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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00:52

촛불시위의 첫걸음 쟁점2016.12.19 00:52

아래 글은 10월 20일 올린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 떼는 시민'을 다시 고쳐쓴 글이다. 페이스북에 처음 올린 글로부터 따지면 세 번째 글이다. 역사적 사례를 보충하는 데 중점을 뒀다. 논점도 살짝 달라졌다. "아마 여기가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도착한 자리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라고 바꾼 부분이 이 달라진 논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대중적 운동의 첫걸음에 좌파들이 불만을 갖는 일은 흔하다.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좌파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경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패배적 평가가 대표적이다. 좌파의 다수는 기존 체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에 대해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전인권의 '애국가' 공연과 시위대의 집회 후 청소, 경찰버스에 붙인 스티커의 제거 행동에 대한 평가에서 극대화됐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도 내 실망감을 정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망감은 내가 공부해온 '역사'에 반추해봤을 때 정당한 게 아니었다. 그 실망감은 내가 그토록 멀리해온 '국개론'(대중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 만을 갖는다며, 현재 상황을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중이 운동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의식을 깨우친다는 것, 무엇보다 좌파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빼놓은 평론가적 태도였을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좌파 일부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글일 뿐이다.

아래 글은 '사회주의자'에 기고한 글
(링크)의 원문이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글솜씨 때문에 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족을 또 달게 된다. '사회주의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회에서 고른 것이다.


11월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4차 범국민 행동'에서 행진에 나선 사람들. [사진 自由魂]

촛불시위의 첫걸음

10월 24일이었다.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의 태블릿PC 속 국정 개입 증거를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접한 대중이 분노를 표시하기도 전 박근혜는 서둘러 1차 대국민 담화를 연다. 녹화 방송에 기자의 질문도 받지 않은 무성의한 담화였다. 아마 대중보다 지배계급이 더 빨리 이 보도의 위력을, 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가 이뤄졌을 때의 파급력을 깨달았을 것이다. 폭로로 가득했던 한 주가 지나고 29일 토요일 첫 대중적 촛불집회가 열린다. 3만~5만명으로 추산되는 참가자들은 분노로 가득했고 이들은 경찰과의 몸싸움도 꺼리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충돌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이후 주말마다(당연히 평일에도 촛불은 계속 밝혀졌다) 계속된 촛불집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시위의 양상은 더 '평화'적이 됐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시위의 평화적 성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혹은 '명예혁명'이라며 촛불집회를 한껏 추켜세웠다.

좌파 일부에서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이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4차 범국민 행동이 11월 19일 있었다. 시위대의 평화시위와 질서 집착에 대한 비판이 이미 나오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버스에 붙인 항의 스티커를 제거한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필이면 이날 전인권은 무대에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몇몇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어떤 노인은 연사에게 '박근혜 퇴진' 외에 다른 얘기들, 이를테면 '사드'라든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같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한 촛불집회

아마 여기가 우리의 촛불이 첫걸음을 시작한 자리일 것이다. 촛불에 불씨를 지핀 건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이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시작은 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JTBC의 보도였다. 같은 그룹의 중앙SUNDAY는 첫 촛불집회 다음날 (10월 30일자) 1면에서 '노력하면 성공하는 나라, 그 믿음이 깨졌다'는 제목으로 시위를 보도했다. 훌륭한 선동이다. 기껏 3만~5만명 나온 시위를 보도하며 정유라의 부정입학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하나로 잇는 분노의 동아줄을 잡아당겼다(작은 숫자는 아니다. '기껏'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 언론의 보도 태도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토요일이 지난 첫 월요일 (10월 31일자) 사설에서 '심상찮은 시위'라며 정부와 정치권에 조속한 해결책을 내세울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는 1905년 1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킨 피의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경찰의 첩자였던 가퐁 신부는 대중의 불만을 '평화'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워 페테르부르크 동궁으로 평화적인 행진을 이끈다. 그러나 이 행진이 궁전을 수비하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자 가퐁은 "이제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고 선언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담화(11월 4일) 가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다음날 더 많은 대중이 광화문 광장으로 몰려들자 조선일보는 점잖게 이렇게 말한다. "朴 대통령 국회 추천 총리에 內治 일임 선언하길."(11월 7일자 사설)

지배계급의 한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러했다.

