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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9일

앰네스티 협조로 만들어진 '아랍의 봄'(장 피에르 필리외 글, 시릴 포메스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이라는 만화가 지난 3월 번역돼 출간됐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책은 '아랍의 봄'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가득찬 책으로 읽지 않기를 강력히 권한다.

1. 이 책은 '아랍의 봄' 원인을 오직 독재와 권위주의 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2008년 경제위기 후 곡물투기로 인한 국제 곡물가 상승이 아랍지역 인민의 생활수준 하락을 불러왔던 점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몇년 전부터 성장하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몇몇 훌리건 팬클럽 이야기는 다루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이 아랍의 봄 이전 지역 국가들이 서구식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빅아들여왔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2. 아랍의 독재ㆍ권위주의 정권과 서방 '민주주의' 국가의 협력적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곳의 독재가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일 뿐만 아니라 현재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임을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이책에 의하면 제거돼야 할 악은 오직 아랍의 독재자들과 그들 나라의 비민주적 관습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의 봉쇄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스라엘과 서방보다는 하마스 비판에 더 열을 올린다. 그래서 아랍 인민의 서방에 대한 분노는 오직 음모론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로 설명한다.

3.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를 아랍 독재자들과 상관없이 다루는 것은 물론 유럽의 리비아 폭격이 리비아 인민의 해방에 도움을 줬다는 식으로 다뤄진다. 서방의 이와 같은 개입들이 아랍과 그밖의 지역에서 반민주적 근본주의자들을 성장시켰음을 침묵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국가의 성장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만 살펴도 충분히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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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0 12:33

전략은 불필요한가 쟁점2013.12.20 12:33

푸코가 1979년 5월 '르몽드'에 기고한 '봉기는 무용한가'를 읽었다. 1979년 이란혁명에 대한 이 글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러나 전략에 대한 폄훼 혹은 오해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느낌을 아래 적는다.

서정연씨가 옮겼다. 글을 읽으려면 여기: 푸코 '봉기는 무용한가'


1979년 샤에 맞서 무장한 군인 앞에 목숨을 걸고 나선 이란의 인민.

이란 혁명이 결국 호메이니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으로 끝나자 이에 대한 비난이 좌와 우 모두에서 빗발쳤다. 최근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에 대해 여러 지식인과 언론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반란]는 무용하다. 언제나 그건 매한가지니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지시를 내리진 않는다. …… 인민들은 봉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이 아닌 아무나의) 주체성은 봉기에 의해서만 역사에 도입되며 역사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실 봉기와 반란은 푸코가 거리를 두는 전략가들의 '전략'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반란의 우연한 계기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다. 푸코가 봉기ㆍ반란과 구분하는 혁명도 다르지 않다. 일반적 특징들 몇몇을 꼽을 순 있겠지만 정확한 순간, 계기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일으킨 파장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우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략은 불필요한 것인가. 푸코는 자신의 이론적 도덕이 '전략가'의 것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나의 이론적 도덕은 이들[전략가]의 것과는 정 반대다. 그것은 '반전략적'이다. 즉 하나의 특이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이를] 존중하는 것, 권력이 보편적인 것을 침해할 경우에 [이에 대해] 비타협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도덕은 전략가들에게 필요한 것임에 틀림 없다.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비타협적이 되는 것. 그러나 여기에는 석연찮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봉기와 반란을 순전히 우발적인 현상으로, 즉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현상으로만 바라보는 데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군대에 맞선 남녀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가 거리에 나서게 된 계기가 순전히 우발적인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료 형제, 혹은 가족으로부터 이어받은 어떤 의식적 경험들이 존재한다. 새롭게 촉발된 운동이 흔히 과거의 성공한(것처럼 여겨지는) 봉기의 형태를 모방하곤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 뿐만은 아니다. 봉기와 반란이 촉발되는 구체적인 순간과 계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이러한 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의식적 반대파의 노력이 있어왔다. 인쇄술의 발달과 계몽주의의 확산은 프랑스 혁명의 전제였다. 러시아 혁명은 경찰과 황제까지도 무시하지 못할정도로 성장하던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1987년 6월 항쟁 앞서 수많은 불온 서적들이 대학가에 넘쳐났고 야학ㆍ서클ㆍ학회와 같은 학습ㆍ조직활동이 확산됐다.

봉기와 반란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혁명적 전략가의 필수적 도덕이다. 인민으로부터 배우며 그 내부에서 전략을 세우는 게 전략가가 해야 할 임무다. 봉기와 반란이 자신이 예측 또는 계획한 데서 벗어났다며 기권하는 것은 결코 전략가적인 태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 반란을 그저 존중만 하는 게 꼭 비타협적 이론가의 태도도 아니다. 왜냐면 "넘어설 수 없는 법"에 "제한 없는 권리로 맞"서는 것은 언제나 인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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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때때로 2013.12.20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 어쩌면 자기 변명의 목적 하에 자신의 도덕을 위축되게 진술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슬람 혁명으로 끝난 이란 혁명에 대한 좌우파 양쪽의 비난을 견디긴 쉽지 않았을 듯.

    지금도 그렇듯 무슬림과 이슬람주의에 대한 유럽 좌파들의 제국주의적 편견은 꽤나 큰 약점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좌파는 교육의 세속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금지에 찬성했다. 영국에서는 좌파들 일부에서 전쟁반대 투쟁에 이슬람주의자들과 함께하는 데 불만을 터트리곤 했다.

    그랬으니 호메이니의 승리로 끝난 이란 혁명을 두고 (한때 지지했다고) 푸코를 오죽이나 공격했을까. 그러니 그는 혁명과 봉기를 구분하고 역사로 사로잡힌 봉기, 혁명의 결과가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은 봉기를 존중하고 지지한 것뿐이라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당시 논쟁의 맥락을 살펴서 푸코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을 듯싶다. 어쨌든 당시 논쟁 맥락을 찾아볼 여력은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2. 지나가다 2013.12.30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측하신 부분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푸코의 경우 당시에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이란 혁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욕을 먹고 있지요. 특히 당시에 푸코가 이란 혁명을 보고 와 작성한 르포 기사들은, 프랑스 좌우파는 물론 이슬람 국가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이들에게까지, 이슬람을 낭만화한다거나 전체주의-가부장적 체제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 르포 기사들을 보면 푸코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희망적인 면을 본다거나, 이란 혁명을 이슬람에 기반한 "정치적 영성"의 봉기로 보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부분들이 특히 문제가 되었죠.)

    푸코의 저 글은 그의 전체적인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중의 자기 방어로 읽혀야 할 겁니다. 실제로 푸코는 이 글 이후 자기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란 혁명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6월 30일 이집트 제2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인민들.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전국적 봉기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이 위기에 처했다. 장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군부도 나섰다. 군부는 "정치 세력은 48시간 이내로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라"며 "국민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부는 마치 봉기한 인민의 편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을 기억해야 한다. 2011년 11월 군부는 '신(新)헌법 기본원칙'을 발표했었다.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선거법을 매우 복잡하게 꼬아놓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 또한 가로막았다. 인민에 의한 정부로의 권력 이양도 최대한 늦추려고 했었다. 이에 분노한 이집트 인민이 거리로 나서자 군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저격수가 시위대의 눈을 조준사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2012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 대통령이 내세운 '파라오법'은 종교적 색채만 덧칠됐을 뿐 민주주의를 제한한다는 측면에서 군부의 지배와 다를 바 없었다. 무르시와 군부는 때론 갈등하고 싸우지만 인민의 삶을 억압하고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데는 같았다.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군부는 인민의 친구가 아니다.

