그들
[아마 UAW]과 새로운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더 큰 승리로 나가는 데 도움을 줬다._3

울워스에는 "저가의 작은 상품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를테면 머리빗, 뜨개질 바늘, 전등갓, 옷핀, 파이 접시, 얼굴 크림, 빳빳한 새 신발끈 같은 것들 말이다. … 가게 이름처럼 단지 5센트 혹은 10센트일 뿐이라고 … 단정하게
[가격이] 인쇄된 표시가 고객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게 전체의 모든 상품에 달려 있었다. … 백인 고객들은 간이조리매장에서 얼마든지 바나나 스플릿을 즐길 수 있었다."

매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당연히 그들이 근무하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잘 알았다. 회사 설립자인 프랭크 울워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에게 저렴한 종사자가 없었다면 값싸게 상품을 팔 수 없었을 것이다." 빙 크로스비의 히트곡 중 하나는 이에 대한 멋진 반박이 될 것이다. "나는 5~10센트 상점에서 100만달러짜리 물건을 발견했지~"

파업, 소녀, 파업!

토요일 아침 빈약한 급료를 받던 디트로이트 울워스의 젊은 여성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속에 플린트의 승리
[GM 노동자의 공장 점거파업 승리]를 떠올렸다. 그 때 "디트로이트 식당 종업원ㆍ여급 노동조합 조직자인 플로이드 뢰브는 매장 1층의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 … 호루라기를 가능한 크게 빽하고 불었다. 그리고 외쳤다. '파업! 파업!'(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파업, 소녀, 파업!')"

"매장의 여러 곳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함성이 터져나왔다. 간이조리매장의 하얀 유니폼을 입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작업을 멈췄다. 그들은 매장의 통로를 통해 빠르게 이동했다. 곧 매장 3개 층의 모든 여성노동자들이 각자의 계산대에서 물러나거나 부엌에서 뛰쳐 나왔다. 그들은
[계산대와 조리대에서] 손을 떼고 작업을 멈췄다."

디트로이트뉴스에 따르면 "금전등록기의 쨍그렁거리는 소리가 그쳤다. 손님들은 5센트 또는 10센트 동전을 손에 쥐고 있어봤자 소용 없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 (그러나) 어떤 소녀도 손님을 기다리려주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자 매장 관리자가 나타났다. 창고관리 소년까지 포함해 모든 여성들은 회의실로 안내받았다.

파업 참가가자들은 관리자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노동조합 인정, 현 25센트인 시급을 10센트 더 올려줄 것, 일일 8시간 노동, 일주일 48시간 근무 외에는 1.5배 지급, 간이조리매장 노동자에게 점심식사 식대 50센트, 자유로운 유니폼과 세탁, 선임권
_4, 노동조합을 통한 신규 고용, [파업에 대한] 보복의 금지.

관리자는
[노동자들에] 에워싸여 우물댔다. 하지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업 참가자들은 그들의 요구가 들어질 때까지 매장 점거를 계속하기로 했다.

프랭크는 "108명의 평범한 젊은 여성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해냈다. 그들은 정확히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파업을 한 것 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큰 초국적 기업 중 하나의 사유재산을 점거했고 떠나라는
[법원의] 명령을 승리할 때까지 거부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고전적인 점거파업이다. 그러나 파업 참가자 모두가 공장의 남성이 아니라 다양한 매장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던 것은 처음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여성들과 파업에 전국적 관심이 집중됐다. 그들은 세기적인 소비의 상징이고, 다섯 개 나라에 2000개의 매장을 지닌 가장 큰 기업 중 하나와 대결한 것이다. 이는 월마트, GAP, 맥도날드 모두에서 동시에 파업에 들어간 것과 같다."

계속된 조직

프랭크는 당시 여성들이 매장의 주방을 이용해 음식을 준비하고, 매트리스를 가져오고, 청소용품을 이용해 매장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가끔은 그들 스스로를 위해 사탕과 진통제를 사용하는 등 꽤 열심히 모두가 참여해 그들 스스로를 조직한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매장의 전화 세 대는 친구와 지지자, 언론과 통화를 위해 사용됐다. 그들은 심지어 '응원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처음엔 [점거파업에 대한] 비난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곧 모든 비난이 사라졌다'.