"귀족 계급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부르주아지에게 호소하는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다. 법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 계급에게 지지의 손을 뻗쳤으며, 또한 법원 서기와 고등 법원이나 귀족 가문의 출입 상인은 시위를 하라는 선동을 받았다. 베아른이나 도피네에서는 정기 소작인과 절반 소작인들까지도 동원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대에도 귀족 계급의 선전이 침투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귀족 계급의 혁명적 선례를 잊지 않을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 54쪽, 을유문화사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특권계급은 자신을 기본권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1788년 프랑스 고등법원은 '왕국의 기본법 선언'을 공포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이 일부 포함됐지만 "당연하게도 조세의 평등과 특권의 폐지에 관한 언급이 없는 이 선언은 어떠한 혁명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2쪽, 두레) 그럼에도 그들의 투쟁은 인민을 교육시켰고 훈련시켰다. 그 교육이 비록 지배계급 일부의 견해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는 혁명을 향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본적으로 1788년 봄에 있어서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바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의 결합이었다.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권계급은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사' 상권, 알베르 소부울, 96쪽, 두레

특권계급의 교육 결과는 훌륭했다. 결국 1년여 후 프랑스 인민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행동에 나서 앙시앵 레짐을 끝장낼 혁명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 ('독일 이데올록', 마르크스ㆍ엥겔스, 김대웅 옮김, 92쪽, 두레) 이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실천 초기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체제에 대한 저항 자체도 바로 그 체제가 제공하고 가르친 표현ㆍ사상에 기반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촛불집회 초기 문재인이 '명예로운 퇴진' 운운했지만 박근혜에게 그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거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더 무슨 권위가 있었겠는가. 우리가 싸워야할 권위는 시민사회 그 자체일 것이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생활 원리로 주장되고 권위를 지니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의경이나 경찰을 시위대의 '가족'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경찰의 권위, 이른바 '질서의 수호자'라는 권위를 시민들이 끝내 그들에게 희망한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비정상'에 의해 단지 현실에서 왜곡된 것일뿐이기에 그 원리 자체는 손상받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헌법 제1조 ②항을 행동지침 삼아 왜곡된 '민주공화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게 된다.

조선일보의 가이드라인이 대중에게 통할까

안타깝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현실로 작동하는 세계에, 심지어 수십만 명의 저항이 이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대중이 배워온 이 표현과 사상이 실제 세계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1905년 1월 차르를 찬양하던 러시아 인민의 평화적 행진은 결국 피의 일요일 이후 파업과 시위로 가득한 혁명으로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반란에서 시작한 1789년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루이16세는 혁명 프랑스에서 1791년까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귀족의 음모'에 대한 공포, 절대주의 '외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이 반복되며 결국 그 권위를 잃었다. 끝내 그는 국가원수임에도 가족과 함께 도주함으로써 혁명 프랑스에 동의하지 않음을 인민에게 입증해보인 후 1793년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렸다.

조선일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폭로 직후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희망을 내비쳤다. '내치를 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외과수술과도 같은 정밀한 대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촛불집회의 급진화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두 번째 주말 촛불집회 후 조선일보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대신 협력"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일주일 전 집회 때 연행자는 물론 밤 늦게까지 충돌도 있었음은 모른 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같은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거리로 나온 대중이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쳤던 것과 달리 '질서있는 퇴진' 운운하며 '탄핵'에 주저했다.

그러나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후 거듭된 사과와 아주 약간의 양보에도 사람들의 분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는 더해만 갔고, 10월 29일 첫 주말 촛불시위 때 5만여 명의 시위대는 3주 만에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12월 3일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232만 명의 인파가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난 것만 변화의 다가 아니다. '하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던 시위대는 '퇴진'이란 구호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됐고, 심지어 '하옥' '체포' '구속'과 같은 말까지 외치게 됐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통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던 '깃발'과 '조끼'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와 어울리고 있다. 노동조합 대열은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고, 이른바 시민들도 스스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온다. 거의 언제나 '폭력집회' 주도 세력 취급받던 농민의 트랙터 행진은 환영받았고, 이를 막아선 경찰은 비난받았다. 농민의 트랙터 행렬은 경찰의 방해에도 끝내 12월 9일 국회의사당 앞 탄핵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 속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집회의 연설도 다양해지고 급진화하고 있다. 집회의 기획자들은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수십 만 인파 앞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한 연사는 '사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광화문광장에서 농성을 계속해온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의 눈물은 광장에 모인 100만명의 분노로 승화하고 있다. 한 학생은 "제 어머니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가난합니다"며 불공정한 사회를 비판했다. 다른 학생은 "저는 공부를 못하지만 정유라 같은 이들이 너무 쉽게 학력을 따는 데는 열받는다"고 분노를 토했다. 많은 학생들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며 함께 행진하기도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만이 이 투쟁의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투쟁엔 이미 많은 과제들이 제기되고 있고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움직일 준비가 돼있다.

