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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먼'에 해당되는 글 1

  1. 2016.09.15 앤드루 클라이먼의 하비 비판 3: 하비의 답변에 대한 재답변

※앤드루 클라이먼의 데이비드 하비 비판 3편을 아래 옮깁니다. 주석과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며 대괄호[ ] 안은 옮긴이가 덧붙인 내용입니다. 잘못 옮긴 부분에 대한 지적을 기다립니다. 댓글로 달거나 메일(go24601@gmail.com)로 보내주십시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비와 마르크스의 대결
3편: 답변

앤드루 클라이먼ㆍ2015년 5월 13일ㆍ링크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은 자본주의의 실제 특징을 해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법칙이 2007~2009년의 대침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둘 사이의 논쟁은 계속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하락하는 경향을 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를 통해 자본주의 위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앤드루 클라이먼은 최근 뉴레프트프로젝트(New Left Project)를 통해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로 꼽힐 데이비드 하비의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이론 비판에 대한 반론 두 편을 발표했다.
1편에서는 하비의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했고 2편에선 미국 기업들의 2차 세계대전 후
장기적 이윤율 저하에 관해 마르크스의 법칙에 근거해 논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하비는 "길게 봤을 땐 클라이먼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면서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내 유기적인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두 비유를 대비시켰다.

아래는 클라이먼의 답변이다.


나는 데이비드 하비가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 자본주의 경제위기론이 기반을 둔 법칙이며, 대침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적절한 법칙이며 이론인 이 법칙을 비판(하비 2014ㆍ링크)한 데 대한 내 반론에 그가 시간을 내 답변해준 것에 감사하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답변(링크)에서 내가 쓴 것의 일부만 다뤘고 특히 내가 제시했던 문헌적(링크)이거나 경제적인(링크) 증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내 유추를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로 묘사하며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익한 토론을 개시할 출발점으로 그의 답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마르크스의 LTFRP가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독창적인 비난과 그에 대한 내 대답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 그러한 유추가 '자본의 본성'을 비유한 것이 아닌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계속해서 이 글의 나머지에선 LTFRP를 잘못 정의해놓고는 그 법칙이 옳을 가능성과 이에 대한 토론의 필요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하비의 새로운 비난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시 증거를 검토해볼 것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첫 번째 버전)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위기론이 일원인론이라고 비난한다.[1] 이러한 비난은 이 법칙이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가정한' 수치들에 기대고 있다는 하비의 주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처럼 의심받는 가정들 때문에 LTFRP는 노동 절약형 기술 변화를 제외한 수익성을 하락시키는 잠재적 원인 모두와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 변화에 의한 상쇄요인 모두를 배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물론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본론' 3권 3편은 금융제도와 같은 부가적인 위기 원인들에 더해 몇몇 상쇄요인들을 논한다. 대신 이 법칙이 일원인론이라는 그의 비난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의 구조,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설명에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는 순서에 초점을 맞춘다. 마르크스는 LTFRP에 대해 설명할 때 우선 '법칙 그 자체(das Gesetz als solches)'를 제시하고, 바로 그 후에 상쇄요인들을 배치하며 그 다음에야 위기의 부가적인 원인들을 끼어 넣는다.

서술을 구조화 하는 이런 방식은 매우 흔한 나무랄 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비는 LTFRP를 '법칙 그 자체'로 축소시켜 일원인론적 서술처럼 묘사한다. 상쇄요인과 부가적인 원인들은 '법칙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비에게는) 그러한 요인들은 LTFRP에 포함되지 않으며 만약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면 법칙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또 (하비에게는) 상쇄요인과 부가적 원인들의 존재를 마르크스가 인지하고 그의 설명에 그것들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LTFRP에서] 일원인론이라는 혐의를 벗겨주진 않는다. 이는 단지 LTFRP의 타당함에 대한 마르크스의 '동요와 양면성'을 보여준 것이며 그는 그 이상으로 법칙을 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법칙에서 유래한 가정이 제거됐을 때 벌어질 일"을 논한다.