파업이 시작되고 이틀이 지난 월요일, 호텔ㆍ식당 노동조합 705 지역 조직자인 미라 코마로프는 몇몇 노동자들과 함께 두 번째로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위축된 울워스
[사측]를 만났다.

오래지 않아 두 번째 매장 점거됐다.

그날 밤, 705 지역의 사무국장이자 회계 담당자인 루이스 쾨니그는 울워스를 위협했다. 그는 만약 파업이 다음 토요일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국의 모든 울워스 매장에서 진행될 "연좌농성 선언을 우리 조합 집행위원회에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쾨니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시내의 약간 큰 호텔과 상류층 클럽에서 일하는 600명의 노동자가 가입한 노동조합을 이끄는 '전형적인 보수적 비즈니스 노동조합주의자'
_58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대는 과격한 연설을 끌어냈고 그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곳곳에서 답지한 연대

파업이 확산되면서 연대 활동도 맹렬히 속도를 올렸다. 아주 많은 수의 지역 호텔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정기적인 피케팅이 매장
[앞]에서 조직됐다. 전국의 노동자 지도자들 사이에 지지의 표현이 확산됐다.

파업 여성 노동자들에 환호하는 전보가 전국에서 쇄도했다. 음식과 물품, 여성용품을 마련하는 데 쓸 모금도 이어졌다. 신문은 이 소식을 주요 뉴스로 전했고 극장에서는 뉴스영화가 상영됐다. 사람들은 파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화요일 뉴욕의 국제소매점원보호조합
_6은 기금 지원을 약속하며 노동조합은 "파업이 끝날 때까지 뉴욕의 울워스 매장에 대한 불매운동"을 쾨니그가 [협상의 마지노선으로] 선언했던 토요일 시위에서 시작할 것이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디트로이트에서 다른 서비스 노동자들도 행동에 들어갔다. 스토우퍼스
_7의 여성종업원과 주방 노동자 60명은 화요일 점심식사가 한창인 때 그들이 일하던 식당을 점거했다. 하일러_8 식당 노동자들은 피셔 빌딩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출입구에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아쉽게도 프랭크는 이 행동들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지역 상점주들은 더 많은 연좌농성을 막기 위해 스스로 임금을 올려주던 것을 중단했다.

수요일 울워스는 마침내 협상에 동의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쾨니그와 요리사노조의 루이스 월터, 소매점원조합의 루이스 솔터를 대표로 내세웠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파업 노동자 중 누구도 뽑히지 않았다. 울워스는 뉴욕의 어떤 거물을 보내왔다.

금요일 오후 5시30분, 파업을 확대하고 뉴욕에서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경고한 시한인 토요일을 간신히 넘기지 않은 파업 6일째 울워스와 노동조합은 합의를 발표했다.

승리

"파업은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고 명백하게 승리했다"고 프랭크는 쓰고 있다. "그들은
[유니폼의] 세탁을 포함한 요구사항의 긴 목록 전체를 쟁취했다. 우선 회사는 모든 여성 노동자의 시간당 급료를 5센트 인상하는 것에 동의했다. … 모두는 주당 48시간 외 근무에 대한 1.5배 지급을 얻어냈다. 신규고용은 앞으로 노동조합을 통해서만 하기로 했다. 유니폼은 회사가 공짜로 제공하고 세탁까지 해주기로 했다. …"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매장을 점거한 동안 평상시 시급의 50%를 지급받기로 한 것이다(아마 하루 24시간에 대한 지급은 아니겠지만). … 게다가 합의안은 단지 점거파업이 이뤄진 두 개 점포만이 아니라 도시의 40개 매장 모두에 적용됐다."

울워스는 조합원이 비조합원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만 얻어냈을 뿐이다.

