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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 이야기

때때로 2010. 5. 13. 16:23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이두부 옮김|이후


최근 몇년간 가장 인상에 남는 책이 '가난한 휴머니즘'입니다. 읽은 후 저자인 아리스티드에 대해 궁금해졌지만 '한글'로 된 정보를 찾긴 매우 어려웠습니다. 얼마전 아이티에 대지진이 온 후 언론에 잠시 아리스티드가 언급되긴 했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망명 중인 그는 재앙이 덥친 조국으로 복귀할 뜻을 비쳤지만 미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허락한다고 말했고, 프랑스는 강력하게 반대했죠. 물론 언론에선 '망명'이라고 쓰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미 해병대에게 '납치'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번 대통령이 됐지만 두 번 모두 미국이 후원한 것이 유력한 쿠데타를 통해 쫓겨났죠.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죠. 말 그대로 진흙 쿠키가 주식으로 이용될 정도입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이 세운 유일한 나라입니다. 노예반란의 유일한 성공 사례죠('블랙 자코뱅'이라는 책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반란의 성공은 200여년 간의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죠.

최근 읽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8장에 이 아이티와 아리스티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더군요. 무척 반가왔습니다. 지젝이 쓴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라는 장이죠. 꽤 긴 '전제'를 해 출판사에게 약간 미안하긴 하지만 아이티의 간략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해 옮겨옵니다. 얇고 값도 싸니 부담 없이 한 권 구입해서 읽어보시길 부탁드려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8장「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슬라보예 지젝|난장|177~180pp. 186~187pp.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조건이자 동력이 아닌 장애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후]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이런 한계를 어디서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국제적 압력을 겪어낸 정치해방운동의 이름이 라발라스(크리올어로는 '홍수')[1]라는 역설적인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발라스는 빗장이 걸린 공동체를 흘러넘치는 징발당한 자의 범람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티드 정권의 전복에 관한 피터 홀워드의 책 제목(『댐으로 홍수 막아내기』)이 상당히 적절한 이유이다. 이 책은 9ㆍ11 이후 곳곳에서 댐과 벽이 세워지는 전지구적 경향 속에 2004년의 아이티 사태를 새겨 넣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세계화'의 진실, 즉 세계화를 유지하는 내적 분할의 전선을 직면하도록 만든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2]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Event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키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3]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말 그대로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뤄졌다. 2004년 독립 2백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레지 드브레가 그 일원이기도 한)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지불해야만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우리 대부분에게 즐거운 어린시절의 기억(진흙 쿠키 만들기)이 시테솔레이유 같은 아이티 빈민가에서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최근의 AP보도에 따르면 식량가격이 치솟자 공복감을 달래는 아이티인들의 전통적인 처방이 새롭게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노란 흙을 말려서 만든 과자이다. 진흙은 오랫동안 임산부와 아이들의 제산제制酸劑이자 칼슘 공급원으로 귀하게 여겨졌고, 진짜 식량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지금은 5달러어치의 흙이 있으면 진흙 쿠키 1백 개를 만들 수 있다. 상인들이 아이티의 중앙 고원에서 시장으로 흙을 운반해오면, 여성들은 그 흙을 사다가 진흙 쿠키를 만들어 불타는 태양 아래서 말린다. 완성된 쿠키는 들통에 담겨져 시장이나 거리에서 팔려나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리스티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미국과 프랑스의 공조가 2003년의 이라크 침공을 둘러싸고 양국간에 벌어진 공공연한 의견 대립 직후 이뤄졌고, 간헐적인 갈등보다 우선하는 양국의 기본적인 동맹관계를 매우 적절하게 재확인시켜준 사건으로 칭송받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안토니오 네그리의 영웅인 브라질의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도 2004년에 벌어진 아리스티드 정권의 전복을 묵인했다. 그 와중에 신성하지 않은 동맹이 결성되어 라발라스의 정권은 인권을 무시하는 중우정치이며,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적 독재자라고 격하했다. 불법적인 용병 암살부대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민주전선', 인도주의적인 NGO, 그리고 정작 자신들은 미국의 돈을 받으면서 아리스티드가 IMF에 '항복'했다고 비난하는 '급진 좌파' 단체 등이 모두 이 동맹의 일원이다. 아리스티드는 급진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의 이런 중첩을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어디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힘 있는 백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데서 약간의 은밀한 만족감, 아마도 무의식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4] 요컨대 지배이데올로기는 종종 좌파의 '자아-이상' 안에 남아 있기도 하다.

……

이제 아이티로 돌아오자. 라발라스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탈근대적 좌파(룰라의 브라질 통치를 칭송했던 네그리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었나?)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가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 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의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브뢴(대중이 행사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대중의 모든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5]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그 즉시 자유주의자들은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을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그렇게 하면 사이먼 크리츨리처럼 알카에다가 레닌주의 정당의 새로운 화신이라도 되는 양 말할 수밖에 없다.[6]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인 불의, 체계적인 사호폭력의 희생자들이죠. …… 그들이 언제나 동일한 이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게 맞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7]

[1] Lavalas. 1991년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이었던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 1953~ )와 그의 지지자들이 사회민주주의에 근거해 "평등을 동반한 성장"을 목표로 결성한 정치운동. 이 운동의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라발라스정치단체(Organisation Politique Lavalas, OPL)는 1994년 아리스티드가 미국 주도의 군부 쿠데타로 사임한 뒤 그 성격이 친서방적으로 변질됐고, 명칭을 투쟁하는인민들의조직(Organisation du peuple en lutte)으로 바꿨다. 1994년 망명지에서 아이티로 돌아온 아리스티드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OPL의 활동가 일부를 규합해 1996년 판미라발라스(Fanmi Lavalas, FL)라는 새로운 정치단체를 결성했다. FL의 활동에 근거해 2000년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2004년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다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FL는 일체의 선거에서 배제되는 조처를 당했다.

[2] Peter Hallward, Damming the Flood: Haiti, Aristide, and the Politics of Containment, London: Verso, 2008. p.11.

[3] 이 구절은 1805년 아이티에 대한 군사적ㆍ경제적 봉쇄를 부탁하기 위해 탈레랑(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 제임스 메디슨(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봉쇄 이유로 제시된 말이다.

[4] Hallward, Damming the Flood, p.338.

[5] Sendero Luminnoso. 1969년 페루의 고원 지대인 아야쿠초에 위치한 후아망가대학교의 철학 교수 구즈만(Abimael Guzman, 1934~ )의 마오쩌둥주의에 동조한 일군의 공산당원들(붉은 깃발 Bandera Roja)이 페루 공산당을 탈당해 만든 단체. '빛나는 길'이라는 단체명은 페루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리아테기(Jose Carlos Mariategui, 1894~1930)의 격언, "맑스-레닌주의는 혁명으로 향하는 빛나는 길이다"에서 따왔다. 1980년 3월 17일 무장투쟁 노선을 선언한 뒤로 이들은 현재까지 반정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6] 크리츨리는 알카에다 같은 집단이 표명한 전위주의를 '신(新)레닌주의'라고 불렀는데(Simon Critchley, Infinitely Demanding: Ethics of Commitment, Politics of Resistance, London: Verso, 2005, p.146), 지젝이 그런 표현(또한 크리츨리의 논의 전반)을 비판한 뒤 둘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Simon Critchley, "Crypto-Schmittianism", State of Nature, vol.1, no.2, Winter 2006). 지젝-크리츨리의 논쟁을 정리한 글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Robert Young, "The Violent State", Naked Punch, no.12, Supplement, October 16, 2009.

[7] Hallward, Damming the Flood,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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