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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은 세계 곳곳에서 근본주의, 극단주의 무장 세력의 성장을 불러왔다. 그것이 꼭 반사작용으로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때론, 혹은 더 자주 미국 정부가 직접 개입해 무장 세력을 키워내곤 한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전사를 키워냈던 게 대표적 사례다. 그들이 키워낸 괴물은 9ㆍ11 테러로 응답했다. 아래 글은 이라크와 시리아를 휩쓸고 있는 이슬람국가(ISIS)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최근 비밀 해제된 미 국방정보국(DIA)의 2012년 보고서는 이슬람국가의 성장을 정확히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정부는 그 위협을 무시했다. 당시 여러 분석은 시리아 저항세력 지원해 전장을 부추기는 미국의 행동이 이슬람국가를 도와줄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지적했다. 이 또한 무시당한 건 마찬가지다. 미국 대통령의 피부색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래 글은 상당한 오역이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ISIS'는 'Islamic State'와 함께 일괄적으로 '이슬람국가'로 옮겼습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이슬람주의가 지도원리로 채택된 국가를 뜻할 땐 '이슬람 국가'로 옮겼습니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를 어떻게 도왔나

최근 비밀 해제된 문서는 이슬람국가의 부상에 미국이 공모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 데이비드 미즈너링크


지난 6월 시리아 라카 거리에서 이슬람국가 전사가 자신들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Reuters]

2014년 10월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은 이슬람국가를 후원하는 미국의 동맹국들을 비난했다. 그 전달엔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이 미국의 '아랍 동맹국들'이 그 단체에 자금을 대고 있다고 상원 군사위에서 말했다.

미국 고위 관계자들은 자신의 동맹국들이 이슬람국가를 후원하는 데 대해 엄격한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동맹의 행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해왔다. 바이든은 이슬람국가를 무장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재빠르게 사과했다.(뎀프시에 대한 대응으로 린지 그라함 상원의원은 실제로 그들을 옹호했다: "그들은 아사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방법들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완곡한 비판은 이슬람 국가 폭격 개시 결정을 설득하려는 미국 관리들의 노력 와중에 이루어졌다. 지금에 와선 이미 그 단체는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서부에서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지난 몇 달 혹은 몇 년간 오바마 행정부가 자신의 종속국들이 이슬람국가가 지역 패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걸 막으려 노력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미국 스스로도 시리아에 무기를 계속 보냈었다. 그 중 일부가 이슬람국가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13년 이슬람국가 지도자 아부 아틸은 미국이 지원하고 있는 FSA(Free Syrian Armyㆍ자유시리아군)을 언급하며 "우리는 FSA 내의 우리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국가가 대공미사일과 대전차무기를 FSA로부터 구입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군 기밀문서는 미국의 공모행위도 증언하고 있다. '비밀'로 보호되던 미 국방정보국(DIA) 2012년 8월 보고서는 보수단체인 사법감시단(Judicial Watch)이 얻은 한 묶음의 문서 사이에 있었다.

주류 언론과 공화당 정치인들은 그 문서들 중 2012년 벵가지에서 미 영사관이 공격받은 것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슬람국가의 부상뿐 아니라 시리아에서 반대파 형성과 이의 외국인 후원자들과의 연관성에 관한 공식적인 설명을 부인하는 이 문서는 주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2012년 8월 5일 DIA 보고서는 시리아 안팎의 적대자들에 관해 아사드가 말해온 모든 것을 확인해줬다"고 '테러 분석가' 막스 에이브람스는 말했다.

이 보고서는 이라크에서 폭력이 분출하던, [그럼에도] 미 언론에서 주요 화제로 삼길 그만두고 시리아에서의 전쟁 보도를 - 워싱턴에서의 논쟁 영향으로 - 아사드 정부에, 그에 맞선 세력들이 아닌 아사드에 초점을 맞추던 시기와 관련돼 있다. 이슬람국가가 미국 정부가 애용하는 괴물이 된 지금에 와선 납득하기 힘들지만 이 시기 시리아에 관한 오바마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발언에선 그 단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2014년 1월 이슬람국가가 팔루자를 점령한 이후에도 그 단체에 관해 알려진 정부의 논의는 부족했다. [이슬람국가의] 전장에서 승리가 계속되고 서구인들에 대한 참수가 대대적으로 알려진 2014년 후반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슬람국가는 제1의 공공의 적이 됐다.

미국 관리들은 이슬람국가의 영향력이 미 정보 당국에 갑작스럽게 눈에 띄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 정부에서 폭 넓게 회람된 2012년 보고서에서는 시리아 동부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Salafist) 국가'의 형성을 예견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한 이라크에서의 이슬람국가는 "그들의 오래된 근거지인 모술과 라마디로 귀환"해 이라크 서부와 시리아 동부에서 '이슬람 국가'를 선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더해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형성은 바로 반대파를 지지하는 외국 정부 목표라고 설명한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시리아 동부(하사카와 데이르조르)에서 선언되든 선언되지 않든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의 설립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정확히 (이라크와 이란의) 시아파 확장에서 전략적 핵심으로 간주되는 시리아 정부의 고립을 위해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는 세력이 원하는 것이다. [DIA 보고서 중]

약간은 다른 문맥에서 이 문서는 이미 "서방 국가들과 걸프만 나라들, 터키"를 "지원 세력"으로 취급했다. 이 문서는 미국을 '지원 세력'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 정말 왜 미국의 정보요원들은 그들의 정부에 정책이 무엇임을 물어야만 했을까? - 미국의 종속 국가들이 '이슬람 국가' 형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2012년 초에는 미국이 알고 있었음을 폭로하고 있다. 미국은 2년도 지나기 전에 저항세력에 우는 소리를 해야만 했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미국은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를 두 나라의 많은 지역을 망라한 - 그리고 휩쓴 - 지역 패권으로 전환시킨 시리아 정부에 대항한 전쟁에 참여했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예측 가능했고 확실하게도 미국 정부 그 자신에 의해서 예견됐다.