집회 문화도 꼭 '애국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민중가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로 시작하는 '노동가요' 메들리를 공연했다. 애국가만 부른 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애초 일부 '시민'이 스티커를 떼내기 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찰버스에 스티커를 붙인 더 많은 시민이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헌재 심판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됐다.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대중의 굳은 의지가 정치권에게 탄핵을 강요했고 새누리당을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앙일보가 "국민이 탄핵했다"며 "정치가 응답하라"
(12월 10일자 1면) 고 쓴 것은 이제 촛불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SUNDAY가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12월 11일자 1면) 고 말한게 내심은 아닐지언정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작가 샤토브리앙(1768~1848)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다" ('프랑스 혁명', 조르주 르페브르, 민석홍 옮김,13쪽, 을유문화사) 고 평가했다. 2016년 겨울을 달군 촛불집회가 지배계급 내부의 싸움에서 비롯했던 것일지라도 그 끝은 오직 대중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에도 다시 100만여 명의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모여 박근혜의 '즉각 퇴진'과 '구속' '처벌'을 외쳤다.

대중은 40여일의 행동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을 깨닫는 훌륭한 산교육이다.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세계의 균열은 커지고 있다. 헌법에 기반한 행동이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어냈지만 대중은 아직 만족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할 때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더 이상 이정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좌파의 기회는 여기에 있고, 소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Posted by 때때로
2016.01.03 21:22

4월 16일, 바다는 기억하지 않는다 쟁점2016.01.03 21:22


분향소 앞의 추모물. 뒤집힌 세월호 모습 위 'Made in Korea'라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사진 自由魂]

2016년 새해 첫 날. 430㎞를 달려, 오전 11시에 출발해 오후 5시쯤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세월호 침몰 626일째. 찬 기운 가득한 팽목항의 첫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항구 한 켠 자갈로 바닥을 고른 공터에 컨테이너로 세워진 분향소의 모습은 쓸쓸함을 더했다. 노란 리본은 색이 바랬고 기억하겠다며 쇠로 만든 추모물들은 녹이 슬고 있었다. 녹슨 글자로 적혀있던 'Made in Korea'.


아직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은 저 등대를 보고 다시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사진 自由魂]

분향소 안 가득한 아이들과 선생님, 희생자들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 힘들다. 그러나 새해를 이들과 함께 하겠다며 달려온 이들은 우리 만은 아니었다. 여러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분향소를 들렀다.


가족의 애끊는 마음은 아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이 추모물 뒷편 바다 건너가 바로 맹골수도다. 세월호가 가라앉아있는 곳. [사진 自由魂]

저 잔잔한 바다의 모습은 자신이 목격한 잔인한 사고를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녹슨 추모물과 풍경, 빛바랜 리본 만이 아직 1000일도 지나지 않은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고의 원인도, 그 많은 희생도, 그걸 기억하는 것도 결국 모두 우리의 몫일 게다. '맹골수도'라는 이름으로 바다의 거침을 강변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게다.

Posted by 때때로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2012년 8월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찾았다. '과거와의 화해'를 위해 전태일 동상 앞에 헌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우 지부장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와 김 지부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뉴시스]

5월 9일 KBS 길환영 사장이 사과하고 김시곤 보도국장이 사임함으로써 세월호 피해자가족들의 청와대 앞 20여 시간 농성이 마무리 됐다. 또 하나의 요구였던 대통령 면담을 청와대가 완강히 거부했음에도 말이다.

박근혜는 왜 그리 강경하게 유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일까. 국정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바로 그 시간 청와대 안에서 박근혜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위축된 소비심리를 살려내야 한다며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청와대와 박근혜에게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면 민생대책회의가 아닌 유족들과의 면담을 우선했어야 할 것이다. 사고 후 수습과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에 사람들은 경악하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게 됐기 때문이다. 소비심리의 회복과 경제생활의 정상화는 바로 이러한 불신과 불만을 어루만지는 데서 시작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박근혜는 유가족이 청와대 앞에서 경찰 수천 명에 고립돼 있는 동안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한국여행업협회장, 대한숙박업중앙회장, 한국관광협회중앙회 부회장, 현대ㆍLG경제연구원장을 만났다. 결국 그가 어루만지려는 국민, 그가 소통하려는 국민은 이 나라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우리 편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다.