6월 30일 봉기로 무르시 정부는 식물정권이 될 듯 싶다. 다시 경계해야 할 것은 군부다. 시위대가 자신의 당면 목표를 달성한 후, 즉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이 권력에서 물러산 후 거리로 나선 인민이 다시 집과 직장으로 얌전히 돌아간다면 군부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2011년 보여줬 듯이 말이다.

● [2011년 11월]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
● [2011년 11월] 이집트 총선 첫날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2012년 12월] 끝나지 않는 이집트 혁명, 코앞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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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의 2011년과 2013년.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쫓아낸 지 2년 만에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 이집트 인민들. 다시 출발한 이들이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사진 ROARMAG.org 페이스북]

6월 30일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 이집트의 주요 도시 거리에 수 백만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이미 2011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떠난 자리에 오른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종교의 탈을 쓴 또 다른 독재자였을 뿐이다. 이집트의 동지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물론 일시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다시 일어섰다. 이 점이 중요하다. 애초 2011년 이후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 스페인의 분노하라 운동, 2012년 터키와 브라질 반란에 영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동지들이 다시 터키와 브라질 반란으로부터 고무받아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다시 시작된 이집트의 운동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전에 멈춘 곳에서 출발하게 된 운동은 그 결과가 인민의 승리든 패배든 더 격렬하게 지배자들과 충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30일 시위 전날인 29일 로어매그(ROARMAG.org)에 실린 이집트 활동가들의 편지는 그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스스로를 '카이로의 동지들'이라고 칭한 이들은 단지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합법성에 대한 강조"가 체제의 진정한 핵심을 가리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번 행동이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들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목표가 거리로 나온 시위대 모두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어제의 시위는 이들의 주장이 허언 만은 아닐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집트 활동가들의 공개 편지를 아래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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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속 탁심과 리우의 동지들에게
Roarmag.org 6월 29일ㆍ링크

우리와 함께 투쟁하는 당신에게,

우리에게 6월 30일은 2011년 1월 25일과 28일 시작된 반란의 새로운 단계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경제적 착취와 경찰 폭력, 고문과 살해의 더 심한 판본일 뿐인 무슬림형제단의 통치에 맞서 일어선다.

'민주주의'의 도입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적절한 생계수단과 존엄의 [향상을 나타내는] 어떤 지표를 지닌 괜찮은 삶을 누릴 가능성과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선거 과정에서의 합법성에 대한 강조는 이집트에서 우리가 투쟁을 계속해야 만 하는 이유, 즉 얼굴만 바뀌었을 뿐 탄압과 긴축, 경찰 폭력의 원리는 그대로인 억압적 체제의 영구화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정권은 여전히 공중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고 고위직은 개인의 권력과 부를 획득할 기회로만 이해된다.

6월 30일 다시 시작될 혁명의 외침은 이거다: "인민은 체제의 폐지를 원한다". 우리는 비겁한 권위주의나 무슬림형제단의 식민주의적 자본주의,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삶의 목을 죄는 군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무바라크 시대의 구체제로 돌아가지 않는 미래를 찾고 있다. 6월 30일 거리로 쏟아져나올 시위대 구성원들은 아직 이 요구로 하나가 되진 않았지만, 피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 [활동가] 네트워크는 여전히 약하지만 최근의 봉기, 특히 터키와 브라질의 봉기로부터 희망과 영감을 받고 있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정치적ㆍ경제적 현실에서 비롯했지만 우리 모두는 인민에게 도움이 될 것은 생각도 안하는 체제를 영구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최상층의 지배를 받아왔다. 우리는 2003년 브라질 바히아의 무상교통운동의 수평적 조직과 터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민중의회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지역화된 신자유주의 원리가 인민의 삶을 짓밟는 과정에 오직 종교적 허식만을 추가했을 뿐이다. 민간 부분을 공격적으로 성장시킨 터키의 전략은 반대자들과 진보적 계획에 대한 시도를 억압하는 주요 무기로서 경찰의 폭력적 지배와 같은 원리의 권위주의적 지배로 변화했다. 브라질에서 혁명적 전통에 뿌리를 둔 정부는 그들의 과거가 인민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협력하는 자신을 가리는 가면일 뿐임을 입증했다.

최근의 이러한 투쟁들은 보다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쿠르드족과 라틴 아메리카 토착민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 지난 10여 년간 터키와 브라질 정부는 생존을 위한 이 운동을 진압하려고 시도해왔지만 실패했다. 정부 탄압에 맞선 그들의 저항은 터키와 브라질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저항 물결의 선구자다. 우리는 각자의 투쟁이 중대함을 인식하는 것의 절실함을 알고, 새로운 공간과 주민, 공동체로 확산되는 반란의 양식을 찾아냈다.

우리의 투쟁은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 체제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 무바라크와 군부, 무슬림형제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위기 때 국가가 권력을 사용해 저들의 부와 특혜를 보호하고 확산하기 위해 [인민의] 재산을 빼앗고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투쟁하는 우리는 고립돼 있지 않다. 우리는 바레인, 브라질, 보스니아, 칠레, 팔레스타인, 시리아, 터키, 쿠르디스탄, 튀니지, 수단, 사하라 서부 지역과 이집트에서 공통의 적에 맞서고 있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모든 곳에서 그들은 우리를 폭력배, 파괴자, 약탈자,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제적 착취, 적나라한 경찰 폭력, 부조리한 법질서에 이상의 것에 맞서 싸우고 있다. 권리나 시민권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역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착취할 수 있게 하거나 세계적 권력이 우리 매일의 삶에 대한 통치권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하는 중앙집권적 억압기구로서 국가에 반대한다. 총탄과 방송,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투쟁을 [억지로] 통일하려 하거나 동일시 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투쟁들의 배경에는 우리가 싸우고 해체해 쓰러뜨리려 하는 지배와 권력의 동일한 구조가 있다. 함께하면 우리의 투쟁은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체제를 쓰러뜨리길 바란다.

카이로의 동지가.

※ 위 편지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임의로 옮긴 것임으로 인용하거나 퍼가시려면 꼭 원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잘못 옮겼거나 틀리게 이해한 데 대한 지적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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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이스탄불 탁심 광장에 있는 작은 공원의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에르도안 정의개발당 정권에 반대하는 거대한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진 facebook The Turkish Revolution 2013 - Türk Devrimi]


조선일보는 '아랍의 봄 2.0'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봄'이라기엔 좀 덥다. 날씨만 다른 것은 아니다. 경제적ㆍ정치적 상황 또한 달라 보인다. 경향신문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하의 터키 경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취임 뒤 에르도안은 외국인 투자자를 적극 끌어들이고 정부 규제를 과감히 없앴으며, 그가 집권한 이래 지난 10년간의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3%에 이른다. 2002년 235억 달러였던 나라빚은 지난해 9억 달러로 줄었으며 올해는 빚을 모두 갚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업률은 8.2%로 10년 만에 최저이고 GDP 대비 국가부채율이나 GDP 대비 재정적자는 유럽연합 대부분 나라들보다 낮다."
- 경향신문 6월 4일자 12면(링크)

그렇기에 5월 31일부터 계속된 전국적인 격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당장 정치적 격변을 가져올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향후 정치적 격변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안하고 있지만 "지난 2011년부터 중동 각국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과 비슷해 보이지만 배경과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적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과 달리 이번 터키는 경제성장의 결과 "안정된 중산층이 더 높은 수준의 자유와 문화 향유를 주장"하고 있기에 '아랍의 봄 2.0'이라고 부른 것이다(조선일보 6월 4일자 16면ㆍ링크).

