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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왕성'.

※아래 글에는 영화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우리 시대 유일한 도덕률이다. 그렇다고 말해진다. 보다 나은 능력과 자원을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사회가 나뉘어지는 것은 당연하게 치부된다. 승자독식은 우승열패 사회의 당연한 결과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뚱이 뿐인 노동자는 "겁에 질려 주춤주춤" 자본가의 작업장으로 걸어들어간다. 탈출구는 교육이다. 물론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식만이라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교육은 상층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회의 동아줄은 많지 않았고 그럴 수록 동아줄을 잡기 위한 노동계급 자녀들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민주화 이전 사교육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는 법의 단속을 피할 수 있고 금지로 인해 높아진 비용을 감당할 여지가 있는 상층 계급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화 이후 치열한 대입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대학 입학정원을 크게 늘렸으나 이는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이제 대학은 모두가 당연히 가야할 곳 취급 받았다. 국내의 명문대를 넘어 해외의 유명 대학ㆍ대학원으로 쌓아야할 스펙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치뤄야 할 경쟁의 폭은 더 넓어졌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현실, 그리고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교육에서 경쟁을 제거하기 어렵게 만든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잡아먹어야만 했던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동료를 토끼사냥하는 영화 '명왕성'의 교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잇따라 개봉한 '명왕성' '더 테러 라이브' '설국열차'는 각자 다른 방향에서 이 '꼬리칸'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 태도는 영화마다 다르다. 특정한 주제의식보다는 상황의 긴박함에서 오는 긴장감을 목적으로 소재가 다뤄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될 수 없다. 단지 영화들에서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풀어 재구성해볼 뿐이다. 아래는 이 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명왕성의 김준

영화 '명왕성'은 이러한 교육이 만들어내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서울 강북의 한 학교에서 꽤나 그럴듯한 성적을 올리던 한 학생은 명문고로 전학을 간다. 자신의 자그마한 세계에서 승자였을 그 학생, 김준은 자신이 원했던 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이전과 다름을 알게 된다. 이미 한 번 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데 성공한 그에게 계급 상승의 욕망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비밀에 쌓여있는 '오답노트'를 얻기 위한 욕망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뛰어넘기 힘든 계급의 장벽이 존재함을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1%의 학생들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은 기만이었다. 상층 계급의 동료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과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한다. 청소년 자살률이 계속해서 높아져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2010년 기준 10~24세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 수는 9.4명으로 OECD 평균 6.5명을 큰 폭으로 상회한다). 영화 '명왕성'에서 이다윗이 열연한 김준의 이야기다.

김준이 만약 자폭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와 달라졌을까. 우리는 아주 높은 확률로 그가 경험할 사회가 학교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거대하게 가로막은 계급 장벽은 우리의 삶을 끊임 없이 좌절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김준이 자폭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이다윗이라는 배우가 두 영화 모두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역할로 나온 것은 우연하게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더 테러 라이브의 박노신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박노규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 야근수당 2만5000원을 더 받기 위해 마포대교 난간에 메달렸던 그는 한강의 어두운 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세계의 지배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위해 강행된 공사였다. 그러나 박노규의 죽음은 세계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세계는 여전히 성공을 위한 아귀다툼으로 가득할 뿐. 그렇게 잊혀져 간다. 경제개발 시절 스러져간 무수히 많은 노동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지만 지금 60~70대일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비루한 삶 뿐이다. 아파트 경비 자리를 얻기 위해, 거리에서 폐휴지를 줍기 위해 자신의 또래들과 경쟁은 계속된다. 하지만 박노신의 아버지 박노규의 이야기는 또한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11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2114명으로 하루 6명 꼴이다. 박노신이 아버지 박노규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산업 현장에서 스러져가는 노동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산업재해의 문제는 이 체제가 노동자를 다루는 더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상층 계급으로의 이동을 미끼로 경쟁을 옹호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기계 부속품 이상이 되지 못한다. '명왕성'의 김준이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그의 삶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분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보여주지 않는 테러범 박노신의 삶이 아마 그러햇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폭탄을 만들 정도로 뛰어났을지라도, 대학 진학 후 더 높은 수준의 폭탄과 격발장치를 제작하고 경찰의 전화추적을 따돌릴 정도로 뛰어난 해킹 실력을 지니게 됐다고 할지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승-전-치킨집이라는 IT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의 자괴감 가득한 농담을 떠올려보라.