미국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이 이슬람국가의 영향력에 대해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전 총리와 아사드를 - 혹은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를 - 탓하는 동안 이슬람국가의 부상에서 핵심적 사건은 시리아에서 내란의 격화와 일치한다는 점을 DIA는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DIA 보고서를 분석한 첫 언론인인 레반트리포트의 브래드 호프는 이 문서가 "초기 이슬람국가는 오직 시리아 반란의 격화를 통해 현실적 존재가 됐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라크에서 미군 철수가 이를 재촉했다는 언급은 없다"고 말했다.

말리키가 시리아에서의 전쟁에 이라크가 휩싸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미국과 그 동맹은 반란을 계속 지원했다. 상대적으로 가볍고 산발적인 미국의 이슬람국가 폭격은 많은 이라크인들에게 미국이 그 단체의 격퇴를 원치 않는다는 믿음을 강화했을 뿐이다.

공식적 이야기에 따르면 미국은 시리아에서 저항세력 '중도파'를 지원함으로써 이슬람국가를 약화시키길 바라고 있다(시리아에서 반란군의 무장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저항세력을 무장시키지 않는다고 거듭 비판받고 있다).

미군이 스스로의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일련의 결정을 내린 것은 지원할 만한 중도파 단체를 발견할 수 없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로버트 포드 [시리아 주재] 전 미 대사는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방법을 찾아왔다"고 말하며 사실상 미국이 후원하는 단체가 알케아다와 제휴한 이라크 이슬람국가의 형제조직 알누스라전선과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 "CIA가 후원하는 저항 부대를 포함해" - 많은 '중도파' 저항세력은 알누스라전선ㆍ이슬람국가와 동맹을 맺고 있다. 올해 초 미국이 후원하는 주요 단체인 하라캇알하즘도 알누스라전선에 타격을 줄수 없자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2012년 DIA 문서는 초기부터 복고주의자들이 저항세력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본주의자(Salafist), 무슬림형제단, 이라크 알카에다가 시리아에서 반란을 몰아붙이는 주요 세력"이라고 문서에 적혀 있다. 이 문서는 또한 "이라크 알카에다는 시리아 저항세력을 시작부터 후원했다"고도 밝힌다.

시리아 전쟁의 초기 단계를 지난 후 시리아 정부에 맞선 전쟁을 지원하는 것은 이슬람국가를 돕는 것이라고 DIA 보고서가 강조한 것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이슬람국가의 부상에 미국이 부상한 것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여러 번 - 가장 악명 높은 것은 1970년대와 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다 - 미국은 자신이 당면한 진정한 적들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전사(그리고 그들의 선도자)들을 무장시키고 동맹을 맺으며 힘을 실어줬다.

꼭 앞선 사건의 역사를 찾아볼 필요도 없다. 바로 지금, 미국은 급히 끌어모은 설립자들을 이용해 세력을 건설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 알누스라전선과 함께 행동하는 - 자신의 대리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고, - 알누스라전선과 그밖에 반동적 단체들이 포함된 - 저항세력 동맹을 무장시켜 조정하려는 걸프 국가들과 터키의 새로운 노력을 승인했다.

미국이 이슬람국가와 알카에다의 격퇴를 진정 원한다면 그들을 무장시키는 행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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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유ㆍ평등ㆍ박애 폭격

프랑스는 1월 11일 말리 내전에 전격적으로 개입했다. 공중 폭격을 실시했고 현재 군인 2150명이 배치돼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맹국들과 함께 말리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전 개입이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말리 정부의 요청에 대한 선의의 답변이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철군했을 때 말리가 안전할 것과 합법적인 정부와 선거과정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 군사개입의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미국의 지원도 항공기를 이용한 프랑스군 부대와 장비의 수송에 그치고 있다. 독일은 입발린 말과 달리 프랑스군의 수송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국제사회, 말리 내전 개입 속도낸다'는 기사가 잇따르지만 대개는 말리 주변국들이 파병하면 그에 대한 재정을 지원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프랑스가 개입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듯도 싶지만 아직은 백중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이슬람 반군이 프랑스ㆍ말리 군에 밀려 주요 거점도시에서 퇴각해 키달 인근 산악지역에 집결해 게릴라전에 대비하는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리비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말리 북부도 이 분쟁에 편입되는 분위기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1 근본주의의 확산? 말리 정부의 요청?

프랑스 군사 개입의 첫 이유는 그들 스스로 밝혔듯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확산일 것이다. 말리 국민의 90%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딱히 근본주의적이진 않았다. 2012년까지 세 번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모두 세속주의적 세력이었다.

북부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 요구라는 불씨에 근본주의 이슬람이라는 기름을 부은 것은 서방세계다. 서구의 경제ㆍ군사적 지원은 주로 소수민족 탄압에 활용됐다. "특히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말리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면서 투아레그족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됐다."
[중앙일보] 궁지에 몰린 투아레그족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투아레그족 출신이 주도하는 '안사르 에디네', 비 말리 출신의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 마그레브 알카에도 분리된 '서아프리카 지하드 통일운동(MUJAO)'이 그것이다. 이들과 세속주의적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를 조직했다. 운동은 곧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에게 주도권을 뺐겼다. 여기에 리비아 등 북부아프리카가 혼란한 틈을 타 무장한 채 되돌아온 망명 투아레그족이 결합했다.

주요 언론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확산으로 말리 북부의 인권침해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개입'이라는 오래된 수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의 샤리아 율법을 따르는 가혹한 처벌 사례가 이어진다. 분명 인권침해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침해는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만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7월 3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2년] 3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충성하는 군인들이 반대자를 대상으로 즉결 처형, 고문, 성적 학대를 자행하고 있는 사례들을 공개하며 말리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향신문]

북부 근본주의 이슬람의 인권침해가 문제라면 남부의 쿠데타 정부에 대한 개입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말리 정부의 요청이라며 북부 반군만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말리 정부의 합법적 정통성 또한 의문이다.