경향신문이 제시한 '터키 이슬람주의ㆍ권위주의 조치'에 따르면 5월만 해도 '주류 판매ㆍ광고 제한' '공공장소 애정표현 규제 추진'과 같은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가까운 조치들이 연이어 이뤄졌다. 이슬람주의 교육운동을 펼치고 있는 페툴라 귤렌과 에르도안 총리의 연계설도 피어오른다. 실제로 천연자원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터키가 중요한 발판으로 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페툴라 귤렌이 아프리카 전역에 설립한 학교였다.

그러나 상황이 이슬람주의를 둘러싼 갈등 만은 아니다. 애초에 이번 시위가 '나무' 몇 그루를 둘러싼 투쟁이 아니듯이 말이다. 에르도안 정부는 에너지ㆍ교통ㆍ도로ㆍ항만ㆍ토지에 대한 민영화와 국유자산 매각을 대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1월ㆍ링크). 올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입찰가격이 기대보다 낮아서일 뿐 민영화 자체에 대한 방향 전환은 아니다. 이와 함께 이스탄불의 동쪽 지역을 금융중심지로 변화시키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세계일보 2011년 4월 2일자 14면ㆍ링크). '도시 재생' '주거 개량'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정의개발당 정부의 이스탄불 개조사업은 큰 저항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도시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거를 잃고 쫓겨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게지 공원 투쟁이 거대한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켰다는 것은 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게지 공원을 철거하고 오스만 제국 시절 병영을 본딴 거대한 쇼핑몰을 짓겠다는 계획은 정부의 이스탄불 개조 계획 중 하나였다. 이스탄불 '주거 개량' 사업은 550년 역사를 지닌 술루쿨 지역에서 시작됐다. 그곳에 모여 살던 가난한 집시들은 집을 잃어야만 했다. 그 다음은 탈라바시였다. 이곳은 마찬가지로 터키에서 주로 하층민에 속하는 쿠르드족의 주거지였다(Socialist Worker 6월 3일ㆍ링크).

참아왔던 불만이 결국 게지 공원에서의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인해 폭발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슬람주의적 권위주의 지배의 강화, 신자유주의 정책의 급격한 도입, 터키의 오래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게지 공원에서 만나 불꽃을 일으킨 것이다.

앞선 이집트 혁명이 보여줬듯이 '혁명'이 쉽게 진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국가 중 세속적 민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모범 국가라고 칭송받는 터키지만, 그 세속주의의 유지에는 케말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군부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쿠데타'의 위협은 여전히 높고 지금까지도 쿠데타 음모와 관련되 군부에 대한 조사와 체포,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개발당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 터키를 지배하던 케말주의자들 또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제이넵 감베티 이스탄불 보가지치 대학 정치학 부교수는 "케말-민족주의 광신도들이 지금은 [그들이 탄압했던] 쿠르드족ㆍ좌파ㆍ아나키스트ㆍLGBT 그룹과 같이 공원을 점거"하고 있다며 이 모습을 '기이한 동맹'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Roarmag.org 6월 2일ㆍ링크). 아직까지는 자신들을 "[터키를 건국한] 아타튀르크의 군대"라고 부르는 이들이 대중운동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진 못했다(레프트21 6월 4일ㆍ링크).

탁심 공원은 터키 좌파에게 유서 깊은 장소다. 1977년 노동절 이곳에서 노동조합과 좌파 활동가 수십여 명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이후 좌파는 노동절이면 먼저 떠난 동료들을 기리며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거듭 노력해 왔다. 지난달 노동절에도 이곳 탁심 광장에서는 좌파와 경찰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었다. 탁심의 활동가들이 과거 자신의 선배들이 겪었던 비극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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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기사는 영어 실력이 중학생에도 못미치는 제가 제 멋대로 번역한 것임으로 인용하거나 퍼가시려면 꼭 원문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오역에 대한 지적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터키에 봄이 오다
Socialist Worker 6월 3일ㆍ원문 링크

톰 게인은 이스탄불 한 공원의 파괴를 저지하려는 작은 시위가 정부와 억압기구에 대한 도전으로 어떻게 발전했는지 설명한다.

비무장한 평화로운 점령자들과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폭력으로 가득했던 날 이후 이스탄불 탁심 광장 가까이에 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온 내 오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한밤 중이었는 데도 내 주변은 모두가 깨어 있었지. 이웃 모두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고, 냄비와 후라이팬을 두드리며 소리쳤어. '타이이프 이스티파! 타이이프 이스티파!(타이이프는 사임하라! 타이이프는 사임하라!)'"

터키 총리이자 이슬람주의 영향을 받은 보수파 정의개발당(AKP)의 수장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다양한 정치적 경향이 함께한 인민의 봉기를 직면해 매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에르도안은 터키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맨 앞자리에 서왔다. 국가 산업의 거의 완벽한 사유화, 지중해 천연자원의 독점에 도전하면서 지역 권력으로의 부상, 그리고 터키의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을 '도시 재생' 또는 '주거 개량'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중심지로 변화시키기 위해 비잔틴과 오스만 전통 지역의 완벽한 파괴가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포함돼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지난주 분출돼 이제까지 계속 확산되고 있는 거대한 시위가 촉발된 계기다.


2012년 2월 정의개발당은 지난 몇년간 그 어떤 정치적 반대도 없었던 가장 최근의 도시 재생 계획 일부로 이스탄불의 가장 번화가 중심에 있는 작은 녹색 오아시스인 탁심 공원의 게지 공원 철거에 착수했다. 정부의 계획은 1940년대 철거된
[오스만 제국 시절] 탁심 병영을 본딴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이다.

공사가 계속되던 5월 27일 월요일 일련의 반-자생적인 시위 결과 작은 활동가 모임이 나무와 녹지를 뿌리뽑는 것을 중단시키기기 위해 게지 공원을 점거했다. 그날 밤 불도저가 공원의 벽을 철거하기 시작했지만 공사는 점령자들에 의해 늦춰졌다.

다음 며칠 동안 시위가 계속됐다. 목요일 아침 유명한 쿠르드 정치인 시리 슈레야 왼더가 불도저와 맞선 후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공사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철거를 승인한 법적인 문서를 받을 수 없었던 건설사는 이스탄불 경찰에게 달려갔다.

목요일 밤 1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공원을 점거했다. 그들의 시위는 2010년 가자 봉쇄를 풀기 위한 선단의 기함인 터키 선박 마비 마르마라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치명적 공격을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행진과 함께 진행됐다.

'이스키 무카델레시(노동자의 투쟁)' 편집자 선가르 사브란이 캐나다의 '사회주의자의 계획: 총알' 웹사이트
(링크)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경찰은 시위대에게 악랄한 공격을 하기 위해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사브란은 이렇게 말한다.

이스탄불은 최루가스로 뒤덮인 전장이 됐다. … 이 모든 것은 보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터키 경찰은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은 시위대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바로 한 달 전, 노동절에 경찰은 최루가스를 아낌없이 사용해 수천 명의 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해산시켰다. … 차이점은 시위대의 투지와 대담함에 있다.

금요일 거리에서의 대치가 계속되자 경찰은 게지 공원을 봉쇄했다. 그러나 경찰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충격적인 이미지가 이미 세계로 확산되면서 격분을 일으켰고 터키 자체 내에서 여전히 최대 규모의 [시위를] 동원하고 있다.

