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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그리스 정부에 의해 18개월 넘게 불법적으로 구금돼 있는 아나키스트 활동가 코스타스 사카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 코스타스 사카스는 6월 4일부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 Teacher Dude 플리커 페이지]

2010년 12월 테러 조직 가입 혐의로 체포된 코스타스 사카스(Κώστας Σακκάς, Kostas Sakkas)는 여전히 사전심리 과정에 놓여 있다. 그는 그리스 헌법이 정한 최대 구금 기간인 18개월 넘게 구속돼 있다. 6월 4일부터 단식 투쟁 중인 그는 의사에 의하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간으로 7월 10일 오전.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양심수 코스타스 사카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무장한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소수의 시위대는 그 어떤 무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의 공격은 가차 없었고 그 장면을 촬영 중이던 카메라도 공격받았다
[▶유튜브 동영상].

우리는 예전보다 더 자주 경찰이 곤봉과 최루탄 등을 사용해 시위대를 잔인하게 폭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태어난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ㆍ사회적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의 회원인 지아나 쿠루토비크는 "현재 경찰의 행동이 지난 10여년 동안 그 이전보다 더 잔인해졌다"고 말한다.

"경찰은 완전무장을 갖추고 특수부대는 군대의 장비로 무장했다. 이 무장에는 불법적인 것도 있다. … 유럽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수도에서도, 심지어 이스탄불(이곳은 수도가 아니다)에서도 이처럼 노골적인 경찰은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리스와 터키의 독재 시절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경찰의 폭력은 그리스와 터키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 브라질 시위도 경찰의 잔인한 행동, 특히 기자들에 대한 폭력이 도화선이 됐다. 2012년 10월 스페인을 뜨겁게 달궜던 시위도 기폭제는 경찰 폭력이었다. 해리 라디스는 그리스 정부가 통치의 주요 수단으로 폭력에 의지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더 이상 '당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현 정부가 "오래 전부터 '당근과 채찍'으로 알려진 방법을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08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가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7월 8일 유로존 재무장관 회담에서는 그리스에 68억 유로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을 결정했지만 그 조건은 공무원 4000명을 해고 하고 2만5000명을 재배치 하는 것이다. 임금도 25% 삭감해야 한다. 참세상에 의하면 정리해고 규모는 1만5000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7월 10일자 10면, 참세상 7월 11일]. 인민은 '빵'을 찾고 있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정부는 주먹으로 대응할 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무시는 경제위기 시대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리스 연정을 주도하고 있는 신민당의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정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다른 정당들과 사전 논의도 거치지 않고 6월 국영 방송국의 폐쇄를 결정했다.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들은 그리스의 여러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급속히 성장하자 노골적으로 정치적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급진좌파연합이 정부를 구성하면 지원은 없을 것이라며 말이다.

이집트에서는 아예 군부가 나섰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임기를 채우지 않고 끌어내린 것을 문제삼고자 하는 게 아니다. 군부는 국민의 뜻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들이 내놓은 것은 무르시의 파라오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만수르 과도 정부 대통령은 1992년 무바라크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한 자다. 총리로 지명된 하젬 엘베블라위는 BBC 보도에 의하면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이집트 경제 전문가"다. 이집트 인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자유시장 경제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참세상 7월 10일].

경찰의 폭력은 민주주의 위기의 한 측면일 뿐이다. 정치인 대부분이 소수 경제 엘리트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리스 정부는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국제통화기금)의 대변인이다. 이집트 군부와 과도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자유시장 경제와 구 무바라크 세력의 후계자다. 심지어 브라질에선 전투적 노동계급 운동으로 탄생한 노동자당(PT)의 호세프 대통령과 정치인들도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에 배신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정치인이 세계 어디서나 가장 인기 없는 이유다. 그리스의 법률가 지아나 쿠루토비키는 심화되는 경찰 폭력이 대표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권위주의적 변형은 그것이 역사적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 한계는 바로 소수 경제 엘리트와 이에 기반한 정치인들의 기득권이다.

