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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해당되는 글 1

  1. 2013.10.11 '국가와 혁명' 망각해선 안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과제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문성원ㆍ안규남 옮김|아고라 프락시스 총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궁전에서 쫓겨났다. 황제가 물러난 겨울궁전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공장과 군대에는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권력 기관이다. 이 소비에트는 1905년 혁명 때 처음 등장했었다.

세계 여성의 날인 2월 23일
(신력으로 3월 8일) 시작된 혁명은 구권력을 무너트렸지만 아직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울궁전의 임시정부는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도 임시정부를 넘어서진 못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교착된 전선처럼 러시아 내부에서도 지리한 고착상태가 들어서는 듯 싶었다. 노동자와 병사의 가장 급진적인 부위에서 당장의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불만이 위험스럽게 쌓여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는 머뭇거렸다.

카데츠와 멘셰비키ㆍ사회혁명당의 연립 임시정부는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전선에서 군사 규율을 강화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적 병사들을 전선에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6월 18일엔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2월 혁명의 반란이 시작됐던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지구에서 설익은 반란이 계획된다. 레닌과 볼셰비키 중앙위는 이들의 행동을 만류하지만 7월 3일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 때는 아니었다.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다수는 아직 볼셰비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연립정부, 즉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연립정부는 즉각 반격했다. 7월 5일 정부는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사무실을 습격했다. 6일에는 레닌 체포령을 내렸다. 이어 트로츠키와 주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도 이어졌다. 경찰과 우익 깡패 집단 흑백인조가 활개쳤다. 레닌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국경을 넘어 핀란드를 향했다.

국가, 전진하는 혁명의 피할 수 없는 벽

7월 사태 후 핀란드로 피신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한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국가와 혁명'을 쓰는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이제 막 수립된 부르주아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봉건 권력에 맞선 혁명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 대중의 무장을 용인하곤 한다(여러 혁명을 겪은 후인 1836년 스페인 혁명 당시 부르주아는 이러한 무장조차 허락하길 꺼려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로서는 노동자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 첫 번째 계율이었다. 따라서 노동자가 쟁취한 모든 혁명 이후에는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는 새로운 투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레닌 재인용ㆍ126쪽,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 대한 엥겔스의 1891년 서문)

1848년 2월 혁명은 파리 노동계급의 협력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을 승리로 이끈 파리의 노동계급은 '사회공화국'의 전망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오를레앙 왕조를 몰아낸 파리 부르주아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조롱하고 모독했다. 분노한 노동계급은 6월 봉기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무장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잔혹하게 진압당한다.

레닌이 떠올린 것은 이러한 역사였을 것이다. 이미 레닌은 7월 사태를 겪으며 부르주아지의 음험한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7월의 공격으로 자신감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나아가려 했다. 연립정부의 수장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장군과 손을 잡고 볼셰비키와 노동자ㆍ병사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코르닐로프는 더 과감했다. 8월 25일 자신의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향해 진격시켰다. 26일에는 지금까지 협력자였던 케렌스키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코르닐로프의 이름은 혁명을 압살하는 데 성공한 장군으로 1936년 스페인의 프랑코, 1961년 한국의 박정희,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앞에 놓였을 것이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인 상비군과 경찰ㆍ감옥과 같은 억압 기구를 국가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들은 …… 공공생활이 복잡해지고 기능이 분화된다는 등의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지적은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여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잠재우고 있다."(21쪽)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와 궁전의 부르주아지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였다. 엥겔스가 국가의 존재를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봉착했고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레닌 재인용ㆍ15쪽,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고 설명한 것은 레닌에게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겨울궁전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자ㆍ병사와의 대립을 견딜 수 없기에 자신의 힘을 소비에트와 혁명적 노동자ㆍ병사의 무력화에 집중해야 했다. 국가는 "계급 간의 충돌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힘이 있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것이기 때문이다(레닌 재인용ㆍ25쪽, 앞의 책). 혁명이라는 역동적 시기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17쪽).

스페인ㆍ한국ㆍ칠레의 경험은 이러한 국가의 본질이 여전히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최근 이집트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평화적인 시기에는 군대ㆍ경찰과 같은 억압 기관이 국가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기의 시기면 군대는 어김 없이 자신의 존재를 만방에 과시하며 역사의 주재자로 등장한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는 '평화적인 시기'임에도 이러한 국가의 본질을 얼핏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부예산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미국 정부는 10월 1일 폐쇄됐다. 그러나 "국방, 경찰, 소방, 우편, 항공 등 '핵심 서비스' 업무는 정상 운영됐다". 국립위생연구소가 심각한 암 환자 200명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노동통계청은 실업률 발표를 연기했으며, 식품의약국은 수입 식품과 의약품에 대한 안전검사를 중단했다.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도 활동이 마비됐다. 노동계급 대중을 위한 필수적 공공서비스가 중단된 이 와중에도 미국 군대의 세계적 활동은 계속됐다. 테러리스트를 잡는다는 핑계의 10월 5일 리비아와 소말리아에서 군사 작전은 정부 폐쇄에도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됐다. 군대를 운영하는 데 종사하는 민간 군무원도 복귀했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산물이자 지배계급의 계급지배 기관이기 때문에 혁명에 성공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먼저 할일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나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본다면, 당신은 내가 프랑스 혁명의 우선적 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ㆍ군사기구를 한편의 수중에서 다른 편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현실적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65쪽,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4권 425쪽)

