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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을 여는 만화, 최규석 '지금은 없는 이야기'

때때로 2011. 12. 1. 14:23

지금은 없는 이야기 최규석|사계절

최규석 작가의 신작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신작'이라고만 표현한 것은 '만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죠. 에피소드마다 다르지만 어떤 것은 그림보다는 '글'이 더 많습니다. 만화와 같은 칸 구분이 있는 것도 아니죠.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최규석이 만들어낸 새로운 '우화'입니다. 미래의 기둥 어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사랑과 용기'를 전하는 우화. 그 어떤 작가가 꿈꾸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어라? 그런데 책을 펼쳐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이런 걸 아이들한테 보여줘도 되는거야?" 이런 물음이 절로 듭니다. 이를 테면 이렇습니다.

불행한 한 소년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괴롭힘에 몽둥이를 들고 복수를 계획하는 소년에게 흰 날개를 단 작은 천사는 "네가 먼저 참고 용서하렴. 그럼 언젠가 그 아이들도 자기 잘못을 뉘우칠거야"라고 말합니다. 불행한 소년은 자라 불행한 청년이 되죠. 고된 노동에도 적디 적은 수입에 절망이 찾아올 때면 어릴 때 그를 찾았던 작은 천사가 다시 찾아와 속삭입니다. "힘을 내세요. 그 사람들도 제각각 괴로움이 있답니다.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당신에겐 제가 있잖아요." 그 청년은 늙어 작은 방에서 홀로 외로이 병들어 죽어갑니다. 자신의 비참한 삶을 탄식하는 그에게 어릴적 그 모습 그대로의 작은 천사는 다시 말합니다. "비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어요. 그리고 아직 제가 옆에 있잖아요." 소년일 때도, 청년일 때도 그랬던 것처럼 병들고 늙은 노인은 조금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휩쌓인 그는 번개같이 스치는 하나의 깨달음에 그 작고 여린 천사를 손으로 잡아 죽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딱 한 번 분노를 표출한 그의 마지막 말은 이 것입니다. "네가… 네가! 평생동안 나를…… 속인 거야!!"

이건 우리가 흔히 접하던 우화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우린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삶이 결국 우리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배웁니다. 불평ㆍ불만을 늘어놓지 마라. 세상을 긍정해라. 인내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다 ……. 그런데 제 짧은 삶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더군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딱 한 가지의 속담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그가 이 책에서 펼쳐놓는 우화는 그러한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상식'이라고 통용되는 것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정말 그러냐고 묻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작가 최규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불평불만 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 그래도 예전에는 삶의 고통을 견디는 굳건한 의지, 앙다문 이빨 정도는 허용해 줬지만 요즘에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요새 떠도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고통조차 웃으며 견뎌야 한다. … 사실 수천 년을 반복해 온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맞는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반은 맞다. …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되고, 당연한 것이 되다 보니 다르게 생각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상황에서도 같은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
- '지금은 없는 이야기' 작가의 말 4~5쪽.

그래서일까요. 이 책에 실린 우화들은 무척 잔혹한 이야기들입니다. 폭력과 죽음이 난무한 그런 잔혹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꿈ㆍ희망ㆍ사랑ㆍ용기 따위를 똥통으로 집어넣는 잔혹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우화가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되던 당시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고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동화와 우화가 발생하던 시기에는 '잔혹한 이야기'였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강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식'에 맞서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잔혹'해져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조화'가 아니라 '분열' '갈등'을 더욱 강조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우화에서 반복되는 '흰쥐와 검은쥐' 이야기는 그러한 적대의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최규석의 이 책 '지금은 없는 이야기'에도 '흰쥐와 검은쥐'의 변형된 여러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우화들은 조금더 살을 붙이고 그림도 다시 그려졌습니다. 탄탄한 기본 실력에 더해 새로운 시도를 그치지 않는 최규석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해보였던 그의 새로운 시도들도 이 책이 완성된 시점에서는 상당히 숙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내놓은 '1318만화가열전'의 두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 올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로 부족함이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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