2012년 3월 사노고 대위의 쿠데타는 말리 군부의 부패와 가혹행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우연하게 일어났다. 신발과 무기도 지원받지 못한 채 북부에서 반군세력과 싸우던 수십 명의 부대가 전멸당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말리 정부는 지난 10년간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음에도 반군과의 싸움에서 군인들은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쿠데타 세력은 지금도 말리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2월에는 쿠데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북부 반군세력에게 합법적 정통성이 없다면 군사개입을 요청한 말리 임시정부 또한 합법적 정통성은 없다.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2 차이나프리카의 견제

프랑스 정부가 인권과 질서의 양날개를 단 천사가 아니라면 군사개입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군사개입은 무엇보다 '프랑사프리크(프랑스+아프리카)'라고 불릴정도로 오랜 관계를 맺어온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ㆍ세네갈ㆍ말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말리는 1958년 세네갈과 함께 연방으로 독립한다. 1960년 세네갈이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지금의 말리공화국을 세웠다. 독립한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2006년까지 프랑스는 말리의 주요 수입국이었다. 프랑스 아프리카투자자협의회는 49개 나라 1000여 곳에 지사를 두고 있다. 아프리카 8개 나라와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있고 특수부대를 세네갈 가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주둔시키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배한 과거 프랑스 정권들은 '프랑사프리크'라 부르는 각국 정권과의 은밀한 후원 또는 결탁 관계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해왔다. 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아프리카에 군사기지를 보유하며 지역 '경찰' 국가 역할을 자임한 나라는 프랑스뿐이다."[경향신문]

말리 등 아프리카 국가들과 프랑스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2000년대부터다. 특히 사르코지의 반이민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사르코지는 2007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역사에 제대로 들어선 적이 없다"는 발언을 해 아프리카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틈을 중국이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해 중국과 아프리카 간 무역규모는 2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수입의 18%가 중국이다. 말리의 경우 무역의 25%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프랑사프리크'라는 말보다 '차이나프리카(차이나+아프리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됐을 정도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약화된 영향력을 말리 내전을 계기로 다시 확대하고자 한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을 주장했던 나라가 프랑스다. 이어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축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일보는 이를 들어 프랑스는 "말리 군사개입이 잘못된 선택으로 끝날 경우 신(新) 식민주의를 시도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까지 보도했다.
[국민일보]


프랑스는 왜 개입했을까 3 방대한 천연자원에 대한 탐욕

프랑스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지역에 방대한 천연자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정부를 확보하는 것이 이 지역의 천연자원 수급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말리는 세네갈-기니-가나-부르키나파소-니제르-카메룬을 잇는 '금광벨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우라늄도 큰 이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말리의 우라늄은 모두 일본과 독점 계약돼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나라인 니제르는 프랑스의 주요 우라늄 수입국이다. 국영 원자력기업 아레바(Areva)는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조달해 왔다. 아프리카 지역에 강하게 남아있는 식민주의의 영향 때문에 말리의 혼란은 니제르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프리카의 국경은 민족적ㆍ문화적 경계와 상관 없이 식민지 모국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졌다. 말리 북부 반란의 주역인 투아레그족의 경우 말리는 물론 알제리ㆍ니제르 영토 내에까지 분포한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투아레그족의 반란이 주변국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프랑스의 원자력 의존률이 75%에 달하는 상황에서 말리 내전은 심각한 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리 정부는 쿠데타 직전까지도 자국 영토에 매장된 천연자원을 밝히며 서방 국가의 주요 기업들에게 개발권을 분배하고 있었다. 세계사회주의웹사이트(WSWS)가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2013년과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쟁탈전'이란 제목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프랑스군의 말리 귀환은 알카에다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투가 아니라 우라늄, 금광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유정과 이웃나라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조치며 올랑드 대통령이 얼마전 '미래의 대륙'이라고 불렀던 이 대륙에 대한 프랑스의 권한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 르완다ㆍ리비아에서 최근 프랑스의 잔인성이 드러난 것처럼 파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책을 결코 완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참세상]


프랑스 좌파의 오래된 한계

식민주의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좌파에게 리트머스와 같은 것이었다. 알제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말리가 다시 한 번 그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스 좌파의 식민주의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던 장 뤽 멜랑숑이 속한 좌파전선(Left Front)은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공화좌파당(GDR)의 프랑수와 어센시는 16일 "좌파전선, 공산주의자와 공화주의자 대표자의 입장은 분명하다"며 "광신자의 야만 행위로 말리 민중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인 실수일 것이다. 국제적 군사조치는 테러리스트 국가 설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좌파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공산당(PCF)은 올랑드의 군사 개입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12일 성명에서 "PCF는 그들 국가 남부를 향하는 지하드 그룹의 무장 공격에 대한 말리의 우려를 공감한다. 여기서 말리 대통령이 요청한 도움에 대한 대답은 유엔 깃발 아래, 미국과 아프리카연합 후원의 뼈대 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참세상]

다행스럽게도 반자본주의신당(NPA)과 좌파당(Gauche)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3일에는 반대 시위를 열었고 16일에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내전ㆍ전쟁이라는 상황, 근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위협에서 우리는 흔히 군사적 개입이라는 '쉬워 보이는 방법'에 못마땅하지만 지지를 보내곤 한다. 만약 군사적 개입이 말리와 북서부 아프리카 인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부득이하지만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에서 그랬듯이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이들의 개입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성장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 지역의 오래된 식민주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식민지 모국의 군사적 귀환은 오래전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서 살폈듯이 프랑스의 이번 군사 개입을 '인도주의'적이라고 볼 근거도 희박하다. 정치ㆍ경제적 욕심이 군사 개입이라는 불장난으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방 국가의 아프리카와 아랍 지역에서의 군사적 모험을 중단시키는 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른 평화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 주요 참고 기사
[중앙일보] 모범 민주국가였던 말리, 전쟁 수렁 왜
[경향신문] '말리 군사개입' 올랑드의 리더십 시험대에
[경향신문] 암울한 말리… 쿠데타군ㆍ반군 모두 인권유린 심각
[뉴시스] 20년 민주국가 망친 말리 쿠데타 주역 사노고
[참세상] 말리 반군 공습,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되나"
[국민일보] 中ㆍ美에 밀린 佛, 말리 개입으로 '阿영향력' 되찾기
[참세상] 말리 사상자 증가… 전쟁 반대 목소리 확대
[프레시안-월러스틴 논평] 아프리카 말리, 제2의 아프간 되나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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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펭귄 2013.01.26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2. 민죠이 2013.02.08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머릿속에 정리가 싹 되네요 :-)

  3. 연풍청년 2013.02.20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때로님은 자본의 관점으로 보실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지난번에는 음악만 듣다가 나갔는데 오늘은 글 몇개를 보았습니다. 저도 말글장을 쓰고 있지만.. 때때로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티스토리라서 그런가? 훨씬 정리가 잘 된거 같고 저는 그냥 Daum 블로그라서 딱히 별로..