지난 며칠간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이스탄불의 거리를 이집트 혁명 초기의 카이로와 닮았다고 하는 것은 불공정한 것 같다. 딱바닥엔 최루탄 껍질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사람이나 팔이 부러진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경찰 또는 정부] 지휘부는 시위대를 해산시기 위해 장갑차와 물대포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위대는 차를 불태우고 세계에 '혁명'을 선언하는 현수막과 함께 바리케이트를 세웠다.

독립 노동조합 활동가인 유수프 케말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 경찰은 실탄을 사용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군가 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후 7시부터 오전 6시까지 싸웠습니다."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의 사회주의 활동가인 오누르 데브림 유크바스는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기후변화 저지 활동가와 관심 있는 모든 부류의 시민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다시 야만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사람의 머리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며 말입니다. 그 습격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시위대의] 주력인 '탁심 연대(Taksim Solidarity)'는 금요일 거대한 시위를 벌일 것을 호소했습니다.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날 저녁 탁심으로 몰려들어 수백발의 최루탄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죠. 그러자 투쟁은 거대한 규모로 다른 도시에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6월 1일 10만 명 이상이 탁심 광장의 공원에 모였습니다. 경찰은 고무총탄과 물대포를 사용했습니다. 9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연행됐고 적여더 몇 십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망자는 없습니다.

운동은 말 그대로 터키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수만 명이 앙카라, 이즈미르와 같은 대도시에서 행진했습니다. 처음으로 정치적인 행진에 참여한 수천 명의 청년들은 '유력한 용의자'가 아닙니다
[상습 시위꾼이란 뜻의 비난에 대한 해명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구 세대에 의해 '비정치적'이라고 불렸지만 지금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공원과 그 역사를 지키고자 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시위가 변화한 결정적 순간은 무엇에서 시작했을까. 보수 종교적 가치에 의해 고취된 일당독재국가로의 변화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신자유주의적 전환으로 인한 나라 전체의 의식하지 못한 모든 불만들, 정치적 문제와 잠재된 분노가 [저항의 폭발을] 자극해 왔다.

영국의 사회주의자이자 작가인 리차드 세이무어는 가디언지에 "이것은 환경에 관한 시위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정부에 대해 쌓여온 모든 불만을 모으는 피뢰침이 될 것"이라고 썼다.

이스탄불과 터키 전역의 시위대는 노동조합 운동에 자신감을 주고 있다. 이는 투쟁의, 또한 억압의 다채로운 과거를 가진 운동이다. 정의개발당 정권 아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된 지난 10년간 대체로 수동적이었던 태도가 여전히 남아있다.

터키에 있는 네 개의 주요 노동조합 중 하나인 '공공노동조합연맹(the Confederation of Publi Worker's Unions)'은 6월 5일 정파를 넘어선 파업을 호소했다.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 정권이 게지 공원 파괴 정책을 지키려 한다면 총파업의 가능성은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니다.

터키 사람들의 용기 있는 시위는 전 세계로부터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 지난주 뉴욕의 점령하라 활동가들은 터키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주코티 공워에서부터 터키 영사관까지 거리 시위를 벌였다. 보스톤에서 활발한 시위가 있었고 이번 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의 도시에서도
[시위가] 열릴 것이다.

게지 공원을 철거하겠다는 것은 이스탄불과 터키 전국을 대상으로 한 더 큰 계획의 일부다. 그것은 2008년 열성적으로 시작돼 2010년 이스탄불을 '문화의 수도'로 선언하게 된다.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에게 그 과정은 추가적인 개발과 '도시 재생' 계획의 허가권을 그들의 손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스탄불에서 강요된 주거 개량 계획은 술루쿨이라고 불리는 550년 역사를 지닌 지역의 철거로 시작했다. 그 지역에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가난한 집시들이 쫓겨났다. 목록의 다음에는 쿠르드족이 대규모로 살던 탈라바시-이 곳은 이주 노동자로 가득한 역사적인 장소다-가 있었다. 그 계획은 그곳에 살던 소수파로 전락한 유대인ㆍ그리스인ㆍ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사람들의 문화적 전통과 오스만 시대 건축물을 파괴했다.

이스탄불에는 제안된 50개의 주거 개량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게지 공원 철거 제안은 많은 활동가로부터 최후의 반격을 받게 된다. 다수의 터키인들이 정의개발당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계획에 관한 모든 것에 진저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게지 공원이 있는 탁심 광장은 1977년 노동절 때 노동조합 과격파와 급진파 수십여 명이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괴한들에게 학살당한 후 터키 좌파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1980년대 초의 잔인했던 군사독재 다음 몇년 동안 시위대는 노동절 때마다 잃어버린 동지들을 위한 상징적 행동으로 탁심 광장 점거를 시도해왔다.

2010년 노동절 경찰은 빡빡한 보안절차를 세우고 시위를 위해 광장을 열었다. 올해 노동절 탁심 광장은 다시 폐쇄됐고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다른 좌파는 국가 폭력에 맞섰다.

터키의 다른 미래는 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와 함께 탁심 광장에서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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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이스탄불: 한 시대의 끝이 시작되는가?
Roarmag.org 6월 2일ㆍ원문 링크

한 터키 교수가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 기이한 동맹의 모호한 이미지를 묘사하며 그녀의 나라에서 계속되고 있는 저항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쓴 제이넵 감베티는 이스탄불에 있는 보가지치 대학 정치학 부교수다.

내 외국인 친구들에게: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사흘 째 최루가스를 마시고 있다. 경찰은 수 톤의 최루가스와 물을 뿌렸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쐈다. 사람들은 다리와 허리, 머리를 가격당했다. 토요일 저녁 앙카라의 이즈미르와 몇몇 다른 도시에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치료받고 있다. 사람들은 상처입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집과 사무실, 식당을 열어주고 있다. 물론 경찰은 시위대를 추적해 빌딩 안에 최루가스를 살포하고 사람들을 폭행했다.

앙카라에서 트위터와 매우 용기 있는 두 개의 TV 채널은 경찰잉 고무탄을 사용한다고 보도했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주로 SNS를 통해)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토요일 오후 군중이 탁심 광장을 점거한 후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경찰이 물러섰지만 시위대가 이스탄불 지역 곳곳, 주로 베식타스[총리실이 있는 곳]로 확산되면서 팽팽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총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쇼핑몰과 상류층을 위한 주택으로 바꾸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총리는 귤렌파에 가깝다고 한다. 페툴라 귤렌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ㆍ평화운동가, 하지만 일부 보도에 의하면 페툴라 귤렌은 이슬람적 율법-샤리아-에 의한 체제를 정의개발당과 함께 꿈꾸고 있다고 한다]이 이끄는 현대적 허울을 쓴 이 종교적 분파는 언론의 일부를 통제하고 있고 미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 학교를 가지고 있다. 압둘라 굴 대통령은 진정할 것을 요구하며 경찰 폭력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시위대는 한 묶음의 선동가들일 뿐"이라고 두드러지게 선동적인 어조로 토요일에 선언한 후 그 의견에 대한 논쟁을 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들은 대통령이 말해왔던 그의 시민-민주주의적인 정부에 대항해 새로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토요일 저녁 게지 공원에 많은 터키 국기가 놀랄 만큼 높이 솟았다. 이것은 기이한 동맹이다. 어제의 케말-민족주의 광신도들이 지금은 쿠르드족, 좌파, 아나키시트, LGBTT 그룹처럼 같은 공원을 점거하고 있다.

