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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0 12:33

전략은 불필요한가 쟁점2013.12.20 12:33

푸코가 1979년 5월 '르몽드'에 기고한 '봉기는 무용한가'를 읽었다.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한 이 글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러나 전략에 대한 폄훼 혹은 오해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느낌을 아래 적는다.

서정연씨가 옮겼다. 글을 읽으려면 여기: 푸코 '봉기는 무용한가'


1979년 샤에 맞서 무장한 군인 앞에 목숨을 걸고 나선 이란의 인민.

이란 혁명이 결국 호메이니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으로 끝나자 이에 대한 비난이 좌와 우 모두에서 빗발쳤다. 최근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에 대해 여러 지식인과 언론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반란]는 무용하다. 언제나 그건 매한가지니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지시를 내리진 않는다. …… 인민들은 봉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성은 봉기에 의해서만 역사에 도입되며 역사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실 봉기와 반란은 푸코가 거리를 두는 전략가들의 '전략'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반란의 우연한 계기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다. 푸코가 봉기ㆍ반란과 구분하는 혁명도 다르지 않다. 일반적 특징들 몇몇을 꼽을 순 있겠지만 정확한 순간, 계기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일으킨 파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우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략은 불필요한 것인가. 푸코는 자신의 이론적 도덕이 '전략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나의 이론적 도덕은 이들[전략가]의 것과는 정 반대다. 그것은 '반전략적'이다. 즉 하나의 특이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이를] 존중하는 것, 권력이 보편적인 것을 침해할 경우에 [이에 대해] 비타협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도덕은 전략가들에게 필요한 것임에 틀림 없다.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비타협적이 되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석연찮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봉기와 반란을 순전히 우발적인 현상으로, 즉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현상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군대에 맞선 남녀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가 거리에 나서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발적인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료 형제, 혹은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어떤 의식적 경험들이 존재한다. 새롭게 촉발된 운동이 흔히 과거의 성공한(것처럼 여겨지는) 봉기의 형태를 모방하곤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 뿐만은 아니다. 봉기와 반란이 촉발되는 구체적인 순간과 계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이러한 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의식적 반대파의 노력이 있어왔다. 인쇄술의 발달과 계몽주의의 확산은 프랑스 혁명의 전제였다. 러시아 혁명은 경찰과 황제까지도 무시하지 못할정도로 성장하던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1987년 6월 항쟁 앞서 수많은 불온 서적들이 대학가에 넘쳐났고 야학ㆍ서클ㆍ학회와 같은 학습ㆍ조직활동이 확산됐다.

봉기와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혁명적 전략가의 필수적 도덕이다. 인민으로부터 배우며 그 내부에서 전략을 세우는 게 전략가가 해야 할 임무다. 봉기와 반란이 자신이 예측 또는 계획한 데서 벗어났다며 기권하는 것은 결코 전략가적인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 반란을 그저 존중만 하는 게 꼭 비타협적 이론가의 태도도 아니다. 왜냐면 "넘어설 수 없는 법"에 "제한 없는 권리로 맞"서는 것은 언제나 인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반란? 세계 곳곳의 반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고전적인 바리케이트와 무장한 시위대-경찰의 충돌이다. 사진은 6월 26일 칠레 산티아고의 시위 모습. [사진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페이스북]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의 반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2011년 튀니지ㆍ이집트 혁명부터 올해 터키ㆍ브라질 반란까지 모두 '중산층 혁명'이라고 주장한다[월스트리트저널 6월 28일ㆍ링크]. 후쿠야마의 기고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이후 우리 언론에서도 '중산층 혁명'에 대한 기사가 잇따랐다. 특히 경향신문은 7월 3일자 1면과 8면 두 개 면을 사용해 가장 크게 '중산층의 반란'을 다뤘다. 이 글에서는 후쿠야마의 월스트리트 기고를 중심으로 '중산층 혁명'에 대해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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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7월 3일자 지면에는 '지구촌 휩쓰는 중산층의 반란'이란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의 물결을 분석하고 있다. 이번 시위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부독재에 맞서는 정치세력도, 세계화의 그늘 속에 좌절한 젊은이들도 아닌 '글로벌 중산층'"이라는 게 요지다[경향신문 7월 3일자 1ㆍ8면ㆍ링크].