성공한 샐러리맨 윤영화

박노규의 아들 박노신과 성공한 샐러리맨의 상징 윤영화 앵커의 만남은 이러한 계급 장벽이 사회 곳곳을 치밀하게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정우가 연기한 윤영화는 성공의 사다리에서 아주 잠깐 삐끗한 것처럼 보인다. 몇몇 불운이 있었지만 박노신의 테러는 다시 성공 사다리에 올라탈 기회로 보였다. 그는 차대은 국장에게 9시 뉴스 메인 앵커 자리를, 박정민 테러대응팀장에게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마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을 주도한다는 윤영화의 생각이 잘못됐음은 바로 드러난다. 방송국과 차대은 국장은 오직 시청률에만 관심있었고 청와대와 경찰청은 테러범의 체포와 면책, 즉 정부의 유지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체제에서 그의 명예와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윤영화가 박노신과 공명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다. 이러한 공감은 윤영화가 박노신에게 이어받은 폭탄 스위치를 누르게 만든다. 테러는 모두 끝났다는 정부의 뻔뻔한 발표에 엿먹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기묘하게 이어지는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 모두는 경쟁사회에서 계급 상승을 위한 사다리에 메달리고자 노력했다. 현실의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배 계급의 일회용 도구에 불과했다. 역시 우리 대부분이 그런것처럼. '명왕성'에서 김준은 스터디그룹 '토끼사냥'의 오답노트가 자신을 1%의 승리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라디오로 밀려난 윤영화는 차대은 국장과 함께 다시 성공의 길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짓된 희망마져 사라졌을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

이에 반해 영화 '설국열차'는 꽤나 희망찬 이야기를 전해준다. 체제-열차는 살아남은 인류를 관리해야 하는 기계의 일부분으로 다룬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이 열차-체제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지 오래고 그 현실은 더 노골적이다. 인간의 존재가 기계의 안녕을 위협할 땐 주저없이 제거된다. 하지만 체제-열차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이었다. 무한정한 시간 동안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영구기관은 없었다. 그것이 폭로된 순간 체제-열차는 폭파되고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새 인류가 대지를 밟는다.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서 거대한 폭발에도 불구하고 체제가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설국열차'의 희망에 가득찬 태도는 더 명확해진다. 아직 현실은 '명왕성'과 '더 테러 라이브'에 더 가깝다. 안타깝게도 '설국열차'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 희망이 체제-열차의 안이 아닌 밖에 있음은 분명하다. 열차에서 내리려면 우리는 우선 이 기관차를 멈춰 세워야만 한다.

Posted by 때때로

3월 30일, 36살의 쌍용차 해고자 한명이 자신이 살던 임대아파트 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스물두 번째.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이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가 22로 또 하나 늘어났습니다.

● [프레시안] 쌍용차 해고자 또 투신자살 … 정리해고 후 22번째(링크)

부모가 없고 혼자 살았던 고인의 사정 때문에 그는 몸을 던진 후 하루가 지나서야 발견됐습니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서야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또 잊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죽음이 그리스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은퇴한 후 연금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던 77세의 노인 드미트리 크리스토울라스는 4월 4일 아테네 국회의사당 인근의 신타그마 광장에서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그리스 국민이 칼라시니코프를 잡는다면 그와 나란히 설 것"이라는 그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만이 "존엄한 삶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고 마지막 남긴 메모에 적고 있습니다.

"The Tsolakoglou government has annihilated all traces for my survival, which was based on a very dignified pension that I alone paid for 35 years with no help from the state. And since my advanced age does not allow me a way of dynamically reacting (although if a fellow Greek were to grab a Kalashnikov, I would be right behind him), I see no other solution than this dignified end to my life, so I don’t find myself fishing through garbage cans for my sustenance. I believe that young people with no future, will one day take up arms and hang the traitors of this country at Syntagma square, just like the Italians did to Mussolini in 1945."
"'트라코글로우' 정부는 내 생존을 위한 모든 연줄을 끊었다. 국가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내 스스로 35년간 지불하며 만들어온 나의 존엄한 자리를 말이다. 나는 이제 강력하게 항의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물론 비슷한 처지의 그리스 국민이 칼라시니코프를 잡는다면 나는 그와 나란히 설 것이다). 생존을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져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기에, 내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만이 존엄한 삶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1945년 무솔리니에 반대해 이탈리아인들이 일어난 것처럼, 어느날 무장을 하고 일어나 이 나라의 배신자들을 교수대로 보내는 것 외에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미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 4월 4일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자살한 77세 노인의 유서 일부
※ 원문은 페이스북에서 구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해 의역을 했으니,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트라코글로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때 괴뢰정부의 수상이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 노인은 구제금융을 이유로 강력한 긴축정책을 요구한 트로이카(유럽연합ㆍ유럽중앙은행ㆍIMF)에 굴복한 루카스 파파데모스 총리를 트라코글로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 [프레시안] 그리스 77세 약사의 공개 자살 '충격'(링크)