Landscapes of emergency from Ross Domoney on Vimeo.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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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유ㆍ평등ㆍ박애 폭격

프랑스는 1월 11일 말리 내전에 전격적으로 개입했다. 공중 폭격을 실시했고 현재 군인 2150명이 배치돼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맹국들과 함께 말리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전 개입이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말리 정부의 요청에 대한 선의의 답변이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철군했을 때 말리가 안전할 것과 합법적인 정부와 선거과정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 군사개입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미국의 지원도 항공기를 이용한 프랑스군 부대와 장비의 수송에 그치고 있다. 독일은 입발린 말과 달리 프랑스군의 수송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국제사회, 말리 내전 개입 속도낸다'는 기사가 잇따르지만 대개는 말리 주변국들이 파병하면 그에 대한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개입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듯도 싶지만 아직은 백중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이슬람 반군이 프랑스ㆍ말리 군에 밀려 주요 거점도시에서 퇴각해 키달 인근 산악지역에 집결해 게릴라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리비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말리 북부도 이 분쟁에 편입되는 분위기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1 근본주의의 확산? 말리 정부의 요청?

프랑스 군사 개입의 첫 이유는 그들 스스로 밝혔듯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산일 것이다. 말리 국민의 90%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딱히 근본주의적이진 않았다. 2012년까지 세 번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모두 세속주의적 세력이었다.

북부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 요구라는 불씨에 근본주의 이슬람이라는 기름을 부은 것은 서방세계다. 서구의 경제ㆍ군사적 지원은 주로 소수민족 탄압에 활용됐다. "특히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말리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면서 투아레그족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됐다."
[중앙일보] 궁지에 몰린 투아레그족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투아레그족 출신이 주도하는 '안사르 에디네', 비 말리 출신의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 마그레브 알카에도 분리된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MUJAO)'이 그것이다. 이들과 세속주의적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를 조직했다. 운동은 곧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에게 주도권을 뺐겼다. 여기에 리비아 등 북부아프리카가 혼란한 틈을 타 무장한 채 되돌아온 망명 투아레그족이 결합했다.

주요 언론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확산으로 말리 북부의 인권침해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개입'이라는 오래된 수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의 샤리아 율법을 따르는 가혹한 처벌 사례가 이어진다. 분명 인권침해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침해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만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7월 3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2년] 3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반대자를 대상으로 즉결 처형, 고문, 성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는 사례들을 공개하며 말리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향신문]

북부 근본주의 이슬람의 인권침해가 문제라면 남부의 쿠데타 정부에 대한 개입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말리 정부의 요청이라며 북부 반군만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말리 정부의 합법적 정통성 또한 의문이다.

2012년 3월 사노고 대위의 쿠데타는 말리 군부의 부패와 가혹행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연하게 일어났다. 신발과 무기도 지원받지 못한 채 북부에서 반군세력과 싸우던 수십 명의 부대가 전멸당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말리 정부는 지난 10년간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음에도 반군과의 싸움에서 군인들은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쿠데타 세력은 지금도 말리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2월에는 쿠데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북부 반군세력에게 합법적 정통성이 없다면 군사개입을 요청한 말리 임시정부 또한 합법적 정통성은 없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2 차이나프리카의 견제

프랑스 정부가 인권과 질서의 양날개를 단 천사가 아니라면 군사개입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군사개입은 무엇보다 '프랑사프리크(프랑스+아프리카)'라고 불릴정도로 오랜 관계를 맺어온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ㆍ세네갈ㆍ말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말리는 1958년 세네갈과 함께 연방으로 독립한다. 1960년 세네갈이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지금의 말리공화국을 세웠다. 독립한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2006년까지 프랑스는 말리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프랑스 아프리카투자자협의회는 49개 나라 1000여 곳에 지사를 두고 있다. 아프리카 8개 나라와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있고 특수부대를 세네갈 가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주둔시키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배한 과거 프랑스 정권들은 '프랑사프리크'라 부르는 각국 정권과의 은밀한 후원 또는 결탁 관계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해왔다. 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아프리카에 군사기지를 보유하며 지역 '경찰' 국가 역할을 자임한 나라는 프랑스뿐이다."[경향신문]

말리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 프랑스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000년대부터다. 특히 사르코지의 반이민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사르코지는 2007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역사에 제대로 들어선 적이 없다"는 발언을 해 아프리카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틈을 중국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해 중국과 아프리카 간 무역규모는 2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수입의 18%가 중국이다. 말리의 경우 무역의 25%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프랑사프리크'라는 말보다 '차이나프리카(차이나+아프리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됐을 정도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약화된 영향력을 말리 내전을 계기로 다시 확대하고자 한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을 주장했던 나라가 프랑스다. 이어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축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일보는 이를 들어 프랑스는 "말리 군사개입이 잘못된 선택으로 끝날 경우 신(新) 식민주의를 시도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까지 보도했다.
[국민일보]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3 방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탐욕