최근 저항에 대한 경향신문의 '중산층의 반란'이라는 규정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중산층 혁명(The Middle-Class Revolution)'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격차(the gap)'를 이번 시위의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본주의 성장은 거대한 규모로 중산층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됐지만 정치가 이 증대된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직면한 실패가 최근 시위들이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처럼 터키와 브라질에서도 정치적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평균 이상의 교육 수준과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기술 친화적인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를 조직하고 연대를 건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반란과 혁명에 대한 틀에 잡힌 관념이 많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배운, 억압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시위는 마치 옛 이야기처럼만 여겨진다. '중산층 혁명'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시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중산층의 성장? 세계는 평평해졌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세계적으로 봤을 때 '중산층'의 성장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쿠야마 스스로도 중산층의 증가 현상이 중국ㆍ인도에 집중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00년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1997년 동아시아 국가를 강태한 경제위기와 2000년대 초 미국의 IT버블 붕괴를 거친 후 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네 개 나라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새롭게 제시됐다. 브릭스(BRICs)는 이 네 나라의 이름에서 비롯한 단어로 세계적 금융자본인 골드만삭스가 2003년 처음 사용했다. 즉 애초 브릭스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선진 국가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금융자본의 반응이었다. 세계경제의 성장과 중산층의 부흥은 결코 전 세계적으로 고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후쿠야마가 주목하고 있는 터키와 브라질에서 지니계수(세계은행, 100 기준)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과 룰라의 노동자당(PT)이 집권한 2003년 각 43.42와 58.78에서 2010년 터키 40.03, 2009년 브라질 54.69으로 줄어들었다. 2010년 멕시코의 지니계수가 47.16임을 감안하면 브라질의 불평등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터키는 2008년 38.95까지 떨어졌던 지니계수가 2010년 다시 증가한 것이다. 후쿠야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중국은 1981년 이후 꾸준히 지니계수가 상승해 2009년에는 42.06에 다다른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지난해 12월 또다른 보도에 의하면 중국가정금융조사연구센터(쓰촨성 청두 시난차이징대와 인민은행 금융연구소가 함께 설립한 연구소)의 조사결과 2010년 중국 지니계수는 0.61에 달해 '폭동을 부를 수준'이다[동아일보 2012년 12월 11일자 21면ㆍ링크].

터키와 브라질에서 빈곤층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브라질의 빈곤층(국가 빈곤선 기준 빈곤층 인원수, 국제 빈곤선 기준 이하 인구 포함) 인구는 2004년 33.7%에서 2009년 21.4%로, 터키는 2004년 25.6%에서 2009년 18.1%로 줄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정체 수준이며, 터키의 경우 장기실업률은 2003년 23.4%에서 2011년 26.5%로 오히려 증가했다
[구글 Public Dataㆍ링크]. 후쿠야마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도 "평균 이상의 소득을 지닌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서울경제는 무르시를 실각시킨 이집트 제2혁명의 원인을 "치솟는 청년 실업률ㆍ경제난"이라고 지적한다. 민간연구소들의 조사에 의하면 30세 이하의 청년 실업률은 60%에 달한다는 것이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랍의 봄의 도환선이었던 튀니지 혁명은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경찰의 단속으로 노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가 분신하면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에 고통받던 튀니지 인민들이 반란에 나선 것이다[프레시안 2011년 1월 16일ㆍ링크].