이에 대해 나는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했다. 나는 "그 글을 이런식으로 읽어선 안된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이런 부당한 독서는 적절한 해석 방법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런 후 나는 내가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유추"라고 부른 것을 설명했다.

일원인론이라는 딱지붙이기가 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정교한 방법론적 논의를 펼칠 필요는 없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보편적 중력법칙을, 바람과 같이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 또는 공기 저항 같은 상쇄요인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가 제안한다고 해서 이 다른 요인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을 배제한, 그 대신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제한적인 일원인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중력법칙으로부터 뉴튼의 운동에 관한 제2법칙을 이끌어내 설명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에서 다른 요인들의 삽입을 삼간다고 해도 그런 [일원인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다음 내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내가 내 양면성과 동요를 드러낸 것도 또는 보편적인 중력법칙이 오직 진공에서만 작용하고 실제 현실에선 작용하지 않는다고 시인한것도 아니다.(강조는 원문)

'자본의 본성'이라는 비유?

이 토론에서 하비(2014)의 처음 주장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위기론 내 LTFRP의 지위에 대해, 그리고 이것의 대침체와 침체의 지속되는 여파와의 연관성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론에서 그의 여러 비판들 각각을 다뤘다. 그에 대한 하비의 대답은 오직 내 반론의 두 문장-앞에 인용한 구절의 셋째와 넷째 문장-을 논하는 데 전념하고 있고 그것 조차 이 두 문장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하비에 의하면 저 문장은 앤드루 클라이먼이 "이윤율 하락에 대한 그의 관점이 왜 일원인론이 아닌지 설명하는", 특히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화 하고 구조화 하는" 데 이용한 비유다. "내
[하비] 생각에 앤드루와 나의 큰 차이점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각각의 비유 형태에 있다".

앞 부분에 세 가지 중요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먼저 내 유추는 '자본의 본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구체적 현상, 즉 이윤율의 경향에 관한 것이다. 둘째 그 유추는 이윤율의 저하에 대한 내 관점 또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과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 관한 것이다.
[2] 셋째 그 유추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론적인 (존재에 관한) 게 아닌 인식론적인 (앎에 관한) 것이다.

나는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거나 구조화하기 위해 그 구절과 다른 어떤 곳에서도 비유를 제시하지 않았고, 그와 같이 제시할 만한 비유를 갖고 있지도 않다. 자본에 대한 내 이해를 개념화 하기 위한 비유는 내게 필요 없다. 특히 '자본'은 그 스스로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이미 사실의 개념화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개념화(이리하여 가치는 이제 과정 중의 가치 value in process, 과정 중의 화폐로 되며, 이러한 것으로서 가치는 자본이 된다ㆍ'자본론' 1권, 2015년 개역판 202쪽)를 다른 비유로 어떻게 대체해야 내 이론적ㆍ경험적 연구를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나는 '자본의 본성'이라는 구절이 의심스럽다. 난 자본주의의 '본성'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왜 작동하고 또는 고장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특히 자본과 자본주의에 자연계와 같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혹은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에 중력의 힘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의 것으로 돌리며 '자본의 본성'이라는 그 구절을 하비가 사용할 때 더 그렇다. 이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한 하비의 대답의 넷째, 다섯째 구절이 암시하는 것과 반대로 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 정치는 비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이에 따라 클라이먼의 결론은'이라는 부분). 그것은 증거와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나는 내 정치를 방어할 것이며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거와 이론에 도전하는, 정말로 논쟁에 기반한 몇몇 논의를 따져본 후에 말이다. 어떤 한 비유의 개인적 선호나 이런 취향에 기반한 (내가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경험했는가와 같은) 주관적 경험은 토론 거리가 못된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 겪은 바에 따른 경험한다. 이걸로 끝이다. 비유와 주관적 경험에 따라 조직된 정치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실제 사실에 비췄을 때 다른 문제다. 그와 같은 정당성을 제공할 임무로 논쟁이 내게 주워지면 나는 기꺼이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내 비유는 '자본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닌 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지나치게 깔끔한 구분처럼 보인다. 제안된 한 종류의 설명은 특정한 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견고하게 연관돼 있지 않는가? 따라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유추는 LTFRP와 중력의 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다. 현상의 '본질'과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 사이에 필연적 연관은 없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3]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유추는 자본주의를 물리적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니다. 그 유추는 대상이 무엇이든 다원인론적 설명이 일반적 법칙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는 '경향적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묘사한 것이다.