2008년만해도 그리스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5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낮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위기는 그리스 국민을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2011년 1~5월 사이 자살률은 2010년 같은 기간보다 40% 증가했습니다(서울신문ㆍ링크).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3월 29일에는 4개월간 월급을 못 받은 28세의 건설노동자가 이탈리아 베로나의 시청사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BBC는 "이탈리아 언론에 경제난으로 인한 자살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문화일보ㆍ링크).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위기의 지표들은 살아있는 인간의 존엄한 삶을 지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스물두 번째 죽음 소식을 들은 홍세화 선생은 "먹먹했다, 아니 막막했다"고 말합니다.

침묵을 강요함으로써 죄를 은폐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스캔들은 그 시대의 악몽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이 그러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시대를 거슬러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통로들을 통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으니까요.

홍세화 선생이 스물두 번째 고인의 소식을 듣고 파울 첼란의 시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파울 첼란의 시는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 변형한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었죠.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참혹함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브레히트가 아니라 파울 첼란의 시를 인용한 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너무 쉽게 흘려보내는 것과 같은 죄악을 떠올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홍세화 선생은 이렇게 글을 이어갑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이 정권과 자본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주장은 결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여기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별일 없이'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주장에서 멈출 뿐, 분노에서 멈출 뿐, 배제된 이들의 죽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 홍세화 "어떤 희망이 이 절망을 위로하랴"(링크)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용기는 범상한 우리들이 쉽게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보다 용서받기를 먼저 청하곤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신화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쉽게 감화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저는 이 신화(십자가의 대속)에서 죄의 용서보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형식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테리 이글턴은 "문자 그대로의 죽음이든 상징적 죽음이든 간에 철저한 자기포기 만이 변화된 삶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보여준 게 이 신화의 교훈이라고 주장합니다(2010년 9월 6일 고려대 강연ㆍ링크). 십자가의 신화가 봉기(부활)의 신화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의 임무는 복잡하고 모순적이기까지 합니다. 성경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너무 많은 이야기가 오히려 그 의미를 바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기억하고, 상기하고, 전파하는 것이 자신을 그 죄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말했죠. 그러나 이는 행동하는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반성은 사고의 형식이 아닙니다. 반성의 말은 무엇보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월 1일은 전 세계 노동자들의 날입니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한 투쟁으로 시작된 이날, 오큐파이 운동은 전 세계 노동자ㆍ청년ㆍ여성ㆍ이주민ㆍ소수민족ㆍLGBTㆍ예술가들의 총파업을 제안했습니다(6 Ways to Get Ready for the May 1st GENERAL STRIKEㆍ링크). 권총으로 자살한 77세의 그리스 노인도 다른 이들이 칼라시니코프를 든다면 그에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봉기하는 것 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미래라고 전하고 있죠.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말'로만은 부족합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서 타인을 탓하는 말은 자신을 반성의 대상으로부터 제외하는 일입니다.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개인이 파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 하루 만은 휴가를 내든, 결근을 하든 모두가 거리로 나와 희망을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때때로