경향신문이 '중산층의 반란'이라고 부른 최근의 보스니아 시위의 배경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스스로 지적하듯이 "보스니아는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이 유럽연합 평균의 29% 수준에 머무는 유럽 내 가장 가난한 국가"이고 "실업률이 44.6%에 달하면서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경향신문 7월 3일자 8면ㆍ링크]. 부패한 정치인의 공직 임명에 반발해 시작된 불가리아 반란도 다르지 않다. 이 반란이 시작되기 세 달 전 불가리아 인민은 전기요금의 급등에 반발해 거리로 나섰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분노한 시민을 달래기 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사태의 수습은 아직 멀어 보인다.

결국 이 모든 반란의 배경에는 고전적인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즉 극심해진 빈부격차, 열악해지는 삶의 질이 그 공통된 배경인 것이다. '중산층의 성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좀 더 평등해진 세계의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경제성장은 몇몇 나라의 소수에게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경향신문은 이 중산층을 부르킹스 연구소의 기준을 빌어와 10~100달러의 소득수준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중산층'은 18억명에 이른다. 이 추세는 계속 이어져 2030년에는 세계인구 80억명의 절반을 넘는 48억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이 적절한지 따지기 이전에 앞에서 살펴본 세계경제의 현실은 경제적 기준의 중산층 성장이라는 주장이 현실과 다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후쿠야마는 중산층을 경제적 기준 만으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는 중산층을 "교육과 직업, 자산의 소유에 의해 정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가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를 예측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많이 내는 중산층은 정치에 더 민감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술 친화적인 이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더 밀접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수준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은 진보와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이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들까지 끌고 온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불만을 품은 중산층이 주도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행동 방침이 소작농과 노동자, 빈민층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848년 '인민의 봄'은 사실상 유럽 대륙 전체에서 분출한 혁명이 직접적으로 앞선 수십여 년 동안의 유럽 중산층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혁명가들을 보자. 프랑스 혁명의 로베스피에르ㆍ생쥐스트, 1848년 혁명의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루이 블랑, 1871년 (비록 결정적 순간에 감옥에 갖혀있었지만) 파리 코뮌의 블랑키, 1917년의 레닌 …. 이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대표적 혁명가들은 몰락한 귀족 또는 교육 받은 지식인 출신이다. 심지어 엥겔스는 자본가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는 또 어떤가.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의사다. 우리는 이러한 목록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들 혁명의 대표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배후에 더 거대한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794년 사이 상퀼로트의 행동이 없었다면 로베스피에르의 위명 또는 악명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상퀴로트의 핵심 지도자들을 숙청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혁명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대중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바로 그 때 그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반동이 닥쳐왔다. 마르크스에게 '붉은 박사'라는 악명을 안겨줬지만 1848년 혁명은 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게 아니며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1871년 블랑키 없이 코뮌을 80일간 운영했다. 1917년 레닌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가 없었다면 볼셰비키의 10월 봉기는 실패했을 것이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레닌도 없다.

동맹, 혁명의 필요조건

물론 후쿠야마가 '개인'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중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의 혁명을 얘기할 때 '개인'으로서 혁명가의 출신성분을 따지지만 현재의 혁명을 얘기할 때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따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혁명에서 이 중산층 '집단'의 다른 계급 또는 계층과의 동맹은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시위와 봉기, 때때로 혁명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성장한 중산층이 주도하지만 마지막에 장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것에는 드물 게만 성공한다. 그것은 중산층이 발전된 국가에서 사회의 소수 이상을 대표하지 못하고 그들 내부가 스스로 분열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맹을 맺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동은 지속적인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후쿠야마는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중요한 듯 말하지만 사회를 뒤흔드는 중요한 투쟁은 거의 언제나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행동하며 벌어진다. 다시 한 번 그 목록을 늘어놓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혁명, 1817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혁명 모두가 그랬다. 보통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계급의 미발전(또는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혁명은 하나의 계급 또는 계층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노동계급은 소수였으며 레닌과 볼셰비키는 농민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여러 타협을 해야만 했다.