만약 내가

●바람처럼 사과를 떨어뜨릴 수 있는 다른 요인이나 공기 저항처럼 그에 대한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기 위해 중력의 일반법칙을 언급하거나
●교수와 잠자리를 같는 것과 같은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멍청함 같은 다른 상쇄요인에 대한 설명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더 높은 점수를 밭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식 향상을 위해 공부한다는 법칙을 주장하거나
●목이 짧은 기린을 멸종시킬 수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요인이나 상대적으로 목이 짧은 새끼를 낳게 하는 돌연변이와 같은 상쇄요인을 말하지 않고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선택 이론을 말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과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지리적으로 어긋나는 것과 같은 실업률을 증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나 차별시정 정책과 같은 상쇄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불균형적인 잦은 실업에 의한 고통을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직면한 차별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임금의 상승과 같이 이윤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요인이나 생산수단의 가격 하락 같은 상쇄요인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주장한다고 해서

부가적인 원인과 상쇄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들을 배제한, 따라서 적용 가능성이 엄격히 제한된 일원인론적 모델을 구축하겠는가. 그러한 설명 후 내가 부가적 원인과 상쇄요인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양면성이나 동요, 혹은 내가 제안한 일반적인 설명 법칙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앞의 중요 항목 네 가지를 먼저 점검해보자. 그것들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내 이해를 구조화 하기 위해 이용한 비유인가? 떨어지는 사과, 좋은 성적, 목이 긴 기린, 불균형한 실업 빈도와 떨어지는 이윤율 모두에 공통적인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중력의 일반법칙, 학습-지식의 연관성, 자연선택, 노동시장의 차별과 LTFRP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어떤 중요한 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각각의 현상이 지니는 '본성'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각각 그것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법칙은 매우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다섯 설명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중요한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일원인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원인론이라는 하비의 비난(새로운 버전)

그럼에도 하비는 계속해서 이러한 결론에 대해 '투덜' 거린다.

우리는 여기서 일원인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만약 중력의 일반법칙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사과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공기저항도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또는 반대되는 힘)은 오직 일반법칙과의 연관 하에서만 적절하다.

일원인론의 일반적 의미는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는 것"인 데 하비(2014)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위기가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인과관계 이론을 주장하려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강조는 클라이먼). 그렇지만 내 비유에서 사과가 운동하는 원인에는 단지 중력 만이 아니라 바람과 공기저항도 있다. 여기에는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 비유는 마르크스의 LTFRP와 위기이론이 '하나의 인과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하비의 비난에 들어맞는 전형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그는 여기서 일원인론이라는 단어를 흔치 않은 의미로 사용한다. 일원인론적 설명에 대한 은연중 드러나는 그의 새로운 정의는 "다른 그 어떤 원인과도 관련이 없는 원인을 지닌 설명"이라는 것이다. 내 반론의 2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중원인론에 대한 주장들은 위기에 관한 하비의 (LTFRP가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부재원인론에 대한 갈망을 가리는 가면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그는 분명 '자본론' 3권에 나와 설명되고 완료된 위기에 관한 명확한 다중원인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본론' 3권에는 LTFRP 이론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금융 시스템과 같은 다른 결정 요인들이 이와 연결돼 그것이 드러나는 방법을 매개한다.(강조는 원문)