    • 때때로 2013.02.22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본의 관점'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파워유저가 아닌 상황에서는 블로그 서비스 중 티스토리가 가장 깔끔한 것 같더군요.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무르시 대통령의 새 헌법에 반대해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든 이집트 인민. [사진=RoarMag.org]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후 휴전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쓸모를 인정받은 무르시는 국내 정책에도 과감한 전환을 시작했다.

'파라오법'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새 헌법은 무슬림형제단이 장악하고 있는 제헌의회와 상원(슈라위원회), 무르시 대통령에게 견제받지 않는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2011년의 혁명적 열정이 충분히 식었다고 판단한 데서 비롯한 반혁명 시도일 것이다.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여준 이집트 인민의 용기는 혁명이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줬다. 물론 아직 어느 한쪽도 승리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내려온 무슬림형제단은 설탕과 빵, 고기를 미끼로 빈민을 반혁명의 도구로 동원하고 있다. 군대의 움직임도 여전히 큰 변수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표현한 이집트 혁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나딤 페타이가 RoarMag.org에 기고한 아래 글은 이집트 혁명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설명하고 있다.

※ 아래 글은 제가 읽기 위해 한글로 옮긴 것으로, 상당히 많은 의역과 오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링크한 원문을 참조하세요.


[RoarMag.org] 타흐리르, 파라오의 시작과 끝
2012년 12월 3일 나딤 페타이링크

이집트의 혁명가들이 타흐리르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그들이 시작한 것, 파라오를 무릎 꿇리고 진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끝내려 한다.

1970년 사다트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치적 자유의 성장 속에서 불법 단체였던 무슬림형제단은 정치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결과에 상관없이 그들의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킬 수 있었고, 정부의 간섭 없이 아이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주입할 수 있었고, 이집트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풀뿌리 조직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났다. 따라서 한 세대 이상 폭력적인 체제에서 유일한 야당이었다는 것, 무바라크 타도를 계기로 대의민주주의를 시행하게 됐을 때 의회와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진짜 정당이었음은 분명하다.

2011년 1월 25일 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무슬림형제단은 저항에 동참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며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이 승리 없이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인민의 편에 섰다. 모스크의 이맘(이슬람 성직자)들은 거리에서 충돌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각의 기도를 중단하기 시작했다. 어떤 흠결도 없는 아름다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의 퇴진은 이집트 사람들이 본적 없는 빈 공간을 열어젖혔다. 무슬림형제단이 사태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2012년 여름 이집트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을 때 선택지는 서구의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이었다: 바로 차악을 선택하는 것. 그렇다. 구체제의 대리인인 아메드 샤피크와 무슬림형제단의 회원인 모하메드 무르시가 선택지였던 것이다. 구체제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은 무르시에게 투표했다. 그리고 그가 60년 만에 권력에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됐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믿음, 서구의 모든 이들이 듣고있는 이야기다. "혁명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이것이 이집트 인민들이 싸워서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다고 말이다. 그러나 혁명의 무대 뒷편에서 진정한 선택권의 부족함에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선거를 거부한 많은 인민들은 계속되는 국가 탄압과 이슬람 정당이 요구하는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에 맞선 투쟁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 혁명은 국제적 압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예를들어 국제통화기금(IMF)은 누가 권력을 잡든지 상관 없이 이집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고, 긴급한 자금 지원에 대한 댓가로 극적인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해마다 12억 달러 규모의 군사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과 짝을 이룬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보여준다: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 체제와 그의 전임자들이 해왔던 것과 같은 세계적 군사력을 위한 또다른 애완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집트의 지정학, 크기, 아랍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한 문화적 중요성은 서구ㆍ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중요하게 한다. 그렇기에 언론은 무르시를 그들의 동맹을 위한 이집트의 영웅으로 추켜세운다. 그들은 무르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협상을 이끌어낸 사람이라고 찬양한다. 바로 그들이 사다트에게 대했던 것 처럼 국제사회는 무르시가 독재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실용주의자이자 믿을만한 대화 상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휴전을 발표한 며칠 후 바로 무르시는 이집트 인민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충격을 준 법령을 공표한다.


새 법령의 진실
자료:알자지라
-대통령은 국가기관의 정화를 목표로 한 법령을 말한다.
-새 법에 의하면 4년 간 대통령이 검사를 임명할 수 있다.
-무르시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있는 권력을 그 자신에게 부여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사실상 현직 검찰청장을 파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떤 권한으로도 대통령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르시는 시위대 살해와 관련한 재판의 재심을 명령했다.
-무르시의 법령은 새로운 의회 선거 때까지 그의 권력을 유지한다.
-의회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선출될 수 없다.
-무르시는 또한 새로운 헌법의 제안을 위한 기간을 늘렸다.
-무르시는 그 자신이 혁명을 수호하는 절대 권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법령은 무르시의 절대 권력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원[슈라위원회]이 (새 헌법 제정을 담당한) 제헌의회와 마찬가지로 [사법부에 의해] 해산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상원과 제헌의회] 둘 모두 동시에 무슬림형제단 대표자 다수에 의해 조정된다. 두 집단에서 몇몇은 저항에 참여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중단시키진 못할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새로운 법과 헌법의 일부에 의해 여성 권리가 억압받았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로 변화하면서 두려움은 현실이 되고 있다. 많은 혁명가들이 인민의 혁명을 도둑맞았다는 의식이 확산되길 기대하며 몇 달동안 거리를 점거한 덕에 무르시는 점차 정당성을 잃어갔다.

