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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에 해당되는 글 2

  1. 2012.04.10 마르크스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6)
  2. 2009.03.17 경제학 책 두 권

경제와 정치, 사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르크스는 재빨리 다시 호출되곤 합니다. 위기가 워낙 자주 찾아와서인지 마르크스가 호출되는 빈도도 더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에 공감하며 그의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실제로 더 늘어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입니다. 주류 언론에서조차 마르크스를 언급하고, 출판 시장에서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 더 많이 나온다는 얘기죠.

지난해 나온 책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쓴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갈라파고스ㆍ링크)'와 다니엘 벤사이드의 '마르크스 사용설명서(에코리브르ㆍ링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국내 저자가 쓴 또하나의 책이 나왔습니다. 류동민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입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류동민|위즈덤하우스(링크)

마르크스 사상의 입문을 위한 책은 보통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크게 나누자면 '철학' '역사' '정치경제학' '계급투쟁'과 같은 것이죠. 여기에 마르크스의 간략한 전기가 덧붙여지는 형식입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책갈피ㆍ링크)'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현재 왜 마르크스를 읽어야만 하는지는 보통 서문에서 다루거나, 책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됩니다. 즉 기존의 마르크스 입문서들은 (전에 마르크스를 읽었든 안 읽었든) 이미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들인 거죠. 그렇기에 지난해 말 나온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는 매우 새로웠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요 저서를 소개하는 내용 자체가 새롭진 않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의 부제목입니다.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가 부제인 것이죠. 부제는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도 반복됩니다. 일본의 패기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권을 휘둘러온 앎"(9쪽)으로써 마르크스를 읽을 것을 권합니다.

류동민의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이러한 시도를 한발 더 앞으로 밀고 나갑니다.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라는 부제에서 드러나 듯, 마르크스의 주요 주제들을 위로와 소통ㆍ교감이라는 틀로 다시 정리해냅니다.

그래서 책은 낯선 파티장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외로움ㆍ위로에 가장 어울리는 마르크스의 주제는 '소외'입니다. 보통 소외는 마르크스에게 남겨져 있는 헤겔의 흔적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류동민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경우는 더 그렇죠. 소외를 다루는 경우도 엄밀한 정치경제학적 입장에서 생산물이 상품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런식으로 해서는 요즘 한창 인기인 '위로'와 연관된 주제로 이어지긴 어렵습니다. 당연히 저자는 보통의 마르크스 해설과 다른 방향으로 우회합니다. 인용하기 가장 좋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입니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해소한다. 그러나 인간적 본질은 개별적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결코 아니다. 그 현실에 있어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 그런 까닭에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보편성으로만 파악된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6, 강유원 역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프리드리히 엥겔스)' 87쪽

첫 단추는 매우 잘 맞춰졌습니다. 이어서 류동민은 이렇게 씁니다.

사람을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마주치는 슬픔과 기쁨, 그 혼란스러움의 미세한 결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38쪽

이제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ㆍ소통ㆍ교감을 소재로 이어갈 수 있게 된 듯이 보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로부터 이어받은 '유적 존재'라는 개념은 책 전체에서 중심적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여섯 번째 테제로부터 시작한 1장의 이야기는 소외에서 물신(페티시즘)으로 이어집니다. 물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넘겨받은 2장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을 펼쳐놓습니다. 유물론을 다룬 2장에서 류동민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그것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중심적 개념인 '클리나멘'을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연과 마주침의 유물론이라고 할까요.

소외에서 페티시즘으로, 다시 유물론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드디어 3장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죠.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류동민을 거치지 않고 마르크스를 살펴보죠.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본질이 참된 현실성을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저 세계, 즉 종교를 자신의 정신적 향료로 삼는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함은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적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탄식이며,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고, 또한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강유원 역 8쪽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인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꼭 종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값비싼 자동차와 오디오에 빠지는 것, 명품의류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을 버리라는 요구만으로는 부족하죠. 문제는 그 배경, 현실세계에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가 현실세계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것을 예고합니다. 그 결실은 완성되진 않지만 '자본론'으로 맺어지죠.

