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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상연 옮김|에이도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도시다.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은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집중시킨다.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인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투쟁의 저수지다. 사실 마오와 체게바라의 농민 게릴라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실천이다.

도시는 생산 뿐 아니라 재생산 공간으로서 노동계급의 일상 전체를 조직한다. 가난의 비참은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더 비극적이 된다. 오웰이 경험한 밑바닥 생활이 그랬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했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도시의 하층 노동계급 문제는 좌파에게 꽤 오랫동안 핵심적 과제였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의 연대가 후퇴하던 자리에 빈민과의 연대를 배치했다. 철거촌에 세워진 골리앗(사실은 건설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로 만들어진 앙상한 구조물)에서 학생과 빈민은 건설 자본가들에게 고용된 조직 폭력배와 맞서 싸웠다. 꼭 90년대만은 아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태는 전쟁 후 성장을 거듭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이면에 빈곤이 축적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세희가 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1970년대 한국사회 하층 노동계급의 삶과 분노ㆍ좌절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비가 도시에서의 비정형적 반란에 주목하며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축적이 일어나고 조직되는 공간으로서 도시 자체에 돋보기를 들이밀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도시에서의 비참과 반란을 자본의 축적과정과 반란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은 다른 좌파에게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곤 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약탈'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의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약탈을 착취와 함께 자본의 두 무기로 고려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약탈'이라는 개념이 참으로 모호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약탈'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문제들을 '다양성' 그 자체로 남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고려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비역사적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부분을 보라.

"도시 전역에 걸친 투쟁이 상징적이고 혁명적 지위를 얻은 1871년 파리 코뮌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한 혁명운동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봉기'라고 주장한다(마르크스가 처음에 이렇게 주장했고, 레닌이 한층 더 강조했다). 하지만 파리 코뮌에서는 일터에서 계급적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해방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도시 자체를 부르주아지의 영유에서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리 코뮌 당시 처음 발표된 두 가지 포고령이었다. 하나는 빵 공장의 야간노동 철폐이고(노동문제), 또 하나는 임대료 지불정지 명령(도시문제)이었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09쪽