합의안에 대한 뉴스가 전해지면서 두 매장의 파업 노동자들이 주요 매장 안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뻐하고 환호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인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쾨니그가 합의안을 낭독하는 지역 호텔로 행진했다. 그는
[합의안에 대한] 투표 요청에 개의치 않았다. 다른 누구도 [투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프랭크는 이어서 "울워스는 토요일에 특별 세일을 발표했다"고 적고 있다.

울워스의 파업은 이를 따라한 행동들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 세인트루이스, 뉴욕, 샌프란시스코, 오하이오주 애크론, 위스콘신주 슈피리어, 미네소타주 세인트폴과 덜루스, 워싱턴주 터코마와 센트레일리아의 소매점에서 점거파업이 일어났다. 프랭크는 "오늘날 전국에 있는 모든 노동조합의 존재는 부분적으로 울워스의 파업 덕"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게 요약한다. "어느날 디트로이트에서 점거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이 108명의 매우 젊은 여성들은 모두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 투쟁이 빛났던 것은 신화적 영웅이 아니라 주요 프랜차이즈 매장을 7일 간 하루 24시간 점거해보기는 커녕 파업의 경험도 없는 젊은 여성들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대 가장 큰 기업 권력 중 하나와 맞서 이겼고, 다른 수십 만 명의 점원들-과 이 파업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를 지키고 최저임금을 요구하기 위해 일어서는 데 (또는 연좌농성에 들어가는 데)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만한 울워스 사측에 큰 교훈을 줬다.

교훈?

프랭크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이 대담해졌고 스스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울워스 노동자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대담함과 밀접하게 관계있는 용기를 추가할 것이다.

그녀는 또 "그들은 거대한 집합적 힘을 배후로 뒀기 때문에 승리했다"며 "예를 들면 (플린트의) GM 노동자들, 여론의 힘, 시장과 정부로부터의 중립, 지지자 수천 명의 극적인 연대"를 꼽았다.

몇몇은 이와 같은 조건이 오늘날 노동운동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은 저임금에 시달리는 월마트와 패스트푸드점 노동자들이 플린트
[의 GM] 노동자들과 같은 사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아직은 아니다.

그들에게 유리했던 조건에서조차 울워스의 승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프랭크는 에필로그에서 디트로이트 울워스 노동자들은 1937년 10월 재계약을 하면서 노조협약을 잃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이 승리한 지 불과 몇 개월 안됐을 때였다.

프랭크는 "매장에 남은 몇몇 여성에 따르면 경영진은 계획적으로 그들을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을 반노조적 노동자와 교체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을 통한 채용 요구가 포함된 합의안을 강제하는 데 노동조합이 왜 실패했는지를 포함해 명백한 이유가 있다. 노동조합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몰두해야만 했던 울워스 사장의 반노조 활동, 일시적 성격의 저임금 노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타격을 입혔는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후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식의 동화와 같은 이야기는 잠시 뿐이었다. 오늘날 디트로이트에서 승리가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악몽으로 보일 뿐이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동안은 말이다.

얄궂게도 울워스 간이조리매장은 1960년대 흑인 주민과 그들의 동조자들이 그곳에서
[흑인이 백인과의 차별 없이] 식사할 권리를 위해 벌인 연좌농성 등 또다른 성공한 투쟁 현장이 됐다. 투쟁은 승리했고 이렇게 [1937년 연좌농성에서] 전달받은 지혜는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디트로이트를 다시 살펴보면 흑인의 80%는 민권운동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흑인이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평가보다 많이 모자란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와 착취받는 인민이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다. 노동조합ㆍ활동가ㆍ정치조직이 있든 없든 저항은 일어난다. 반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란을 승리로 만들고,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망과 용기를 지닌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페이스북에 글쓰는 것, 트위터에서
[소식을] 전하는 것, 언론 보도와 여러 매체에서의 선전 이상의 것을 뜻한다.