프랑스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지역에 방대한 천연자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부를 확보하는 것이 이 지역의 천연자원 수급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말리는 세네갈-기니-가나-부르키나파소-니제르-카메룬을 잇는 '금광벨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우라늄도 큰 이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말리의 우라늄은 모두 일본과 독점 계약돼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나라인 니제르는 프랑스의 주요 우라늄 수입국이다. 국영 원자력기업 아레바(Areva)는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조달해 왔다. 아프리카 지역에 강하게 남아있는 식민주의의 영향 때문에 말리의 혼란은 니제르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프리카의 국경은 민족적ㆍ문화적 경계와 상관 없이 식민지 모국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졌다. 말리 북부 반란의 주역인 투아레그족의 경우 말리는 물론 알제리ㆍ니제르 영토 내에까지 분포한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투아레그족의 반란이 주변국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프랑스의 원자력 의존률이 75%에 달하는 상황에서 말리 내전은 심각한 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리 정부는 쿠데타 직전까지도 자국 영토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밝히며 서방 국가의 주요 기업들에게 개발권을 분배하고 있었다.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WSWS)가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2013년과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쟁탈전'이란 제목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프랑스군의 말리 귀환은 알카에다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투가 아니라 우라늄, 금광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유정과 이웃나라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조치며 올랑드 대통령이 얼마전 '미래의 대륙'이라고 불렀던 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권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르완다ㆍ리비아에서 최근 프랑스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처럼 파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책을 결코 완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참세상]


프랑스 좌파의 오래된 한계

식민주의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좌파에게 리트머스와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말리가 다시 한 번 그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 좌파의 식민주의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던 장 뤽 멜랑숑이 속한 좌파전선(Left Front)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공화좌파당(GDR)의 프랑수와 어센시는 16일 "좌파전선, 공산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대표자의 입장은 분명하다"며 "광신자의 야만 행위로 말리 민중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인 실수일 것이다. 국제적 군사조치는 테러리스트 국가 설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좌파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공산당(PCF)은 올랑드의 군사 개입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12일 성명에서 "PCF는 그들 국가 남부를 향하는 지하드 그룹의 무장 공격에 대한 말리의 우려를 공감한다. 여기서 말리 대통령이 요청한 도움에 대한 대답은 유엔 깃발 아래, 미국과 아프리카연합 후원의 뼈대 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참세상]

다행스럽게도 반자본주의신당(NPA)과 좌파당(Gauche)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3일에는 반대 시위를 열었고 16일에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내전ㆍ전쟁이라는 상황, 근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위협에서 우리는 흔히 군사적 개입이라는 '쉬워 보이는 방법'에 못마땅하지만 지지를 보내곤 한다. 만약 군사적 개입이 말리와 북서부 아프리카 인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부득이하지만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그랬듯이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이들의 개입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성장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 지역의 오래된 식민주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 모국의 군사적 귀환은 오래전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서 살폈듯이 프랑스의 이번 군사 개입을 '인도주의'적이라고 볼 근거도 희박하다. 정치ㆍ경제적 욕심이 군사 개입이라는 불장난으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 국가의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중단시키는 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른 평화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 주요 참고 기사
[중앙일보] 모범 민주국가였던 말리, 전쟁 수렁 왜
[경향신문] '말리 군사개입' 올랑드의 리더십 시험대에
[경향신문] 암울한 말리… 쿠데타군ㆍ반군 모두 인권유린 심각
[뉴시스] 20년 민주국가 망친 말리 쿠데타 주역 사노고
[참세상] 말리 반군 공습,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되나"
[국민일보] 中ㆍ美에 밀린 佛, 말리 개입으로 '阿영향력' 되찾기
[참세상] 말리 사상자 증가… 전쟁 반대 목소리 확대
[프레시안-월러스틴 논평] 아프리카 말리, 제2의 아프간 되나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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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펭귄 2013.01.26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2. 민죠이 2013.02.08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머릿속에 정리가 싹 되네요 :-)

  3. 연풍청년 2013.02.20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님은 자본의 관점으로 보실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지난번에는 음악만 듣다가 나갔는데 오늘은 글 몇개를 보았습니다. 저도 말글장을 쓰고 있지만.. 때때로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티스토리라서 그런가? 훨씬 정리가 잘 된거 같고 저는 그냥 Daum 블로그라서 딱히 별로..