1871년 파리에서의 반란과 혁명을 '노동문제'와 '도시문제'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애초 노동조합 쟁점에만 적용되는, 즉 작업장, 특히 대규모 공장 내에서만 적용되는 쟁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노동조합 쟁점으로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코뮌을 돌아보자.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제정 붕괴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봉기 이전 몇 년 간의 노동계급 투쟁의 상승을 고려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정면으로 맞부딛친 첫 경험인 1848년 6월 봉기에서 노동자는 패배했지만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노동계급 투쟁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서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1862년 나폴레옹 3세의 배려로 런던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노동자 대표단은 귀국 후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1864년 파리 인쇄공 파업은 1789년 대혁명 때 제정돼 노동계급의 단결을 금지해 온 르 샤플리에 법을 사실상 무력화 했다. 1864년 9월에는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고 1865년 프랑스 지부가 파리에 건설됐다. 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프랑스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1867년 주물공 파업 이후 더 급진화됐다. 파리코뮌 1년 전 1870년에도 노동계급 투쟁의 물결은 계속 고조됐다. 그해 4월 인터내셔널 조합원은 24만명을 넘어섰다. 즉 파리코뮌은 보불전쟁으로 인한 제정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 투쟁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특히 1871년 파리코뮌의 모태가 1870년 9월 국방 임시정부 수립 후 인터내셔널이 주도해 건설된 파리 20구 감시위원회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의 이러한 동학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본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에서 비롯한 다양한 갈등은 수시로 불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투쟁이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계급이라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된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그 이전 몇년 간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 2월 보스니아 반란은 투즐라의 다섯 개 기업 민영화에 반기를 든 노동자 투쟁에서 시작됐다. 때론 노동계급 외부에서 시작된 사회적 운동이 노동계급을 자극해 투쟁을 더 결정적 국면으로 성장시키기도 한다.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이 대표적 사례다 2011년 뉴욕 오큐파이 운동도 이후 시카고 교사 총파업과 월마트 등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하비는 반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 도시에서의 지역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GM의 플린트 공장 점거 파업, 1984년 영국 탄광 파업 등을 예로 들지만 이는 오히려 정 반대의 사례다. 단호한 노동계급 투쟁이 지역적 차원의 투쟁을 고무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직 '공장' 노동자 만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물론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여러 좌파가 '공장' 노동자 만을 특권화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코뮌 당시 파리 기업들은 오늘날 대규모 공장과 달랐다. 평균 다섯 명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이었을 뿐이다. '아르티클 드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공예품을 만드는 영세 작업장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이 봉기를 '플로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주장했다. 하비 스스로 예를 들었듯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80년대 후반 공장 외부의 쟁점인 '인두세 반대 투쟁'에 전력을 다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혁명이 오직 공장 안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가 공장 외부에서 도입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닌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70~1973년 칠레전투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지역 차원에서의 치안ㆍ행정ㆍ사법ㆍ생필품 보급을 책임지는 데까지 발전했다. 반란과 봉기는 그랬을 때만이 '혁명'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비가 '도시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도시 노동계급에게 주거는 핵심적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핵심 고리로 노동계급을 통제하곤 한다. 1980년대 영국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공공주택의 개인 소유로의 전환이었다. 하비가 강조하듯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외 주거단지의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에서 대표적 사례는 울산일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 백화점 등 근린 생활시설의 보급, 이를 통한 부르주아적 문화 헤게모니의 확립은 노동조합을 기업, 또는 지역적 한계로 가둬두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대량 소비는 노동계급을 부채의 허울에 가둬 기업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매달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전세 혹은 주택자금 대출 이자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대다수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기권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1980년 4월 사북 탄좌 노동자들의 반란에 대한 좌파의 상대적 무관심은 이러한 문제점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이 사건은 인용될 때조차 5월 광주항쟁의 전조로만 매우 간단히 다뤄진다).

이러한 도시생활의 문제는 체제의 문제와 별개로 개인적 선택 또는 지역 활동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지곤 한다. 귀농귀촌, 마을 만들기, 사회적 기업 열풍등이 그런 것이다. 하비의 장점은 이러한 운동들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그는 무엇보다도 '도시권'의 문제를 반자본주의적 관점 안에 위치지우고자 노력한다.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역적 차원의 거버넌스와 국가적ㆍ지구적 차원의 거버넌스에 적용되는 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유재를 어떤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공유재를 결정하는 문제 자체가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도시문제를 둘러싼 문제는 노동계급 문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투쟁이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설명한 한계 때문에 그의 서술은 서로 다른 입장에 쉽게 인용될 수 있다. 한겨레 한승동의 서평 기사처럼 말이다. 하비는 서문 말미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의 영속적 축적 시스템 자체는 물론 이와 밀접히 결부된 착취계급과 국가권력의 구조를 전복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목표로 가는 길에 있는 중간역과 같다. 설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여도 도시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22쪽

이 말은 하비 스스로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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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0 12:33

전략은 불필요한가 쟁점2013.12.20 12:33

푸코가 1979년 5월 '르몽드'에 기고한 '봉기는 무용한가'를 읽었다.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한 이 글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러나 전략에 대한 폄훼 혹은 오해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느낌을 아래 적는다.

서정연씨가 옮겼다. 글을 읽으려면 여기: 푸코 '봉기는 무용한가'


1979년 샤에 맞서 무장한 군인 앞에 목숨을 걸고 나선 이란의 인민.