게지 공원에서 승리하는 데는 축구 팬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기에 연고지를 둔 세 개의 축구단 팬들은 하루종일 경찰과 싸웠다. 그들은 경기장에서의 훌리건처럼 활동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그들이 경찰에 대해 두려움 없이 싸우는 법을 안다고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정부에 맞서 의미있는 항의로 연결될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다. 어쨌든 탁심 광장 밖에서의 싸움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 것은 나무를 구하기 위한 시위가 아니다. 정부는 선을 넘었다. 우리는 지난 몇 달간 다른 몇몇 것들을 참아왔지만 게지 공원은 최후의 결정타였다. 체포된 쿠르드족과 활동가들은 터무니 없는 비난을 받고 있다. 변화한 학교 교육과정에는 어린이에게 종교교육을 하는 게 포함됐다. 낙태가 금지됐다. 터키-이라크 국경지역을 가로지르는 쿠르드족 민간인을 폭격해왔다(무장 게릴라로 오해했다고 한다). 시리아 내전
[터키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부추기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시리아 접경 지역 레이한리에서 50명이 죽은 미심쩍은 폭탄테러. 음주 제한 시도. 이스탄불의 모든 것을 바꾸려는 거대한 계획. 제3 보스포러스교에 알레비파 사람들(터키에서 비수니파 무슬림 중 다수파)을 거의 완전히 전멸시켰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이름을 붙이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지 공원 계획.

그동안 쿠르드족은 대안적인 평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지난주 앙카라에서 500명의 터키 지식인과 언론인, 시민사회 지도자를 모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시작하고, 타인에 대한 자신의 죄(예를 들어 쿠르드족은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참여했었고 LGBTT는 마르크스주의 좌파에 의해 매도당해 왔다)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게 된 것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

요약하면 이것은 아마도 한 시대의 끝이 시작되는 것이리라. 대중의 일부는 이 정부를 끝낼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정부를 대신해] 그 장소에 올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오늘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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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유ㆍ평등ㆍ박애 폭격

프랑스는 1월 11일 말리 내전에 전격적으로 개입했다. 공중 폭격을 실시했고 현재 군인 2150명이 배치돼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맹국들과 함께 말리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전 개입이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말리 정부의 요청에 대한 선의의 답변이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철군했을 때 말리가 안전할 것과 합법적인 정부와 선거과정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 군사개입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미국의 지원도 항공기를 이용한 프랑스군 부대와 장비의 수송에 그치고 있다. 독일은 입발린 말과 달리 프랑스군의 수송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국제사회, 말리 내전 개입 속도낸다'는 기사가 잇따르지만 대개는 말리 주변국들이 파병하면 그에 대한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개입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듯도 싶지만 아직은 백중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이슬람 반군이 프랑스ㆍ말리 군에 밀려 주요 거점도시에서 퇴각해 키달 인근 산악지역에 집결해 게릴라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리비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말리 북부도 이 분쟁에 편입되는 분위기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1 근본주의의 확산? 말리 정부의 요청?

프랑스 군사 개입의 첫 이유는 그들 스스로 밝혔듯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산일 것이다. 말리 국민의 90%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딱히 근본주의적이진 않았다. 2012년까지 세 번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모두 세속주의적 세력이었다.

북부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 요구라는 불씨에 근본주의 이슬람이라는 기름을 부은 것은 서방세계다. 서구의 경제ㆍ군사적 지원은 주로 소수민족 탄압에 활용됐다. "특히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말리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면서 투아레그족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됐다."
[중앙일보] 궁지에 몰린 투아레그족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투아레그족 출신이 주도하는 '안사르 에디네', 비 말리 출신의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 마그레브 알카에도 분리된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MUJAO)'이 그것이다. 이들과 세속주의적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를 조직했다. 운동은 곧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에게 주도권을 뺐겼다. 여기에 리비아 등 북부아프리카가 혼란한 틈을 타 무장한 채 되돌아온 망명 투아레그족이 결합했다.

주요 언론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확산으로 말리 북부의 인권침해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개입'이라는 오래된 수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의 샤리아 율법을 따르는 가혹한 처벌 사례가 이어진다. 분명 인권침해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침해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만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7월 3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2년] 3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반대자를 대상으로 즉결 처형, 고문, 성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는 사례들을 공개하며 말리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향신문]

북부 근본주의 이슬람의 인권침해가 문제라면 남부의 쿠데타 정부에 대한 개입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말리 정부의 요청이라며 북부 반군만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말리 정부의 합법적 정통성 또한 의문이다.

2012년 3월 사노고 대위의 쿠데타는 말리 군부의 부패와 가혹행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연하게 일어났다. 신발과 무기도 지원받지 못한 채 북부에서 반군세력과 싸우던 수십 명의 부대가 전멸당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말리 정부는 지난 10년간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음에도 반군과의 싸움에서 군인들은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쿠데타 세력은 지금도 말리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2월에는 쿠데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북부 반군세력에게 합법적 정통성이 없다면 군사개입을 요청한 말리 임시정부 또한 합법적 정통성은 없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2 차이나프리카의 견제

프랑스 정부가 인권과 질서의 양날개를 단 천사가 아니라면 군사개입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군사개입은 무엇보다 '프랑사프리크(프랑스+아프리카)'라고 불릴정도로 오랜 관계를 맺어온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ㆍ세네갈ㆍ말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말리는 1958년 세네갈과 함께 연방으로 독립한다. 1960년 세네갈이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지금의 말리공화국을 세웠다. 독립한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2006년까지 프랑스는 말리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프랑스 아프리카투자자협의회는 49개 나라 1000여 곳에 지사를 두고 있다. 아프리카 8개 나라와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있고 특수부대를 세네갈 가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주둔시키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배한 과거 프랑스 정권들은 '프랑사프리크'라 부르는 각국 정권과의 은밀한 후원 또는 결탁 관계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해왔다. 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아프리카에 군사기지를 보유하며 지역 '경찰' 국가 역할을 자임한 나라는 프랑스뿐이다."[경향신문]

말리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 프랑스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000년대부터다. 특히 사르코지의 반이민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사르코지는 2007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역사에 제대로 들어선 적이 없다"는 발언을 해 아프리카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틈을 중국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해 중국과 아프리카 간 무역규모는 2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수입의 18%가 중국이다. 말리의 경우 무역의 25%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프랑사프리크'라는 말보다 '차이나프리카(차이나+아프리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됐을 정도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약화된 영향력을 말리 내전을 계기로 다시 확대하고자 한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을 주장했던 나라가 프랑스다. 이어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축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일보는 이를 들어 프랑스는 "말리 군사개입이 잘못된 선택으로 끝날 경우 신(新) 식민주의를 시도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까지 보도했다.
[국민일보]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3 방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탐욕