하비는 일원인론이란 단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하기에 난 그의 재정의에 이의를 재기할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관념에 따라 사회적ㆍ경제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일원인론이라고 매도한다면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탄소가 없었다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의 활동도, 그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 현상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은 '오직' 탄소와 '연관해서만 유의미하다'. 그것들은 바로 탄소가 지구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그는 LTFRP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위기에 관한 부재원인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하비는 "자본에 의해 구성된 유기적 총체는, 앤드루가 지지하고 있으며 그의 주장과 달리 나 또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이윤율 하락을 향하는 구조에 의해 약화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가 수익성을 하락시키고 이러한 수익성 하락이 위기로 이어지는 경우와 같은 몇몇 예외적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그가 부인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미 말했던 바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그는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한 일반법칙으로써 진정한 법칙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또한 이 법칙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위기 이론이 "태양이 궁극적으로 수명을 다할"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4] 그의 답변의 결론은 이러한 가능성들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유기체 비유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적절하다."(강조는 필자)

허수아비 LTFRP

떨어지는 사과 유추가 '자본의 본성'에 대한 비유라는 하비의 주장은 내 글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자본의 본성'을 아래의 말처럼 한정짓는다는 그의 주장은 같은 식으로 다룰 수 없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은 결국 경쟁이라는 추동력에 따라 상대적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며 사라지는 것으로, 뉴턴 세계의 시계와 같은 기계적 확실성은 끝을 맺는다. 자본의 노동 고용비율은 자본의 이익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이윤율은 떨어지게 된다. 유기적 전체로서 자본의 진화를 보고 경험해온 내게 이러한 기계적 모델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너무나 일방적이며 결국엔 목적론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위기론은 금융화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앤드루 클라이먼은 가장 단호하게 주장해 왔다"는 그의 처음 주장처럼 그 어떤 근거와 인용도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틀렸다. 정말 명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에 대한 내 입장은 내 것이라고 치부되는 주장의 반대편이다.

위기를 통한 자본가치 파괴는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파괴가 초래하는 수익성 회복도 역시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이윤율은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 걸쳐 확고한 장기 지속적 추세를 갖지 않았고, 그런 추세를 연역하거나 예측하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클라이먼 2012, 53쪽).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가져와 결정론적 전망을 표현한 기계적 은유의 예로는 아래의 글이 문장이 더 적절할 것이다.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어느 수퍼마켓에서든, 어느 노동시장에서든, 어느 상품생산 체계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그리고 어느 가구에서든 한결같이 관철된다.

그런데 이 결정론적 비유는 내 것이 아니다.[5] 이 문장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하비 1990, 국역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ㆍ한울) 394~395쪽에 나온다.

하비는 그의 허수아비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의 혐의를 풀어주는 데 매우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윤율 하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기계론적 이해를 나의 것으로 돌리면서도 그는 다시 또 LTFRP와 이에 연관된 위기이론에 일반적인 '환원론'과 같은 의미로 일원인론의 책임을 묻는다. "(이윤율 하락의 구조)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죽는 원인으로 오직 심장마비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강조는 필자) 아니, 이건 그것과 다르다. '주로''오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위기의 원인으로 이윤율 하락에 주로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대침체에 대한 내 책에서 다룬 2007~2008년 금융위기의 12가지 원인과 내 반론 1부에 정리한 목록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적게 이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변수가 실제로 주요한 첫 번째 원인이 될지, 아니면 두 번째 원인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역할도 못할지는 미리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경험적 증거를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하비가 토론의 방향을 그의 비유 대 나의 비유로 바꾸기 전 우리가 했던 게 바로 이것이다).