이란 혁명이 결국 호메이니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으로 끝나자 이에 대한 비난이 좌와 우 모두에서 빗발쳤다. 최근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에 대해 여러 지식인과 언론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반란]는 무용하다. 언제나 그건 매한가지니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지시를 내리진 않는다. …… 인민들은 봉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성은 봉기에 의해서만 역사에 도입되며 역사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실 봉기와 반란은 푸코가 거리를 두는 전략가들의 '전략'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반란의 우연한 계기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다. 푸코가 봉기ㆍ반란과 구분하는 혁명도 다르지 않다. 일반적 특징들 몇몇을 꼽을 순 있겠지만 정확한 순간, 계기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일으킨 파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우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략은 불필요한 것인가. 푸코는 자신의 이론적 도덕이 '전략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나의 이론적 도덕은 이들[전략가]의 것과는 정 반대다. 그것은 '반전략적'이다. 즉 하나의 특이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이를] 존중하는 것, 권력이 보편적인 것을 침해할 경우에 [이에 대해] 비타협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도덕은 전략가들에게 필요한 것임에 틀림 없다.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비타협적이 되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석연찮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봉기와 반란을 순전히 우발적인 현상으로, 즉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현상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군대에 맞선 남녀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가 거리에 나서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발적인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료 형제, 혹은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어떤 의식적 경험들이 존재한다. 새롭게 촉발된 운동이 흔히 과거의 성공한(것처럼 여겨지는) 봉기의 형태를 모방하곤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 뿐만은 아니다. 봉기와 반란이 촉발되는 구체적인 순간과 계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이러한 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의식적 반대파의 노력이 있어왔다. 인쇄술의 발달과 계몽주의의 확산은 프랑스 혁명의 전제였다. 러시아 혁명은 경찰과 황제까지도 무시하지 못할정도로 성장하던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1987년 6월 항쟁 앞서 수많은 불온 서적들이 대학가에 넘쳐났고 야학ㆍ서클ㆍ학회와 같은 학습ㆍ조직활동이 확산됐다.

봉기와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혁명적 전략가의 필수적 도덕이다. 인민으로부터 배우며 그 내부에서 전략을 세우는 게 전략가가 해야 할 임무다. 봉기와 반란이 자신이 예측 또는 계획한 데서 벗어났다며 기권하는 것은 결코 전략가적인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 반란을 그저 존중만 하는 게 꼭 비타협적 이론가의 태도도 아니다. 왜냐면 "넘어설 수 없는 법"에 "제한 없는 권리로 맞"서는 것은 언제나 인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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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때때로 2013.12.20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 어쩌면 자기 변명의 목적 하에 자신의 도덕을 위축되게 진술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슬람 혁명으로 끝난 이란 혁명에 대한 좌우파 양쪽의 비난을 견디긴 쉽지 않았을 듯.

    지금도 그렇듯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에 대한 유럽 좌파들의 제국주의적 편견은 꽤나 큰 약점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좌파는 교육의 세속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금지에 찬성했다. 영국에서는 좌파들 일부에서 전쟁반대 투쟁에 이슬람주의자들과 함께하는 데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

    그랬으니 호메이니의 승리로 끝난 이란 혁명을 두고 (한때 지지했다고) 푸코를 오죽이나 공격했을까. 그러니 그는 혁명과 봉기를 구분하고 역사로 사로잡힌 봉기, 혁명의 결과가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은 봉기를 존중하고 지지한 것뿐이라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당시 논쟁의 맥락을 살펴서 푸코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을 듯싶다. 어쨌든 당시 논쟁 맥락을 찾아볼 여력은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2. 지나가다 2013.12.30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측하신 부분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푸코의 경우 당시에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이란 혁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욕을 먹고 있지요. 특히 당시에 푸코가 이란 혁명을 보고 와 작성한 르포 기사들은, 프랑스 좌우파는 물론 이슬람 국가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에게까지, 이슬람을 낭만화한다거나 전체주의-가부장적 체제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 르포 기사들을 보면 푸코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희망적인 면을 본다거나, 이란 혁명을 이슬람에 기반한 "정치적 영성"의 봉기로 보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특히 문제가 되었죠.)