현재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터키에서 젊은 활동가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업과 쿠르드족의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칠레에서는 무상교육과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에 교사ㆍ부두ㆍ광산ㆍ의료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연대에 나섰다
[참세상 2013년 6월 27일ㆍ링크].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은 오클랜드 항만 노동자와의 연대, 시카고 교사 파업, 월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거대한 투쟁들이 자동적으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집트의 두 번째 혁명에는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함께 참여했다.

계급 화해의 정치, 모호한 미래

이미 동맹은 현실에서 이뤄져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동맹이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중요한 동맹의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1849년 2월의 쁘띠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 1848년 파리 노동자의 6월 봉기가 무참히 진압된 뒤 쁘띠부르주아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위협받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제반 민주주의적 보장책들이 반혁명으로 인해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쁘띠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했다". 6월 봉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노동자는 이들의 제안에 동의해 공동강령을 마련하고 연합선거위원회를 발족해 공동후보를 추천했다.

"플로레타리아의 사회적 요구로부터 혁명적 요소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쁘띠부르주아의 민주주의적 주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형태가 없어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 사회-민주주의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곧, 민주공화주의 제도가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 극단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적개심을 무디게 하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 53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동맹의 결과 1849년 5월 28일 입법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마르크스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산악당은 750석 중 200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 중 하나와는 맞먹을 수 있는 수였다. 특히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의 다수가 산악당이라는 점에서 이 동맹은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월 13일 산악당은 2주 만에 질서당(두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의 연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후퇴한다. 그 지도자인 르드뤼롤랭은 영국으로 망명해 1870년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파[산악당]는 과도적 계급, 즉 그 안에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동시에 서로 뭉뚱그러져 있는 쁘띠부르주아지의 대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계급 적대 일반을 초월했다고 상상한다. 민주파들은 자신들이 특권계급과는 대립하고 있으나, 나머지 국민과 함께 인민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의 이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여 투쟁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조차 그들은 여타 계급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원을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할 필요조차도 없다. 단지 신호만 보내주면 인민은 자신들의 고갈될 줄 모르는 힘으로 압제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 58쪽, 최형익 옮김, 비르투

1848년 6월 봉기의 패배로부터 쁘띠부르주아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노동자에게 사회-민주주의의 모호한 정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브라질, 계급타협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를 화해키려는 모호한 정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브라질에서의 반란은 이러한 정치의 종말을 보여준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MST)의 지도자인 페드로 스테딜레는 "신자유주의 15년, 그에 이어 계급타협 정부의 지난 10년은 정치를 자본의 인질로 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룰라 시절에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의 당근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로 지우마 호세프에겐 룰라와 같은 좋은 조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참세상 2013년 7월 2일ㆍ링크, 레디앙 2013년 6월 27일ㆍ링크]. 그럼에도 후쿠야마는 "많은 것은 리더십에 달렸다"며 반란을 적절한 개혁에 대한 타협으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산층 중) 기업가적 소수는 정치인들에게 부패의 책임을 지우고 수혜자 중심의 정치를 가능케 하도록 원칙을 바꾸는, 브라질의 정치 체제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중산층 동맹의 기초를 지원할 수 있다. 이것은 광범위한 중산층이 동원돼 19세기적 정실주의를 끝장내고 공적 서비스를 개혁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끈 미국의 진보 시대(1890~1920년)에 일어난 일이다. …… 호세프 대통령에게 봉기는 좀 더 야심찬 체제 개혁을 시작할 계기다."

