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본문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때때로 2013. 7. 17. 14:25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킴 그림|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도서출판 길찾기

1931년 스페인에선 공화국이 수립된다. 인민에 기반한다고 주장하는 공화국이지만 실상은 소수의 지주, 대자본가, 귀족에게 지배받았다. 노동조합 활동가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작업대 한켠에 권총과 수류탄을 올려놓고 일해야만 했다. 언제 자본가가 사주한 우파의 테러가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1936년 2월 좌파들이 모여 만든 인민전선은 총선에서 크게 승리한다.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됐지만 불안한 평화는 야심찬 장군 프랑코에 의해 끝난다. 모로코로 좌천됐던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모로코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장군에 올랐다. 1935년에는 노동자 봉기를 진압해 악명을 떨쳤다. 인민전선의 승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그 만큼 적격의 인물은 없을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오웰의 '카탈로니아
(카탈루냐) 찬가'. 최근으로 오면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 모두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의 승리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는 이제 끝장인 것처럼 보였던 시절 스페인에서의 내전은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이끌었다. 아마도 스페인 내전에서의 '국제 여단'과 같은 경험은 유일무이할 것이다.

스페인의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작은 땅뙤기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하는 농촌의 갑갑함을 젊은이들이 버티긴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도서출판 길찾기)의 주인공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이 현실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반발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시골 청년의 동경은 어느 시대나 비슷할 것이다. 안토니오는 한 번 실패하지만 두 번째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는 도시로 가 꿈에 그리던 운전면허를 딴다. 그러나 그에게 자동차 운전은 여전히 먼 일이다. 실업이 도시를 옥죄고 있었다. 임금도 나날이 떨어진다.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아나키즘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립보다 화해, 갈등보다는 협조. 정치적 대립을 접한 대다수 사람의 반응일 것이다. 안토니오도 다르지 않았다. 미싱 외판원을 하던 당시 그는 자신의 미싱이 천을 꿰듯 갈등과 대립으로 갈라진 스페인 인민을 하나로 만들어줄 수 있기를 꿈꿨다. 꿈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프랑코군에 징집된 안토니오는 목숨을 걸고 전선을 넘는다. 그는 의용군의 총격 앞에서 파시스트 군대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CNT-FAI'
(전국노동자연맹-이베리아무정부주의동맹)라고 외쳤다.

여러번 언급되지만 안토니오가 CNT와 FAI에 활동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까지 포함해 고작 네 명의 작은 동맹에 가입한 것이 다다. 전선에서 만난 그들은 총알을 모아 만든 반지를 나눠 끼는 것으로 자신들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을 맹세한다. 안토니오는 전선에서야 자신의 꿈이었던 운전을 하게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도 품는다.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프랑코군의 공세가 강화된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의용군의 정규군화는 더 고통스럽다.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에서 그리듯 정규군화는 의용군이 싸우는 '의미'를 빼앗는 짓이었다. 이어지는 패배. 이후 그의 삶은 패배와 배반으로 계속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스페인 내전 당시를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 만화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패배 이후의 삶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특별한 경험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아나키스트 혁명가 두루티는 1936년 내전 초기 목숨을 잃는다. 어쩌면 그는 이른 죽음으로 배반과 패배를 겪지 않았기에 더 행복했을런지 모른다.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안토니오는 친구로부터 물려받은 두루티의 신발과 함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의 전선을 누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배반을 겪으며 그는 스스로 그 신발을 태운다. 가까스로 지키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은 결혼과 함께 옛 동료에게 맹세의 반지를 되돌려 보내며 끝낸다. 종교적 결혼의 맹세가 아나키즘에 대한 맹세를 대체한 것이다.

1975년 프랑코가 죽으며 스페인의 독재도 끝난다. 안토니오와 동지들이 찾던 자유와 해방된 사회가 온 것일까.

"스페인은 민주국가니까요."

이 말보다 더 잔인하게 그를 파괴한 것은 없을 것이다. '민주국가' 스페인은 절차와 형식 속에, 그의 노쇠한 몸 속에 그를 가뒀다. 안토니오는 모든 실패 속에서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두더지가 자신의 가슴을 파먹도록 내버려뒀다. 동지들의 패배를 핑계로 자신의 신념을 배반한 삶을 사는 것은 그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듯 싶다. 자신의 마지막 존엄과 자유를 위해 그는 양로원의 5층 창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아흔에 다다라 스스로 비상한다. 이 책의 원제가 'El Arte de Volar'(비상의 기술)인 이유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안토니오는 스스로 맹세의 반지를 뺀다. 그러나 그는 곧 그 반지를 뒤늦게 얻은 자식의 손에서 발견한다. 실제로 이 책은 그의 아들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썼다. 게다가 최근 스페인에서는 그의 후예들이 다시 저항에 나서고 있다. 맞서 싸운 대상은 다르다. 그러나 인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조장하는 자본가들,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인민의 뜻을 무시하는 정치가들의 권력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싸움은 안토니오의 싸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비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지금은 절판된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지음, 변상출 옮김, 실천문학사)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아마 두루티에 관한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란 제목은 아마 이 책에서 따온 듯 싶다. 스페인 내전과 아나키즘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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