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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경찰이여, 그댄 나의 형제"

때때로 2008. 12. 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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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2월 15일자 5면에 재밌는 사진이 실렸다. 한겨레에 실린 사진설명을 읽어보자.

한국청년센터 등 시민ㆍ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청년실업 해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찰이 미리 계단을 선점해 막았으나, 이들은 경찰들 사이로 들어가 행사를 진행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시민ㆍ사회단체의 기자회견과 집회, 시위를 경찰이 방해해온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지난 봄과 여름의 촛불 시위 이후 지금도 주말이면 종각, 청계천 입구, 시청광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을 선점한체 멍하니 앉아있는 젊은 경찰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찰이 집회ㆍ시위ㆍ기자회견 장소를 선점하는 경우 시민ㆍ사회단체 회원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곤 했다. 보통은 가벼운 충돌 후 원래의 장소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서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날 기자회견은 경찰이  한 사람 간격으로 서 있는 그 계단에서 경찰들 사이에 서서 이뤄진 듯 하다.

무장한 경찰로 기자회견 단체를 위협하려 했을 것이나 오히려 이 사진은 젊은 경찰들이 기자회견에 함께 한듯 보이게  한다. 이런 경우가 적지는 않았지만 이날 기자회견의 내용이 '청년실업 해소'였다는 점에서, 이들 젊은 경찰들의 다수가 가까운 시일에 취업전쟁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처지라는 점에서 이 사진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 하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가수 손병휘가 부른 '삶에 감사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젊은 경찰이여/ 그댄 나의 형제/ 우리의 아들/ 함께 노래해요" 프랑스 혁명 이후 바리케이트는 상퀼로트, 프롤레타리아트 등 피억압자들이 지배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코뮨, 평의회, 운동을 지키기 위해 등장했다. 나폴레옹 이후 파리의 거리는 이미 바리케이트 전투를 하기에 불리하게 개조됐지만 운동이 그 파고를 높여갈 때면 어김없이 다시 등장했다. 전투에서의 효율성을 떠나 바리케이트는 사회적 장벽을 상징하며 개개인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도구다. 군인이 바리케이트를 넘는 것, 자신들의 상관에게 맞서 바리케이트를 세우는 것은 혁명의 큰 전환점이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역사적 정통성이 약한 지배자들일 수록, 게다가 자신들의 안녕을 다수의 적대적 계급 출신 사병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그들에게 사병들의 반란은 불가능한 악몽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12월 8일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이상희 국방부장관이 "해마다 입대하는 20만명의 장병 중에는 대한민국 60년을 사대주의 세력이 득세한 역사로,군을 기득권의 지배도구로써 반민족·반인권적 집단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국가관,대적(對敵)관,역사관이 편향된 인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말한 건 이런 저들의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지난 6월 10일의 명박산성은 수십만 명의 시위대의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를 공격에 대비하는 것과 함께 3만여 명의 전ㆍ의경이 압도적인 숫자의 시위대 앞에서 정부/시위대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전ㆍ의경은 국가권력의 강제 앞에서 가장 취약하다. 그들이 바리케이트를 넘어오는 것은 실제로 혁명의 가장 마지막까지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겨레 사진이 보여주는 시위대와 경찰의 뒤섞임은 바리케이트를 넘는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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