울워스 파업 참가자들은 어렵지만 잘 싸웠다. 그들은 승리했었다. 그들의 대담함과 용기는 우리 모두에게, 특히 저임금 노동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승리를 지키기는 데 실패한 교훈으로부터 배울 필요도 있다.

* 마크 노튼은 유나이트히어!_9 2 지역, 1972년 출범한 샌프란시스코 호텔ㆍ식당 노동조합의 평조합원이다. 그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가입해있기도 하다. 그의 홈페이지는 www.MarcNorton.us다.

1_ 1879년 뉴욕주 유티카와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에 세워진 염가 판매점. 1911년 경쟁업체 네 곳과 통합해 전국적인 점포망을 갖췄다. 1912년에 미국 전역에 596개의 매장이 울워스 이름으로 영업했다. 1998년 베나토르그룹으로 이름을 바꿨다.

2_ 한국의 1000원숍과 비슷한 저가 매장.

3_ 미국노동자협회(AFL)는 백인 숙련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이었다. 1929년 대공황과 35년 만들어진 와그너법(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하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한)으로 AFL 내 일부에서 미숙련ㆍ반숙련 노동자까지 포함한 산업별 노조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AFL이 이들 혁신파를 모두 제명하면서 1938년 탄광ㆍ의류ㆍ섬유ㆍ금속가공 등 8개 산업별 조직을 기반으로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결성된다. CIO는 한동안 진보적 노동운동을 대표했으나 메카시즘 열풍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1950년대 사회주의 계열 조직과 좌파 지도부가 축출됐고 결국 1955년 AFL과 다시 통합해 AFL-CIO를 만들어 오늘에 이른다. UAW는 1935년 설립됐다. 1968년 AFL-CIO를 탈퇴했다. 지금은 자동차뿐 아니라 헬스케어ㆍ카지노ㆍ항공우주산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미국자동차항공우주농업기계노동조합(United Automobile, Aerospace and Agricultural Workers of America).

4_ 고용주가 해고할 때 근속년수가 오래된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고용관행. 해고는 근속년수가 짧은 노동자부터 순서대로 이뤄지고 복직할 때도 근속년수가 많은 사람부터 고용하는 것. 1930년대 발전했다.

5_ 비즈니스 노동조합주의는 노사협조와 특정 정치에 경도되지 않는 초당파주의, 사실은 사회주의 정치와의 거리를 핵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적 노동조합 운동을 말한다.

6_ 1890년 AFL에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전국소매점원보호조합(The Retail clerks' National Protective AssociationㆍRCNPA)으로 출발, 1899년 영국ㆍ콜럼비아ㆍ캐나다 지부가 승인되면서 국제소매점원보호조합(The Retail Clerks' International Protective AssociationㆍRCIPA)로 발전했다. 보통 국제소매점원노동조합(The Retail Clerks' International UnionㆍRCIU)으로 불린다. 1974년 의료 서비스 부문의 발달로 전문직종 본부가 생겼으며 1977년에는 부츠ㆍ신발노동조합이 병합돼 신발제조본부(The Footwear Division)가 설립됐다.

7_ 1914년 창립한 미국의 냉동식품 회사. 1973년 네슬레에 합병됐다.

8_ 미국의 사탕ㆍ식당 프랜차이즈 기업. 1883년 뉴욕 맨하탄의 사탕 공장으로 출발했다.

9_ UNITE HERE!. 미국과 캐나다에 26만5000명의 조합원을 둔 노동조합. 호텔ㆍ음식점ㆍ창고ㆍ카지노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 2004년 유나이트(formerly the Union of Needletrades, Industrial, and Textile EmployeesㆍUNITEㆍ섬유ㆍ의류산업노동조합)와 히어(Hotel Employees and Restaurant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ㆍHEREㆍ호텔ㆍ식당국제노동조합)가 합쳐 만들어졌다. 2005년 AFL-CIO를 탈퇴하고 승리를위한변화동맹(The Change to Win FederationㆍCtWㆍ2005년 AFL-CIO의 대안으로 건설됐다)에 참여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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