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잘 사는 나라, 살아가는 데 별 근심이 없는 나라인 북유럽에서 자살이 높다고 배웠었죠. 우리는 잘 살게 된걸까요? 별로 그래보이지 않습니다. 가난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부터, 미래의 엘리트로 최고 수준의 대우와 교육을 받는 이들까지. 자살은 마치 전염병처럼 우리를 좀먹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이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는 것일까요. 특히 최근 잇따른 카이스트 학생의 죽음은 명확하게 하나의 현상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경쟁. 우리는 경쟁에서 승자의 영광만을 봅니다. 그 그늘에 패자의 비참함이 따른다는 것은 떠올리려 하지 않죠. '나는 가수다'가 충격을 준 것은 패자의 비참함, 그 비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일 듯 합니다. 더구나 성공한 가수의 추락은 그 충격의 깊이를 더해줬죠.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이 충격을 주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경쟁에서 가장 성공한 길을 가는 듯 보였던 그들의 추락은,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비참함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입증해줍니다. 고작 0.01점 차이로 징벌적 등록금을 부과하는 카이스트의 제도는 그 상징이죠.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 카이스트의 비극(링크)
성적 3.0을 경계선으로 정해놓으면 3.0을 훨씬 넘는 학생들조차 불안해진다. 1980년 전두환 정부 초기에 졸업정원제가 도입됐다. 대학 졸업 정원의 30% 만큼 더 뽑아놓고 4년간 경쟁시킨 뒤 졸업 때 30%를 탈락시키는 제도라서 학생들은 끊임없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급기야 필자가 근무하는 경북대에서 한 여학생이 성적 스트레스로 자살을 했다. 이 학생은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도 항상 탈락의 불안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정권이라 대규모 시위는 감히 꿈꾸지 못할 시절이었는데도 이 사건 직후 경북대 전교생이 데모에 나섰다. 결국 정부는 두 손을 들었고 이 악명 높은 제도는 폐지됐다. 카이스트의 경우에도 학점 위주의 지독한 성과주의가 대다수 학생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중략…)
스탠퍼드 대학의 저명한 경영학자 제프리 페퍼 교수의 연구는 회사에서 택하는 성과주의는 단기 효과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오히려 마이너스임을 보여준다. 그는 개인별 보상에 반대하고 집단적 보상을 권고한다. 심리학자 알피 콘은 “설탕이 치아를 해치듯 경쟁은 인간의 자존심을 해친다”고 말한다. 그는 성과주의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극도로 단순한 작업에만 효과가 있다”고 결론내린다. 콘은 학교에서 개인별 학습보다 집단적 협동 학습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꼭 카이스트만의 문제는 아니죠. 탈락자에 대한 관용과 안전장치가 전무한 한국사회에서 탈락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경쟁은 생존의 문제로 전환합니다. 이정우 교수의 글에는 우리가 선택 가능한 다른 대안의 단초가 담겨있습니다. 집단자살로 몰려가는 한국사회가 언제까지 이 죽음의 행렬을 개인적 심성의 나약함으로 치부할지 의문입니다.

이정우 교수가 인용한 알피 콘의 책 '경쟁에 반대한다'는 2009년 이영노의 번역으로 산눈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카이스트 학생의 잇단 죽음이 던진 여러 의문 중 하나, 경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는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경쟁에 반대한다 알피 콘 지음|이영노 옮김|산눈

Posted by 때때로

[이대근 칼럼]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링크)
만약 20대라면 실업자일 가능성이 높고, 중년이라 해도 비정규직이기 쉬우며 큰 병에 걸리면 가정이 파탄나고, 늙는 것은 곧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여자가 구원받는 길은 재벌2세의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한 세상은 쉬 변하지 않을 것이다. 먹는 밥의 한 숟가락, 하루 중 단 몇 분, 번 돈과 노동의 일부라도 세상을 바꾸는 데 쓰지 않으면 죽음의 행진을 막을 수 없다. 내가 돈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못한다. 내가 그렇게 못할 사정이 있다면, 다른 사람도 사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래도 하지 않겠다면 죽음의 공포가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이 조용한 사회에서 당신은 죽을 각오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당신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기름값이 오릅니다. 우유값이 오릅니다. 수입 밀 가격도 급등하고 있습니다. 빵값도 곧 오르겠죠. 고기값도 오르죠. 모든 것이 오르는데 제 월급만 안 오릅니다. 잘리지만 않아도 다행이죠. 쌀값이나마 안 올라준다면 고맙겠습니다.

긴 얘기를 덧붙일 필요가 없는 칼럼입니다. 저라면 제목을 이렇게 달았겠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p.s. 한국사회포럼이 오늘(17일)부터 토요일까지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열립니다. 개막토론 주제는 '한반도 긴장, 진보적 관점과 대응'입니다. 이 토론에는 김하영(다함께), 박경순(민주노동당), 이대근(경향신문), 정욱식(평화네트워크)이 참여합니다. 이 밖에도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가 두루 포함돼 있습니다. △삼성의 지배구조와 무노조 경영 △공정하고 효과적인 온실가스 감축방안을 위한 모색 △간접고용, 대안과 해결 방향이 기획토론회 주제로 잡혀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재편도 토론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토요일(19일) 오후 3시30분부터 시작되는 폐막대토론회에는 김장민(민주노동당), 박용진(진보신당), 신석준(사회당)이 발표자로 나서서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주제로 토론합니다. 박용진은 진보신당에서 통합파에 가까운 사람인데 발표자로 나섰다니 좀 의외입니다. 결국 중앙당은 통합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싶어요(이게 제 기우이기만을 바라지만).

오늘 내일은 평일이라 힘들지만 토요일엔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사회운동과 비전 2012 '한국사회포럼 2011'(링크)


Posted by 때때로