    • 때때로 2013.02.22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본의 관점'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파워유저가 아닌 상황에서는 블로그 서비스 중 티스토리가 가장 깔끔한 것 같더군요.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ㆍ11
살바도르 아옌데ㆍ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정인환 옮김|서해문집


동지 여러분께 조용히,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사도도 메시아도 아닙니다. 저는 순교자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인민이 부여한 과업을 완수하고 싶은 한 명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자들, 인민 절대다수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이 분명히 깨닫도록 합시다. 비록 순교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인민이 부여한 과업을 완수한 뒤에야 라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물러날 것임을 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인민의 정부를 방어해내겠습니다. 그게 바로 인민들이 제게 부여해준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1년 12월 4일 산티아고, 쿠바 대표단 환송행사,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118~119쪽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연합 후보가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36.3%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10월 24일 의회에서의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결정되겠지만 아옌데의 집권 저지를 위한 칠레의 부자, 군부, 권력자들과 미국의 음모는 이미 시작됐죠.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위원장인 워싱톤의 '40인 위원회'는 1970년 3월 25일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아옌데의 대통령 당선 저지, 이에 실패할 경우 아옌데 정권의 전복을 위한 행동 계획이었습니다. 40인 위원회는 이 자리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흑색선전 지원을 위해 12만5000달러의 예산 집행을 결의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여 간, 미국은 이러저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80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습니다. 칠레의 경제를 혼란으로 몰아넣어 인민의 삶을 위태롭게 하고, 우파의 백색테러를 통해 공포를 부추기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우파 언론을 지원하거나 직접 인수해 인민연합에 대한 흑색선전을 확대하는 것도 계획에 포함돼 있었죠. 궁극적으로 쿠데타를 통한 아옌데 정권의 붕괴와 이를 통한 남미에서의 좌파 정치세력의 성장을 저지하는 것이 이 계획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이들의 계획은 1973년 9월 11일 화요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통해 성공했습니다. 1970년 11월 4일 대통령에 오른 이후 살바도르 아옌데는 우파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우파는 미국 정부의 협력으로 칠레 경제를 효과적으로 파탄시켰습니다. 공개적인 사보타주를 통해 공장의 생산시설을 파괴하고, 생활 필수품을 (말 그대로) 땅에 파묻고, 운송과 교통망을 마비시켰습니다.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군부 요인에 대한 백색 테러가 자행됐죠. 미국 정부는 칠레와의 신용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심지어 지진 피해에 대한 긴급 구호 요청도 거부했죠. 칠레 군부의 무기 구입을 위한 지원은 계속되는 상황에서 말이죠. 아옌데는 대통령이었지만 군부와 경찰을 비롯한 거대한 행정부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지배자들과 우파에 의한 이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향한 인민의 단결된 힘은 조금씩 성장했습니다. 우파의 사보타주에 맞서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사장들의 공장파괴에 맞서 공장을 지키고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3년 상반기에만 3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민의 삶은 고통스러웠으나 인민연합 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욱 공고해져갔습니다. 1973년 3월 4일 총선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이끈 인민연합은 43.3%의 표를 얻어 압승을 거뒀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9월 11일 아옌데는 이러한 이민들의 굳건한 지지에 힘입어 재신임 투표를 발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공연도 예정돼 있었죠.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파괴됐습니다.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라는 아옌데의 예언 아닌 예언은 현실이 됐습니다. 9월 11일 이후 일주일간 3만여 명이 군부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대통령궁인 라 모네다 궁을 폭격하기 위한] 제트기의 급강하는 계속됐다. 우리 동네 위쪽에 있는 산악 지대와 인접한 '포블라시온(판자촌)'에 로켓을 퍼붓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환상까지 모조리 죽어버린 것 같다… 이게 우리가 맞서야 하는 상대라면, 희망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
- 조안 하라,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53쪽