몇몇 자경단은 여성에게 (언어와 육체적인) 공격을 가하는 폭력배를 찾기 위해 카이로 도심을 수색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해질 때까지 스스로를 폭력배와 여성 사이에 서있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평화적인 데서부터 더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거리에서 여성을 학대한 남성의 눈에 페인트를 뿌리는 한 자경단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르시가 새 법률을 밝히자 마자 많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충돌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 악명 높은 타흐리르 광장에 횃불이 밝혔다. 상황은 무르시 얼굴의 절반은 무바라크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 무르시 무바라크". 그리고 그 안에 무슬림형제단의 실수가 있다: 그들은 대중의 혁명적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을 만큼 충분히 기다렸다고 믿었다. 그들은 확실히 틀렸다.

지난 1년 반동안 이집트 사회는 전례 없는 정치적 자각 수준을 성취했다. 특히 무바라크 퇴진투쟁의 맨 선두에서 싸웠고 봉기에서 친구와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 혁명가들 자신의 혁명적 정서는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더욱 평범한 이집트 사람들이 무르시의 법률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자신의 투쟁이 소용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기보다 타흐리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른 점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인민은 분열돼 있다. 무르시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 거대한 규모의 - 지금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 종파간 분열이 성장했다. 한쪽에는 자유주의자, 좌파, 판사, 청년, 지식인, 혁명가들이 있다. 다른쪽에는 무슬림형제단 회원ㆍ동조자들과 설탕ㆍ빵 또는 (드물게) 고기에 매수당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 18일간의 타흐리르 광장 점거 기간에 낙타를 타고 공격한 그 날 동원됐던 같은 사람들 - 이 있다.

거리는 다시 한 번 작은 전쟁터가 됐다. 경찰은 최루탄을 뿌리고, 무슬림형제단 민병대는 평화적인 반정부 인사들을 공격하고, 혁명가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안절부절 하면서 기다리던 군대가 제자리를 지키는 동안에 일어났다. 바로 혁명의 시작인 이러한 일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저울의 균형추를 움직일 것이다. 만약 군대가 반정부 인사들의 편에 선다면 무르시가 오랫동안 인민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의 파라오법은 그것이 제기됐던 만큼 빠르게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군대가 무슬림형제단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면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2011년 11월 뉴욕타임스는 이집트 혁명은 끝나지 않는 혁명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시간, 그것은 진실이 됐다: 군사 최고위원회(SCAF)는 "과도정부" 형태로 권력을 잡았다. 이 기간 내내 시민에 대한 군사재판이 실시됐고 이집트 인민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하나의 억압적이고 전제적인 체제에 맞서기 위해 단순히 투쟁한 것 같았다. 체제 스스로 무너지진 않았다. 단지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다. 무바라크로부터 SCAF로, 다시 무함마드 무르시로.

현재 우리는 느리고 고통스럽게 태어나고 있는 끝나지 않는 혁명의 마지막 무대를 목격하고 있다. 현실에서 대의민주주의적 과정에 포함된 내재적 오류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이집트 인민이 더 많은 무언가를 요구하며 봉기하는 게 가능할까? 세계 모든 곳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봉기를 고무한 후 거의 2년이 된 이집트 사람들이 바리케이트로 되돌아와 그들 스스로 그와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이집트 군대의 [앞으로의] 결정을 포함한 이러한 질문들에는 단지 시간 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변이 무엇이든 이 혁명이 시작된 후 거의 2년 지난 지금 그 끝이 가까워졌다. 끝나지 않는 혁명은 더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들은 2011년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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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분노의 날'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한 남성이 1일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신문, 사나=AP연합뉴스]


2006년 여름 쌍용자동차 파업 이후 자살한 이가 14명이 됐습니다. 신차를 발표하며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쌍용자동차. 하지만 해고자와 무급휴직자에겐 고통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만의 문제는 아니죠. 지난해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인구 10만명 당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2001년 14.4명에서 2009년 31명으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셋값과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무섭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구제역 사태는 가뜩이나 위기에 몰려있던 (축산)농민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죠. 우리는 이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벼랑 끝 삶' 쌍용차 해고자 또…, 경향신문(링크)
쌍용차 또 자살… "생활고 우울증 심해", 경향신문(링크)
자살률 '무서운 상승곡선', 한겨레(링크)
"5000원짜리 한 장으로 점심도 못 먹는 세상", 프레시안(링크)


세계화된 경제와 2008년의  금융위기로 고통받던 또다른 인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야만적 왕정과 군부독재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죠. 이들 중동 인민이 저항에 나선지 두 달. 리비아에서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카다피는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공군을 이용해 저항세력이 차지한 도시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다행이 카다피의 시도는 격퇴되었다고 합니다. 카다피와 저항세력은 불안정한 균형 상태에 놓여있는 듯 합니다.

과거의 모든 정치적 격변에서 관찰할 수 있듯 이러한 균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누가 먼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느냐가 문제겠죠. 제가 보기에 관건은 저항세력에게 있습니다. 우선 저항세력은 내부적으로 매우 불균등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카다피 정권 하에서 리비아의 구체제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던, 저항의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카다피 편에 섰던 자들이 저항세력의 대표자들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압델 자릴 전 법무부 장관이 그 대표일 것입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자릴 전 장관과 현 저항세력과의 불협화음이 들려옵니다. 자릴은 해방된 뱅가지시에서 자신이 과도정부를 구성했다고 발표했었지만 국민위원회의 대변인은 이를 부정했죠. 구체제의 일부를 청산하지 않은 해방이라는게 얼마나 불안정한지는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와 또 하나의 측면에서 연결되는 것이 있습니다. 외세의 군사적 개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학살'에 대한 소식에 분노하며 카다피에 대한 군사적 징치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적 개입이 리비아 혁명의 올바른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혁명의 초창기, 저항세력이 아직 승기를 잡지 못해 곳곳에서 카다피의 잔혹한 공격위협에 처했을 때는 왜 군사적 개입에 대한 얘기가 없었을까를 우린 물어야 합니다. 오히려 리비아의 대다수 지역이 저항세력의 손에 넘어가고, 이를 위해 인민 스스로 무장한 시점에서 미국과 유럽은 리비아에 대한 개입을 천명하고 실제적인 행동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미군은 28일 공식적으로 해군 함정과 공군기를 리비아 인근으로 배치했다고 밝혔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식에 의하면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벵가지시 등의 지역에 이미 투입(US Special Forces Arrive In Libya, 링크)됐다고 합니다.