    푸코의 저 글은 그의 전체적인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중의 자기 방어로 읽혀야 할 겁니다. 실제로 푸코는 이 글 이후 자기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란 혁명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6월 30일 이집트 제2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인민들.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전국적 봉기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위기에 처했다. 장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군부도 나섰다. 군부는 "정치 세력은 48시간 이내로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라"며 "국민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부는 마치 봉기한 인민의 편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11월 군부는 '신(新)헌법 기본원칙'을 발표했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선거법을 매우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또한 가로막았다. 인민에 의한 정부로의 권력 이양도 최대한 늦추려고 했었다. 이에 분노한 이집트 인민이 거리로 나서자 군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저격수가 시위대의 눈을 조준사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2012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이 내세운 '파라오법'은 종교적 색채만 덧칠됐을 뿐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군부의 지배와 다를 바 없었다. 무르시와 군부는 때론 갈등하고 싸우지만 인민의 삶을 억압하고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데는 같았다.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군부는 인민의 친구가 아니다.

6월 30일 봉기로 무르시 정부는 식물정권이 될 듯 싶다. 다시 경계해야 할 것은 군부다. 시위대가 자신의 당면 목표를 달성한 후, 즉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이 권력에서 물러산 후 거리로 나선 인민이 다시 집과 직장으로 얌전히 돌아간다면 군부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2011년 보여줬 듯이 말이다.

● [2011년 11월]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
● [2011년 11월] 이집트 총선 첫날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2012년 12월] 끝나지 않는 이집트 혁명, 코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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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의 '신(新)헌법 기본원칙'에 대한 반발로 18일 시작된 시위가 날로 격화되고 있다. 군경은 고무총탄과 최루가스를 사용하고 이로 인해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22일 내각 총 사퇴로 이 위기를 넘겨보고자 하지만 몸통인 '군부'가 분노의 초점이 되는 상황에서 시위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 하다. [http://www.stern.de]

2월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독재를 종식시킨 이집트 인민이 다시 거리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항은 18일부터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리는 최고사령관의 종말을 원한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고 요구하며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죠. 군부정권의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집트 인민의 저항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ㆍ수에즈까지 이집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고무총탄ㆍ최루가스 등을 이용해 강경진압을 하고 있고 이로 인해 30여 명 이상의 사망자를 포함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독재를 종식시킨 이후 최고군사위원회의 통치 하에 민주화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11월 28일 진행 예정인 총선을 시작으로 내년 1월까지 3단계에 걸친 선거로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드는 게 그 첫 단계죠. 하지만 군부는 의회가 구성된 이후에도 내년 말에서 2013년 초 사이에 예정된 대선까지 행정부를 장악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집트 인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붙인 것은 11월 초 군부가 발표한 '신(新)헌법 기본원칙'입니다. 군부가 제시한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민간 정부의 수립 후에도 예산 등에서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레드 파미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 교수는 "이집트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은 집권 군부"라며 "군부는 선거법을 매우 어렵게 꼬아놓고 감시ㆍ견제를 피할 수 있는 새 헌법원칙을 발표하는 등 장기집권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이집트 현재당'을 창당한 이슬람 로트피는 "이집트 군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막고 있다"며 민주화 혁명 이후 진전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지적했죠.

이집트 인민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군부뿐만이 아닙니다. 이집트 법원은 "이번 총선에서 무바라크 정권의 인사들도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해 독재정권의 부역 세력을 정치권에서 뿌리뽑고자 하는 이집트 인민의 열망을 배신했죠.

현재 시위대는 군부에게 정권을 조속히 민간정부로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권은 내각 총사퇴라는 방법으로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합니다. "에삼 샤라프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최고군사위원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는 모하메드 헤가지 이집트 내각 대변인의 성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이집트 정치권력의 핵심은 군부, 최고군사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내각 총 사퇴라는 꼬리자르기 시도에도 초점은 최고군사위원회 사령관인 후세인 탄타위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인민은 민주화를 위한 제2의 봉기에 나서고 있는 듯 합니다. '4월 6일 운동'과 '혁명청년연합' 등은 오늘 오후 4시(한국시간 11월 22일 오후 11시) 타흐리르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백만인 행진'이 예고됐습니다.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의 영광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물러날 때까지 이곳(타흐리르 광장)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간에 의한 국가를 원한다."
"지난 금요일(18일) 모든 정치적 계층의 사람들은 군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민간의 민주적인 국가를 원하며 이러한 합의는 군부를 굴복시킬 것이다."