그러나 혁명의 시기 부르주아지는 내각의 일부를 노동계급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한다. 1848년 혁명 후 프랑스에서 그랬고 레닌이 이 책을 쓰고 있던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그랬다.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가 수상이 됐고 멘셰비키 7명이 내각에 들어갔다. 1936년 스페인 인민정부 내각에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국가에 대한 근본적 반대파인 아나키스트까지 포함돼 있었다. 1970년 칠레에선 심지어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이 된다.

위기가 이러한 권력의 '재분배'를 통해 해결되진 않는다. 그러나 "관료기구의 자리가 여러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정당들에 많이 '재분배'되면 될수록, 피억압계급들과 그들의 정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화해 불가능한 적개심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가장 민주적인 정당들조차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바로 그 억압장치인 국가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53~54쪽). 자유주의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였던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강화되거나 여전히 유지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공통되게 경험했던 바다. 브라질 정부는 올해 6월 대중교통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반란과 10월의 교사 노동자 파업을 강력한 경찰력으로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 정부의 수장인 브라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는 사회주의 게릴라 출신이다. 정치권력의 일부를 분배받거나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국가권력을 향해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시키고,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절멸시킬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된다."(54쪽)

부르주아 독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핀란드로 피해있던 레닌에게 과제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와의 대결 만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겐 국가기구의 파괴가 끝일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점차적으로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량을 있는 대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는 과제가 남아있을 것이라고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었다(레닌 재인용ㆍ42~43쪽, '공산당 선언' 이론과실천판 39쪽).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공은 아직 국가 일반을 없애지 못한다.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멸할 테지만 이제 막 혁명을 시작한 러시아에서는 "착취자의 저항을 억누리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 농민ㆍ프티부르주아ㆍ반(半)프롤레타리아 등을 지도하기 위해서도, 국가권력ㆍ집중화된 권력조직ㆍ폭력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46쪽).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특수한 폭력조직으로서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역할의 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다"(47쪽).

한국의 어떤 자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레닌과 볼셰비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강신준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볼셰비키는 ……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ㆍ링크).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완전한 왜곡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48년과 1871년 혁명을 경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술로부터의 빼곡한 인용으로 가득하다. 레닌이 인용한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나를 두고 말하자면, 나의 공적은 근대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그들 상호간의 투쟁을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나보다 훨씬 전에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나의 새로운 점은 ①계급의 존재는 다만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 ②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간다는 것, ③이러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지양하고 무계급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레닌 재인용ㆍ58쪽,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저작선집 2권 497쪽)

파괴된 부르주아 국가를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철저하게 수행"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줬듯이 "다수의 인민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72쪽). 파리 코뮌은 이러한 완전한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조치도 보여준다. 코뮌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공직자에게 주어지는 보수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조정된다. 각종 특권은 폐지된다. 법관들도 표면상의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 코뮌은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직접적인 실행기구이고 위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을 여는 것이다. 혁명의 발전은 이러한 조치들에 덧붙여 구체적 상황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의 대체는 단지 행정부에 대한 것 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입법ㆍ행정과 함께 사법도 노동계급의 직접적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육과 종교 등도 예외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코뮌은 옛 정부의 권력의 물질적 도구였던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제거하고 나서, 곧바로 정신적 억압도구인 성직자 권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789년 혁명 이후 종교는 혁명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종교는 인민을 교육하는 기관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의 교육은 언제나 가장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었다. 즉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핵심이었다
(71~72쪽).