미, 해·공군 전력 리비아 근접 배치, 경향신문(링크)
서방, 리비아 군사 개입 목적은 구질서 회복, 문이얼, 레디앙(링크)


문이얼은 리비아가 중요한 석유 생산국이라는 점, 특히 지난 몇년 간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리비아 진출이 확대됐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기에 카다피의 강경 대응으로 인해 저항세력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카다피가 서방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중요한 석유시설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무장한 리비아 민중들이 이러한 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서방에겐 엄청난 압박일 수 밖에 없다. 카다피가 무너진 이후가 더 걱정이라는 서방의 우려는 사실 이런 시설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세력에게 돌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 생략 …) '인디펜던트'지 2월 27일자에 따르면, 영국 [석유] 업계는 겉으로는 독재정권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카다피의 몰락으로 2000년대 들어 지속되는 양국간 교역 확대기조의 역행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방, 리비아 군사 개입 목적은 구질서 회복', 문이얼, 레디앙

미국을 위시한 유럽의 개입 움직임을 보며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국제사회는 리비아 국민들의 안녕보다 현지 석유 가치에 대해 더 우려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죠. 독재와 학살의 소식에 가만히 손놓고 있기는 어렵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에 반대했던 수 많은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자진해서 군대에 가게끔 만들었었죠(하워드 진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국가', 그것이 현 세계체제의 유지에 핵심적 이해관계를 지닌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인도주의적' 목적으로만 제한될 수 있다거나,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발칸반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수단 등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군사적 개입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만 만들었습니다. 더 많은 희생을 가져왔을 뿐이죠. 더 안좋은 것은 해당 지역 내의 자발적인 민주화 의지, 능력, 평화를 향한 노력을 파괴해 왔다는 것이죠.

리비아는 이슬람 정체성이 강한 북아프리카 국가라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식민주의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나라죠. 카다피가 여러 정치위기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반제국주의적 수사 때문이었습니다. 미군의 개입은 반제국주의적 수사를 사용하는 구체제의 생존을 더욱 용이하게 할 것입니다(아프가니스탄에서 탈리반 세력이 다시 회복되고 있듯이).

아직 특정한 인물ㆍ세력을 지칭하진 않지만 미국 언론이 리비아에서 신뢰할 만한 인물로 꼽는 압델 자릴 전 법무부 장관은 구체제의 일부입니다. 미국의 개입은 잘해봤자 자릴 같은 자로 얼굴만 바꾼채 구체제를 유지하는 결과로 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타깝고, 조바심이 나더라도 우린 리비아 인민의, 무장한 저항세력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아랍혁명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분출하고 있습니다. 3월 1일 예멘에서는 32년간 장기 집권해온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습니다. 이 시위에는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리비아와 비슷한 시기에 저항이 시작됐지만 이후 지배자들의 유화책으로 다른 길을 걷는 듯 보였던 바레인에서도 저항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도 오는 11일 대규모 시위를 호소하는 외침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홍해 건넌 민주화 불씨, 아라비아 반도서 '활활', 경향신문(링크)


주류 언론에서는 아랍혁명이 중국과 북한으로 확산될 것인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과 북한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싶습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는 우리의 동료ㆍ이웃을 돌아보게 됩니다. 날로 개방적으로 변해가는 경제환경에서 '경쟁력'을 못갖춘 이들은 패배자로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사람 뿐입니까. 구제역으로 이미 300만 마리가 넘는 돼지와 소가 생매장됐습니다. 당장 어떠한 행동이 아니더라도 대안에 대한 고민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점입니다.

p.s 읽어볼 만한 글 : 중동 봉기에 관한 다섯 가지 미신 Juan Cole|연구공간L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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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6 11:24

중국은 아랍과 다를까? 쟁점2011.02.26 11:24

중국은 아랍과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입니다.

우선 다른 것부터.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서 아랍과 중국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랍은 천연자원 수출국이지만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천연자원 수입국이죠. 즉, 중국은 고도로 발달한 공업국가죠. 이는 중국에 대규모의 산업 노동자 계급이 밀집해 있다는 말입니다. 아랍 국가 대다수의 산업발전 수준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습니다.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만큼이나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됐습니다. 아랍 세계는 부족 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매우 강한 종교적 전통과 언어적 통일성으로 묶여있습니다. 그에 반해 중국의 소수 민족과 인종은 저마다 다른 전통과 습속에 기반한 삶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이 매우 격렬한 민족적 갈등을 겪을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몇년 전의 신장 위구르 지역의 반란이 이를 입증해보였죠.

하지만 중국 또한 아랍을 뒤흔든 반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지적했 듯이 중국의 다양한 민족ㆍ인종 구성은 현실적인 갈등의 씨앗입니다. 더구나 이런 갈등은 중국 해안 지방의 산업 발전과 대비되는 내륙의 침체 혹은 정체로 인해 그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발전된 공업국가라는 점은 가장 큰 잠재적 정치 위기의 씨앗입니다. 이집트의 반란은 지난 몇년 간 노동자 투쟁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난 몇해 동안 규모면에서 압도적인 노동자 투쟁을 겪어왔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상해와 해안의 산업지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죠.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의 한 축으로 꼽히는 중국의 높은 저축률은 중국의 산업 노동자 계급이 저임금에 고통받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죠. 하지만 중국 정부로서는 단기간에 중국 산업 노동자 계급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임금 상승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관건은 내륙 지방의 소수 민족과 해안 지방의 산업 노동자 계급이 단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기에 단발적인, 고립된 투쟁만 반복돼 왔습니다. 하지만 중국 내부의 가장 큰 불만 세력인 이 둘이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중국은 아랍 세계의 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반란의 물결에 휩쌓일 듯 합니다.

