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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5일 작성, 일부 수정

자크 비데와 제라르 뒤메닐이 쓴 새 책이 나왔다. 제목은 '대안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앞 부분에 나온다.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스승을 찾고 있던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 17쪽.

그래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독자들은 마치 이 이야기가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 같은 러시아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혹은 더 직접적으로 레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한 얘기인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해선 우선 프랑스 노동당 건설을 위해 쥘 게드와 마르크스가 함께 작성한 강령의 해설에서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Accusing Guesde and Lafargue of "revolutionary phrase-mongering" and of denying the value of reformist struggles, Marx made his famous remark that, if their politics represented Marxism,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what is certain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개혁을 위한 투쟁의 가치를 폄하하며 '혁명적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게드(프랑스 노동계급 지도자)와 라파르그(마르크스의 사위)를 비난하며 마르크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발언을 내놓는다. 만약 저들의 정치를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확실한 것은 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80년 프랑스 노동당 강령에 대한 편집자의 해설(링크)

이는 노동당 건설을 위한 강령을 의논하기 위해 게드와 라파르그를 만난 이후를 설명한 글이다. 마르크스의 이 언급은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Marx and Engels, Werke, Vol.35 p.388)에 인용돼 있다.

Nor have you any other source, i.e. other than Malon at second hand, for your reiterated assertion that in France 'Marxism' suffers from a marked lack of esteem. Now what is known as 'Marxism' in France is, indeed, an altogether peculiar product — so much so that Marx once said to Lafargue: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If anything is certain, it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존중받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는 당신의 반복된 주장은 말롱(제1 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한 염색 노동자)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라고 알려진 것은, 정말로 완전히 기이한 결과물이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무언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882년 11월 2일 엥겔스가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링크)

엥겔스는 이 말을 1890년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반복한다.

Just as Marx used to say, commenting on the French "Marxists" of the late [18]70s: "All I know is that I am not a Marxist."
마르크스는 1870년대 후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해 언급할 때면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아는 전부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 1890년 8월 5일 엥겔스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링크)

이 언급들 모두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른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사정에는 그의 사위 라파르그가 끼어있다. 실제로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는 1889년 라파르그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We have never called you anything but 'the so-called Marxists' and I would not know how else to describe you. Should you have some other, equally succinct name, let us know and we shall duly and gladly apply it to you.
우리는 너를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 외에 어떤 것으로도 부르지 않았었고 그것 외에 어떻게 너를 묘사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간결한 이름 같은 다른 어떤 것을 네가 가졌다면 우리에게 알려주렴. 우리는 당연히도 기꺼이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1889년 5월 11일 엥겔스가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링크)

그런데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물론 정확한 인용 표기도 없이 마구 사용되고 있다. 그것도 매우 눈에 잘 띄는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말이다. 최근 뒤메닐 글을 읽으며 자꾸 실망하는 데, 이번 글도 '서론'에서부터 실망스러운 것 투성이다. 그 앞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저 문구를 그저 '일반적 상황'에 대입해 썼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터이다. 명백히 '프랑스' 마르크스주의를 대상으로 한 말을 '러시아의 근대 초기 혁명가'들에게 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왜곡일 뿐이다.

'저명한 저자'라고 해서 의심 없이 읽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도 심각한 오역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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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7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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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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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론' 하면 보통 레닌을 떠올린다. 하지만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의 성취는 레닌에 못지 않다. 이정로(본명 백태웅)가 옮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당시의 검열 때문에 원작자의 이름이 표기되지 못하고 본문에서도 몇몇 문장을 삭제하고 어떤 표현은 순화시켜 옮겼다. 레닌이 쓴 서문이 빠진 것은 당연하다. 이를 대신해 서문으로 실린 엥겔스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3장조차도 여기저기 '완화'된 표현으로 인쇄돼야만 했다. 우선은 여기 레닌이 쓴 서문을 옮긴다. 이곳저곳 눈쌀 찌푸리게 할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원문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대괄호[]는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고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레닌의 서문[1]
원문: N.I. Bukharin: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 - Introduction(링크)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 글에서 다룬 주제가 중요하고 시의적절하다는 것에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설명도 불필요하다. 제국주의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한 형태를 고찰함에 있어서 경제학 영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 생활의 어떤 본령에 관심을 가진 모두는 이 문제와 연관된 여러 사실들, 가장 최근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 필자에 의해 세밀하게 선별된 사실들을 숙지해야만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주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근거로 경제적이고 정치적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분석 없이 최근 10년 간 경제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의 이해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해 없이 전쟁에 관한 올바른 판단의 형성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요건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외교 '문서'들 또는 일상의 정치적 사건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한 나라의 지배계급에게 유익하고 편리할 뿐인 그와 같은 고립된 사실들로 구성된 방법의 '과학적' 가치와 전쟁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분석들에는 오직 비웃어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예를 들면 이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플레하노프는 현대에 최고조로 발달한 원숙하고 과숙한 자본주의와 연관된 경제체제로서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특징과 경향을 분석하는 대신 푸리시케비치와 밀류코프의 비위에 맞춘 사소한 사실들에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제국주의의 과학적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러시아 제국주의자 두 명의 당면한 경쟁자, 적수, 반대자를 향해 내뱉어지는 욕설 수준으로 축소됐다.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외국 경쟁자ㆍ반대자들과 전적으로 같음에도 말이다. 잊혀진 단어, 포기된 원칙, 혼란에 빠진 세계에 대한 개념, 버려진 해법과 엄숙한 약속,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 놀랍지 않다.