따라서 류동민의 책도 3장에서부터 경제적 운동법칙들에 대한 이야기가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출몰'이라고만 적은 것은, 이 책 전체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적 연구가 부차적 지위로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하면 떠오르는 '노동가치론'이나 '착취'가 강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착취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경쟁과 차별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가 노동자로부터 분리되고 차별받는 상황을 강조합니다.

착취와 경쟁 차별로부터 우리는 정의의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류동민은 4장 '능력, 공정함 그리고 정의'에서 마르크스의 정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경쟁의 원리는 능력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신분은 적어도 법률적, 제도적으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근대사회에서 성과의 차이, 더 구체적으로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는 오로지 능력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요?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165~166쪽

먼저 능력의 기원이 불평등함을 설명합니다. 애시당초 자본주의가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는 것"을 돌이켜보면(자본의 시초축적: 인클로저 운동 등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탈취) 자본가들이 자신의 부의 기원을 개인적 근면함과 검소한 생활로부터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더 근본적으로는 능력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라쌀레를 따르던 이들과 마르크스를 따르던 이들이 1875년 고타에서 당 통합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을 건설하면서 채택한 강령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는]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377쪽) 분배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쟁과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결코 불공정한 거래ㆍ사기ㆍ협잡의 결과는 아닙니다. 이는 '노동력'이라는 특별한 상품의 지극히 공정한 등가교환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투쟁에서 어떤 초월적 기준의 정의는 없습니다. 오직 힘과 힘의 맞부딛침, 즉 투쟁이 있을 뿐이죠.

이제 류동민은 5장 '관계의 비대칭성,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마르크스를 따라 계급투쟁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순화된 언어로, 장의 제목이 말하듯 정치와 민주주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중요한 소재로 다뤘던 너와 나, 소통과 교감의 이야기는 앞선 4장에서 잠시 약해졌다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뚜렷이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현실정치적 발언이 가장 많이 드러난 장이기도 합니다(류동민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민주주의(혹은 계급 투쟁)로 만들어가야 할 사회, 그리고 나와 너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요. 류동민은 6장에서 마르크스적 희망을 설명하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공산주의적 미래를 그린 마르크스의 텍스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공산당 선언'이죠.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강유원 역 41쪽

류동민은 이러한 연합체를, 개인의 소외가 극복된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라는 어려운 과제를 목표 삼아 달려온 책의 결론으로서 훌륭한 마무리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아프냐고 물은 마르크스는 어떤 결론을 답변으로 준 것일까요? "역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류동민 234쪽),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류동민 239쪽)는 마르크스의 말은 결국 해결은 인간 스스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나, 혹은 너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인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의 어떠한 결심,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죠(이는 대개의 자기계발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이 바로 저 부제입니다. 마르크스를 휴머니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없지 않긴 하지만 대놓고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이라니 막막해 보였습니다. 저자와 편집자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은 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을 유연하게 연결시켜 설명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물론 마르크스를 안내하고자 하는 이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아직 의문이긴 합니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키워드로 [알랭 드] 보통처럼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의(설탕옷)'는 자칫 잘못하면 이만 썩게 하고 약효과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저는 우회하는 것보다 직접 가는 것이 대개의 경우에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쉽지 않았을 시도에 기꺼이 나선 류동민과 편집자에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는 다른 더 많은 독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때때로
2009.03.17 13:23