프랑스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지역에 방대한 천연자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부를 확보하는 것이 이 지역의 천연자원 수급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말리는 세네갈-기니-가나-부르키나파소-니제르-카메룬을 잇는 '금광벨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우라늄도 큰 이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말리의 우라늄은 모두 일본과 독점 계약돼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나라인 니제르는 프랑스의 주요 우라늄 수입국이다. 국영 원자력기업 아레바(Areva)는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조달해 왔다. 아프리카 지역에 강하게 남아있는 식민주의의 영향 때문에 말리의 혼란은 니제르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프리카의 국경은 민족적ㆍ문화적 경계와 상관 없이 식민지 모국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졌다. 말리 북부 반란의 주역인 투아레그족의 경우 말리는 물론 알제리ㆍ니제르 영토 내에까지 분포한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투아레그족의 반란이 주변국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프랑스의 원자력 의존률이 75%에 달하는 상황에서 말리 내전은 심각한 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리 정부는 쿠데타 직전까지도 자국 영토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밝히며 서방 국가의 주요 기업들에게 개발권을 분배하고 있었다.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WSWS)가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2013년과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쟁탈전'이란 제목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프랑스군의 말리 귀환은 알카에다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투가 아니라 우라늄, 금광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유정과 이웃나라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조치며 올랑드 대통령이 얼마전 '미래의 대륙'이라고 불렀던 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권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르완다ㆍ리비아에서 최근 프랑스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처럼 파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책을 결코 완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참세상]


프랑스 좌파의 오래된 한계

식민주의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좌파에게 리트머스와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말리가 다시 한 번 그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 좌파의 식민주의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던 장 뤽 멜랑숑이 속한 좌파전선(Left Front)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공화좌파당(GDR)의 프랑수와 어센시는 16일 "좌파전선, 공산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대표자의 입장은 분명하다"며 "광신자의 야만 행위로 말리 민중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인 실수일 것이다. 국제적 군사조치는 테러리스트 국가 설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좌파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공산당(PCF)은 올랑드의 군사 개입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12일 성명에서 "PCF는 그들 국가 남부를 향하는 지하드 그룹의 무장 공격에 대한 말리의 우려를 공감한다. 여기서 말리 대통령이 요청한 도움에 대한 대답은 유엔 깃발 아래, 미국과 아프리카연합 후원의 뼈대 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참세상]

다행스럽게도 반자본주의신당(NPA)과 좌파당(Gauche)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3일에는 반대 시위를 열었고 16일에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내전ㆍ전쟁이라는 상황, 근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위협에서 우리는 흔히 군사적 개입이라는 '쉬워 보이는 방법'에 못마땅하지만 지지를 보내곤 한다. 만약 군사적 개입이 말리와 북서부 아프리카 인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부득이하지만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그랬듯이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이들의 개입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성장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 지역의 오래된 식민주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 모국의 군사적 귀환은 오래전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서 살폈듯이 프랑스의 이번 군사 개입을 '인도주의'적이라고 볼 근거도 희박하다. 정치ㆍ경제적 욕심이 군사 개입이라는 불장난으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 국가의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중단시키는 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른 평화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 주요 참고 기사
[중앙일보] 모범 민주국가였던 말리, 전쟁 수렁 왜
[경향신문] '말리 군사개입' 올랑드의 리더십 시험대에
[경향신문] 암울한 말리… 쿠데타군ㆍ반군 모두 인권유린 심각
[뉴시스] 20년 민주국가 망친 말리 쿠데타 주역 사노고
[참세상] 말리 반군 공습,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되나"
[국민일보] 中ㆍ美에 밀린 佛, 말리 개입으로 '阿영향력' 되찾기
[참세상] 말리 사상자 증가… 전쟁 반대 목소리 확대
[프레시안-월러스틴 논평] 아프리카 말리, 제2의 아프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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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펭귄 2013.01.26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2. 민죠이 2013.02.08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머릿속에 정리가 싹 되네요 :-)

  3. 연풍청년 2013.02.20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님은 자본의 관점으로 보실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지난번에는 음악만 듣다가 나갔는데 오늘은 글 몇개를 보았습니다. 저도 말글장을 쓰고 있지만.. 때때로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티스토리라서 그런가? 훨씬 정리가 잘 된거 같고 저는 그냥 Daum 블로그라서 딱히 별로..

    • 때때로 2013.02.22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본의 관점'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파워유저가 아닌 상황에서는 블로그 서비스 중 티스토리가 가장 깔끔한 것 같더군요.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뒤 동료 곁에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고 27년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가 그 동료를 지키겠다며 다시 이 크레인에 매달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흔드는손을 저들 중 몇 명이나 보고 있을까요."
- '사람을 보라'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의 한 청년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습니다. 26살의 대학 졸업자인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과일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갔었죠. 그러던 중 경찰의 단속으로 팔던 과일을 모두 빼앗기자 그는 절망과 분노의 불길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새해의 네번째 날,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의 분신은 전 세계적 저항의 봉화로, 세계를 흔드는 2011년 투쟁의 도화선이 됩니다.('한 '청년 백수'의 분신, 23년 독재를 무너뜨리다' 프레시안ㆍ링크)

부아지지가 세상을 떠난 이틀 후, 부산 영도에서는 한 여성 노동자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조용히 오릅니다. "스물한살에 입사"해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두살"이 된 이 여성 노동자는 김진숙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김주익이 외롭게 죽어갔던 바로 그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크레인에 오르며' 김진숙ㆍ링크)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10년 전 그때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대량학살이 있었고 2년을 싸워 노사가 합의를 했건만 그 합의를 사측이 번복하던 날. 키 큰 사내 하나가 숨죽이며 올랐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갇힌 짐승처럼 이 크레인 위를 서성이며 오늘은 동지들이 얼마나 모일까 노심초사 내려다보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숱한 날들을 매달려 있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도크에 배가 빠지던 날, 육중한 배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뒤돌아서던 조합원들을 보며 끝내 유서를 썼던, 여기가 85호 크레인입니다."
- '사람을 보라'

누가 부르지 않아도 오는 사람들, 불꽃같은 사람들
- '사람을 보라'

부아지지의 죽음이 아랍에 봄을 불러왔듯, 김진숙과 김주익의 크레인 85호가 등대가 되어 사람을 불러모았습니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오는 사람들, 불꽅같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영도로 향했습니다. 6월 11일에는 500명, 7월 9일에는 1만명, 7월 30일에는 1만5000명이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100일 가까이 외롭게, 김주익처럼 죽음의 목마 위에 탄듯 했던 김진숙은 친구를 만났고 삶을 만났습니다. 사람을 만났습니다.

김진숙의 투쟁의 기록,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희망을 향한 애탄 몸짓의 기록, 희망을 배달한 사람들의 기록이 '아카이브'에서 나온 '사람을 보라'입니다. 우리가 잊었던 단어 '단결'과 '연대'는 삶의 동아줄이었습니다. 150여년 전 알렉시스 토크빌은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신분질서, 계급, 직종조합, 가족 따위의 낡은 유대가 더 이상 개인들 사이의 결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 이익에만 전적으로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응당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모든 공적 미덕이 질식당한 협소한 개인주의 속으로 칩거해버리는 것이다. 전제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기는커녕, 모든 공통된 열정과 욕구 및 모든 상호이해의 필요와 공동행동의 기회를 시민들에게서 앗아감으로써 오히려 그것에 저항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전제주의는 공적 미덕들을 사생활 속에 가두어버린다. 전제주의는 이미 산산이 흩어지고 차가와진 공적 미덕들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냉각시켜 버리는 것이다."
- 알렉시스 토크빌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서론 7쪽