특히 니콜라이 부하린 작업의 과학적 의의는 분명히 가장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전체적으로 연관된 근본 사실을 조사했다는 데 있다. 유럽의 선진국들에서 봉건제를 극복했을 때, 여전히 점령되지 않은 막대한 지역과 아직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지 않은 나라들로 ‘평화롭게’ 퍼져나가며 비교적 평온하고 조화롭게 발달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비교적 '평화로운 자본주의' 시대였다. 물론 그 시대에조차, 대략 1871년부터 1914년까지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군대와 전체 계급이 이해하는 진정한 평화와는 매우 먼 삶의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선진국 거의 대부분의 대중에게, 식민지와 후진국 인민 수억 명에게 이 시대는 '평화'가 아닌 압제와 고문과 공포의, 끝이 없어 보이기에 더 두렵게 보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돌연한 변화와 재앙, 갈등으로 가득찬 비교적 더 충동적인 시대, 그렇지만 힘든 노동에 종사하는 대중에게 더 이상 끝없는 두려움으로만 나타나지 않는, 그러한 공포를 완전히 종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와 일반화 된 상품생산[사회]의 뿌리 깊고 근본적인 경향의 직접적인 발전, 성장, 지속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란 걸 염두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품교환의 성장, 대량생산의 성장은 전 세계의 나라들에서 관찰되는 근본적인 경향이다. 발달하는 교환의 어떤 단계에서, 성장하는 대량생산의 어떤 단계에서, 다시 말해 대략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도달한 단계에서 상품교환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막대한 규모의 대량생산 증가를 동반하고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하기 시작한 경제관계의 세계화와 자본의 세계화. 나라 안과 국가 간 교역에서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기업가들의 독점적 동맹, 즉 트러스트가 만연한 형식이 됐다. 특히 유동적이고 신축적인, 특히 국내외적으로 뒤얽힌, 특히 개성이라곤 전혀 없고 직접적인 생산과정과 분리된, 특히 집중되기 쉬운 권력인 금융자본, 이미 집중의 길로 매우 큰 걸음을 성큼 걸어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운명을 손에 움켜쥔 억만장자와 백만장자 수백 명의 권력인 금융자본이 세계의 전형적인 지배자가 됐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추론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던) 카우츠키가 내렸던 결론, 현재는 자본의 거물들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단결할 시기, 즉 국민적 한계를 지닌 금융자본의 경쟁과 투쟁이 세계적으로 단결한 금융자본으로 대체될 때를 그리 멀리 남겨두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론은 지난 세기의 90년대 '스트루베주의자'들과 '경제주의자'들이 도달한 것과 유사한 결론으로서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부정확한 것일 뿐이다. 후자, 자본주의의 혁신적 본질과 불가피성,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부터 유래한 이들은 어떤 때는 (자본을 숭배하고 자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자본과 싸우는 대신 자본을 찬양하고) 옹호하며, 어떤 때는 비정치적이 되고(즉 정치 또는 정치의 중요성을 거부하고 일반적인 정치적 격변을 부인하는 등 이러한 것들은 '경제주의자'들이 특히 자주 범하는 실수다), 어떤 때는 다름 아닌 '파업'을 설교하기까지 한다(그들에게 '총파업'은 신격화 한 파업운동이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잊히거나 무시당할 위치로까지 고양된다. 그것은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어느 정도 속물적인 자유경쟁의 '낙원'과 비교되는 자본주의의 의심할 여지없는 혁신성과, 세계의 선진국에서 '평화적' 자본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피할 수 없는 최종적 승리 또한 수없이 다양한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실수와 불운으로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징후가 있다.