●프레시안|"이집트 총선 지옥으로 가고 있다" 최악 유혈사태(링크)
●프레시안|이집트 정국 격랑 … 내각 총사퇴, 시위대 '조기 대선' 요구(링크)
●참세상|격화되는 이집트 反군부 시위(링크)
●참세상|다시 일어난 민중봉기 … 이집트 과도내각 총사퇴(링크)
●경향신문|이집트 군부 유혈진압에 민주선거 좌초 위기(링크)
●중앙일보|타흐리르 광장 또 유혈시위 … 이집트 '제2 혁명' 불붙나(링크)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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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타도"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있는 이집트 소녀. [AP=연합뉴스]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를 뒤흔드는 아랍 봉기에 대해 월러스틴이 논평을 내놨습니다. 그는 이번 시위와 파업을 1916년 오스만트루크 제국에 저항한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의 봉기를 잇는 2차 아랍 봉기라고 부릅니다.

월러스틴의 글은 한 청년의 분신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시위가 어떻게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을 쫓아낼 수 있었느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는 두 가지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내놓습니다. 첫 번째는 이집트 국내에서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이고 두번째는 이번 봉기가 세계 체제의 권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국내 상황은 복잡합니다.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권력을 잡을 의지와 열정을 지닌 조직된 정치 세력의 부재로부터 비롯합니다. 우선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을 유력한 후보를 보유한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의지와 달리 탄탄한 기반을 갖지 못했습니다. 1917년 볼셰비키가 그랬던 것과 같은 세석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의지와 대중적 기반을 지닌 세력은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입니다. 이집트에선 '무슬림 형제단'이 바로 그들이죠. 일부 사람들은 이들 무슬림 형제단을 탈레반과 동일시 하는 잘못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월러스틴이 지적했 듯이 샤리아 율법을 시행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이슬람과 어느정도 세속적인 터키에서의 이슬람과 같은 세력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월러스틴의 두 번째 분석은 국제적인 세력관계에 대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 처럼 이번 봉기의 가장 큰 패배자는 미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이전과 달리 상황을 전혀 주도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와 아랍 지역 내의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월러스틴은 지적하지 않지만 쇠락하는 제국일지라도 그들의 개입능력을 우습게 봐선 안 될 것입니다. 이미 미국은 이집트 군부와의 채널을 가동시키고 있는 듯 합니다.

19세기 이후 외세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와야만 했던 아랍 민중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위대한 여정에 나섰습니다. 이 운동은 그리 쉽게 패배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안적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승리도 그리 만만한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은 그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선 급진적 대안을 건설하는게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아래에 월러스틴 논평의 일부를 첨부합니다.


[월러스틴 논평] "제2차 아랍 봉기, 최대 피해자는 미국"

그렇다면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튀니지와 이집트 아니 아랍권 전체에서 누가 권력을 잡게 될지 우리는 앞으로 최소 6개월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봉기는 1917년 러시아와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권력은 길거리에 있다"는 레닌의 말과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다. 볼셰비키가 그랬듯 조직되고 결연한 의지를 가진 세력만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아랍 국가들의 정치 상황은 각각 다르다. 볼셰비키처럼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고 세속적이며(이슬람교 신정체제를 추구하지 않음 : 옮긴이) 급진적인 정당을 가지고 있어서 권력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세력은 현재 아랍 국가 어디에도 없다. 주역이 되고 싶지만 탄탄한 기반은 거의 없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운동만이 다양하게 있을 뿐이다.

가장 조직화된 운동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운동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운동도 하나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슬람주의 국가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터키처럼 다른 세력들에게도 비교적 열려 있는 형태에서부터 (탈레반 정권 시절의 아프가니스탄처럼) 샤리아 율법의 엄격히 적용하는 가혹한 형태까지 다양하다.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그 중간 정도에 있다. 어떤 체제가 될 것인지는 불확실하고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국내적인 차원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너무나 불확실하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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