2011년은 토크빌이 두려워했던 전제주의의 위협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음이 증명된 한해였습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부산으로 달려갔던 희망버스 탑승자들이 바로 그 산 증거였죠. 새해 벽두 정리해고의 차디찬 통보에 맞서 50여 일을 싸운 홍익대 청소ㆍ경비노동자의 옆에도 바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랍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남미에서도 단결과 연대의 발길은 이어졌습니다. 아랍에서 부아지지가 목숨을 잃고 한국에서 김진숙이 외로이 크레인이 올랐던 1월 미국 위스콘신의 주지사는 교사와 공무원노조 단체교섭권 박탈과 사회보장 혜택 축소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1월 15일 시작된 반대 시위는 위스콘신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노동자ㆍ시민의 연대가 미국에서도 가능함을 입증했습니다. 2월 19일 위스콘신주 주도 매디슨시에는 7만여 명의 노동자ㆍ시민이 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습니다.
('위스콘신 주지사는 미국의 무바라크?' 프레시안ㆍ링크) 사람들의 투쟁은 9월 17일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로 이어졌습니다.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시위대(The Protester)'를 꼽았습니다. 시위대는 기업의 이윤, 독재자의 폭정에 맞서 사람들의 참 삶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바로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사람을 보라'를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올 한해 세계에 울려퍼진 사람들의 목소리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적 미덕을 우리는 다시 찾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의 기억은 끊임없이 회고되며 삶의 원칙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라'는 309일 간 이어진 김진숙의 외침과 연대의 행동 모두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김진숙은 다시 땅을 밟았지만 사람의 외침은 쌍용자동차에서, 유성기업에서 계속 이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이 나를 살렸습니다. 다음엔 쌍용차로 갑시다' 프레시안ㆍ링크) 이 책은 결코 끝을 볼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목에 이 책이 하나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연극치료를 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동작을 해보라 해서 팔을 활짝 벌려 흔들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말을 해보라는데 '고맙습니다' 하며 목이 메였습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 묻는데 '감옥에 있습니다' 그 말을 미처 못 끝내고 울었습니다."
- 김진숙 트위터 12월 29일

사람을 보라|한금선ㆍ노순택ㆍ김홍지ㆍ오은진ㆍ이미지ㆍ이정선ㆍ임태훈 기획 및 편집|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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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가 진압군이 발사한 최루탄을 들어 던지고 있다. [the Atlantic/Reuters/Amr Abdallah Dalsh]

오늘(28일)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독재가 종식된 후 첫 선거가 열립니다. 하원 498명, 상원 390명의 의원을 뽑는 내년 3월까지 진행될 기나긴 선거의 시작입니다. 민주주의의 쟁취를 기뻐하고 그 권리를 향유해야 할 이집트 인민에게 오늘의 선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군부독재의 종료와 민주적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18일 시작된 저항이 열흘 넘게 이어지며 40여 명의 사망자 등 수 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기 때문이죠.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장악한 정권은 민주적 권리 확대에 있어서 불철저할 뿐 아니라 되레 무바라크 독재 종식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청년과 노동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민주세력을 탄압했죠. 엠네스티에 의하면 1만2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군사법정에서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 적어도 13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필립 루더 엠네스티 중동ㆍ북아프리카 실행감독은 무바라크의 억압적인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최고군사위원회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평화적 저항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수천명의 시민을 군사재판에 회부함으로써 평화적 저항을 분쇄하고 무바라크 비상법의 영향(소관)을 확대해왔다. 최고군사위원회는 1월 25일 시위대가 끝장내기 위해 싸워왔던 억압적인 지배를 계속하고 있다." - 필립 루더 엠네스티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 실행감독
● [엠네스티] 이집트: 군부독재가 1월 25일 저항의 희망을 깨뜨리다(링크)

"사회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는 깡패와 군사 법원을 동원해 시위 참가자와 파업 노동자 들을 공격했다. 노동자들은 법원의 사유화 철회 결정을 환영하며 사유화된 기업들의 재국유화를 바랐지만, 정부는 이 염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또, 정부는 옛 무바라크 정당 인사들의 선거 참가 금지를 명한 법원 결정을 무시했다. 현 이집트 정부는 자신이 무바라크 정권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 11월 20일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성명서
● [레프트21] "군사독재 물러나라, 무바라크 통치 종식하라!"(링크)

이집트 인민의 불만은 지난 몇 개월간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민주주의적 권리는 확대되지 못했으며 경제적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은 부정당했습니다. 10월 9일에는 군부가 콥트교도를 공격해 28명이 학살당하기도 했죠.

내년 3월까지 여러 단계에 걸친 복잡한 선거계획도 군부정권의 민주화 이행 의지에 대한 의심을 부추겼습니다. 오늘(28일) 열리는 하원선거도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하는 게 아닙니다. 28일, 29일 이틀에 걸친 첫 선거는 9개 주 240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6번의 선거를 치뤄야 1단계가 끝나죠. 군부는 대통령 선거 등 정권의 민간이양에 관한 정확한 일정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죠.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1월 초 발표한 군부의 '신(新)헌법 기본원칙'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기본원칙은 민간정부가 군부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죠.

● [뉴시스] 이집트, 혼란 속에 하원 선거 실시(링크)
이집트 인민은 왜 다시 거리로 나섰나?(링크)


11월 20일 부상당한 시위대 한 명이 타흐리르 광장 인근 병원에서 진압군에 의해 사용된 탄피를 들어보이고 있다. [boston.com/Reuters/Amr Abdallah Dalsh]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사용된 최루탄. 'Made in U.S.A.'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the Atlantic/AP]

이집트 인민은 군부의 잔혹한 시위진압으로 더 큰 분노에 휩쌓이고 있습니다. 특히 진압군이 사용하는 고무총탄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죠. 시위대에 의하면 훈련된 저격수가 시위 참가자의 '눈'을 목표로 저격한다고 합니다.

아흐메드 하라라는 1월 29일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그는 그날의 싸움을 기억하기 위해 실명한 눈을 가린 안대에 그 날짜를 적어놨었죠. 하라라는 11월 20일 다시 시위에서 다른 쪽 눈도 잃었습니다. 그는 "이날 오후 3시쯤 타흐리르 광장에 나갔는데 7~10m 거리에서 진압군이 쏜 고무탄환에 눈을 맞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사메 나기브에 의하면 '11월 20일'이 적힌 새로운 안대를 한 하라라는 여전히 시위대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잔혹한 진압군 저격수는 시위대에게 '아이 헌터(eye hunter)'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군부는 고무총탄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최고군사위원회가 임명한 만수르 알에사위 내무장관은 "진압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은 물론 고무탄ㆍ새총 등을 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려면 손발이라도 맞아야죠. 히샴 시하 보건부 대변인은 "지난주 시위사태에서 실탄ㆍ고무탄ㆍ새총에 의해 최소 41명이 사망하고 325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죠.

● [레프트21] 정권에 맞선 이집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다(링크)
● [조선일보] 이집트 시위대 "아이 헌터 처형하라"(링크)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은 11월 25일 뉴욕 이집트 영사관을 방문해 군부정권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항의했다. 이들은 미국산 최루탄이 이집트 군부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며 12월 1일에는 펜실배니아 제임스타운의 군수공장으로 항의 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occupywallst.org]

이집트 군부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는 국제적인 연대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미국이 만든 최루가스와 무기가 이집트 인민에게 사용되고 있다며 이 무기의 생산과 수출을 중단시켜달라며 연대를 호소했었습니다. 군부독재를 대변하는 이집트 대사관과 이집트 군사정권과 거래를 하는 자국 정부에게 항의해달라고도 요청했죠.

이에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Occupy Wall Street) 참가자 수백명은 11월 25일 뉴욕의 이집트 영사관으로 항의행진을 진행했습니다. 12월 1일에는 이집트 군부독재 정권에 최루가스를 공급하는 펜실배니아 제임스타운의 공장으로 항의 행진을 할 계획입니다.