특히 카우츠키에 관해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절연한 그는 정치를 거부하거나 체념한 것도, 무수하고 다양한 정치적 갈등과 격변, 특히 제국주의 시대 성격의 변화를 대충 건너뛴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도 아니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를 꿈꿨을 뿐이다. '평화로운' 자본주의는 평화적이지 않은, 군사적이고 파멸적인 제국주의로 대체됐다. 카우츠키는 이것이 지나간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미 1909년 발표한 특별한 책
[2]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내며 동의한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제국주의에서 '평화로운' 자본주의로 되돌아간다는 꿈이 불가능하다면, 본질적으로 프티부르주아인 이들이 '평화로운' 초제국주의에 대한 순진무구한 기대를 꿈꾸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초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편하고 가장 불안정하며 가장 혐오스러운, 그렇기에 프티부르주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과 같은 갈등을 없애 민족적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경으로 나뉜) 제국주의의 국제적 단결을 쟁취할 수 있다면, 모든 종류의 갈등과 재앙으로 가득찬 그 맨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낸 이미 도래한 현 제국주의 시대를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 비교적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갈등이 덜하며 재앙이 없는 초제국주의의 순진한 꿈으로 돌아가 보자. 현재 유럽을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제기되는 '까다로운' 목표도 한쪽으로 제쳐둬 보자. 아마 이제 곧 지나가버릴 이 시대를 헛되이 보내기보다 그 뒤를 이어 곧 도래할 '과격한 목표' 따윈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평화로운' 초제국주의 시대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직접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그와 같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초제국주의) 단계는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우리는 아직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신시대ㆍNeue Zeit, 144쪽, 1915년 4월 30일)[3]

현존하는 제국주의를 회피하려거나 '초제국주의' 시대라는 몽상에 빠져드는 이러한 경향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요소가 조금도 없다. 이러한 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금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고려하면 이 이론은 실현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 이론의 창안자 자신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프티부르주아적이고 매우 반동적인 경향을 제안한다. 카우츠키는 다가오는 불안과 파국의 시대, 1909년 목전의 전쟁에 관해 글을 쓰면서 예견했고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 같이 보였던 때가 있다. 그 시대가 도래한 것이 절대적으로 명백해진 지금 카우츠키는 다시 다가올, 하지만 언제 도래할 지 알수 없는 초제국주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할 것을 단지 약속할 뿐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조건, 지금 이 순간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다른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행동하겠다는 몇몇 약속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내일을 위한 미래의 외상 마르크스주의를 얻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약속으로서 연기됐다. 우리는 오늘날 모순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현재의 프티부르주아 기회주의적 이론-이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을 얻었다. 그것은 모국과 동맹국들을 제외한 어떤 나라, 즉 적국에 한해서라면 모든 국제주의적 표현에 공감하며, 그들 동맹국들과의 협정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맹 가입자격이 있는 나라가 복속시킨 나라가 아닌 곳에서만 '민족자결권'에 동의하는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더 이상 열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국제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수출을 위한 국제주의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 만연한 수천 가지 위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제국주의의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다시 말해 초제국주의 단계의 '가능성'도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추상적으로 그와 같은 단계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자신을 현재의 실제 삶에서 전개되는 사태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자신을 꿈을 핑계로 그것으로부터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모든 기업과 국가를 예외 없이 집어 삼킨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가 도래하고, 개별 나라의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 세계 연맹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앞에 언급한 압력ㆍ속도ㆍ모순ㆍ갈등ㆍ격변-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들에서 또한-하에서 전개될 것이고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르러 그 반대물로 전화할 것이다.

1915년 12월

각주
1_ 이 서문은 원래 레닌의 익명인 'V. Ilyin' 서명으로 작성됐다[marxists.org 편집자].
2_ 카우츠키의 팜플렛 '권력으로 가는 길(Der Weg zur Macht)'.
3_ 이 구절은 카우츠키의 논문 '다시 사고하기 위한 두 단계(Zwei Schritte zum Umlernen, 신시대ㆍNeue Zeit 5호, 1915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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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몬드문어 2014.03.04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상 마르크스주의', '유연한 미래의 목표를 핑계로 과격한 오늘날의 목표를 거부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일 뿐이다.'와 같은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듭니다. 저는 레닌의 글들을 읽어본 게 거의 없어서 주관적 감상일 뿐이지만, 이 글 속의 단어들은 낡어보이는데 글이 주는 내용은 새로운 것 같아 오묘(?)합니다.
    (그런데 두번째 문단에서 '삶의 조건들을'이 두 번 연속으로 나오는데, 오타인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 때때로 2014.03.05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간이 100년도 못산다고 100년이 역사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죠. 물론 자본주의가 가져온 혁명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매우 달라 보이도록 만들었지만, 그러한 자본주의적 혁명의 원리 자체는 100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 까 따져보면 글쎄라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지적해주신 해당부분은 제가 보기에도 오타인 데, 혹시 모르니 퇴근하면 원문을 보고 정정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