실제로 그녀는 시위대에 대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와 달리 브라질 경찰은 터키의 경찰, 이집트의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대하고 있다. 시위대 또한 정부의 유화적 태도에도 결코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쿠야마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진보 시대가 1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터키와 이집트, 그 밖에 많은 나라의 반란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배자들이 실제로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정치인들은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압력하에 긴축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대중의 계속된 반란과 위협에도 말이다. 올해 초 대중의 저항에 직면해 조기총선을 치뤘던 불가리아에서는 제1당이 정부 구성 권리를 포기했다. 이집트에서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뿌리 내린 지난 수 십년의 활동을 기반으로 무슬림형제단이 1차 혁명의 성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돼 그들도 대안이 아님이 입증됐다. 무슬림형제단은 국제통화기금의 식료품과 공공요금 보조금 삭감 압력에 굴복했다. 실업은 해결되지 못하고 더 심각해졌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억압당했다.

반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들에서 권위주의의 강화, 경찰의 잔인한 시위대 탄압이 분노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양보할 게 없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 정부는 주먹에 의지하기 쉽다. 계급타협 정치는 좌파가 아니라 우파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먼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기회

그럼에도 계급타협 정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반란에서 계급 간 대결이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진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중간계급의 지위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 전체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양대 계급의 대결로 몰아간다는 사정 자체가 갈등을 복잡하게 한다.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적 습속을 버리긴 어려우며 프롤레타리아는 피지배 계급이라는 현실 때문에 부르주아적 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중산층,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중간계급이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혁명의 대열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무르시를 쫓아낸 2차 혁명에서 이집트 자유주의자들은 군부의 폭력에 기대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반란의 배경이었던 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압력에 맞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도 분열돼 있다. 민족적ㆍ인종적ㆍ종교적ㆍ성적 차이에 기반한 전통적인 분열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하다. 단결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계급 간 타협에 대한 미련도 그렇다. 이번 반란들도 분열된 노동계급의 현실 때문에 단일한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인민' 또는 '민중'의 반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는 없다. 패배든 승리든 반란은 현실의 역사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은 어느 계급이 혁명의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최근의 반란으로 사회 전체가 흔들리며 여러 계급ㆍ계층이 동시에 진출하고 있다. 때로는 반란에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집단적 행동으로 역사의 키를 쥐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산층의 혁명'은 지나치게 협소한 규정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동맹은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갈등할 것이다. 중산층 중심의 계급타협 동맹은 우파와 지배계급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따라서 동맹에서 어떤 정치에 의한, 어느 계급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 투쟁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칠레의 학생 반란에는 교사와 광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은 2011년 아랍의 봄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허약해 보이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몇몇 짧은 장들을 예외로 한다면,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보는 중요한 부분마다 "혁명의 패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이 패배 때문에 사라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사라진 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의 잔재, 다시 말해 아직 날카로운 계급 대립으로까지는 고양되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것은 2월 혁명 이전의 혁명적 당파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ㆍ환상ㆍ관념ㆍ계획들이었는데 혁명적 당파들은 2월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패배를 통해서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적 진보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진보의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결속력 있고도 막강한 반혁명이라는 하나의 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인데, 이 적과의 싸움을 통해서야 비로소 혁명적 당파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당으로 성숙해 갔다.
-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프랑스 혁명사 3부작' 39쪽, 임지현 외 옮김, 소나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당파는 패배를 통해서만 과거의 습속과 환상,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이어진 투쟁의 굴곡 속에 몇몇, 때로는 심각한 패배를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열었고, 그들이 멈췄던 곳으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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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무르시 대통령의 새 헌법에 반대해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든 이집트 인민. [사진=RoarMag.org]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후 휴전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쓸모를 인정받은 무르시는 국내 정책에도 과감한 전환을 시작했다.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새 헌법은 무슬림형제단이 장악하고 있는 제헌의회와 상원(슈라위원회), 무르시 대통령에게 견제받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2011년의 혁명적 열정이 충분히 식었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한 반혁명 시도일 것이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여준 이집트 인민의 용기는 혁명이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줬다. 물론 아직 어느 한쪽도 승리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내려온 무슬림형제단은 설탕과 빵, 고기를 미끼로 빈민을 반혁명의 도구로 동원하고 있다. 군대의 움직임도 여전히 큰 변수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표현한 이집트 혁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나딤 페타이가 RoarMag.org에 기고한 아래 글은 이집트 혁명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설명하고 있다.

