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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공선' 프로문학 부활의 신호탄 될까

때때로 2008. 9. 2. 16:11

한 회사의 사장과 직원, 수십억 원 대 자산가와 88만원 짜리 비정규 알바까지, 우리는 흔히 한 배에 탄 운명이란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나라가 잘 돼야, 회사가 잘 돼야 개인도 잘 될 수 있다는 얘기를 귀가 닳도록 듣곤 하죠.

고바야시 다키지는 80여 년 전 캄차카의 차가운 바다에 떠있는 공업선을 배경으로 이 주장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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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공선 고바야시 다키지|양희진|문파랑

지금도 이런 선박이 있는 지 모르겠네요. 이 소설의 배경이자 주인공이라 할 '게공선'은 바다에서 게를 잡아서 배 안에 있는 공장에서 바로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선박입니다. '공장'이라는 이유로 이 배는 항해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공장'은 배라는 이유로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도 않았다고 하네요. 즉 약자들이 그 어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장소라는 것이죠.

농지에서 쫓겨난 농부, 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탄광의 막장 인생이 지겨워 떠난 노동자 등이 이 '게공선'으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그들은 캄챠카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죠.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라는 말로 이 소설은 시작합니다. 400여 명의 잡부와 어업노동자, 선원 들은 백야의 찬 북극해에서 그야말로 지옥같은 노동을 계속합니다. 밥은 찰기가 없어 부서져 떨어지고 '똥통'같은 선실은 비좁고 냄새나고 이와 벼룩으로 가득합니다. 어업노동자들은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작은 '똑딱선'을 타고 게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내몰려야 했죠. 잡부들은, 공장 노동자들은 어둔 공장 안에서 하루 13시간, 14시간 이상, 아니 잡혀온 게를 모두 통조림으로 만들기까지, 아니 감독과 회사의 목표치를 세울 때까지 폭력에 노출된 채 노동을 강제당합니다.

여느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문학)과 마찬가지로 지옥과 같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맞닥뜨린 노동자들은 부당함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지배자들의 술수로 서로 경쟁하며 분열하기도 하지만 결국 단결된 자신들의 힘을 발견합니다. 상투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줄거리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건 자본주의의 역사 내내 모든 곳에서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게공선'은 상투적으로 보이는 서사에도 불구하고 표현과 묘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집단으로서의 '게공선' 노동자는 보여주지만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는 보여주질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학생 출신 잡역부, 어업노동자, 잡역부 등으로 구분할 순 있지만 그 묘사가 특정한 인물의 묘사에만 국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대화에서 발화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책을 처음 읽을 땐 이를 쫓아가며 이해하기가 쉽진 않습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보면 '게공선'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제약돼있는 노동자라는 '공통점' 속에서 그들의 집단적 발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의 사건은 1926년 '하쿠아이호' 사건을 소재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꼭 과거의 일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많은 비정규직들은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죠. '비정규직 보호법'이라는 일련의 법안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더한 불안으로 몰고갔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무려 8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일본에서 다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후 일본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 1만명이 넘는다고까지 합니다. 과장된 거일 수도 있지만 한국 언론에도 여러 곳에 보도가 된 걸로 봐서는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이미 한 번 번역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6월 민주항쟁과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8월에 나왔었죠. 다시 한국에서 2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게공선'이 나왔습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씨는 이 책의 출간이 2~3년 후 한국에서의 새로운 '프로문학'의 부흥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고 있더군요. 문제는 '프로문학'의 부흥이 '사회주의'의 부흥으로 이어질 것이냐겠죠. 아직은 잘 팔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책을 출간해준 문파랑과 번역에 힘쓴 양희진씨께 응원을 보냅니다.

※ 저자인 고바야시 다키지는 1903년생으로 아키타현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오타루고등상업학교를 졸업 훗카이도 척식은행에서 근무하면서 '클라르테'라는 동인잡지를 통해 문학활동을 합니다. 고리키 등의 영향으로 인도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입장으로 문학적 태도를 바꾼 그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APF),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 등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펼치다 1933년 30세에 경찰에 체포 잔혹한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그의 장례는 3월 15일 쓰키지 소극장에서 노동자농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1987년에 번역된 '게공선'에는 그의 대표작 '1928년 3월 15일'과 '당생활자'가 함께 실렸었다고 합니다. 번역자인 이귀원씨는 1961년생으로 부산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어찌보면 전형적인 386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이 당시 그는 합법적인 출판이 불가능했던 사회과학ㆍ좌파 서적들을 독해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속했던 그룹 내에서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많은 일본어 팜플렛과 책들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는 평화전문인터넷신문 '평화 만들기'에 실린 차타니 주로쿠의 '20년 전에 발행되었던 한글판 '게공선''(클릭하면 관련기사로 이동합니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게공선'은 20년 전 8월 15일 광복절에 발행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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