경제학 책 두 권 2009.03.17 13:23

최근 경제학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300쪽이 조금 넘는 얇은 책입니다. 한 권 읽는데 일주일씩 걸렸네요. 사실 사흘 정도면 충분히 읽을 분량인데 문제는 항상 술자리입니다. 술자리를 하루 가지면 당일에 책을 못읽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음날도 그 여파로 책에 집중하기 어렵죠.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미루다 보면 결국 일주일이나 걸려서 겨우 한 권을 읽는 수준인 것 같네요.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도 일년에 50여권 남짓밖에 못 읽는 것 생각하면 좀더 분발해야 하지만 실상 좀 두꺼운 책을 집어들다 보면 결국 50권 읽기도 벅찹니다. 그래도 작년부턴 대체적으로 일주일에 한 권은 읽고 있다는 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책은 로버트 하일브로너와 레스터 서로가 쓴 '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고 게시판에 쓴 글에서 이 제목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었죠. 읽은 후엔 그 편집자에 대한 제 불평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제목은 이 책의 핵심을 거의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경제학 제국주의'라는 말이 있더군요. 경제학, 정확하게는 주류 경제학적 판단이 인접 인문사회학적 판단을 압도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죠. 대학 시절 경제학원론을 딱 한 번 들어본 적 있습니다.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과목 성격이 짙은 강의여서 고등학교 수준하고 그리 차이가 많진 않아 어렵진 않더군요. 나름 학점을 얻어보려고 신청한 과목이라 충분히 만족했고 예상처럼 중간고사 성적도 잘 나왔었죠. 그런데 결국 중간고사 후 교수하고 대판 싸우고 수업을 안들어가서 결국 F가 나와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수와 싸운 내용은 모두 잊었지만 지금에 와서 '경제학 제국주의'라 불리는 문제와 비슷한 것이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경제학이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제가 받아들이기에)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정말 참아줄 수가 없더군요. 더구나 인간의 가치 판단을 배제할 수 있는 데서 경제학의 과학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그의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 후 경제학(주류 경제학) 공부는 완전히 포기해버렸죠.

하일브로너의 책을 제가 좀더 읽찍 읽었더라면 경제학을 좀더 좋아하게 됐을 것 같습니다. 대개의 경제학 교과서가 그렇듯 이 책도 경제학사부터 시작해서 거시경제-미시경제의 순을 거쳐 경제학을 설명합니다. 이번에 나온 책이 특별한 것은 최근의 경제, 시장 근본주의의 확산과 디지털 혁명의 영향을 설명하려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은 그 앞부분만으로도 훌륭합니다.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후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설명(비판)이 빠져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여전히 경제학사의 핵심 학자로 스미스ㆍ케인즈와 더불어 마르크스를 들고 있습니다. 거시경제와 미시경제쪽에 들어가면 이 책의 장점은 더욱 빛납니다. 입문서에 필요없는 그래프와 수식을 빼버렸다는 사소한(하지만 중요한) 장점은 물론이고 가난과 실업, 시장의 실패와 국가의 개입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은 차갑게만 느껴졌던 경제학 전반에서 유독 돋보이는 장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가 무조건적인 국가개입 찬성론자는 아닙니다. 주류 내에서 비주류이긴 하지만 그도 결국 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학자들이 시장이 실패할지라도 그 실패 자체의 치유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방임'에 손을 들어줬다면 그는 시장의 실패에 때론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점(물론 방법적 고민은 더 필요하지만)을 강조합니다. 왜냐면 인간 사회는 경제적 동물들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죠. GDP 수치에는 계층(또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구체적 인간사회의 고통이 표시돼지 않습니다. FTA를 체결하면 나라 전체로는 GDP가 올라갈 수 있지만 특정 계층(한국적 상황에서 특히 농민)의 삶은 더 피폐해지죠. 결국 누군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FTA를 체결할지 말아야 할지는 '과학적'인 경제학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전 이 책의 제목을 '경제학 할 말 못할 말'이라고 줄여서 부르고 있습니다. 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는 걸 먼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작으로, 이미 경제학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지녔겠지만 대학의 여러 경제학 교수님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두번째 책은 류동민의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책이죠. 입문서로선 드물게도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윤율저하경향의 법칙 : TRPF)에 대한 논쟁, 전형(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 논쟁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경험적 사실들에 기반한 설명으로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줍니다. 특히 개인적 경험이 많이 담겨 있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수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오히려 혼란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이것은 입문서에 있어서 '교과서'적 서술 방식을 선호하는 제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읽는 내내 입안이 깔끄러웠던 것은 외래어 표기의 문제입니다. 중국어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된소리로 표기하는 건 말이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게다가 찾아보기가 빠진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탈자 정도가 아니라 후주 하나가 탈락한 건 더 큰 문제죠.(13장의 본문엔 11번 주석이 표기돼 있지만 후주에선 11번이 없습니다.) 물론 이건 출판사 편집자의 문제죠. 구입하면서 많이 기대했었는 데 약간 실망스런 책이 됐네요.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