※ 아래 글은 제가 읽기 위해 한글로 옮긴 것으로, 상당히 많은 의역과 오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링크한 원문을 참조하세요.


[RoarMag.org] 타흐리르, 파라오의 시작과 끝
2012년 12월 3일 나딤 페타이링크

이집트의 혁명가들이 타흐리르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그들이 시작한 것, 파라오를 무릎 꿇리고 진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끝내려 한다.

1970년 사다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치적 자유의 성장 속에서 불법 단체였던 무슬림형제단은 정치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결과에 상관없이 그들의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킬 수 있었고, 정부의 간섭 없이 아이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주입할 수 있었고, 이집트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풀뿌리 조직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났다. 따라서 한 세대 이상 폭력적인 체제에서 유일한 야당이었다는 것, 무바라크 타도를 계기로 대의민주주의를 시행하게 됐을 때 의회와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진짜 정당이었음은 분명하다.

2011년 1월 25일 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무슬림형제단은 저항에 동참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며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이 승리 없이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인민의 편에 섰다. 모스크의 이맘(이슬람 성직자)들은 거리에서 충돌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각의 기도를 중단하기 시작했다. 어떤 흠결도 없는 아름다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의 퇴진은 이집트 사람들이 본적 없는 빈 공간을 열어젖혔다. 무슬림형제단이 사태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2012년 여름 이집트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을 때 선택지는 서구의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이었다: 바로 차악을 선택하는 것. 그렇다. 구체제의 대리인인 아메드 샤피크와 무슬림형제단의 회원인 모하메드 무르시가 선택지였던 것이다. 구체제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은 무르시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그가 60년 만에 권력에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됐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믿음, 서구의 모든 이들이 듣고있는 이야기다. "혁명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이것이 이집트 인민들이 싸워서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다고 말이다. 그러나 혁명의 무대 뒷편에서 진정한 선택권의 부족함에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선거를 거부한 많은 인민들은 계속되는 국가 탄압과 이슬람 정당이 요구하는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에 맞선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 혁명은 국제적 압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예를들어 국제통화기금(IMF)은 누가 권력을 잡든지 상관 없이 이집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고, 긴급한 자금 지원에 대한 댓가로 극적인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해마다 12억 달러 규모의 군사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과 짝을 이룬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보여준다: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 체제와 그의 전임자들이 해왔던 것과 같은 세계적 군사력을 위한 또다른 애완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집트의 지정학, 크기, 아랍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한 문화적 중요성은 서구ㆍ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한다. 그렇기에 언론은 무르시를 그들의 동맹을 위한 이집트의 영웅으로 추켜세운다. 그들은 무르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협상을 이끌어낸 사람이라고 찬양한다. 바로 그들이 사다트에게 대했던 것 처럼 국제사회는 무르시가 독재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실용주의자이자 믿을만한 대화 상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휴전을 발표한 며칠 후 바로 무르시는 이집트 인민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충격을 준 법령을 공표한다.


새 법령의 진실
자료:알자지라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정화를 목표로 한 법령을 말한다.
-새 법에 의하면 4년 간 대통령이 검사를 임명할 수 있다.
-무르시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그 자신에게 부여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사실상 현직 검찰청장을 파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떤 권한으로도 대통령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르시는 시위대 살해와 관련한 재판의 재심을 명령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새로운 의회 선거 때까지 그의 권력을 유지한다.
-의회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선출될 수 없다.
-무르시는 또한 새로운 헌법의 제안을 위한 기간을 늘렸다.
-무르시는 그 자신이 혁명을 수호하는 절대 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법령은 무르시의 절대 권력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원[슈라위원회]이 (새 헌법 제정을 담당한) 제헌의회와 마찬가지로 [사법부에 의해] 해산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상원과 제헌의회] 둘 모두 동시에 무슬림형제단 대표자 다수에 의해 조정된다. 두 집단에서 몇몇은 저항에 참여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중단시키진 못할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새로운 법과 헌법의 일부에 의해 여성 권리가 억압받았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로 변화하면서 두려움은 현실이 되고 있다. 많은 혁명가들이 인민의 혁명을 도둑맞았다는 의식이 확산되길 기대하며 몇 달동안 거리를 점거한 덕에 무르시는 점차 정당성을 잃어갔다.