자료를 분석하기 전에, 나는 현실의 이윤율이 1980년대 초반 이후 반등하지 못했다는 어떠한 사전적인 믿음도 갖지 않았고 … 내가 미국 법인들의 수익성의 지속적인 하락이 이번 대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고,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사실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많은 자료들을 고속으로 처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에는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클라이먼 2012, 28쪽).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 된다

심장마비에 대한 하비의 비유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찰스 샌더스 퍼스[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가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규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길을 막아선 안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접할 그 어떤 이론적 시도도 원칙적인 논리적 잘못은 없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시작된 연구는 방해없이, 그리고 낙담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 철학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강조는 원문)

심장마비의 비유는 노동절약형 기술 변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위기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막으려는 선험적 금지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증거를 살피고 평가하기에 앞서 이런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어쨌든 "다른 것들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유기적 전체'라는 비유는 "내가 자본에 대해 경험하고 본 방식에 딱 들어맞는" 그저 "내게 강한 인상을 준 비유"이기 때문에 말이다.[6]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가능성을 그들이 추가적으로 밝힐 때 비유는 탐구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험적으로 가능성을 배제하곤 했고, 탐구의 길을 가로막았으며, 연구를 방해하고 의욕을 꺾어 "진리를 향한 전진의 길목에 방어벽을 친다".

하비의 심장마비 비유는 "영리하고 기만적"이다. 이는 우선 심장마비가 인간을 죽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일 가능성을 -귀납적으로- 거부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우리가 이미 확보했다는 것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가 사회적 통념과 달리 '주요'란 단어를 '유일한'으로 대체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요란 단어를 복원해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 재정적 문제가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를 졸업 못하는 주요 원인일 가능성도 증거에 앞서 배제하도록 명령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자본주의 위기의 실제 주요 원인을 제기한 것일 수 있는 이론은 증거를 살펴보기도 전에 왜 배제하라고 명령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 원인이 주요한 것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을 만큼 호기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현상의 원인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큰 호기심을 가지지 않기도 한다고 이해한다. 나는 그들의 취향을 굳이 바꾸고 싶진 않다.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려는 길을 그들의 취향이 방해만 않는다면 말이다.

증거로 돌아가기?

그런데 또 짜증나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심지어 '현재 이곳'의 위기-대침체와 그 여파-가 한 가지 주요 원인 때문이라고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 즉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 하락은 대침체의 중요한 근본원인이며 이윤율 하락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이 경우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주장은 그리 대담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증거를 살피기도 전에 이 가설을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도 문제다. 이미 난 증거를 제시했다. 내가 예전에 제시한 이윤율 하락의 증거에 대한 하비의 몇몇 반론을 다루며 나는 예상한 증거에 대한 해석과 내 분석을 보여줬다. 그는 이에 대해 마땅한 반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제시한 노동력 성장 통계는 이윤율이 상승하거나 LTFRP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건, (정당한)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이, 또 이 증거로부터 이끌어낸 내 추론을 비유적으로 옳지 않은 '비유 형태'(그런게 있지도 않은데)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묵살하는 게 적절하냐는 점이다. 하비를 부당하게 비난하지 않게끔, '독자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비유 형태를 단순히 비교하거나 대비시킨 것이었다고 이해되지 않게끔 내가 여기서 다시 반복하해보자면 ①나에 대한 그의 대답은 "자본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기적 비유는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잘들어맞는다"는 단정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맺으며 ②이 결론은 경험적 증거에 대한 고려없이 이뤄진다. 그는 내가 제시한 증거에 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험적인 그 어떤 종류의 합당한 반증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더 잘 들어맞는 것"을 결정하는데 있어 자신에게 '인상적'이었던 것과 자신이 "자본을 어떻게 보고 겪었는지"에 대해 늘어놓을 뿐이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승인하기 위한 목적이나, 결론의 정당성을 사후 승인하기 위한, 실제론 정치적 편의를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식의 방법이 명백한 증거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이런 방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점을 지닌다. 벌어진 일을 사람들이 '보고 겪는' 방식의 이해는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기 십상이며, 이런 방식은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부적절하기 일쑤다.
[7] '보고 겪은' 일의 정확성과 타당성을 받아들이기 전 주의깊게 명확한 증거를 숙고하고 추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경험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곤 한다. 하비는 고용의 성장이 그 자체로 이윤율을 향상과 LTFRP가 작동하지 않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한다(하비 2014). 그는 상품의 가격이 가치와 일치할 때만 마르크스의 법칙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여러 반론들이 이미 예측된 것일뿐 아니라 충분히 해명됐음을 들어보지 못한 듯 이윤율 하락 증거의 현실적 적합성에 의문을 표한다. 그와 같은 오해에 기반한 주관적 경험에 의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위기에 관한 이론이 '지금 여기'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내 생각에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독단주의에 맞서 싸워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무척 중요하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완강히 고집하는 것은 독단주의의 한 형태다. 하비에겐 분명 이런 잘못은 없다. 그는 "그럼에도 앤드루와 나의 비유 형태 모두가 옳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부당하게도 내가 제시하지도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은 비유를 탓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최소한 독단적이진 않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단주의도 있다. 명백한 증거와 논리적 추론을 두고도 믿음을 완강히 고집하려는 태도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지녔고 나는 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거나 "당신과 나의 경험은 다르다"는 말은 열린 태도나 상호 존중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가 증거와 논리를 묵살하기 위한 것일 때 이는 자신이 잘못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걸 거부하는 독단주의에 다름 아니다.
[8]