중국의 정치 엘리트가 얼마나 똑똑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중국 사회가 거리의 폭발적 대중시위를 만들어낼 정도의 압력을 내부적으로 지녔느냐가 되겠죠. 분명 한국 언론 일부와 서구의 언론이 아랍 세계의 혁명을 보며 중국을 언급하는 데 섣부른 감이 있긴 합니다. 그들을 믿을 순 없지만 그 반대로 무조건 그들을 부정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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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ypt supports Wisconsin workers"

2월 11일, 무바라크의 항복 선언 이후 이집트의 저항은 아랍  세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리비아와 바레인에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레인의 왕세자는 강경한 시위대의 모습에 한 발 물러서 대화를 하자고 나섰지만 가다피는 더욱 강경하게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통신망을 마비시킨 리비아 정부 때문에 정확한 소식은 들어오지 않지만 무바라크가 이집트에서 시도했던, 깡패와 흉악범을 동원한 유혈사태 기도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집트의 저항은 아랍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것과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선 침묵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의 건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는 언제나 혁명의 예측할 수 없는 급작스러움과 신기술의 영향력을 떠들기에 급급합니다. 우리나라의 1987년 6월 항쟁을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그 전해의 건대항쟁과 5ㆍ3 인천 항쟁, 다시 그보다 앞선 85년의 구로동맹파업과 일일이 거론하기 힘든 여러 싸움들이 1987년 6월 항쟁을 준비해왔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죠. 이번 시위의 중심적 역할을 한 청년 운동인 4월 6일 운동은 2008년 4월 6일의 노동자 파업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레디앙에 실린 문이얼의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에서 이집트 노동자 투쟁의 역할을 온당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이집트 혁명은 지난 몇 년 전부터 이집트 내에서 가열되기 사작한 좀 더 긴 과정의 클라이맥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200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이집트 노동자들의 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4월 6일에도 또다시 파업이 발생하였다. 파업이 발생하고나서 수시간만에 파업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파업 참여자들은 무바라크의 포스터를 끌어내리고 이를 짓밟았는데, 급기야 파업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는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면은 무바라크가 통치한 지난 30여년 동안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으로 이집트 정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파업으로 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또다시 보너스와 임금 인상 등의 양보를 획득했고, 이 파업을 지지하면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청년운동인 '4월 6일 운동'이 탄생했다.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 문이얼, 레디앙(링크)

노동자 투쟁이 중요한 것은 2008년의 경제위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유럽은 2008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발생한 노동자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금은 가라앉은 듯 하지만 그 투쟁이 언제 다시 터져나올 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은 이집트 투쟁과 지난 며칠간의 위스콘신 노동자 투쟁이 보여줍니다.

이런 추세는 지난 2004년 이후 기업가들로 구성된 소위 '개혁 내각'이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한 개혁 노선을 밀어붙이면서 더욱 더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들 사이에 부패가 만연했고, 인플레이션과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인해 이집트 서민들의 생활은 날이 가면 갈수록 곤궁해졌다.
'이집트 제2혁명 더 큰놈이 오고 있다', 문이얼, 레디앙(링크)

위스콘신주는 1959년 주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최초로 제정한 주이지만 지난달 취임한 공화당 스캇 워커 주지사와 주의회가 재정적자를 이유로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연금 및 건강보험 혜택을 축소하는 내용의 공직사회 구조조정 입법을 추진했다.
'"공무원 단체교섭권 박탈" 법안에 위스콘신주 7만여명 찬반 시위', 한국일보(링크)

위 한국일보 기사의 제목은 참 재밌습니다. 저 제목만 보면 7만여명이 반으로 나뉘어 찬반  시위를 벌인 듯 하지만 사실 대다수는 반대 시위대입니다. 김낙호(트위터 아이디 capcold)씨가 트위터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날로 연대가 확산되어 간다고 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위스콘신주 주도인 매디슨의 인구는 2006년 현재 22만7642명입니다. 인구 20만명의 도시에서 7만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거죠. 서울로 치면 3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과 마찬가지죠.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주지사는 '침묵하는 다수' 드립을 하고 있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저항에 나선 이유가 하나의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죠. 스티글리츠가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2008년 경제위기를 맞은 미국 정부가 기업 살리기(기업복지)에 나서는 가운데 더 가난한 다수의 삶은 내팽겨쳐지고 있습니다(물론 의료보험 등에서 부분적인 개선이 있었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유럽 각국의 대응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죠. 재정적자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복지혜택 등을 축소하는데 골몰하고 있는게 지난해 노동자 투쟁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집트와 아랍 세계 인민은 경제위기로부터 더욱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유럽 정도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타격은 생존을 위협하는 더욱 직접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지난 몇 십년간 지배해온 독재자에 대한 분노가 결합된 것이죠. 사실 이 둘은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하나를 강제로 분리하려 했을 때 나머지 절반(정치적 민주화)도 기형적 변화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죠.

아랍의 투쟁은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합니다. 1960년 4ㆍ19, 1979년 박정희 암살부터 12ㆍ12 쿠데타, 1980년의 5ㆍ17 쿠데타, 5ㆍ18 광주항쟁, 1987년의 6ㆍ10 항쟁과 이어진 7ㆍ8ㆍ9월 노동자 대투쟁 …. 아랍의 투쟁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비록 그 투쟁이 독재자의 총탄 앞에 스러진다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아랍의 정치에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칠 게 틀림 없습니다.