몇몇 자경단은 여성에게 (언어와 육체적인) 공격을 가하는 폭력배를 찾기 위해 카이로 도심을 수색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해질 때까지 스스로를 폭력배와 여성 사이에 서있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평화적인 데서부터 더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거리에서 여성을 학대한 남성의 눈에 페인트를 뿌리는 한 자경단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르시가 새 법률을 밝히자 마자 많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충돌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 악명 높은 타흐리르 광장에 횃불이 밝혔다. 상황은 무르시 얼굴의 절반은 무바라크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 무르시 무바라크". 그리고 그 안에 무슬림형제단의 실수가 있다: 그들은 대중의 혁명적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을 만큼 충분히 기다렸다고 믿었다. 그들은 확실히 틀렸다.

지난 1년 반동안 이집트 사회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각 수준을 성취했다. 특히 무바라크 퇴진투쟁의 맨 선두에서 싸웠고 봉기에서 친구와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 혁명가들 자신의 혁명적 정서는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더욱 평범한 이집트 사람들이 무르시의 법률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자신의 투쟁이 소용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기보다 타흐리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른 점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인민은 분열돼 있다. 무르시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 거대한 규모의 - 지금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 종파간 분열이 성장했다. 한쪽에는 자유주의자, 좌파, 판사, 청년, 지식인, 혁명가들이 있다. 다른쪽에는 무슬림형제단 회원ㆍ동조자들과 설탕ㆍ빵 또는 (드물게) 고기에 매수당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 18일간의 타흐리르 광장 점거 기간에 낙타를 타고 공격한 그 날 동원됐던 같은 사람들 - 이 있다.

거리는 다시 한 번 작은 전쟁터가 됐다. 경찰은 최루탄을 뿌리고, 무슬림형제단 민병대는 평화적인 반정부 인사들을 공격하고, 혁명가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리던 군대가 제자리를 지키는 동안에 일어났다. 바로 혁명의 시작인 이러한 일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저울의 균형추를 움직일 것이다. 만약 군대가 반정부 인사들의 편에 선다면 무르시가 오랫동안 인민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의 파라오법은 그것이 제기됐던 만큼 빠르게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군대가 무슬림형제단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면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2011년 11월 뉴욕타임스는 이집트 혁명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시간, 그것은 진실이 됐다: 군사 최고위원회(SCAF)는 "과도정부" 형태로 권력을 잡았다. 이 기간 내내 시민에 대한 군사재판이 실시됐고 이집트 인민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하나의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체제에 맞서기 위해 단순히 투쟁한 것 같았다. 체제 스스로 무너지진 않았다. 단지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다. 무바라크로부터 SCAF로, 다시 무함마드 무르시로.

현재 우리는 느리고 고통스럽게 태어나고 있는 끝나지 않는 혁명의 마지막 무대를 목격하고 있다. 현실에서 대의민주주의적 과정에 포함된 내재적 오류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이집트 인민이 더 많은 무언가를 요구하며 봉기하는 게 가능할까? 세계 모든 곳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봉기를 고무한 후 거의 2년이 된 이집트 사람들이 바리케이트로 되돌아와 그들 스스로 그와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이집트 군대의 [앞으로의] 결정을 포함한 이러한 질문들에는 단지 시간 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변이 무엇이든 이 혁명이 시작된 후 거의 2년 지난 지금 그 끝이 가까워졌다. 끝나지 않는 혁명은 더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들은 2011년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