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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0일 작성>

프랑스. 프랑스를 말할 때 제 머릿 속에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은 '혁명'입니다. 1789년, 1848년, 1871년의 파리코뮌은 이미 고전적 사례들이죠.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1968년 혁명, 1995년의 총파업, 재작년의 유럽헌법 반대 투쟁과 작년의 CPE 반대 투쟁까지. 바로 어제(2007년 10월 19일)는 사르코지의 우파 개혁에 맞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되었죠. 프랑스인들의 혈관엔 마치 혁명과 투쟁의 열기가 적혈구 대신 가득차 있는 듯 싶습니다.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프랑스의 혁명가들이 제기한 이상은 무수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사로잡았습니다. 평등과 우애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회. 1789년으로부터 10여년의 혁명은 '쿨'한 현실주의자들에게 웃음거리 취급받을 '말'들이 그 행동의 진실성으로 사람을 감동시켰던 시대이죠.

그 시대, '기요틴의 독재자'로 불리며 비극적 삶을 살다간 혁명가가 있습니다. 오늘 얘기할 로베스피에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양희영 옮김|교양인

프랑스 혁명은 1791년 헌법의 서문으로 작성된 '인권선언'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인권선언의 탄생은 현대 민주주의 이념의 출발이라고 여겨지죠. 하지만 인권선언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노력이 없었다면 인류 최초의 보편적 권리에 기반한 민주적 제도의 탄생은 그 시기를 훨씬 뒤로 했어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시민은 그가 누구이든, 모든 등급에서 대표자가 되기를 바랄 권리가 있습니다. 능동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려는 여러분의 논의는 결코 여러분이 선언한 인권선언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권 선언 앞에서는 모든 특권, 모든 차별, 모든 예외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권리와 수입이 비례한다면, 10만 리브르의 랑트를 받는 사람은 그에 따라 10만 배나 중요한 시민이라는 것입니까?
-1789년 10월 22일 보통선거 폐지법안에 반대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사실 1789년 혁명 직후 제헌의회에서 그는 간혹 번뜩이는 능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또 다른 혁명의 거인들에 비해 그리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외국군대들이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침략을 시도하던 시기부터입니다. 1792년 "조국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선언 이후 반혁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의 진정한 역할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1789년 이전과 이후의 수많은 혁명에서 우리는 항상 무수한 반혁명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혁명의 성공 여부는 반혁명을 진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죠. 혁명은 느리게 흐르던 역사를 수백배 빠른 속도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상황 변화는 어제의 급진파를 오늘의 보수파로 변화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바치던 무수한 혁명가들이 혁명의 생존을 위해-자신의 생존이 아닌- 반혁명 세력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1917년 혁명에서 멘셰비키의 역할이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 초기 로베스피에르의 절친한 동료였던 파리시장 페티옹은 혁명의 와류에 휩쓸려 지롱드파로 후퇴합니다. 마라와 함께 코르들리에 클럽을 창설했던 당통은 지롱드파와의 화해를 바라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여러 혁명가들 중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은 그가 일관되게 혁명의 급진파로서 자리잡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공포정치의 독재자로 비난받으며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혁명의 급진파로서의 위치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민중이여, 공화국에서 정의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면, 이 단어가 평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헛된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의 대상이며 아부의 대상이며 경멸의 대상인 당신들, 주권자로 인정받으면서 여전히 노예로 대접받는 민중이여! 정의가 지배하지 않는 곳이면 그 어디든 민중은 운명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슬을 또 다른 사슬로 바꾸었을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
그리하여 악당들은 우리에게 민중을 배신하는 법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를 독재자라고 부릅니다! 이 법에 동의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독재자로 낙인 찍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민중을 보호합시다. 그들은 범죄의 길을 통해 그리고 우리는 덕의 길을 통해 단두대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국민공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급진적 부르주아지로서 혁명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나가고자 한 그는 본능적으로 그가 기대어야 할 사회계급이 상퀼로트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1792년 8월과 1793년 5월에 그는 상퀼로트에게 호소함으로서 공화국을 방어해왔죠. 그러나 상퀼로트가 사회적으로 단일한 계급일 수 없던 사회적 발전상태는 그에게 비극을 안겨줍니다.

상퀼로트에는 가난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상퀼로트에는 소상인과 함께 때로는 대상인, 은행가까지 포함되어 있었죠. 파리의 각 구에 건설되어 있던 코뮌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그 정치적 성향에 복잡한 모순을 앉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가 가능했던 데는 이러한 상황이 결정적이었죠. 국민공회 내 우파와 극좌파가 손을 잡고 로베스피에르파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혁명이 가난한 이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은 가난한 이들의 불만을 초기부터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이해하고는 있었죠.