이집트 인민에 대한 연대의 행동은 한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시민ㆍ사회단체 회원 50여 명은 11월 25일 이집트 대사관 앞에 모여 군부정권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항의했습니다.

● [occupywallst.org] 이집트 인민의 연대 요청에 답하다(링크)


오늘 시작된 이집트 총선의 최대 수혜자는 군부가 될 듯 합니다.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온 무슬림형제단은 자칫 자신들이 '다수파'가 될 이번 총선이 무산될까 전전긍긍하며 18일 시작된 저항에 불참하고 있죠. 그들의 이러한 착각은 정권을 민간정부가 가져온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군부의 손을 들어줄 뿐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급진적 저항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온 이들이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행동에 얼마나 큰 해악을 미치는지 입증해주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종교적 반제국주의가 아닌 세속적 대안정치세력의 성장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집트는 앞으로 더 큰 변화의 혼란에 휩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때론 이란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퇴행적 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 대안정치의 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번 이집트 혁명이 단순히 법적인 '민주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은 튀니지에서 노점단속을 당한 한 청년의 분신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 또한 최근 고통스러운 경제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무바라크 정권의 공기업 사유화 정책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수년 전부터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행동이 성장하면서 이번 혁명의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가 더 나은 삶을 위한 다수의 참여로 만들어질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랍봉쇄에 협조한 댓가로 이집트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원조의 댓가는 결코 국민경제 전체를 살찌운 것이 아니었다. 예시적으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노선의 낫세르하인 1960년~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2배 증가했으나 이후 사다트, 무바라크를 잇는 70년~2000년 1인당 국민소득은 거의 제로상태라고 한다. 이어 1991년이후 지금껏 314여개 국영기업 중 150개를 사유화(다수를 서방에 팔아먹은) 할 정도로 일방적인 신자유주의를 펴면서 경제가 파탄지경이다. 특히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후 세계경제 불황속에서 미국의 양적완화정책, 저금리기조는 전세계적으로 제삼세계 국가들에 물가압력(인플레이션)으로 전가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수요의 폭증에다 국제투기세력에 의한 곡물 및 석유 투기까지 겹치면서, 이집트에서도 빈곤과 물가상승, 실업난등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현재 이집트 시위는 이런 정치경제적 맥락하에서 발발했다.
현재의 시위는 ①애초에 두 명의 빈민노점상의 분신항의에서 촉발했듯이 사회경제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 ②그러면서 국영기업을 주축으로 한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이 나라에서는 정치엘리트=경제엘리트(소위 state business elite)인지라, 무바라크등 소수 정치엘리트에 대한 공격과 경제적인 요구의 양자가 구분되기 어렵다는 점이 특징이다(예를 들어 이 국가는 군부가 방산업체 대부분을 경영하는 식이다). 토니 블레어, 오바마등이 그래서 이집트사태 해결에 '경제개혁'이 중요한 과제라고 이미 말했었다." - 권영숙, 1월 31일
이집트 시위의 성격과 전망(링크)

이집트 인민의 봉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뉴욕의 점령하라 운동이 월스트리트에 맞서 싸우는 것, 유럽의 분노하라 시위대가 정부와 탐욕적 자본에 맞서 싸우는 것, 이집트의 인민이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 모두 99% 인민의 삶을 파괴하고 소수 1%의 이익만 늘려주는 이 체제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이 귀환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자신감 없는 급진적 정치세력의 외소한 모습이 너무나 아쉬운 때입니다.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11월 22일 타흐리르 광장 인근의 시위대. [the Atlantic/AFP/Getty Images/Mahmud Hams]

※ 아래 링크에서 더 많은 이집트 저항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간혹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인한 잔인한 사진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the Atlantic] 이집트의 끝나지 않은 혁명(링크)
● [boston.com] 이집트, 새로운 저항이 폭발하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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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의 '신(新)헌법 기본원칙'에 대한 반발로 18일 시작된 시위가 날로 격화되고 있다. 군경은 고무총탄과 최루가스를 사용하고 이로 인해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22일 내각 총 사퇴로 이 위기를 넘겨보고자 하지만 몸통인 '군부'가 분노의 초점이 되는 상황에서 시위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 하다. [http://www.stern.de]

2월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독재를 종식시킨 이집트 인민이 다시 거리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항은 18일부터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리는 최고사령관의 종말을 원한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고 요구하며 단호하게 저항하고 있죠. 군부정권의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집트 인민의 저항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ㆍ수에즈까지 이집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고무총탄ㆍ최루가스 등을 이용해 강경진압을 하고 있고 이로 인해 30여 명 이상의 사망자를 포함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독재를 종식시킨 이후 최고군사위원회의 통치 하에 민주화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11월 28일 진행 예정인 총선을 시작으로 내년 1월까지 3단계에 걸친 선거로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드는 게 그 첫 단계죠. 하지만 군부는 의회가 구성된 이후에도 내년 말에서 2013년 초 사이에 예정된 대선까지 행정부를 장악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집트 인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붙인 것은 11월 초 군부가 발표한 '신(新)헌법 기본원칙'입니다. 군부가 제시한 이 기본원칙에는 군부가 민간 정부의 수립 후에도 예산 등에서 정부 및 국회의 관리ㆍ감독을 피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레드 파미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 교수는 "이집트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은 집권 군부"라며 "군부는 선거법을 매우 어렵게 꼬아놓고 감시ㆍ견제를 피할 수 있는 새 헌법원칙을 발표하는 등 장기집권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이집트 현재당'을 창당한 이슬람 로트피는 "이집트 군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막고 있다"며 민주화 혁명 이후 진전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지적했죠.

이집트 인민의 분노를 자극한 것은 군부뿐만이 아닙니다. 이집트 법원은 "이번 총선에서 무바라크 정권의 인사들도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해 독재정권의 부역 세력을 정치권에서 뿌리뽑고자 하는 이집트 인민의 열망을 배신했죠.

현재 시위대는 군부에게 정권을 조속히 민간정부로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과도정권은 내각 총사퇴라는 방법으로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합니다. "에삼 샤라프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최고군사위원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는 모하메드 헤가지 이집트 내각 대변인의 성명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이집트 정치권력의 핵심은 군부, 최고군사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내각 총 사퇴라는 꼬리자르기 시도에도 초점은 최고군사위원회 사령관인 후세인 탄타위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점령하라' 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전해줬던 이집트 인민은 민주화를 위한 제2의 봉기에 나서고 있는 듯 합니다. '4월 6일 운동'과 '혁명청년연합' 등은 오늘 오후 4시(한국시간 11월 22일 오후 11시) 타흐리르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백만인 행진'이 예고됐습니다.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의 영광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군부는 물러나고 시민들에 의한 의회로 대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와 군사위원회가 물러날 때까지 이곳(타흐리르 광장)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간에 의한 국가를 원한다."
"지난 금요일(18일) 모든 정치적 계층의 사람들은 군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민간의 민주적인 국가를 원하며 이러한 합의는 군부를 굴복시킬 것이다."

●프레시안|"이집트 총선 지옥으로 가고 있다" 최악 유혈사태(링크)
●프레시안|이집트 정국 격랑 … 내각 총사퇴, 시위대 '조기 대선' 요구(링크)
●참세상|격화되는 이집트 反군부 시위(링크)
●참세상|다시 일어난 민중봉기 … 이집트 과도내각 총사퇴(링크)
●경향신문|이집트 군부 유혈진압에 민주선거 좌초 위기(링크)
●중앙일보|타흐리르 광장 또 유혈시위 … 이집트 '제2 혁명' 불붙나(링크)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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