수도에 가해진 폭격.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 군부의 폭력 앞에 인민은 숨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도 산티아고를 떠다녔지만 아옌데와 인민연합 정부가 이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우파의 백색테러와 협박 속에 그나마 중립적 입장을 표하던 카를로스 프라츠 국방장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쿠데타를 20여일 앞둔 8월 23일 사임했습니다. 그의 후임에는 쿠데타의 주역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임명됐죠. 공장파괴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고 생산을 재개하기 위해 애쓰던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우파의 압력으로 인민연합 정부에 의해 해산됐습니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평화적' 혁명정부는 군부의 후안무치한 테러와 폭력 앞에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쿠데타 직후 자신의 집을 수색하로 온 군인들에게 "마음대로 둘러들 보시게. 여기 당신들한테 위험한 것은 오로지 '시'밖에 없으니"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체제의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무기는 '말과 글'입니다. 빅토르 하라는 종합경기장에서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 '칠레 경기장에서'라는 쿠데타의 야만을 증언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와 같은 노력을 통해 우리는 군부의 야만적 폭력을 현재까지 전해들을 수 있고 이를 교훈 삼아 새로운 행동 계획을 만들 수 있었죠.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런 인상적인 행보를 보인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 무장하지 않은 이념은 대개 야만적 폭력에 무참히 짓밟혀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말과 글이 유일한 무기인 이념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야만적 폭력이 이 정도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전례가 없다."
- 피델 카스트로,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129~130쪽

카스트로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옌데의 죽음은, 인민의 패배로, 사회주의를 향한 평화적 길의 실패로 기록되었습니다. 결코 사용되길 바라지 않았을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은 미국산 전투기의 폭격에 맞서 사용될 수밖에 없었죠. 이후 30여년 간 칠레에선 군부 독재정권이 지속됐고, 지금도 당시의 부역자들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같은 이들의 노력 덕에 피노체트는 상대적으로 평안한 말년을 보내고 2006년 91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칠레에서와 같은 미국의 대외적 개입정책 또한 1973년 9ㆍ11 이후 40여 년 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의 9ㆍ11 테러는 세계적 고통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태도를 만들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그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숨겨져서 상상조차 어려운 운명의 결정인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 지원하고 북돋운 칠레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바로 그날,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한 테러가 발생했다. 어쩌면 운명은 미국인들 앞에 놓인 도전이얼마나 큰 것인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날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미국의 젊은이들은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됐다. 사랑하는 이들이 실종된 뒤에도 주검이 없어 장례조차 지내지 못한 이들이 감내했어야 할 지옥 같은 세월이 어땠을지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9ㆍ11 테러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민족들이 견뎌내야 했던 비슷한 고통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 아리엘 도르프만,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29~30쪽

1973년 9월 11일 화요일의 기억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지니고 있던 노학자 아리엘 도르프만의 기대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짐짓 그 가능성을 알고 있음에도 무시하고자 했던 방향, 즉 2001년 9ㆍ11의 비극은 더 큰 악의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사악한 목적으로 악용"됐고, "전쟁을 부추"겼고, "복수의 명분"이 됐고, "한 사회를 군사화"하는 방향으로 이용됐죠.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선물한 AK-47로 무장한 아옌데 대통령. 그는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맞서 끝까지 라 모네다 궁을 지켰다.

1973년 9월 11일로부터 38년, 2001년 9월 11일로부터 10년. 우리의 삶은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억압, 세계적 분쟁으로 인한 참화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아옌데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인류의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동자ㆍ인민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비록 그의 꿈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인류의 이상은 미미하지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8년 이후 경제위기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에서, 프랑스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아옌데가 태어나고 죽은 칠레에서 정의를 향한 저항은 지독히도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9월 11일이면 2001년 미국의 비극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라도 이 책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ㆍ11'을 통해 1973년 칠레의 9월 11일을 기억하고 라 모네다 궁에서 생명을 다한 아옌데의 꿈에 공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나라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
제가 노동자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단 하나뿐입니다. 저는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고귀한 의식 속에 뿌린 씨앗은 결코 영원히 묻혀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쿠데타군이 무력을 장악했으니 우리를 박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진보를 막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범죄행위나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인민이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으로 쓰디쓴 순간을 이겨낼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히 나아갈 드넓은 거리가 열리게 될 것임을.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제가 남기는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제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최소한 제 죽음이 범죄자와 비겁자, 반역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라 모네다 궁, 라디오 마가야네스에서의 마지막 연설,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38~41쪽



칠레의 대표적 민중가요 '우리 승리하리라(Venceremos)'.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 직후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하기 직전 이 노래를 불렀다고 알려졌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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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idISay 2013.01.18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미쪽 문학작품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그때그때 구글에 의존해서 해소하느라 아는 것들이 좀 파편화된 느낌이었거든요. 도서관에서 책을 좀 찾아봐야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