하비가 두 번째 형태의 독단주의에 빠져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하비는 경험적 증거를 두고 그의 생각을 다시 숙고해보길 거부하진 않는다. 단지 그는 증거와 겨뤄보질 않았을 뿐이다. 그에겐 여전히 그럴 기회가 있고 나는 그가 그렇게 했으면 한다. 이는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 지식인들에겐 이와 다른 책임도 있다. 그 책임 중 하나는 알곡에서 쭉정이를 골라내듯
[9] 경험적으로 옳은 것,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하는 일이다. 이는 중요한 책임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독자들은, 그들 스스로 증거와 주장을 적절하게 평가할 지식, 그리고 이 지식을 충분히 쌓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임무다.

독자들은 주로 시간과 지식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 일부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는 증거와 주장들 대신 더 '유용한' 비유의 비교를 찾는다. 어떤 독자는 그 비유가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에 기댐으로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더 잘 적용되는' 것을 대신 결정해주는 '유용한' 의견에 마음이 쏠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다른 자본의 화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벌어진 일에 책임이 있는, 자본의 여러 화신들 중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변혁시키길 바란다면,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또 망가지는지에 대한 진정한 지식-증거와 이 지식에 기반한 주장을 갖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유용한' 제안은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클리포드(William Kingdon Cliffordㆍ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가, 1845~1879)가 '믿음의 윤리학'에서 설득력있게 주장한 데 따르면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모든 믿음은 항상,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가 쟁점을 판단하기에 능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믿음을 굳힐 시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Harvey, David. 1990.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An Enquiry into the Origins of Cultural Change. Cambridge, MA and Oxford: Blackwell Publishers.('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구동회ㆍ박영민 옮김, 한울 2013)
_______. 2014. ‘Crisis Theory and the Falling Rate of Profit’.
Kliman, Andrew. 2012. The Failure of Capitalist Production: Underlying Causes of the Great Recession. London: Pluto Books.('자본주의 생산의 실패: 세계대침체의 원인', 정성진ㆍ하태규 옮김, 한울 2012)
Marx, Karl. 1971. Theories of Surplus-Value, Part III. Moscow: Progress Publishers.
_______. 1989b.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_______.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_______. 1991.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III. London: Penguin.('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3권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년 개역판)
Quine, W. V. O. 1960. Word and Object, Cambridge, MA and London: MIT Press.