곡물 교역의 자유는 우리 공화국의 생존과 양립할 수 없다. 우리 공화국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소수의 자본가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누가 곡물 교역을 담당하는가? 소수의 자본가들이다. 왜 그들은 교역을 하는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소비자에게 비싼 값에 곡물을 되팔아서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무제한적인 자유로 곡물가를 지배하는 이 자본가와 지주 계급이 노동자의 일당을 결정하는 데서도 지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명의 노동자가 필요할 때마다 열 명의 노동자가 줄을 서 있고, 부자가 결정권을 갖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적게 요구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는 노동자의 값을 결정하고, 노동자는 그의 법에 따른다. 노동자는 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필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당은 16~18수인 반면, 밀은 스티에(setier, 1스티에는 약 75킬로그램)당 36리브르(1리브르는 20수)이다……. 따라서 일당은 생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1792년 11월 19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가 구종을 대신해 읽은 청원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몇십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에 반해 부르주아지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급을 형성하고 정치적 훈련을 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경제적 정책에 있어서 끊임없이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최고가격제가 시행되었지만 식량에 대한 최고가격제는 기만적으로 시행되는 반면 임금에 대한 최고가격제-임금도 '가격'에 포함시켰죠-는 철저히 시행돼 가난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배가시켰죠.

혁명을 성공시킨 두 계급-하나는 이미 성숙한 부르주아지와 다른 하나는 아직 맹아로서만 존재하던 프롤레타리아-의 분열은 자신들이 탄생시킨 혁명을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덕성'과 '최고존재'에 대한 순종을 '애국파 시민'들에게 호소함으로서 그 분열을 치유하고자 했고 그 방법이 불가능해지자 프레리알 22일의 법-혁명재판소에서 변호와 심문을 중단시킨 공포정치의 개막을 가능케 한 법-을 국민공회서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정치에 대한 책임 모두를 그에게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지롱드파 73인의 의원들을 처형에서 구해줬고 당통의 처형을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저했습니다.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의 일부분은 지나치게 가혹한 공포정치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에게 비판받고 소환됐던 의원들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가 프레리알 22일의 법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혁명은 언제나 그 논리에 있어서 좌우 양극단의 대결을 요구합니다. 혁명에서 더 큰 비극은 좌우 양극단의 화해를 요구할 때 발생하곤 합니다. 과거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과 앞으로의 전진을 요구하는 세력이 화해하는 것은 평범한 시기엔 가능하지만 그 갈등을 최고조로 올려놓는 혁명의 시기엔 불가능한 일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항상 급진파의 역할을 자처했지만 그의 현실주의적 사고와 행동은 당시 막 싹트고 있던 '공산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은 물질적 조건의 미성숙으로 인해 쉽게 정치적 조급증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혁명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가난한 상퀼로트들의 지도자들-에베르파와 코르들리에 클럽-을 자기 손으로 숙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로베스피에르에게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서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지난 두 번의 봉기 때완 달리 가난한 상퀼로트들에게서 도움받지 못하도록 만들었죠.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발걸음은 몇 세대 뒤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자코뱅의 적자는 100여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나죠.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인 로베스피에르의 생생한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해줍니다. 우파의 공격에 맞서 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로베스피에르를 방어합니다. 한 인물의 전기로만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기는 힘듭다. 그러나 한 인물의 전기로 프랑스 혁명을 접해보겠다면 그 가장 훌륭한 선택은 바로 이 책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두군데 오타가 있긴 하지만 번역자와 편집자의 충실한 작업은 이 먼 나라의 옛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곳곳에 인물 설명, 각 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간단한 연표, 부록의 연표, 혁명기 주요 정파의 흐름도, 프랑스 혁명력 등은 책을 읽기 전에는 물론이고 읽은 후에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특히 서울대 최갑수 교수의 서문은 여전히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 책의 앞부분에 표시되어 있지만 저작권자를 찾지 못해 저작권 계약을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계약을 맺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로베스피에르가 1792년 4월 27일 자코뱅 클럽에서 한 연설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아! 우리는 승리를 거둔 행복한 조국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협받고, 분열되고, 억압당하는 조국이라면! 우리는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구하든지 아니면 조국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내게 자유에 열광하는 영혼을 주고, 독재자의 지배 아래 태어나게 한 하늘, 당파들과 범죄가 지배하는 시기까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킨 하늘은 내 나라를 행복과 자유로 인도해야 할 길을 나의 피로써 그리라고 내게 명령하는 듯합니다. 나는 이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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