박근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국민 다수와 사이에 투명한 벽을 쌓고 있다. 팽목항을 처음 찾았을 때 경호원에 둘러싸인 박근혜는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오열하는 유가족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만 움직인다. 4월 29일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았을 때 그는 가짜 유가족을 앞세워 우아한 워킹으로 사진과 영상을 위한 촬영에만 최선을 다했다. 경호원에 의해 박근혜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로막힌 '순수' 유가족이 거센 목소리로 정부의 무능력에 항의하는 중에 말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던 시절인 2012년 8월 28일,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며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려 했을 때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이 거센 항의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박근혜, 전태일 유족 반발에 발길 돌려ㆍ뉴시스ㆍ링크).

세월호 사고 초기부터, 아니 취임 전부터 일관되게 보여왔던 박근혜의 어떤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개인적 기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아마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희진은 경향신문 칼럼
(위로하는 몸ㆍ4월 23일자 13면ㆍ링크)에서 이렇게 적었다.

"박 대통령의 경직된 얼굴은 국민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독재성)이 합쳐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은 미개한 민초'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자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불쾌감으로 대응했다. 굳은 얼굴, 위로하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화가 난 것이다. 뻔뻔스러움조차 넘어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몸이다."

이 구절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떠올린 인물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닌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였지만 말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에서 지배계급 개인의 특성이 역사의 운동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물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나는 개인의 특성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러한 개인들을 매개로 움직인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주장대로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에게 관심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는 지금 분노의 초점이고 정국의 핵심이다. KBS 본관 앞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꿈쩍 않던 사장과 보도국장이었다. 청와대는 공개적으로는 KBS의 사과와 보도국장 사임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과와 사임을 한 것이다. 이는 국영방송국을 움직이는 핵심 권력이 청와대에 집중돼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고 박근혜의 권력을 강력한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지난해 12월 철도노노조의 총파업은 박근혜 정부를 위기로 몰아갔다. 나는 지난해 12월 이 블로그에서 노동자들의 단호한 집단행동이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분열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몰아부쳤고 중도층을 박근혜정부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민주노총이 물러섬으로써 그 기회를 놓쳤지만 말이다
(민주노총, 흔들리는 정부ㆍ새누리당 앞에서 후퇴하다ㆍ링크). 이와 비슷한 일이 KBS를 둘러싸고 다시 벌어졌다. 조금 작은 규모지만. 김시곤 국장은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며 사장도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규모 있는 집단적 행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SNS로 표출되는 대중의 불만과 분노 만으로도 지배계급은 균열을 드러냈고 청와대도 둔하지만 조금씩 움직였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 판단력 부재, 평소의 나르시시즘'에 가득찬 박근혜와 청와대는 둔하게만 움직일 수 있다. 트로츠키가 그린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역사의 파도에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박근혜의 무감각으로부터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짜르와 역사 사이의 침투할 수 없는 '매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매질이 만들어낸 박근혜의 무감각이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이 '매질'은 역사의 파도로부터 짜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박근혜의 경우 이 '매질'이 분노를 자아내고 대중을 움직이고 있다. 5월 10일 안산에는 2만여 명이 모였다. '엄마들의 노란손수건' 대표 김경래씨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조작하고 은폐하는 정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필요없다"며 국민과 사이에 투명한 매질로 벽을 쌓는 박근혜정부를 비난했다. "우리가 나라를 바꾸겠다"는 주장에 크게 동감하는 것이 나 만은 아닐 것 같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산 거리 가득 메운 촛불ㆍ경향신문ㆍ링크). 우린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역사가 움직이진 않을지라도 말이다.

트로츠키가 쓴 러시아 혁명사 4장 '짜르와 황후' 일부를 아래 발췌해 옮겨놓는다. 최규진이 옮기고 풀무질에서 발행한 책이다.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짜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 역사발전 과정 중에서 짜르는 혁명과 마주쳤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짜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짜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니콜라이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이고 혁명마저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주(州)나 군(郡)을 통치할 자질도 물려받지 못했다. 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저 역사의 파도를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媒質)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러시아군이 … 러일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치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 그리고 다시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 경악, 충격을 느꼈을 때였다. 그러나 짜르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 … 이것의 핵심은 기질적 무관심, 정신력의 빈곤, 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 ……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짜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버티고 있었다. ……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은 잔인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라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늦게 태어나 자기 운명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온 정성을 다해 인간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 국가예산에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집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들었다. 이들 중 누가 야당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었을 경우에는 사면조치를 내렸다. ……

니콜라이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한편, 지난 몇 십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 그런 까닭에 짜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처져 있었다.

짜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움츠러들 뿐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이 더욱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

구 체제의 신봉자인 참의원 의원 타간체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체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실이 담겨있다.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反)사회적 기생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깡패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행패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깡패짓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때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