가볼 만한 사이트
2011년 아랍 혁명 : 연구공간 L의 블로그, 아랍혁명에 관한 다양한 해외 소식을 번역해서 올리는 곳, 지젝ㆍ바디우ㆍ네그리의 글도 볼수 있다.
아이비스 에너지 전략 연구소 : 중동ㆍ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관계 분석 블로그. 아랍혁명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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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현지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와엘 고님(왼쪽)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연설하고 있다. 구글의 중동ㆍ북아프리카 마케팅 책임자인 고님은 지난달 27일 시위 중 경찰에 붙잡혔다가 7일 석방된 뒤 이집트 민주화 시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8일 타흐리르 광장의 연단에 선 고님은 "나는 영웅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당신들이 영웅"이라고 말하고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모두 한마음으로 이집트를 위해 싸우자"고 외쳤다. [중앙일보 카이로 로이터=뉴시스]

뉴욕타임스 "2주 만에 가장 많은 인파"

소강 상태로 접어들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8일과 9일 연이어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이집트를 뒤흔들었습니다. AP 추산 25만명, 뉴욕타임스는 "2주 만에 가장 많은 인파", BBC는 "시위가 시작된 지난달 25일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보도했습니다.

시위의 규모만 커진 것은 아닙니다. 9일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서 농성과 집회에 참여하던 일부 시위대는 의회로 행진을 시도했습니다. 의원들의 자진 사퇴와 의회 해산을 요구했죠.

이집트의 저항이 사그라들줄 모르자 이런저런 양보안을 내놓았던 술레이만이 시위대를 협박하고 나섰습니다. 9일 언론사 대표들을 만난 술레이만 부통령은 "경찰력을 동원해 문제를 풀길 원치 않지만, 시위사태의 장기화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정권이 뒤집히거나 무바라크 대통령이 당장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대화로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남은 선택은 거대한 혼란과 쿠데타뿐"이라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저항의 날로 급진화 하면서 그의 협박은 힘을 잃는 듯 합니다. 술레이만의 든든한 지원자로 보였던 미국조차도 '긴급조치 해제' '언론인ㆍ시민운동가에 대한 구타ㆍ폭력ㆍ체포 즉각 금지 및 집회와 표현의 자유 보장' '야권과의 대화' '정권이양 로드맵과 일정개발에 야권 인사 참여'를 촉구하고 나섰으니까요.

[조선일보] 수십만 시위대 재집결… 정부 "더이상 못 참아" 링크
[조선일보] 이집트 시위대 의회 앞 진출 … 해산 요구 링크


노동자의 시위ㆍ파업, 독립노동조합의 건설

특히 노동자들의 시위 진출이 이집트 저항의 중요 변수로 급부상 하고 있습니다.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시위에 당연히 노동자들도 포함돼 있었겠죠.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텔레콤 이집트 노동자 300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인 수에즈 운하에서도 노동자의 집단적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수에즈운하당국 소속 5개의 서비스회사 소속 6000여 명의 노동자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8일부터 연좌시위에 들어갔습니다. 2000여 명의 섬유노동자도 노동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하네요. 수도인 카이로에서는 공공부문 청소노동자 1500명 이상이 정부 중앙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건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달 30일 독립노동조합연맹이 건설됐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1987년 6월의 대중시위 이후 노동자의 집단적 저항까지 한달이 걸렸죠.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 가까이 흐르고서야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는 것과도 비교해보세요. 이집트의 상황은 무척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참세상] 이집트 봉기, 도약하는가 링크


이집트 저항의 새 아이콘 '구글'?

특별한 지도자 없이 진행되던 이집트 저항에서 30살의 청년이 시위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구글의 중동ㆍ북아프리카 마케팅 매니저인 와엘 고님(Wael Ghonim)입니다.

지난달 27일 시위 중 체포됐었던 고님은 11일만인 8일 풀려나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 앞에 섰습니다. 그는 "나는 영웅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당신들이 영웅"이라고 말하고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모두 한마음으로 이집트를 위해 싸우자"고 외쳤습니다.

[중앙일보] 'SNS 영웅' 고님, 시위 다시 불붙이다 링크
[조선일보] '구글 청년' 고님이 떴다 … "시위 새 목소리를 얻다" 링크


이슬람 세계에 돌파구를 내다

중동의 정치지형을 지배해온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지배(사우디아라비아)와 테러(알 카에다), 시아파-수니파의 종파간 대립, 기독교ㆍ유대교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 지배자들에게는 물론 좌파들에게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종교족 완고함이라는 이미지를 떨치기 어렵게 했죠. 일부 좌파도 중동지역 인민의 '민주주의적 자질'을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세속주의적 대안이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집트의 저항은 이슬람 세계를 둘러싼 세계의 이러한 인식은 물론 무슬림 스스로의 인식에도 큰 균열을 나았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처음으로 종파간 대립을 뛰어넘는 '대중적'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이집트는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의 모국이지만 2주가 넘어가는 이번 저항에서 알 카에다는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하메네이조차도 지난 2월 4일 이번 이집트 혁명의 '세속적' 성격을 인정하면서 "30여년 전에 발생한 위대한 이슬람 혁명이 이집트나 튀니지, 기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다"라고 말했다."
- '종교 뛰어넘는 단결, 새로운 저항운동', 문이얼(아이비스에너지전략연구소), 레디앙

이집트의 저항이 초기와 같은 열기를 계속 지닌채 전진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대중의 열기를 담을 용기(실린더), 즉 조직의 부재 때문입니다. 물론 대중적 기반을 지닌 무슬림형제단이 좀더 세속주의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내부의 근본주의적 세력의 압력 또한 무시할 순 없습니다. 혁명의 전진이 꺾였을 때 퇴행적인 종교 근본주의적 압력은 다시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이집트 혁명은 실제적인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합니다. 대중의 폭발적 저항에 놀란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밀려 위로부터의 변화를 꾀하는 듯 합니다. 심지어 그 완고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말이죠. 알-파이잘 사이디 왕자는 지난주 5명의 국민을 불러 얼마전 발생한 홍수 사태의 수습을 위한 정부의 노력을 설명했습니다. 겨우 5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중에는 정부를 비판해 2년간 감옥에 갇혔었던 반정부 블로거도 포함돼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레디앙] 이집트 중간결산 … 권력자 퇴진선언 이어져, 중동이 바뀐다 링크


굳은 벽에 균열을 내고 전진하기 시작한 이집트 인민에게 승리가 함께하길 바라며 오늘의 이집트 소식을 마칩니다.

Posted by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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