민주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국가의 폭력적 전복,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행. 민주주의가 아직 확립되지 않고 국가가 여전히 폭력에 의한 지배에 머무르던 제정 러시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까. 민주적 제도의 진전은 사회의 부정의를 교정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확대할 것이라는 게 보통의 기대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민주적 절차와 방법이 아직 덜 발전했고 대중이 민주주의에 익숙치 않아서 그렇다고 말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레닌에 의하면 "'부'의 전능함이 민주공화국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부의 "전능함이 정치적 메커니즘의 개별적 결함이나 자본주의의 열악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외피다. 따라서 자본은 이 최선의 외피를 획득한 뒤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물이나 제도나 정당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자기의 권력에는 하등의 동요도 없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다."(27쪽)

이는 "고대 공화정들에 있었던 자유"가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선거가 확립된 한국의 2012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다. 12월 18대 대선의 투표율은 17대보다 12.8%나 급증했음에도 75.8%에 불과했다. 그것은 레닌에 따르면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146쪽). 게다가 미국에는 아직 스스로 등록한 사람 만이 투표할 수 있고, 최근까지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이 포함된 조직적인 투표 등록 방해가 존재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동지역 최대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엔 민주주의라는 건 눈꼽만치도 없다. 1970년 칠레에서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에 뽑히자 자본가들은 온갖 사보타쥬를 자행했으며 민주 국가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미국은 올해 7월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자행했음에도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자본가들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매우 예민한 눈으로, 특히 피억압계급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레닌의 지적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우 소중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기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서나, 즉 선거권의 '사소한', 아니 사소하다고 이야기되는 세부 조항들에서만이 아니라 대의기관들을 구성하는 기술상의 문제에서, 단체조직권에 대한 실제적 방해에서, 일간지들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구성에서, 그 밖에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도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제한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제한, 예외, 배제, 방해들은 특히 가난을 직접 체험해본적이 전혀 없고 피억압계급들의 실생활을 가까이 접해본적도 없는 자들의 눈에는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들은 빈민을 정치로부터,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제외하고 배제하는 것이다."(147~148쪽)

국가 없는 삶의 시작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대체는 국가 일반의 사멸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나서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가 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행하는 마지막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 한 한 영역에서 차츰 불필요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스스로 조락한다. 인간에 대한 통치 대신에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레닌 재인용ㆍ31~32쪽, 엥겔스 '반 듀링론')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것이다. 그러나 억압자와 자본가들에 대한 제한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만 말하지는 않는다. "억압이 있고 폭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도적이고 하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다. "인민의 착취자ㆍ억압자에 대한 폭력적 억압, 즉 그들을 민주주의로부터 배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변화"인 것이다(149쪽).

"자본가들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되고 자본가들이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떠한 계급도 없는(즉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에 전혀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자유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으로 완전하고 참으로 아무런 제외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적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의 무수한 참상ㆍ야만성불합리추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옛날부터 알려져왔고 수천 년에 걸쳐 모든 교훈서에서 반복된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하는 특별한 강제기관 없이 준수하는 데 점차 습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사멸하기 시작한다."(149~150쪽).


즉 사회주의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인민 다수가 "투표와 선거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 사무에도 자주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누구나 다 '국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될 때 국가 일반은 사멸의 길로 접어든다(197~200쪽).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고비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트는 이전의 국가기구를 인수해 이용할 수 없다.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파괴돼야 한다. 즉 혁명 러시아의 임시정부와 군대ㆍ경찰, 부르주아적 두마와 제헌의회는 제거돼야 한다. 부르주아 국가를 무너트린 자리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들어선다. 소비에트는 이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인민의 공적 생활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대표자들은 언제든 소환될 수 있고 보수는 노동계급의 평균 임금으로 제한돼야 한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하지만 아직 억압자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억압자를 억압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멸을 향한 길을 닦는다.

잊혀진 꿈의 귀환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게 흐르진 못했다. 참혹했던 내전은 혁명적 노동계급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독일혁명의 패배로 인한 고립은 모든 과거의 오물을 부활시켰다. 옛 억압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관료의 독재로 대체됐고 국가는 사멸하지 않고 강화됐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붕괴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모든 국가의 사멸이라는 희망을 백일몽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쓰던 100여 년 전과 다른 운명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는 자본주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 각 나라의 주권, 인민의 민주적 권리가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스 선거에서 급진좌파연합이 부상하자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부르주아 언론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는 짓도 개의치 않았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유럽연합헌법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아일랜드 국민들을 겁박했다. 프랑스에서도 헌법이 부결됐지만 유럽의 지배자들은 방법을 바꿔 국민투표 없이도 유럽연합의 원칙을 각 나라에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유럽에서 국가는 혁명가들의 행동이 아닌 지배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되고 곳곳에서 무시당하는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만은 그 강력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경찰의 잔인한 폭력은 유럽과 중동, 남미의 저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 차원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폭력기구에 의지해 계급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고전적 국가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핵심 역할로써 억압기구의 활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에선 공화당의 부시가 애국자법을 만든 데 이어 민주당의 오바마가 국방수권법을 만들어 인민의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오큐파이 운동은 연방정부가 조직한 계획에 따라 전국의 경찰에 의해 일제히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경제를 지닌 중국은 민주주의하고 거리가 먼 나라다. 천안문 광장을 점령한 것은 인민 대중이 아닌 공안이다.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의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는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전적 국가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