주석
[1] 이 반론의 1편에서 내가 썼듯이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노동절약형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일어난다. 생산비용의 절감에 따라 기술 혁신은 생산가격의 상승을 저지시키는 경향을 띠며 이는 기업이 생산을 위해 투자하는 자본량이 늘어나는 만큼 빠르게 이윤을 증가시키는 것을 어렵게 한다.
[2] 하비와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충돌은 여기에 있다. 내가 언급했 듯이 그는 처음 글(하비 2014)에서 자주, 그리고 매우 길게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비의 답변에선 마르크스가 거의 사라졌다. 그는 LTFRP와 이에 기반한 위기이론을 다루면서 단 몇 번만 [마르크스를] 언급하며, 거의 대부분을 비유와 연관해 그와 마르크스의 대립을 자신과 나와의 대립으로 그려낸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왜인가? 하비는 왜 갑자기 증거에 대한 토론에서 비유에 대한 토론으로 방향을 바꿨는가? 클라이먼이 제안한 '비유 형식'이 옳을 것라고 받아들인 것으로 봐도 되는가. 그렇다면 대침체(the Great Recession)의 발생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왜 이리 다른가?
[3]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만취상태를 분석한다"는 문장은 타데즈 보이-젤렌스키(Tadeusz Boy-Zelenskiㆍ폴란드 시인, 1874~1941)가 마이클 드 몬테인(Michael de Montaigneㆍ프랑스의 르네상스 철학자, 1533~1592)의 '만취에 관하여'라는 수필을 묘사하며 처음 쓴 표현이다.
[4] 하비는 아마 이 표현을 "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자본주의의 붕괴는 태양이 꺼질 때까지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로부터 빌어왔을 것이다.['자본의 축적', 황선길 번역, 826쪽(Ⅱ책) 128번 각주]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이윤율 하락 때문에 반드시 혹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와 달리 그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일반법칙(이윤율의 경항적 저하의 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취소"['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289쪽]하기에 LTFRP는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322쪽]인데 "항구적인 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잉여가치학설사' 이성과 현실, 589쪽 *표 각주]고 주장한다.
[5] 현대 유체역학의 나비에-스토크스방정식이 유체의 흐름은 '혼돈 상태'일 것이라는 가설에 기반해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여기서 혼돈 상태는 기술적인 정의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다르다. 실제 예측이 불가능함에도 혼돈 상태의 동적 체계에서 변수의 작용은 완벽히 결정돼있는 것과 같다.
[6] 이 묘사에 딱 맞는 유일한 유기적 총체로는, 콰인(1960, p.52)의 '가바가이(gavagai)'가 있다. 이는 우리 중 나머지가 토끼 전체에 자극받을 때 가상의 '원초적' 자극으로서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이란 구절은 그의 '위기이론과 이윤율 저하'(하비, 2014)와 최근 답변에서 반복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학설사[3부 20장 3절]'*에서 이 말을 인용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요인들의 폭력적인 융합으로서 경제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하비가 이 구절을 위기의 원인들은 서로 분리돼 있고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인용한 것과 달리 말이다.

※하비가 인용했던 '잉여가치학설사' 3부 20장 3절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링크)
The capitalist directly produces exchange-value in order to increase his profit, and not for the sake of consumption. It is assumed that he produces directly for the sake of consumption and only for it. [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which, in fact, are reconciled by a process of adjustment which, at the same time, however, manifests itself as crises, violent fusion of disconnected factors operating independently of one another and yet correlated?if it is assumed that the contradictions existing in bourgeois production do not exist, then these contradictions obviously cannot come into play.
자본가는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바로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그가 직접소비하기 위해서, 오직 이를 위해서만 생산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부르주아적 생산에 존재하는 모순-실제에서 이 모순들은 존재함과 동시에 교정의 과정을 거쳐 조화를 이룬다. 물론 위기로서 그 자체는 서로에게 독립적일뿐 아니라 연관해 작용하는 분리된 요인들의 폭력적 융합이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들이 작동하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7]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자본론' 3권, 김수행 2015년 개역판, 1037쪽) 그 둘은 일치하지 않기에 '과학'이 필요하다.
[8] 난 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같은 것들과 [이를] 비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는 것에 적절치 않다. 증거와 이유가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증거와 이유가 충분하지만 대립의 한 편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길 독단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9]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분명히 하자면 이는 '자본의 본성'을 농업생산에 비교하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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